오늘 제가 얘기할 내용은 즐거운 주제가 아닙니다. 어려운 주제입니다. 오늘 저녁은 여흥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주제이지만, 어쩌면 결코 알 수 없을 주제입니다. 바로 전쟁이라는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입니다. 10년 전에 시작되었죠. 저는 그 침략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그건 불법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국제법을 위반했습니다. 전쟁범죄라는 말입니다. UN헌장은 먼저 공격을 받지 않은 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은 국제법에 따라 금지된다, 국제법에 위배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라크 정부가 좋은 정부였는지, 나쁜 정부였는지 혹은 일부 좋고 일부는 나쁜 정부였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국제법의 관심은, 이라크가 미국을 공격할 참이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답은 명백히 물론 아니었습니다. 이라크는 미국을 공격할 아무런 의도도, 아무런 계획도,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중해 너머로 태평양을 건너서 어디, 뉴욕을 공격한다? 그럴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쿄와 독일 뉘렌베르크에서는 전쟁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이 전쟁범죄인가를 규정하는 이른바 뉘렌베르크 원칙이 세워졌습니다. 뉘렌베르크 전쟁원칙의 첫번째는 ‘평화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peace)’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전쟁범죄입니다. 전쟁이 없는 곳에 가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범죄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죄로 고발된 이들은 도쿄와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처형되었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정당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전쟁범죄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고, 처형되긴커녕 고발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이건 또한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한 다른 나라들도 모두 전쟁범죄에 가담했다는 뜻이 됩니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우선 미국은 이라크정부가 알카에다와 동맹을 맺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고, 미국정부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증거가 명백했습니다. 즉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라크 침략의 이유로 미국이 제시한 두 번째 이유는 이라크가 핵무기, 생물학적 무기, 화학무기, 독극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라크정부는 이것을 거듭해서 부인했습니다. 과거에 이라크정부의 관료들이었던 사람들도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UN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한 차례 이상 이라크에 사찰단을 보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와 미국이 제안한 모든 장소를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면 미국은 왜 이라크를 침략한 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언제 침략했습니까? UN 이라크 사찰단이 사찰결과를 발표한 뒤입니다. UN 사찰단을 이끈 한스 블릭스가 이라크에서 돌아와서, 거기 아무것도 없다,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다고 말한 뒤에, 그런 다음에 미국은 침공을 했습니다. 일리가 있지요, 그렇죠? 다시 말하면, 미국은 UN을 이용한 것입니다. UN이 이라크에 핵폭탄이 없다, 화학무기도 없고 생물학적 무기도 없다고 미국을 안심시켜주자, 침략해도 안전하겠다고 미군은 결정했던 것이죠. 이렇게 표면상의 공개된 이유들은 하나도 뒷받침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다르게 또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욱 가공할 일은, 이라크에서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서, 미국이 국제법을 파괴 내지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국제법이란 굉장히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제법은 유럽에서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온 것입니다. 기원이 매우 오래전이며, 선례들과 조약들에 의해서 발전해왔습니다. 국제법의 대부분은 단순히 선례들입니다. 즉 과거로부터 전해져온 전통입니다. 전시(戰時) 국제법도 매우 오래된 것이고, 과거로부터 전해지면서 조금씩 발전해왔습니다. 많은 선례들이 19세기 말에 처음으로 조약으로 문서화되었습니다. 헤이그조약, 제네바조약 같은 것이죠. 국제법을 종이 위에 증명하여 국가들은 그것을 따르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국제법은 선례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가 국제법을 위반하고, 다른 식으로 행동하고도 처벌받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도 그것을 범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이것이 새로운 선례, 새로운 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법적 권리
미국은 9·11 뉴욕과 워싱턴 디씨에 가해진 공격 직후, 국제법상의 새로운 권리들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가지를 꼽겠습니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섯 개의 새로운 권리를 미국은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미국은 간단히 “우리는 이러한 권리들을 갖는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첫번째 권리는 침략할 권리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침략은 UN헌장과 뉘렌베르크 원칙에 위배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하고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첫번째입니다. 아시겠어요? 저는 의도적으로 ‘침략’이라는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라크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라크 침공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군사적 침략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즉 미국은 한 나라에 들어가서 그 정부가 미국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정부로 강제로 갈아치울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내정간섭이라고 불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미국법을 어긴 외국인을 외국 영토에서 체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것도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쉬운 예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여러분 모두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말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옛 미국 카우보이 영화를 생각해보세요. 열차강도나 은행강도가 돈을 훔쳐서 말에 올라타 남쪽으로 달아납니다. 보안관도 말을 타고 그들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강도들이 멕시코 국경을 넘어서면 보안관은 멈춥니다. 국경을 넘어가서 그쪽에서 그들을 체포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는 멕시코에서는 보안관이 아니니까요. 그가 총을 꺼내 들고 무력으로 그들과 싸우거나 체포한다면, 그건 그저 폭력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정부는 멕시코 정부에 연락해서, “당신들 영토에 범죄자가 있다, 그 범죄자를 체포해서 우리한테 돌려보내 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오래 걸리고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국제법입니다. 이것을 한 나라의 자주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9·11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 땅에 들어가서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지금까지는 누구도 갖지 못했던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네 번째는 이렇게 체포된 사람들을 감금할 권리, 즉 인신보호령에 따른 권리를 주지 않고 구금할 권리입니다. 특정 범죄에 대해 기소하지도 않고, 일정 기간 이후에 석방하지도 않습니다. 인신보호령의 권리는 범죄의 혐의를 받는 사람들, 피의자들이 갖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권리인데, 중세 영국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체포했을 때, 정부는 일정한 기간 내에 이 사람을 기소할 죄목을 찾지 못하면 그 사람을 풀어줘야 합니다. 범죄로 기소하여 재판을 받게 하거나 아니면 석방해야 합니다. 무기한, 죄목 없이 사람을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로 이런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외국 땅에서 용의자를 암살할 권리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제 이른바 무인정찰기를 사용하면서 이 일은 점점더 비일비재해지고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이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미국이 예전의 국제법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새로운 나라를 침략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이미 침공한 나라들에서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구금되었던 사람들을 계속해서 감금해두고 있습니다. 또 직접 암살할 대상을 선별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쯤 버락 오바마의 사무실에서는 회의가 열립니다. 사진이 첨부된 문서들을 돌려 보면서, 아프가니스탄 혹은 이라크 아니면 파키스탄에 있는 이 사람은 이런 일 또는 이런 일을 했을지 모른다, 이 사람은 어쩌면 누구누구와 친구일 수 있다, 이런 의논을 합니다. 버락 오바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이 사람 말고, 음, 이 사람으로 합시다.” 그러고 나서 미국은 무인정찰기를 보내서 로켓을 쏘아서 그 대상자와,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었던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살해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여섯째 권리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건 이 권리들은 전부 미국 외의 다른 어떤 나라도 가져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미국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권리입니다. 미국을 위한 것이지, 영국 혹은 한국이나 일본이 이런 권리를 갖는다고 미국은 말하지 않습니다. 미국만 유일하게 이들 권리를 갖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로써 국제법의 영역에서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리에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하는 일단의 권리들을 갖습니다.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권리들은 통치 혹은 지배와 관련된 것입니다. 정부라는 게 무엇입니까? 한 나라가 있다고 할 때, 이 나라의 정부란 무엇입니까? 정부는 그 나라 안에서 사람들을 체포하고 감금할 수 있는 조직체입니다. 이것이 정부를 정의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자, 여기 이라크 혹은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있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 나라들에 그 나라 정부에 묻지 않고도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서 특정한 사람을 잡아서 데려갈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미국은 통치권력의 일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즉 전체적으로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용어가 정치학에 있습니다. ―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비방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걸 가리키는 전문 용어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가치중립적인 정치학 용어입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제국’입니다.
2차대전 이래로 9·11 이전까지는 줄곧 제국은 미국에서 금기어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제국’, ‘제국주의’라고 했고, 미국 정책을 변호하려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건 제국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부정했어요. 요컨대 모두가 제국은 나쁜 것이라는 데 동의한 것이죠. 비판자들은 제국이라고 하고 옹호자들은 제국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논쟁은 그런 식이었어요. 그런데 9·11 이후 미국에서 이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미국 외교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국이라고? 그래서 뭐? 맞다, 제국이다. 미국은 좋은 제국이다. 미국은 제국이 될 자격이 있다.” 지금까지는 미국 대통령 중에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 주변의 많은 사람들, 미국 외교정책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책을 써서, “이것은 미국식 제국이다, 이건 좋은 제국이고, 우리는 이걸 옹호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제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제국이 왜, 무엇이 문제인지를 설명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지금부터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라는 주제보다 조금 넓은 주제입니다.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소위 테러와의 전쟁의 한 부분이지요. 조지 부시가 “이건 전쟁이다” 하고 선포한 것은, 미국에서의 9·11 공격 후 불과 몇일 뒤였어요. 그리고 이내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관념입니다. 테러에 대응하는 방식을 전쟁으로 한다는 것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테러는 나라가 아니라 전술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테러는 어떤 조직도 아닙니다. 전술입니다. 그런데 전술에 상대해서 어떻게 전쟁을 하나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테러는 전술이고, 전술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들도 종종 테러를 합니다. 국가테러는 테러의 여러 형태 중 하나입니다. 테러는 행위의 효과를 확대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전쟁을 하면서 병사들만을 죽인다면 병사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비교적 안전하겠죠. 전장에서만 피해서 있을 수 있다면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아무나 죽인다면, 그러면 적이 소수의 사람만을 죽이더라도 모두가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형적인 테러행위는 식당을 폭파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누가 있든 상관없습니다. 혹은 버스를 폭발시킵니다. 버스에 누가 타고 있든 개의치 않습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만 하면, 사회 전체가 공포에 떨게 됩니다. 이런 것이 소규모 집단이 사용할 수 있는 테러의 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식당에 폭탄을 투척하는 일은 분명히 테러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도시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 식당을 포함해서 건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폭파하는 일도 역시 테러입니다. 역시 비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군사전술 용어로 그건 테러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합니다. 테러는 공포를 뜻하죠.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다음은 자기 차례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겁에 질리게 하는 방법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영국은 뉘렌베르크, 함부르크, 드레스덴 같은 독일 도시들을 폭격하여 도시 전체를 파괴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이것을 ‘테러 폭격’이라고 불렀습니다. 윈스턴 처칠도 그것을 ‘테러 폭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정부들은 이 말의 뜻을 바꾸는 데 성공해서, 이제는 테러리스트는 테러 전술을 사용하는 비정부 인사라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테러를 어떻게 줄이는가? 미국이 안하면 된다.” 그러나 더이상 테러라는 단어는 그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테러라고 하면, 오직 테러 전술을 사용하는, 특정한 미국의 적들만을 의미합니다. 테러는 이제 정부가 사용하는 전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언어가 이상하게 변한 것이지요.
이들 소위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미국의 전쟁에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쟁은 끝을 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상대해서 싸우고 있다면,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다면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습니다. 한 나라가 이길 수 있죠. 다른 나라로 들어가서 진군하여 수도 혹은 사령부를 점령하고 다른 쪽을 항복하게 만들면 전쟁은 끝납니다.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양쪽이 포기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의 경우에는 지휘본부가 없습니다. 수도도 없습니다. 그곳을 점령하면 전쟁에 이기는 어떤 특정한 구역도 없습니다. 조약을 체결할 상대도 없습니다. 이 사람하고 조약을 조인해도 저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전쟁은 끝을 낼 도리가 없습니다. 즉 영구적인 전쟁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럼 미국은 왜 이렇게 변화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서 미국이 얻는 것이 뭘까요? 앞에서 말했듯이, 테러에 전쟁으로 대응한다는 건 새로운 관념입니다. 소규모 그룹들에 의한 테러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요. 조지 부시가 바꾸어놓기 전까지 테러는 법 집행, 즉 치안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테러와의 전쟁’으로 바뀌면서 이것은 더이상 경찰의 일이 아닌 군대가 담당할 일이 되었습니다.
경찰과 군대는 매우 다릅니다. 훈련받는 내용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릅니다. 경찰, 즉 경찰관이나 수사관의 일은 범죄자 혹은 범죄 용의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찾아내서 그를 사회로부터 격리, 체포하여 사법당국에 보내 재판에 회부합니다. 미국 범죄물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경찰이 일상적으로 용의자들을 처형하죠. 죽입니다. 그러나 진짜 경찰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경찰에서 일을 하셨어요. 실은 약 30년 동안 연방 수사관으로 일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민간인 복장,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 일을 하러 가셨는데, 가죽 끈을 안에 착용해서 한쪽에는 커다란 피스톨을 차고, 다른 쪽에는 수갑을 넣으셨죠.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 저는 여쭤보았습니다. “경찰 일을 하시는 동안 한 번이라도 총을 겨누고 쏘아보신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모욕으로 받아들이셨어요. “아니, 30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 없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지만 한 번도 사람에게 총을 쏘신 적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군인은 완전히 달라요. 그들은 다르게 훈련을 받습니다. 군인은 단서나 증거를 찾는 수사 훈련은 받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규칙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법의 집행에서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질렀다고 혐의가 가는 사람만을 잡아갈 수 있습니다.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잡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쁜 데 대한 법은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죄를 지은 데 대한, 법에 의해 금지된 행위에 대한 법밖에 없습니다. 나쁜 성격을 금지하는 법은 없죠.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법률 집행관(경찰)의 경우에는 용의자가 어떤 일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반면 군인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불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적(敵)의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군복을 지금 막 입었을 수도 있습니다. 안됐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아직 무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가 적군의 군복만 입고 있다면 그것으로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게 전쟁인 것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따라서 군인은 군복을 식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럼 사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응하는 방식을 법의 집행으로부터 전쟁으로 바꾸었을 때, 그 실제적인 결과로서 미국은 그 둘의 혼성물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미군에게 용의자들을 죽일 권리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법의 집행자들은 용의자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용의자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적의 군복을 입고 있지 않더라도, 미군의 눈에 테러리스트처럼 보인다면, 즉각 그들은 사살됩니다. 이것이 미국이 얻게 된 커다란 소득입니다. 즉 미국이 죽이고 싶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부터 미국이 얻은 두 번째 소득은,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사람들이 테러리스트 혐의로 잡혀서 구속되었을 때, 이게 보통의 전쟁이라면 이들은 전쟁포로로서의 권리를 갖게 됩니다. 전쟁포로의 권리는 전통과 1949년 제네바협정에 의해서 보장됩니다. 전쟁포로는 전쟁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거나 형벌에 처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이 보장되어야 하고,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고문은 물론 안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건강한 상태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쟁포로가 갖는 권리입니다. 한편 그가 범죄 혐의자라면, 그 경우에는 미국법에 의거해서 피의자로서의 권리들을 갖습니다. 앞에서 말한 인신보호법에 의한 권리입니다. 재판을 받을 권리, 변호사를 만날 권리,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열람할 권리,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듣고, 할 수 있다면 거기에 반박할 권리 ― 이 모든 권리들을 피의자는 갖습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에서 잡힌 사람들은 범죄 용의자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고, 전쟁포로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 권리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쿠바에 있는 미군 기지에 구금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쿠바의 미군 기지는 미군 부대이기 때문이 쿠바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기지 안에서는 쿠바법이 관할권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곳은 쿠바이고 미국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형사법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게 미국정부의 주장입니다. 또한 그 수감자들은 미군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군법도 적용받지 않고, 전쟁포로도 아니기 때문에 국제법도 적용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정부에 따르면, 그 사람들은 어떤 법에 의해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전혀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권변호사들은 이의를 제기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상황은 변함없습니다.
전쟁경제에 기초한 제국
왜 미국은 끝을 낼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을까?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중 한 가지는 경제적인 동기입니다. 미국 경제의 매우 커다란 부분은 군사경제입니다. 군사지출이 미국 전체 경제에서 대단히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1929년, 미국에서 주식시장 붕괴가 있었습니다. 대공황의 시작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끝, 자본주의적 성장의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대파국으로 종식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공황으로부터 미국을 끌어내기 위한 정책을 시작했는데, 그게 뉴딜입니다. 뉴딜정책은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경제이론에 기초한 것인데, 그 주장을 매우 간단하게 말하면, 정부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경제에 투입하면, 그것으로 경제가 다시 원활하게 굴러가고, 그리고 자본주의가 구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미국에는 정부의 대규모 지출에 대한 매우 강한 저항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고,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정부가 경제 회복을 위해 돈을 쓰긴 했어도 그건 결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뉴딜정책으로 몇 가지 좋은 법 ― 사회보장법, 최저임금법 같은 것들이 통과되었지만,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뉴딜은 미국에서 경제성장을 회복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미국 경제를 구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입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미국정부는 계속해서 훨씬 많은 돈을 군비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뉴딜정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전히 다른 차원의 거액을 투입했고, 그것은 전쟁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에 의해 정당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빠르게 미국 경제를 회복시켰습니다. 전시 지출 덕분입니다. 이렇게 미국은 국토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다른 2차대전 참전국들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미국은 굉장히 운이 좋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하면, 미국이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이후에 벌인 모든 전쟁은 다른 나라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단 하나도 미국 땅에서 벌어지지 않았어요. 미국인들이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공황에서 끌어냈고, 다시 미국을 매우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제2차대전 후에는 냉전시대가 곧장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1941년에 전쟁경제로 전환했고, 오늘까지 계속해서 그렇습니다.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로 미국은 전쟁경제에 줄곧 머물러 있습니다. 요컨대, 군비지출과 전쟁이 미국의 뉴딜이고, 바로 그것들이 미국 경제를 계속해서 살리고, 확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945년부터 미국은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미국식 제국을 ‘군사기지의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유형의 제국입니다. 대영제국은 무너졌고, 프랑스 제국도 붕괴했고, 스페인 제국도 무너졌습니다. 다른 모든 제국들은 붕괴했지만, 그 뒤에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제국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한 가지 이름은, 아까 말했듯이, 군사기지들의 제국입니다. 비밀기지도 있기 때문에 미군 기지가 정말로 몇 개나 되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세계 전역에 걸쳐서 일천 개나 되는 군사기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 군사기지들은 사실상 미국사회입니다. 나라 밖에 있는 미국문명의 거대한 일부입니다.
한국에도 거대한 미군 기지들이 있으니까 여러분 중 많은 분들도 기지 내부가 어떤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오키나와의 경우 오키나와 주요 섬의 20%를 미군 기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매우 작지만 미군 기지는 거대합니다. 기지 안에 있으면 섬 전체보다 기지가 큰 것처럼 느껴집니다. 신기한 일이죠. 군사기지에는 병사들과 병영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지는 도시입니다. 매우 이상한 왜곡된 도시입니다. 기지에는 가정이 있고, 학교가 있습니다. 어린이집에서부터 대학까지 있습니다. 병원이 있고, 식당이 있고, 술집이 있고, 운동할 수 있는 헬스클럽이 있고, 수영장이 있고, 골프 코스가 있고, 볼링장이 있고, 테니스 코트가 있고, 미식축구장이 있고, 야구장이 있고 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오키나와에 잔디밭은 기지 안에만 있습니다. 기지 밖에는 잔디밭이 있을 공간이 없습니다. 또 경찰이 있고, 법원이 있고, 감옥이 있습니다. 저는 때때로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영어 라디오방송을 듣는데, 군사 휴양지 광고가 나와요. 세계 전역에 있는 미군 소유 휴양지들인데, 알래스카에 있고, 하와이에 있습니다. 독일 알프스에도 있어서 스키를 탈 수 있어요. 제가 오키나와 밖에 살고 있다면 스쿠버다이빙, 낚시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오키나와 휴양지 광고도 들을 수 있겠지요. 현역병은 한 기지에서 다른 기지로 비행기 운임을 내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무상으로 이들 휴양지에 갈 수 있는 것이죠. 평생을 기지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지는 사회입니다.
다만 기지에는 단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기지를 그토록 이상한 사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생산적인 노동이 없습니다. 보통의 도시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만드는 일을 하거나 아니면 사회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만드는 일을 돕습니다. 음식, 옷가지, 거처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군사기지 안에는 제조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겁니다. 생산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지의 활동, 즉 기지의 생산물이란 전쟁 혹은 전쟁 준비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만, 기지의 활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쟁 또는 전쟁 준비, 전쟁 위협입니다. 그게 그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돈이 이 기지들을 부양하는 데 쓰이지만, 쓸모 있는 것은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습니다. 소위 군산업도 마찬가지죠. 폭탄을 생산하고, 로켓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공격할 제트비행기를 제조하지만, 이것들 중 아무것도 시민사회,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유용한 것은 없습니다. 폭탄은 폭발하면 그만이죠. 다시 또 폭탄을 만들고, 폭발하고 사라지고. 그러니까 돈이 그냥 훅 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전쟁 외에는 아무런 사회적 기여 없이 말입니다.
이 거대한 조직, 이 거대한 군사기지들의 제국과 그 배후에 있는 산업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들어가는 그 모든 돈을 납세자들에게 해명해야 합니다. 납세자들은 그 모든 비용을 감당하면서 아무런 생산물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때때로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면 사람들은 “이것들은 필요가 없으니 없애자, 돈을 아끼자”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군대가 생존하기 위해서, 군사조직, 군사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끔 전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혹은 즉각적인 전쟁의 위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군대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한 가지이지만, 그러나 이면은 군대를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경찰에 대해서도 할 수 있어요. 범죄가 사라지는 것은 경찰에 재앙입니다. 파산하겠죠. 실직하게 되고. 경찰은 일정한 정도의 범죄에 의존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여러 나라들에 죄를 양산하는 많은 이상한 법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이유를 떠나서 군대의 경우에 전쟁 혹은 전쟁위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평화는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건 미국 경제에도 재앙이 될 것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완벽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죠. 특정한 지역에 한정된 대부분의 전쟁들과 달리, 테러와의 전쟁은 모든 곳에서 일어납니다. 국경이 없습니다. 공간적인 한계, 지리적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군 기지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실제로 어디에나 있지요. 또한 테러와의 전쟁은 끝이 날 수 없기 때문에, 미군 기지가 계속해서 어디에나 존재할 필요에 대한 영원한 보장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완벽한 것입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의 전쟁에서 졌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서 졌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전쟁에서 졌습니다. 이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과장이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군사지출은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의 군사경비를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전쟁에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군사적 관점, 즉 전형적인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이들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전쟁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베트남에선 쫓겨났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전쟁 이전보다 더욱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이 전쟁들을 이길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군사력으로는 더이상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힘(power)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볼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힘은 정말로 무엇입니까? 힘은 군사조직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단결한 사람들의 투지 같은 것입니까? 정확히 힘은 무엇일까요? 왜 군사력이 계속해서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미국 군사 ― 산업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그 군산복합체의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기고 지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미국 군산복합체는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똑같은 돈을 법니다. 군인들 역시 부상을 당하거나 전쟁으로 미치지만 않는다면 봉급을 받고, 승진을 하고 혜택을 얻습니다. 그래서 승패는 그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앞서 얘기했듯이, 이건 계속해서 미국 영토 밖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조건 아래에서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남북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은 모조리 상대 나라의 땅에서 벌어졌고, 상대 나라는 파괴되었습니다. 미국 땅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사회는 이익을 얻었던 것이고요. 그 조건 아래에서는, 이기든 지든 미국은 이익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으로 끝내겠습니다. 생각해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은 윤리적 원칙입니다. 이 전쟁은 정당한가? 전쟁 자체가 정당화되는가? 정당한 전쟁이라는 게 있었던가? 모든 전쟁은 폐지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큰 윤리적 질문입니다. 물론 어떤 윤리학의 관점에서 봐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략은 법적으로 범죄이고, 도덕적으로 범죄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봅시다. 윤리는 잠깐 제쳐두고, 우리의 이익을 획득할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미국이 아닌 나라, 가령 한국이나 일본, 호주, 프랑스 같은 나라의 입장에서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데서 얻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그 전쟁의 유일한 목적은 미국 군사 ― 산업 제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 다른 나라,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야 합니까? 이게 이치에 맞습니까? 윤리는 차치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입니까? 저는 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김정현 녹취·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