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배제하는가
내가 사는 동네에는 몇해 전부터 종종 마주치게 되는 50대 남성이 있다. 키가 작고 몸이 너무나 말라, 처음 보는 사람도 심각한 병색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얼마 전부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걸곤 했다. 나 역시 처음에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어느 날 파란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그를 세워놓고 무언가를 캐묻는 장면을 보았다. 잠시 뒤 그는 겁먹은 표정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며칠 후 길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걸었다. 그날 경찰에게 왜 붙들렸냐고 물으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나머지 길에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 신고를 했다고 했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는 발음이 조금 어눌할 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하자 태어날 때부터 소두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쯤 뒤에는 함께 걸으며 그의 집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집 밖에 나와 계시던 어머니와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젊었을 때 밴드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10여 년 전부터 몸이 약해져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매달 받는 장애인 수급비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한다. 그나마 교회에 나가 사람들을 만났지만 거기에서도 종종 따돌림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냉대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성격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표정이 어둡고 때로 사나워 보여 처음 말을 거는 데에는 내게도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그 거친 표정은 타고난 성품보다 고통스러운 생활과 오랜 배척에서 비롯된 짜증과 분노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이상하게 행동해서 사람들이 그를 밀어낸 것인지, 사람들이 그를 밀어냈기 때문에 그의 표정과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두 차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내게 전혀 적대적이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진솔하게 들려주었고, 그 과정에서 나의 경계심은 사라졌다. 그러한 경계심은 우리 사회 곳곳에 드리워 있고, 점점 심해지는 듯하다.
반세기 전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서울의 동네를 떠올려본다. 문을 열고 골목에 나가면 행상인, 고물장수, 넝마주이, 상이군인, 걸인, 부랑자와 건달을 마주쳤다. 당시의 상황을 낭만적으로 미화해서는 안된다.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거리에서 조롱과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는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그때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을마다 소위 ‘동네 바보’나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살았고, 사람들은 싫든 좋든 그들과 늘 마주쳤다. 어린아이들은 처음에는 놀리거나 무서워했지만, 오랜 시간 한동네에서 지내면서 그런 사람들의 행동과 습관에 익숙해졌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는 그러한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남자가 한 명 등장한다.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광장을 배회하는 그는 사람들에게 “광장은 내 거야!”라고 소리친다. 지금 같으면 경찰이 나서서 제지할 행동이지만, 마을사람들은 익숙한 소음처럼 받아들이고 웃으며 맞장구를 쳐준다. 영화 후반부에서 성공한 영화감독이 된 토토가 수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옛 극장은 사라졌고 광장은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늙어버린 그 남자만이 여전히 그곳을 맴돌며 “광장은 내 거야”라고 외친다. 그 장면은 단지 사라진 극장에 대한 향수를 넘어,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던 광장 자체의 소멸을 보여주는 듯하다.
근대 이후 도시는 더 깨끗하고 안전하고 질서정연해졌다. 그 과정에서 정신질환자와 장애인, 걸인과 노숙인은 병원과 시설, 보호소 안으로 옮겨졌다. 거리의 혼란은 줄었지만, 이질적인 사람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고 서로 적응하는 기회도 함께 사라졌다. 우리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시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눈앞에서 치우기 위해 시설을 이용해온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 구마시로 도루(熊代享)는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이라는 책에서 현대사회가 질서와 청결, 효율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이질적인 존재를 더러운 얼룩처럼 지워버리는 현상을 ‘사회적 표백’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지만, 그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이상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사회적 표백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거리에서 밀어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거슬리는 말을 차단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질성을 지워버리고 싶은 생활세계의 욕망은 어느 순간 정치적 배제의 욕망으로 변질되어버린다.
불편함이 적대감으로 바뀔 때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갈등을 거치면서 광장에 새로운 세력이 출현했다. 계엄을 옹호하고 선거부정을 주장하는 집회와 극우성향의 유튜브 채널, 정치단체에서 젊은 남성들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정치사회의 담론에서는 최근 한국 극우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2030의 등장을 지적한다. 하지만 청년들이 극우화되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청년 전체는 물론 청년 남성도 하나의 정치적 집단이 아니다. 보수적 견해를 지닌 것과 민주주의의 규칙 자체를 부정하는 극우는 구분되어야 한다.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를 청년 남성 전체와 동일시하는 담론 자체가 청년층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가릴 수 있다는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
오늘의 청년들은 끝없는 평가와 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입시와 취업, 주거와 결혼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단계가 서열화되었다. 그리고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양질의 일자리와 적절한 주거의 확보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물론 불안정한 청년 대다수는 혐오와 음모론에 빠지지 않고, 반대로 부유층이 극우적 세계관을 갖는 경우도 많다. 불안과 박탈감은 극우화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정치적 선동이 스며들 수 있는 하나의 토양일 뿐이다. 극우정치가 제공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다. 소속감과 정체성, 분명한 적과 싸워야 할 임무를 함께 부여한다. 삶이 괴로운 이유를 하나의 도식과 음모론으로 설명해주고, 좌절감과 열패감을 쏟아낼 표적을 설정해준다.
왜 그런 담론에 끌려드는가? 청년 남성들과 대화하는 프로젝트 ‘어색한 사이’를 기획한 청년 활동가 이한 씨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구조적으로 해석할 언어를 얻은 데 비해 남성들에게는 자기 삶을 해석할 언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만난 청년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술자리는 자주 가지면서도 고민이나 감정을 나눌 관계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극우집회는 그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곳이며, 거기서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고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혐오는 신념이기 이전에 외로움에서 비롯된다는 진단이다.(“극우의 시대, 손절 대신 ‘대화’ 택한 사람들”, 〈경향신문〉, 2026년 7월 8일자.) 여기에 알고리즘이 가세한다. 확증편향을 먹고 자라는 소셜미디어는 이용자를 점점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콘텐츠로 밀어 넣으며,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와 사람을 걸러낸다. 구마시로 도루가 말한 ‘사회적 표백’이 온라인 공간에서 훨씬 정교하고 자동화된 방식으로 재현되는 셈이다.
이러한 반민주적 충동은 거리에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과 어떤 연관을 가질까? 그 둘 사이에는 공통된 문법이 존재한다. 애매함과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청결과 불결, 정상과 비정상, 안전과 위험, 유용과 무용, 우리 편과 적으로 나누려는 욕망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제거해야 할 오염원이 된다. 대화하거나 설득할 상대가 아니라 침묵시키거나 추방해야 할 적이 된다. “광장은 내 거야”라고 외칠 때 다양한 사람들이 허용되는 광장은 사라진다. 그리고 “광장은 우리 편의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 둘로 갈라진다.
최근에 확산되는 ‘손절’의 문화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물론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관계에는 단호해야 한다. 그러나 차이를 이해하고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조금만 불편하면 차단하고 관계를 정리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은 퇴화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간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줄어들수록, 미디어가 유포하는 단순한 이미지와 경직된 범주로 서로를 규정해버리게 된다. 내가 동네의 그 남자와 말을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그를 위험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직접 마주한 얼굴은 단순한 범주를 흔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낯선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 사람의 성별과 세대, 지역과 정치성향을 먼저 확인한다. 사람보다 범주가 앞서는 것이다.
청년들의 혐오와 극단화를 되돌리려는 시도도 결국 같은 원리에 기대고 있다. 조롱과 낙인 대신 직접 만남을 택한 ‘어색한 사이’ 같은 프로젝트는, 손절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청년들이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경험을 만들려 한다. 이질적인 존재와 접촉하며 불편을 견디는 경험은, 비단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태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정치적 타자를 대하는 태도까지 바꾸어놓을 수 있다.
누구나 배제되는 쪽에 설 수 있다
예순 돼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병원 복도를 달린다/사나운 개에 쫓기는 계집애처럼/으흐응 느껴 울면서/오른손으로 눈물 닦으며/옆구리에 붙인 왼손 팔락팔락 휘저으며/종종종 달려간다/그 뒤에서 청년이 소리친다/“엄마, 이리 와아!/치매가 뭐 어때서 그래!?”/단걸음에 따라간 청년이/들썩이는 엄마 어깨를 잡아/되돌려 모셔 간다
―황인숙, 〈하얀 복도〉(전문)
이른바 비정상적인 사람의 배제를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소수자 시민의 인권 때문만이 아니다. 안전과 쾌적함을 절대적인 가치로 삼는 사회는 결국 우리 모두의 자리를 위협한다. 왜 그런가. 대한민국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몸의 기능과 인지능력을 잃는다. 지금은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어느 날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거나 치매로 길을 잃을 수 있다. 정신이 흐려지고 엉뚱한 말을 하면서 타인에게 거리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결과 치매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두문불출하며 살아가기 쉽다. 그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타인의 시선이다. 본인도 가족도 정신이 무너지고 실수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기를 두려워한다. 집 안에 갇힐수록 몸과 정신의 기능은 더 빨리 쇠퇴하고, 돌봄을 떠맡은 가족도 지쳐간다. 그러다가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요양병원이나 시설로 옮겨간다. 집과 시설 사이에 지역사회가 사라진 것이다. 그 공간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위에서 인용한 시에서 아들은 엄마에게 말한다. “치매가 뭐 어때서 그래?” 그 짧은 말에는 병을 부정하지도, 병 때문에 사람을 지우지도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중요한 메시지로 확장될 수 있다. 극우세력이 꿈꾸는 공동체는 대개 강하고 정상적이며 쓸모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영원히 강한 자로 남을 수 없다. 젊은이는 늙고, 건강한 사람은 병들며, 일 잘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오늘 우리가 그어놓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은 내일의 우리 자신을 가두는 벽이 될 수 있다. 정신질환자와 장애인을 격리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체계가 잠재적인 치매 환자인 자기자신과 가족을 독방에 가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 취약한 사람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낸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심하고 늙거나 병들 수 없다.
물론 타인의 모든 행동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주는 불편을 받아들이는 것과 폭력이나 위협을 묵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위험인물로 취급해서는 안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행동에는 적절히 개입해야 한다. 청년을 낙인찍어서는 안되지만, 혐오와 폭력,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에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경계가 없는 체제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기준으로 경계를 세우는 체제다. 어떤 사람을 그가 속한 세대나 성별, 장애, 질병, 출신 지역 때문에 공동체 밖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 사람의 존재는 배제하지 않되, 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에는 냉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것은 법과 제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마주치고, 상대방을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알아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여러 부류의 주민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평상과 작은 공원, 주민센터와 도서관, 동네 가게와 카페가 그런 장소가 될 수 있다. 서울 노원구에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카페들이 있다. 손님들은 그곳을 드나들면서 처음에는 낯설었던 행동과 말투에 익숙해진다. 특별한 인권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계속 마주치는 동안 장애인은 추상적인 ‘그들’이 아니라 커피를 건네고 인사를 주고받는 구체적인 사람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차원의 ‘소셜 믹스’가 필요하다. 계층과 세대, 장애와 비장애를 철저히 분리하는 주거와 교육, 돌봄 체계를 바꾸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생활을 함께하면서 공통감각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사회적 혼합이 갈등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마찰과 불편을 늘릴 수 있다. 하지만 갈등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을 계속 분리하면, 서로에게 적응하고 타협하는 능력 자체가 사라진다.
생태계가 한 종류의 생물로만 이루어질 때 외부의 충격에 취약해지는 것처럼, 사회도 지나친 동질성을 추구할수록 허약해진다. 다양성은 보기 좋은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력을 만드는 조건이다. 21세기에 들어 주목받은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도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인간의 뇌와 감각, 사고방식에는 본래 여러 형태가 존재하며, 그 차이를 모두 치료하거나 교정해야 할 결함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쾌적함은 소중하다. 누구나 조용하고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쾌적함을 절대화하여 타인의 소리와 냄새, 느린 몸짓과 서투른 말, 낯선 생각을 모두 지워버린다면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 타인의 취약함이 완전히 제거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취약함도 설 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극우화에 맞서는 일도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헌정질서를 지키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을 조롱하지 않고, 실패와 무능을 드러내도 인간적 존중을 잃지 않으며,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와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극우가 제공하는 적대적 소속감보다 더 넓고 따뜻한 소속감을 민주주의가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타인들과 같은 광장을 나누어 쓰는 기술이다. 그 광장에는 말이 느린 사람도,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소란스럽고, 더디고, 불편할 것이다.
그 불편을 견디지 못해 광장에서 낯선 얼굴들을 하나씩 지워버린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서로를 위험인물로 의심하고 감시하는 고립된 개인들뿐이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불편한 타인을 몰아내는 배척이 아니다. 폭력에는 경계를 세우면서도 불편한 대상과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포용이다. 그 느슨한 유대와 만남의 장(場)에서 우리는 다양한 잠재력을 발현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이나 무능함을 애써 감추지 않고 연민의 가슴을 열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느라 타인과 부질없이 맞서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문이 거기에서 열린다. 불편을 견디며 낯선 타인과 접촉하는 능력,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손절과 혐오의 정치에 맞설 수 있는 탁월한 방역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