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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9.

흙과 반도체 — 타들어가는 논 위에서 이 땅의 미래를 생각한다

녹색평론 통권 제195호 엄청나

새벽 논둑에 서면 물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흐르는 소리, 스며드는 소리, 때로는 마르는 소리. 그것은 생명의 언어와 다름이 없다. 오래도록 땅에 기대어 산 농민들은 그 소리를 통해 자연을 읽어왔다. 그런데 올여름, 그 언어가 곳곳에서 뚝뚝 끊겼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끊긴 곳은 경남이다. 마른장마이지만 비와 맑음이 오락가락했던 내가 사는 충남 예산과 달리, 지난달 찾은 진주에서는 단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았다며 큰일이라는 농민들의 한탄을 들었다. 진주에서는 과수 피해가 벌써 278ha에 이르렀고, 닭과 돼지 1만 2,000여 마리가 폭염 속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전남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전남지역 농업용 저수지 1,047곳의 평균 저수율은 평년의 63.8%에 한참 못 미치는 42%까지 내려앉았고, 전남·광주의 젖줄인 동복댐은 48%대로 가라앉아 ‘주의’ 단계에 들어섰으며, 장성호는 저수율이 역대 최저치인 28.2%까지 떨어지면서(30년 평균 저수율 59.8%의 절반 수준) 이달 안에 사상 처음 10%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어제 전남 곡성의 한 농민은 자신의 논밭에 물을 대던 저수지의 저수율이 마침내 0%가 되었다는 소식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결국 끝을 봤으니 인디언 기우제라도 지내야겠다고 한탄했다. 나주 노안면의 논바닥은 주먹이 그대로 들어갈 만큼 깊게 갈라졌다고 한다. 새벽마다 논둑에 서서 물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논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게 가슴 아파 이제는 아예 논에 나가지 않는다고도 한다. 어쩌다 농수로에 물이 내려오는 날이면 물 한 방울을 놓고 이웃과 다투게 됐다는 어느 농민의 말에서, 나는 물이 단지 용수가 아니라 농촌의 오래된 관계들을 잇는 끈이라는 사실도 새삼 떠올렸다.
그런데 이 마지막 남은 물을 생명을 키우는 농업에 이용하는 날이 앞으로 길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최근 서남권에 계획되고 있는 반도체 산업단지에 하루 65만t의 물을 대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동복댐에서 30만t, 주암·장흥댐에서 15만t, 보성강댐에서 10만t, 그리고 순전히 농사를 위해 건설된 나주호에서도 10만t을 끌어오겠다는 것이다. 나주호가 하루 평균 논에 공급할 수 있는 물이 채 30만t이 되지 않으니, 그 물줄기의 3분의 1 이상을 공장으로 돌리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이런 구상을 내놓고서 “농업에 지장이 없는 한도에서”라는 단서를 붙인다. 그러나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이 여름을 겪은 농민들은 이 단서가 기만의 말일 뿐이라는 걸 안다.

효율이라는 가치를 좇아
효율은 철저히 경제학의 언어다. 같은 투입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산출을 낼 수 있는가를 따지는 자본의 논리다. 과연 이 잣대를 흙에도 들이미는 것이 온당할까. 한 줌의 흙 속에는 수억 마리의 미생물이 숨 쉬며 유기물을 분해하고 질소를 순환시킨다. 흙은 빗물을 머금어 가뭄과 홍수를 완충한다.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이자, 지구가 스스로 숨 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허파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토지라는 유한한 자원을, 그 살아있는 흙을 이른바 ‘효율적’으로 이용하겠다며 끊임없이 파괴해왔다. 농지를 뭉개고 길을 닦았으며, 공장을 세우고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끝없이 양산되는 쓰레기도 땅에 묻었다. 이러한 논리는 농사방식에서도 이어졌다. 더 많은 수확량, 더 높은 농지 이용률을 강요받으면서 농민들은 화학비료를 쏟아붓고 땅을 갈아엎는 일을 한 해에도 수없이 반복했다. 살아 숨 쉬던 흙은 그렇게 서서히 죽은 지표면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땅을 남용한 대가가 바로 한낮 기온이 40℃를 웃도는 작금의 폭염이다. 기후재앙은 지구가 보내는 신호이다.
“농지보다는 태양광 사업이 훨씬 더 효율이 높지 않습니까.”
지난 4일 대통령 주재 업무보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에게 던진 이 말은, 폭염이 들끓는 이 끔찍한 여름 며칠을 더 끙끙 앓으며 보냈어야 할 만큼 내게 충격적이었다. 남태령을 넘으며 국민이 세운 대통령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생명보다 효율’이라는 농업 멸시 발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논란이 되었던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이른바 ‘농망법(農亡法)’ 발언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이고 참담하다.
우리 헌법 제121조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달성되도록 국가가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농지법 역시 ‘농업경영에 이용되고 있거나 이용할 토지’로서, 농지를 엄격히 정의하고 있다. 농지는 농사짓는 이가 땀 흘려 생명을 길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헌법과 법률이 최후의 보루로서 지켜온 땅이다. 국가가 이토록 명문화하여 농지를 보호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본 자원인 식량을 생산하는 유일한 공간이고, 나아가 지구가 스스로 생명력을 유지하는 근본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의 가치로만 평가할 때, 농지는 더이상 헌법으로 보호해야 할 근본적 생산활동이 이루어지는 터전이 아니라 좀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전용할 수 있는 도구로 치부되는 것이다.
얼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개최한 재생에너지로의 정의로운 전환을 주제로 한 국회 토론회에서, 공익법률센터 농본 하승수 대표는 “태양광과 풍력을 늘린다고 정말 온실가스가 줄어드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재생에너지가 절대 선(善)으로 포장된 세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AI와 반도체 산업을 위해 천문학적인 전기가 필요해진다는 전제하에 그 전력을 감당하기 위해서 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는 논리는 기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탄소를 줄이는 실천이 아니라 산업의 팽창에 녹색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면죄부일 뿐이다. 농지를 무참히 뒤덮고 있는 태양광 패널, 백두대간에 꽂히고 있는 거대한 풍력발전기는 이 땅의 미래를 위한 전환의 징표가 아니라 오직 대기업들의 수출을 늘려주기 위한 도구다. 오늘날 재생에너지 개발은 탄소배출을 줄이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지금까지 탄소를 흡수해온 흙과 갯벌, 산림과 꿀벌, 그리고 사람을 짓밟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갯벌에서 옥토로, 그리고 다시 자본의 도구로
현재 재생가능에너지 확대를 이유로 농지의 파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전국의 간척지이다. 태양광발전 자본이 몰려드는 서·남해안 간척지들은 본디 갯벌이었다. 그동안 정부는 국민을 먹여 살릴 식량기지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바다를 막아 간척사업을 벌였고, 그 뒤 수십 년 동안 농민들의 수고로운 노력으로 소금기 어렸던 땅들이 옥토로 개간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척지는 이제 대한민국 전체 농지의 24%를 차지하며, 가장 넓고 가장 기름진 식량기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는 이런 간척지에 ‘농사지을 수 없는 땅’이라는 표지를 붙이고 있다. 염분 피해가 심해서 농지로서 가치가 없다는 이유다. 그러나 그들의 측정방식은 문제가 있다. 벼의 뿌리가 닿지도 않는 30~60cm 깊이의 심토를 기준으로 염도를 측정하는데, 담수기에는 간척지의 심토는 표토보다 염도가 평균 1.67배나 높게 나오기 때문에 쉽사리 ‘염해 농지’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의 의뢰를 받은 연구에서도 이런 식의 판정은 결함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제도는 개선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어 100년 동안 멀쩡하게 벼를 잘 길러온 땅들이 하루아침에 ‘농사지을 수 없는 땅’으로 분류되고 있다. 농지로서 가치가 없다는 판정을 받은 땅은 쉽게 전용될 수 있고, 그 결과로 전국의 간척지에 태양광 패널들이 끝도 없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간척지를 옥답으로 만들어온 농민의 노력은 온데간데없다. 특히 임차농들의 처지는 참으로 안타깝다. 지주들에게 고액의 임대료를 약속하는 태양광업자들이 밀려오면서, 그 땅을 묵묵히 일궈온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일터, 삶터에서 쫓겨나고 있다.
만약 정부의 정책이 진정으로 탄소배출을 줄이는 쪽을 향하고 있다면, 설령 간척지가 농지로 부적합하다고 평가하더라도 흉물스러운 패널들로 그 땅을 영원히 덮어버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방조제를 허물어 갯벌로 되돌려놓는 편이 백번 맞다. 갯벌이야말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탄소흡수원이자, 수천 종의 생명이 깃들어 사는 진정한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런 갯벌을 식량생산을 늘리겠다고 개간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기후변화를 핑계로 농지로 일구어진 땅을 짓밟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균형성장’의 두 얼굴
정부는 이 무분별한 난개발을 ‘균형성장’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포장한다. 지역에 거대한 성장거점을 만들면, 그 온기가 주변 지역까지 따뜻하게 데워줄 것이라며 낡아빠진 낙수효과 이론을 되뇐다. 21년간 205조 원을 쏟아붓고도 수도권과 지역의 격차가 오히려 심화되어온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역사가 엄연히 있는데도 말이다. 이번에는 성공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반면, 낡은 정책이 외양만 바뀌어 지속될 때 그로 인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막대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더욱 신중하게, 더욱 깊은 사회적 숙의가 필요한 것이다.
광주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고 인근 지역의 물과 땅을 끌어대서 산업을 운영한다 해도, 그렇게 만들어진 반도체의 소유권과 수익은 서울에 있는 본사로, 결정을 내리는 자본세력에게 돌아간다. 지역은 부지와 용수와 인력을 내주고, 수도권은 이윤과 결정권을 가져간다. 공장이 호남 땅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것을 ‘균형’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진짜 균형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부가 그 지역으로 돌아가고, 그 땅에 무엇을 세울지 지역의 사람들이 결정하고, 그 땅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그 지역이 먼저 쓰고 남게 되는 만큼만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지금의 ‘균형발전(성장)’은 이 세 가지 중에서 무엇 하나 지역에 남는 것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착취의 방향은 송전탑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신안의 태양광 단지와 영광의 원전에서 만들어낸 전기는 그 지역들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나주와 함평, 장성의 들녘을 거침없이 찢고 지나가는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고압 송전선로를 타고 저 멀리 경기도 용인에 건설되는 반도체 산단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방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전기가 결국 이미 비대한 수도권의 몸집을 더욱 불리기 위한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에서, 지방의 ‘개발’은 그저 수도권이 끝없이 배를 불리기 위해 자원을 착취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에너지 지산지소’(지역에서 생산하여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뜻)라는 구호의 남용이다. 이 말은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면서, 지방이 한낱 수도권의 전력 식민지가 되어가는 현실에 맞서서, 농민들이 피를 토하며 만들어낸 저항의 언어다. 탐욕을 위해서 삶터를 짓밟는 철탑을 건설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다는 절절함이 담겨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는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가라”고 기업들을 부추기면서, 하필이면 이 말을 뻔뻔하게 가져다 쓰고 있다. 그리하여 ‘지역의 발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수도권의 확장’을 위해, 지역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사활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이 ‘탄소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다는 사실은 더욱 아프다. 우리는 공기 중의 탄소 입자를 세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탄소 창고는 우리 발밑의 흙이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전 세계 토양이 대기 중 탄소량의 세 배에 달하는 약 2,400Gt의 탄소를 품고 있다고 밝혔다. FAO(유엔 식량농업기구)도 토양으로 탄소를 되돌려놓는 일은 기후위기 대응에서 잠재력이 가장 크고 비용은 가장 저렴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못박았다. 무경운, 윤작, 피복작물, 유기물 순환 등 오래된 농법들은 흙을 죽은 지표면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저장고로 되돌려놓는다. 그런데 이런 살아있는 흙에서 생명을 길러내는 농사를 버리고, 더욱 뜨거운 지구를 만드는 데 기여할 전기를 생산하겠다고 태양광 패널로 땅을 덮어버리는 일을 우리는 지금 ‘기후위기 대응’이라 부르고 있다.
‘메가프로젝트’라는 것은 말 그대로 ‘크기’로 세상을 재겠다는 선언이다. 몇조 원, 몇 기가와트. 그러나 이런 숫자들은 크면 클수록 파괴력도 크므로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자라지 않는다. 볍씨 한 톨이 여름 한철을 건너 밥 한 그릇이 되는 그 작고 느린 순환이야말로 이 문명이 오래도록 잊어버리고 있는 진짜 힘이다. 따라서 농민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속도 대신 흙의 시간을 따르겠다는 선택이며, 값을 매길 수 없는 작물의 뿌리와 미생물의 대화, 물로 이어진 관계, 또 갯벌이 품어온 생애들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이다.
“풍력발전기 아래서 철새가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철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지켜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가 철새더라. 근데 우리를 국가는 지켜 주지 않더라.”
‘정의로운 전환’을 호소하기 위해 국회에 온 어느 농민이 들려준 가슴을 후벼 파는 이야기 중의 한 대목이다. 기후재앙을 막기 위한 탄소중립 정책은 그 실현 과정이 정의로워야 한다. 기후재앙을 만들어낸 자본의 편에서 진행되는 ‘탄소중립’은 또다른 재앙으로 우리를 몰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 정부가 사활을 걸고 지켜야 할 기간산업은 반도체가 아니라 농업이다. 반도체는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지만, 식량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농업은 단순한 1차 산업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생명을 다시 길러내는 생명산업이다. 기후위기는 가장 먼저 식량의 위기로 나타날 텐데, 그 위기는 결코 공평하게 도래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다. 논바닥이 갈라지면 기업가들과 정치인들의 식탁이 아니라 서민의 밥상이 먼저 비어간다. 나는 이 여름, 갈라진 논바닥 앞에 선 농민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메가프로젝트가 삼켜버릴 것은 생명의 현장이고, 고통받는 민중이며, 땀 흘리는 노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흙은 말이 없지만 기억한다. 갈라진 논바닥 틈 사이로 언젠가 다시 물이 스며들기를, 그리고 그 물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오래된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를, 나는 오늘도 논둑에 서서 가만히 기다린다.

195호 공개글 목록

01 책을 내면서 / 성장시대는 끝났다 | 김정현
02 흙과 반도체 — 타들어가는 논 위에서 이 땅의 미래를 생각한다 | 엄청나
03 불편을 견디는 민주주의 | 김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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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보
엄청나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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