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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11.

책을 내면서 | 상상력과 용기

녹색평론 통권 제193호 김정현

다시 한번 전쟁의 포화 속에 새해가 시작되고 있다. 중동이 화염에 휩싸이고 석유 운송이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전 세계 주가(株價)가 요동을 친다. 세계경제가 여전히 얼마나 화석연료(석유)에 깊숙이 의존하고 있는지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글로벌 공급망으로 연결돼 있는 우리 경제가 얼마나 취약한 시스템인가도 재차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 반복되면서 외면할 수 없게 된 우리 삶의 가장 추악한 면은 다른 곳에 있었다. 포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복구할 수 없이 파괴된다는 사실에 애를 태우는 사람들보다, 내가 가진 주식계좌에 이 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걱정하며 잠을 설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참사가 가져올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고 있는 것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같은) 일부 반사회적 인간이나 선정적 매체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되어 있다. 이 ‘문명’에는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한계(금기)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 같다. 근대 산업문명의 원죄는, 천지자연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어리석고 추한 존재로, 타자의 피눈물 위에 자신의 행복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 호모에코노미쿠스로 타락시킨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이 연초부터 군사적 정밀공격을 감행, 베네수엘라와 이란이라는 엄연한 주권국가의 정치지도자들을 체포, 사살한 행위는 온건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제국주의적 횡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란의 핵개발이나 베네수엘라의 마약 밀매 혐의를 사실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런 테러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미국의 관심사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최근 미국의 행보에는 새삼스럽게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달라진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영토나 주권 같은 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전쟁을 벌이면서도 국내외적으로 민주적 합의절차라는 형식조차 갖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장된 몸짓과 언사로 나랏일을 기분 내키는 대로 즉흥적으로 처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트럼프 개인의 문제로 돌리면 더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석유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은 역대 다른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미국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제거해온 것도 미국의 일관된 외교정책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미국이 거칠고 사나운 태도를 보이는지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기축통화 보유국이라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누리면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특히 소련연방이 해체된 뒤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달러와 석유라는 현대 세계의 절대적 무기를 휘두르면서 제국주의적 욕망을 충족해왔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건설된 제국이 실은 사상누각이었다는 것이 지금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질서는 물리적 한계가 명백한 화석연료에서 동력을 얻고 있었고, 미래세대든 제3세계든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비윤리적인 구조도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뿌리가 없는 이 구조물은 너무 비대해져서 자그마한 충격에도 무너질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 기후위기는 이 시스템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수많은 증거 중의 하나일 뿐이다(트럼프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한 것 같은데, 그건 기본적으로 미국식 질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달러와 석유의 힘으로 운영되는 현재의 시스템을 버리지 않고서는 기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트럼프는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 근년에 몹시 험악해진 국제 정세는 석유나 희토류 같은 자원에 대한 강대국들의 탐욕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제국의 변방에서 다른 방식의 삶, 문명적 전환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오히려 더 큰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근거는 있다.
불평등한 구조는 더 작은 수준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이 약소국들을 제물로 삼아 풍요를 누려온 것처럼, 서울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원과 인구를 빨아들여서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몸집을 키웠다. 그래서 이제 크고 힘이 세진 만큼 대단히 취약한 도시가 되어 있다. 그런 도시를 모델로 하여 이 나라에 제2, 제3의 서울을 만들겠다는 구상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새로운 서울을 뒷받침할 지방이 어디에 남아 있다는 말인가?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거론될 정도로 인구도, 자원도, 자금도 서울이 흡수해버렸고, 심지어 이제 우리는 이주노동자나 쓰레기 수출 같은 형태로 해외 식민지까지 수탈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지방이 살아남을 길은 더 크고 강한 또하나의 서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각 지역에서 자립의 힘을 키워서, 장기적으로 이 나라가 정치적·경제적 분산사회로 가는 것 말고는 서울에 극도로 집중된 기형적 구조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서울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변화하기보다 멸망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제국주의적 구조에 옭매여 있다. 제3세계를 수탈해서 낭비적인 편익을 누려온 북반구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봉책인 줄 알면서도 미국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돌파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실용주의’를 표방하더니, 예고했던 대로 근본적인 개혁보다 역대 한국정부들이 진보, 보수 구별 없이 모두 밟아온 길, 즉 글로벌 호황 산업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대 재벌기업들과 손을 잡는 쪽을 선택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인공지능, 반도체, 원자력을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붕괴하고 있는 세계경제 질서에 꼼짝없이 묶여 있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이 나라의 장기적인 번영을 도모하는 것 같은 일을 다음 선거 전에 성과를 내야 하는 대의제 정부가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선 안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화석연료에서 동력을 얻고 제국주의-식민주의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세계질서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한계점에 온 지구생태계나 지속 불가능한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대책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맹목적으로 전력을 다해서 온 국토를 발전소와 자동차, 무기,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로 덮어버리고 난 뒤에 이 거대한 기계들이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실용주의는 기존의 방식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고, 거대한 변화가 요구되는 시기에는 최악의 원리가 될 수 있다. 어제와 다른 내일을 가져올 상상력과 용기가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정부가 열정적이고 유능할수록 나라는 더욱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재명 정부가 분배나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이제 핵심적으로 중요한 의제가 못 된다. 이 시대에 정말로 의미가 있는 질문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전쟁을 불러오지 않는 경제·사회·정치 모델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인간과 자연을 체계적으로 착취해온 것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산업문명 사이에 차이가 없었고, 약자들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부강한 나라가 되겠다는 강박적 관념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왔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좌우의 논리에 갇혀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역사의 종언’으로 착각하고, 자본주의와 결합한 대의민주주의 이외의 가능성을 도외시했던 것은 인류의 크나큰 패착이었다. 1991년 이후에도 (물론 그 이전에도) ‘대안’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창조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제국주의 시스템의 과실을 독점하고 있는 엘리트 세력들이 개입하여 무력화하고 억압해왔기 때문에 “대안은 없다”라는 비관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일례로 1959년에 시작된 쿠바의 혁명은 7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더디게 진행되면서 여전히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비전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일찌감치 1962년부터 미국의 주도하에 이 나라의 무역과 금융이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은 섬나라는 ‘국제주의 연대’의 원칙 아래에서 혁명 직후인 1960년대부터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들과 재난의 현장에 의료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1980년대가 되면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건사업보다 쿠바의 해외 의료원조 규모가 더 커지게 된다. 경제적 봉쇄, 정치적 탄압, 서방 언론들의 집요한 선전전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후에는 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주민 2만 6,000명(그중 2만 2,000명은 아이들)을 본국으로 데려와서 무려 24년 동안 무상으로 돌보고 치료를 해주었고, 코로나19 역병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는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도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다(코로나 시기에 쿠바의 도움을 받은 국가들에 대하여 미국은 제재 조치를 발동하여 응징했다). 21세기식 사회주의라고 부르든, 이슬람주의 원리라고 하든,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지만 쿠바(1959~), 칠레(1970~1973), 이란(1979~), 베네수엘라(1999~) 같은 나라들이 시도한 정치적 기획이 미국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질서보다 낫다거나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실험은 (제국의 탄압으로 인해) 사실상 한 번도 온전하게 전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우리로서는 찬성하거나 반대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이 문명의 내부적 야만성과 경직성으로 인해서 다른 길로 갈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우리가 빼앗겼다는 사실은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청사진이나 계획으로 역사가 방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우리 보통사람들의 상상력과 용기이다. 《에코토피아》(1975)에서 생태적인 고려를 우선시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던 어니스트 칼렌바크도, 독자들이 자신의 구상을 전범처럼 여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인류 역사는 엘리트 권력층이 주도해온 것이 아니라 풀뿌리의 힘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자신의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변화는 우리가 ‘다른 것’을 꿈꿀 때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탈성장, 저에너지 분산사회, 진실로 민주적인 경제는 과연 어떤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것인가?[김정현]

193호 공개글 목록

01 책을 내면서 | 상상력과 용기 | 김정현
02 지방자치, 통합이 아닌 네트워크로 | 곽현근
03 당사자로서 바라본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 | 신문영/김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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