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사회학자, 성공회대학교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이문재 (시인, 경희대학교 교수(사회))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나이듦연구소 소장)
2024년 7월 20일, 녹색평론사 편집실
이문재 내년 2025년, 우리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넘는 초고령사회로 접어듭니다.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이라는 것인데, 새삼스럽진 않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을 짚어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바람직한 초고령사회가 될지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그간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주제가 광범위해서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 보이지만, 노년의 문제를 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노년의 사회화·정치화 가능성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찬호 선생님은 최근 펴낸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에서 노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능력을 강조하셨죠. 이전부터도 책과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이 문제를 천착해오셨지요. 이희경 선생님은 지역사회에서 돌봄, 나이듦을 중심으로 노년문제에 접근하고, 연전 펴내신 《이반 일리치 강의》와 일간지 칼럼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저는 늙음이나 죽음에 대해 공부한 적은 없습니다만 3년 전부터 ‘60+기후행동’이라는 시민단체에 발을 들여놓고 회원들과 함께 노년층이 생태적 전환의 주체로 거듭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두 분 선생님도 이제 60대로 접어드셨는데, 소회가 어떠신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갈까요?
김찬호 제가 육십 되던 해에 손녀가 태어났고, 2년쯤 지나 지난달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손녀는 쑥쑥 크면서 딸을 빼닮아서, 이 아이를 안고 있으면 제가 딱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세대를 넘어서 핏줄이 이어진다는 실감, 삶에 대한 엄중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예상해보면 암울해지잖아요. 점점 더 상황이 나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중에 이 아이가 저한테 할아버지는 (세상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했냐고 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한편으론 친구나 선후배, 제가 직접 아는 사람들 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나 자신에게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실감이 나고, 그럼 나는 준비가 돼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희경 저는 정규직 일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큰 변곡점 없이 심상하게 육십을 넘겼는데, 외부 시선을 통해서 나이가 들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지요. 《이반 일리치 강의》 책 내고 나서 라디오방송에 나갔는데, 사회자가 저를 보고 ‘훨씬 젊은 분인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의식을 하면서 보니 사회활동 하는 사람들 중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걸 확인했어요. 무엇보다 저는 10년쯤 전부터 병약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나이듦을 돌봄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 자신도 갱년기를 겪으면서 실제로 몸이 아프니까 친구들과 만나도 대화가 몸에서 시작해서 몸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런 때에도 노년에 접어든 걸 실감하는 것 같아요.
이문재 저도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모습으로 나이듦을 자각했어요. 10여 년 전만 해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아저씨’라고 불렸는데 어느 날부터 마트나 식당 같은 데서 ‘아버님’이라고 하더니, 요즘은 ‘할아버지’로 불립니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기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한테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그래요. 호칭만 바뀐 게 아닙니다. 저도 친구들을 만나면 건강 얘기가 화제에 오릅니다. 잇몸 안 좋으면 무슨 치약 써라, 허리 아픈 데는 어떤 운동이 좋다, 치매 예방에는 춤이 최고란다…. 저는 내년 2월이 정년인데 퇴직 이후를 생각하면 역시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압박으로 다가와요. 연금이 나오는 저도 그런데 자영업자들이나 일찍 일선에서 물러나신 분들은 노후에 대한 고민이 매우 크리라 짐작합니다. 이제 이른바 베이비부머 세대가 60대에 접어들어서 새로운 노년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선생님들께서는 이 세대의 특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계신지요?
김찬호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말은 오해를 빚을 수 있어요. 우리 세대는 보통 형제가 넷 정도이지만 우리 위 세대만 해도 8명, 10명도 흔했잖아요. 인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베이비부머 세대였다는 말입니다. 전쟁 때 출산율이 주춤했다가 확 늘어났고 그리고 다시 줄어들었기 때문에 앞뒤 상대적 관계 속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죠.
여하튼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고도성장기 한가운데에서 그 성취감을 온몸으로 맛보며 자란 세대이지요. 물론 편차가 있겠지만 보릿고개나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고, 산업화와 민주화가 궤도에 오른 후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외치고 도전하고, 또 개인적으로 성취도 이룬 사람들입니다. 5,000년 한국 역사에서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문화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많은 걸 누리고 자신 있게 산 세대가 없지 않을까요. 7080이라고 하지만 8090, 6070이라고는 하지 않거든요. 7080으로 묶이는 것도 베이비부머 세대인데, 대학문화가 꽃피던 시절에 20대를 보냈다는 뜻이죠. 문제는 두터운 이 베이비부머 인구층이 노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과잉 대표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거예요.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고 우려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희경 그런데 언제부터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용어를 썼지요? 과거엔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저도 나이로 치면 베이비부머 세대에 속하지만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규정해본 적이 없어요. 저와 제 친구들은 오히려 ‘K장녀’라는 개념으로 우리 세대 문제를 사회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K장녀들은 전 생애를 통해서 돌봄을 거의 모두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려왔어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활발하게 진입하던 때에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바깥에서 일도 하면서 집에선 양육도 도맡아야 했죠. 공동육아, 대안학교 같은 것도 철학적, 이념적 소산이기보다 구체적인 현실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할 거예요. 그런데 이제 60대로 넘어가면서 부모 돌봄 문제에 봉착한 거예요. K장녀는 이렇게 평생 뼈 빠지게 누군가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실존적 고민이 큰 사람들입니다.
1차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는 이미 정년을 했고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4~1972년생)가 은퇴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연금 개혁도 수십 년째 지지부진하고,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람들을 사회가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베이비부머 세대가 호명되고 있는 것일 테죠. 베이비부머 세대를 ‘마처 세대’라고도 하던데요.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자녀로부터 돌봄을 못 받는 처음 세대라는 뜻인데, 역시 생계나 돌봄 차원에서 노후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없다는 우려를 담은 표현이겠지요.
계층화, 대상화되고 있는 노년
이문재 말씀 듣고 보니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용어에 문제가 많군요. 여성의 역할을 비롯해서 다양한 생애 경험과 입장이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대를 보다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품어 안는 현실적 담론이 나와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오래전부터 베이비부머 세대는 ‘흙의 마지막 자녀’이고 ‘아스팔트의 첫 번째 부모’라고 보았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제 아들딸에게 물려줄 수 없어요. 우리 세대에 이르러 ‘단군 이래’ 면면히 이어져오던 전통이 완벽하게 단절되었다고 봅니다. 전통의 계승이 전부 좋은 건 아니지만 단절 또한 다 좋은 건 아니겠지요. 어쨌든 지금 이 단절은 여간 심각한 수준이 아닙니다. 저는 요즘 노년층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노인을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죠. 노년층을 4분위로 나누기도 하던데, 경제력도 있고 건강한 경우를 1분위, 경제력은 있지만 건강하지 못한 경우를 2분위, 경제력은 없지만 건강한 경우를 3분위, 경제력도 없고 건강하지도 못한 경우를 4분위로 나누더군요.
이희경 지금은 인구 20% 노년층 내에서의 양극화, 계층화가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돌봄의 관점에서만 봐도 독립적으로 생활이 가능한 사람들부터 모든 것을 도움받아야 하는 사람들까지 노년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거든요. 나이듦연구소를 열고서 〈나이듦과 자기 서사〉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저는 적어도 50대 후반이나 60대가 올 줄 알았는데 40대부터 오더군요. 나이가 들었다고 느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거예요. 여성의 경우라면 가령 24살에 대학교 졸업하고 15년쯤 직장생활 하면 40대가 되는데, 직장에서는 중견이 되어 있고 아이들은 다 크고 인생의 전환기에 들어서면서 나이가 들었다고 실감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편 노인복지법 같은 제도에서 노인으로 규정되는 연령이라도 스스로 ‘노인’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마다 다양한 실존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논의할 수 있을까요?
김찬호 확실히 과거에 비해 사람들이 훨씬 더 일찍부터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쇠퇴한다는 느낌.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밀려난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노인’이라고 인식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늙는다는 것을 부정하고 회피해야 하는 것, 외면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어요. 늙은이, 노인, 어르신, 시니어, 실버―이렇게 용어가 바뀌어온 것이 그 증거지요. 노인이란 말에 낮춤의 이미지가 덧씌워졌어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노년 안에서 우선 연령차가 한 세대 이상 나버리니까 노인의 이미지나 스펙트럼도 다양해졌죠. 하버드대학 행복 보고서에서 오래전에 졸업한 동문들을 85년 동안 추적했더니 나이가 들수록 격차가 벌어진다는 거잖아요. 수명이 길어지니까 ‘건강, 경제, 관계’ 이 세 가지 모두 격차가 대단히 커집니다. 경로당을 보면 그런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요. 지금 전국적으로 경로당이 6만 개가 넘는데 이용자 수는 줄고 고령화된다는 거예요. ‘나는 저런 노인들과 다르다’는 구별짓기 때문이에요. 다르다는 건 학력 차도 있고 문화적인 것도 있겠죠. “수준이 안 맞아서 (경로당에) 못 가겠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특히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우리로서는 젊은 노인과 좀더 나이 든 노인 사이에 생애경험의 차이가 크고,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구별짓기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이문재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주은경 지음)에도 나오지만, 경로당에 다니는 노인 대다수가 많이 배운 사람들, 뭔가 이룬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60+기후행동 운영위원들도 시민사회, 종교, 교육 부문에서 평생 활동하신 분들인데, ‘ 노인’이란 용어에 대해 다들 부정적이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확실히 노년층 안에서 양극화, 아니 다극화되어 있고, 서열화까지 겹쳐지는 것 같아요. 경제, 건강, 관계 이외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맥락이 다른 이야기인데, 제가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어서 학생들의 관심사를 비교적 깊이 있게 접하는데, 요즘 학생들이 초고령사회와 인구 감소에 대해 걱정이 많아요. 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찬호 그 세대의 중요한 키워드가 ‘공정’이잖아요. 취학, 취업, 선발 과정, 젠더 간의 공정성에 대해 민감한데,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세대 간 공정성도 예민하게 의식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어릴 때 조부모와 함께 지낸 경험이 많지 않고, 구체적으로 노인들을 일상에서 친밀하게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과 인격적 유대가 부족하지요. 그런데 노년 인구 비중이 커지면 사회적 부담이 된다는 우려는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니까 이게 막연한 두려움으로 압박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문재 초고령사회나 인구 감소에 대해 학생들이 걱정하는 건 경제적인 측면이에요. 미디어를 통해서건, 부모나 조부모를 통해서건 학생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돈’입니다. 남을 위해 공부해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부모는 많지 않죠.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이 희망과 직업을 동일시해요. 이런 삶을 살고 싶다가 아니고, 이런 직업을 갖고 싶다고 말합니다. 의미 있는 일, 가치 있는 삶에 대해선 거의 생각을 하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먼 미래, 큰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데에는 부모와 조부모, 즉 기성세대의 그릇된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도 책임이 있어요. 그럼 이제 우리 사회와 국가는 노인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말씀들 들어볼까요.
이희경 초고령사회 정책은 노무현 정권 때인 2005년(노인인구 9.1%)에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됐어요. 그리고 2010년까지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 만들어져서 지금은 4차인가 그렇지요? 노인인구가 10%가 된 2008년에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확립되는데, 이건 2000년에 시작된 일본 개호보험을 본뜬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그때 일본의 노인인구는 17%였어요. 연금 개혁 논의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죠.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이나 선진국들에 비해서 대비가 늦었던 건 아니에요. 문제는 속도지요. 불과 20년 동안 제도가 따라갈 수 없게 빠르게 초고령화가 진행된 거예요.
고령화란 전체 인구 비중에서 노년층이 늘어나는 것이고, 결국 저출산이 문제인 것인데, 아이를 안 낳는 건 젠더문제, 여성노동의 문제로 연결되잖아요. 한국 여성 자살률이 OECD 1위이지만, 특히 20~30대 여성 자살률이 가파르게 증가했다는 거잖아요. 다큐멘터리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2020)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에만 3,000명씩 자살 시도를 했고 300명 가까이 죽었다고 합니다. 1997년에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변하면서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2008년 금융위기 겪으면서 또 한차례 노동환경이 크게 변하는데, 이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도 여성 노동자들이었어요. 비정규직으로, 시급제로 몰렸어요. 코로나 발발 직후 한 달에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거잖아요. 한 달 사이에 무려 12만 명이 해고된 것도 놀랍지만 이게 전혀 사회적 이슈가 안됐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어요. 노인빈곤 문제를 살펴봐도 여성이 더 취약합니다. 요는 초고령사회로의 빠른 이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젠더, 계급 문제와 함께 풀어야 한다는 거예요. 노인에만 초점을 맞춰선 해결이 안됩니다.
김찬호 인구의 구조적 변화와 함께 중요하게 봐야 될 건 사회의 해체입니다. 가족도, 지역사회도 급격하게 해체됐어요. 그에 따라서 예전엔 굳이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을 문제, 이를테면 고독사 같은 문제들을 정책적으로 떠안아야 되니까 부담은 커지고 비용도 높아지는 것이죠. 게다가 자원을 쏟아붓는 방식으로만 문제에 접근하니까 노인이 대상화되고, 사회적 문제로서만 부각이 되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도 동네에서 게이트볼 같은 것을 하셨는데 그런 데 은근히 국가 예산이 많이 들어가겠더라고요. 행사 같은 것 할 때마다 조끼 만들어서 나눠 주고, 돈이 자잘하게 엄청나게 들어가더라고요. 이런 건 기사화되지 않으니 가까이서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심지어 아이들 농구장을 갈아엎어서 게이트볼장을 만들어요. 노인은 표가 되고 청소년은 표가 안되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정치의 핵심은 자원의 분배일 텐데, 계층뿐만 아니라 세대 간에도 균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가 노년층에게 이제 좀 욕심을 내려놓고 후세대를 배려하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표 달라고 아첨하면서 시혜적 정책만 내놓고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초고령사회의 복합적인 위기에 대해서 좀 깊이 연구하고 긴 안목으로 접근을 해야 되는데, 당장 손에 잡히는 성과 위주로 정책이 가니까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작업이 모두 방치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