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다양성의 소멸과 상상력의 위기

웨이드 데이비스

 

   웨이드 데이비스(Wade Davis)는 캐나다 지리학회 워싱턴 주재 탐험가이다. 그의 저서《하나의 강(One River)》(1996)은 총독상을 받았다. 최근 저서《세상 끝에서의 빛(The Light at the Edge of the World)》은 2001년에 출판될 예정이다. 

토론토 <글로브 앤 메일> 2000년 12월 28일

  앞으로 백년 뒤, 20세기는 전쟁이나 기술혁신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물학적, 문화적 다양성의 대대적인 파괴를 지원한--또는 수동적으로 승인한--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만도, 100만의 생물종이 멸종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생물종의 상실을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필적하는 손실 즉, 인종권(ethnosphere)이 좀먹어가고 있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인종권'이란 태고부터 인간의 상상력으로부터 생성된 모든 사상, 이상, 신화와 통찰의 총체로 정의할 수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6,000종의 언어들 중 꼬박 절반은 아이들에게 교육되지 않고 있다. 사실상 그러한 언어들은 이미 사멸하였다. 21세기 말에 이르면 언어의 다양성은 500종으로 감소할지 모른다.

  물론, 언어는 단순히 어휘와 문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영혼의 광채이며, 정신세계가 물질계에서 표현되는 수단이다. 각각의 언어는 독특한 지적, 영적 성취를 나타낸다. 비록, 사멸의 위험에 처한 언어들 대부분이 작은 토착공동체에서 사용되는 것이지만, 그 소멸의 결과는 다른 어떤 언어에 못지않게 엄청난 것이다.

  가장 비관적인 생물학자라도 현재 세계 생물종의 50%가 멸종위기에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적으로는 가장 낙관적인 전망이다. MIT대학의 언어학 교수 켄 헤일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의 언어를 잃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토착사회의 처지에 대해 동정적인 사람들 사이에도 체념이 감돌고 있다. 현대기술세계가 가차없이 전진함에 따라 토착문화들은 아무리 진기하고 다채롭더라도 어떻게든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려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류학의 핵심적 교훈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 교훈에 따르면, 우리사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현실의 한 모델에 불과하며, 우리 선조들이 오래 전에 행한 특정한 선택들의 결과이다. 보르네오 숲의 유목민인 페낭족이든, 하이티 부두교의 복사(服事)든, 티베트의 야크 목동이든지간에,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살아가고, 사고(思考)하고, 자연과 관계하는 또다른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나는 동남아시아의 마지막 유목민들 중 하나인 보르네오의 페낭 사람들과 한동안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인류역사 대부분의 기간동안 우리는 모두 유목민--원시행성의 방랑자들이었다. 신석기혁명과 농업이 시작된 불과 10,000년 전에야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목사회에서 우리의 지난 모습을 본다.

  유목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녀야하므로 축재할 이유가 없다. 한 사회의 부유함은 구성원들간 관계의 돈독함으로 결정된다. 나눔은 본능적 행동이다. 다음에 식량을 확보할 사람이 누구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의 삶은 다른 인간형을 낳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세계관으로부터 심오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캐나다 길거리에서 노숙자를 지나치면서,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어쩌면 경제체계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페낭족들은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을 자기들 모두의 부끄러움으로 배우며 큰다.

  나는 토착민들을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루소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시각은 토착민들의 혹독한 생존의 몸부림을 부정하는 것이다. 뉴기니아 말라리아 습지에서의 삶은 사람의 감정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향수'는 보통 에스키모인들에 연상되는 특질이 아니다. 아마존의 수렵과 채집으로 생활하는 유목민들은 경영에 대한 자각이 없다.

  이러한 문화들은 세월과 관례를 통하여 형성된 지구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땅에 대한 깊은 애착뿐 아니라, 훨씬 더 미묘한 직관--이 땅 자체가 인간의 자각에 의해 생명을 갖는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산, 강과 숲은 단순히 인간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의 받침쯤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들 사회에서 땅은 생명을 가진, 인간의 상상으로 포용하고, 변형될 역동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북서 태평양 연안 숲들을 자기 종족의 영혼의 거처라고 숭배하며 자란 콰키우트족 소년은 그러한 숲이 벌목을 위해 존재한다고 배운 캐나다 아이와는 완전히 별개의 사람이다. 안데스에서 성장하여 산은 수호영혼의 세계라고 믿는 아이는, 산을 그저 채굴되기 위한 죽은 바위더미로 생각하도록 자란 청년과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세계관들, 소멸되는 모든 문화들은 인간 삶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우리는 자연계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우주의 의미에 대한 직관도 잃어버린다. 우리는 온 인류가 직면하는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방법들을 감소시킨다.

  다른 세계에서 현대 북아메리카 사회를 방문중인 인류학자는 이곳의 발전상에도 주목하겠지만, 또한 우리의 환경문제들, 20%의 인구가 80%의 부를 좌지우지하고, 결혼 후 절반 이상이 이혼하며, 노인들의 90%이상이 친척들과 함께 살지 않는 사실에 어리둥절해 할지 모른다. 우리가 다른 삶의 모델들을 잃을 때, 우리는 또한 많은 지혜와 (수많은 선배들, 치료자, 농부, 산파, 시인들과 성인들이 남긴) 전문지식들이 담긴 거대한 창고를 잃는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과연 값을 매길 수 있을까? 우리가 다른 문화들에 대한 식물학적 지식을 잃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실제로, 서구과학에 의해 완전히 연구된 부분은 전세계 식물의 1%에도 못 미친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들의 덜 구체적인 공헌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빈곤의 고통을 완화시키고 개인을 외로움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족간 유대가 갖는 가치는 얼마일까? 영적 세계에 대한 여러가지 직관들의 가치는? 결과적으로 숲을 보호하는 의례적인 관습의 경제적 가치는?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생전에, 자신의 큰 근심은 우리가 점점더 균질한 세계로 빠져들면서 개성없고 일반적인 현대문화의 기초를 다져서 종국에는 유일한 문화로 남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드가 염려한 것은, 인간의 상상력 전체가 단 하나의 지적, 정신적 모델의 한계내에 갇혀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악몽은 우리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저녁, '사라와크'의 산등성이에서 나는 '우봉' 강 지역의 페낭족 우두머리인 아시크 넬릿과 함께 모닥불 옆에 앉아 있었다. 해질녘이어서 부분적으로 나타난 달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나왔다. 아시크는 달을 쳐다보더니 문득 나에게 사람들이 달까지 가서 흙을 가져왔다는 것이 정말이냐고 물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도대체 왜 갔습니까?" 그가 물었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는 사람에게 1조달러짜리 우주계획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시크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은 우리는 새로운 부를 획득하러 우주로 간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여행에서 지구에 대해 얻은 새로운 시각으로 지구생물권의 연약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인종권'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 또한 연약하고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토론토 <글로브 앤 메일> 2000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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