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농 -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  쓰노 유킨도 (津野幸人)/성삼경 옮김  녹색평론사 2003

편집자 후기

땅에 뿌리박은 지혜

 

  그 자신 농사꾼이기도 한 일본의 저명한 농학자 쓰노 유킨도(津野幸人)의 저서 중 하나인 이 책은 농사일이야말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지구상에서 가장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할 때, 그 농사일의 주체가 되는 사람으로서 소농의 존재가 가진 의의를 다각도로 설명해주면서, 지구의 미래가 어떻게 소농의 부활에 달려있는가를 명쾌하게 밝혀주고 있는 책이다.

  현대사회가 농업중심의 자급적 생존방식을 버리고, 공업사회를 지향해오는 과정에서 농사마저도 화폐증식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실제로 진짜 농민이라고 할 수 있는 소농이 거의 소멸 직전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의 생태적 미래를 생각할 때, 공업화의 전략으로는 더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것, 즉 농업중심의 순환사회가 아니고는 장기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경작지를 근거로 기계화와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현대적 농법'으로는 이러한 순환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적 과학영농은 어디까지나 공업의 논리에 따른 것이지, 물질의 순환적 신진대사를 기초로 하는 농업의 논리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급속히 사라져가는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농의 운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반드시 생태적 위기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쓰노 유킨도는 이 책에서 이와 관련해서 퍽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말기, 즉 그가 소년시절에 겪은 경험이다. 그 당시 그는 시골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서, 일본은 반드시 진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애국적인 감정에 꽉 찬 순진한 소년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는 어른들에게 항의하고, 심지어 어른들이 비애국자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면서, 일본이 왜 패전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즉, 자기가 지금 쓰고 있는 전정(剪定) 가위는 20년 전쯤에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데, 20년이나 사용한 가위가 아직도 새것이나 다름없이 말짱한데, 이 정도로 튼튼한 강철과 용수철을 이미 오래 전에 만들 수 있는 미국이 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리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후 얼마 안있어 과연 할아버지가 예견한 대로 일본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소년시절의 이 일화를 돌아보면서 쓰노 유킨도는, 전시 하의 철저한 정보 차단의 상황에서 시골 농사꾼들이, 학교 교육을 받은 자기들보다 어떻게 정확히 일본의 패배를 예견할 수 있었던가, 라고 자문해본다. 대답은 간단하다. 자기들과 같은 학생, 지식인들은 국가와 국가기관 ― 학교와 신문과 방송을 포함하여 ― 이 제공하는 선전자료를 근거로 판단하고 있었음에 반해, 할아버지를 비롯한 농민들은 국가기관의 말은 처음부터 믿지 않고, 땅의 사람으로서 살아온 오랜 경험과 지혜에 의지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일화가 갖고 있는 함축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흔히 국가의 보호 아래 우리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오랜 세월 땅에 뿌리박고, 땅을 의지하면서 정직한 땀을 흘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라 할지라도 국가의 논리에 쉽사리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군사국가이며, 국가기관이란 결국 민중을 착취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으로 땅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국가와 국가기관의 선전과 수사(修辭)에 쉽게 설득당하는 것은 이른바 계몽된,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쉽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 자유무역과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전지구적인 거대한 시장의 출현에 대해서 흔히 지식인들은 이것을 인류사회 진보의 새로운 단계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이 세계의 자연과 대다수 민중을 위협하는 대재앙이 되고 있다는 것은 땅의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일이다. 그들은 미국산 옥수수의 한정 없는 소비에 의존하는 공장식 축산업과 그 산물인 맥도널드 햄버거가 번창하는 세계에 내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중국 시장에 핸드폰을 내다팔기 위해서 한국의 마늘 농가가 파산을 감수해야 하는 경제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는 전체 사회의 몰락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다. 갯벌과 바다를 죽이고, 아름다운 산과 들을 거덜내면서 '친환경 개발' 운운한다는 건 결국 기득권자들의 상투적인 속임수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지금 우리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사물의 핵심을 뚫어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소농의 몰락과 더불어 우리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소농은 식량안보와 국토보존이라는 측면에서만 보호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소농을 살리는 문제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작은 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이웃들과의 연대와 협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존조건 때문에 소농은 거대자본과 국가기구에 예속된 지식인, 전문가, 관료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자주적 정신과 협동적 자치의 삶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땅에 뿌리박은 자주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진보라고 믿는 어리석은 미신에서 지금 우리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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