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적이다  웬델 베리 지음  녹색평론사 2006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박혜영

 

  한때 정치적 탄압이 우리의 삶을 뿌리째 흔들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책을 읽는지, 어느 집회에 참석하는지, 어떤 발언을 하는지가 우리의 삶을 하루아침에 고문과 사형으로 이끌던 시절이 있었다. 최대한 모욕과 굴욕감을 주도록 ‘과학적으로’ 고안된 각종 고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포기해야 했다. 나아가 군대의 총칼 아래 수많은 삶의 밑동들이 아무 인과관계도 없이 잘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탄압과 폭력의 한 시절은 ‘서울의 봄’과 함께 물러났고, 그 뒤로 소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낯선 이름의 손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같이 살림을 꾸리자면 어느 한쪽의 변질은 ‘불가피해’ 보였다. 결국 대세는 시장이었고, 민주주의는 효율성과 경제발전을 위해 ‘구조조정’ 되었다. 이제 시장의 원리와 규칙은 정치폭력보다 더 폭력적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도, 일거리가 있는 사람도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GNP와 무관한 아이들과 노인들마저도 불안하게 되었다. 생각과 사상 때문에 탄압받던 시절에는 없었던 정체 모를 불안감이 사회 곳곳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웬델 베리는 현대산업문명의 본질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존경과 충직함, 이웃간의 정과 같은 미덕으로 수천년간 삶을 꾸려온 ‘붙박이들(stickers)’을 뿌리뽑아 모두 한탕주의 ‘뜨내기들(boomers)’로 만드는 것이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뜨내기들의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약탈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우대하는 문화에선 누구나 최초의 처녀지를 찾아나선 고독한 탐험가가 되어야 하고, 누구나 최대의 독점적 이윤을 얻기 위해 혼자서 분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와 친숙한 것은 모질게 대하지 못한다. 한솥밥 먹는 식구들이 그러하고, 부대끼며 정든 가축과 이웃이 그러하고, 자기를 키워준 고향땅이 그러하다. 땅을 오염시키고, 물을 더럽히고, 고향을 싹쓸이하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돈을 찾아 떠도는 임시 뜨내기들이다. 현대의 지배적인 문명이 한탕주의 뜨내기 우대문화였다는 점은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인류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웬델 베리의 지적처럼 오랫동안 자비와 동정, 돌봄과 나눔의 법칙으로 삶을 이어온 인류가 이제부터는 산업주의적 방식으로 인간 대 자연, 만인 대 만인의 생존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웬델 베리의《삶은 기적이다》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밑도 끝도 없는 이 불안감을 천착하여 경제전체주의라는 산업문명의 횡포와 그 동력으로서의 과학기술의 오만함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는 책이다.  

 

  산업문명의 횡포

  웬델 베리는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수필가이며 소설가이다. 그는 T. S. 엘리어트 상을 비롯하여 여러 저술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사상가이지만, 자기 식구들의 생계방편으로는 소위 가장 반세계화적인 농사일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 스탠포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고, 이후 켄터키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웬델 베리가 잘 나가던 교수직을 그만두고 5대째 내려온 고향마을인 켄터키의 헨리 카운티로 돌아가 농부가 된 것은 이런 뜨내기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땅에 뿌리를 박고 책임있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책임감이란 인간적 한계를 받아들일 때 나온다. 웬델 베리가 보기에 농사일은 한 장소에 뿌리내리고 산다는 것의 인간적 책임과, 자연과 공존하고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는 인간적 한계가 도리어 얼마나 우리 삶을 신비롭고 경이롭게 바꿔주는지를 날마다, 계절마다 새기도록 해주는 가장 신성한 노동이다. 한 마을에 함께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사는 농촌 사람들에겐 문화가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과 민담이 있고, 함께 농사일을 꾸리며 부르는 민요가 있고, 풍성한 수확을 비는 제의가 있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가을걷이란 본질적으로 농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웃간의 품앗이와 알 수 없는 천지신명의 은덕에 기대는 농부의 마음이란 결국 무한한 자연의 신비 앞에 선 한 작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각성과 겸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훌륭한 문화란 인간의 한계를 깊이 새길 때, 그래서 삶이란 알 수 없고, 신비로운 것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번성할 수 있다. 

  하지만 농업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의 경제전체주의에서는 존재의 모든 요소, 삶의 모든 기술이 ‘특허’와 ‘상품’으로 환원된다. 아이를 잘 낳는 것도, 잘 낳지 못하는 것도 모두 시장이 된다. 난자와 같은 가장 은밀한 사적요소들은 상품이 되고, 복제기술은 특허가 된다. 물론 여분의 배아들은 일회용 휴지처럼 사용한 뒤 폐기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쪼개지고, 분리되고, 가로막힌다. 산은 터널을 위해 존재하고, 강은 댐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한쪽에선 우량농지 확보를 위해 기름진 바다를 메우고, 다른 한쪽에선 군사시설을 위해 기름진 땅을 파헤친다. 모두가 철거되는 것이다. 난자도, 배아도, 농민도, 노동자도, 농토도, 바다도 모두 더이상 원래 생겨난 곳에 붙박고 살 수가 없다. 산업문명이란 바로 ‘철거문명’이기 때문이다. 소위 전근대적인 농업사회에서처럼 한자리에 오래 붙어있는 것들은 돈이 되지 못한다. 자꾸 새로운 시장을 찾아낼수록, 자꾸 옮겨 다닐수록, 즉 자꾸 철거할수록 GNP는 올라간다. 웬델 베리의《삶은 기적이다》에는 과연 이런 식으로도 앞으로 계속해서 인류의 삶이 이어질 수 있겠느냐는 작가의 통탄이 담겨있다.  

  웬델 베리는 현대문명의 이런 속성을 “고도의 생산성과 영구혁신”이라는 현대 산업주의의 경제적 이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 성공과 발전은 모두 숫자와 크기로만 측정된다. 개인의 성공은 연봉으로 측정되고, 국가의 발전은 GNP로 결정된다. 예술이건, 교육이건 모두 얼마나 상품성이 있는지가 생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정부도, 교육도, 종교도, 병원도 마치 기업조직처럼 변질되고, 규모의 성장과 이윤의 확대를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기업들이 외치는 “글로벌 경제라는 것은 이제는 상품이 아닌 돈을 생산해내는 것”이며, 당연하게도 “표토나 삼림이 줄어들어야 돈은 늘어나게” 되어있다. 웬델 베리는 대학교수들마저 후안무치하게 상업주의적으로 변해가고, 대학은 기업의 거간꾼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탄한다. 오로지 “혁신만을 위한 혁신”을 추구하거나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발전의 척도로 삼는다면 결국 우리는 영원히 새로운 시장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고, 처음 생겨난 곳으로부터 모두 뿌리 뽑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진정한 낯설음을 파악하고도 농사짓는 법을 잊어버린다면 과연 얻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웬델 베리는 묻는다.

  물론 ‘뿌리 뽑힘’이라는 산업문명의 속성은 전문가주의와 과학주의로 무장한 과학기술의 배타적인 지원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근대적 과학기술이란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물질로 환원될 수 있고, 이 물질을 쪼개고, 부수고, 자른 뒤, 마치 시계 조립하듯이 끼워맞추면 다시 새로운 전체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그릇된 확신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관에서는 숲이나 주차장이 별반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숲을 없애 주차장을 만들고도 ‘생산’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웬델 베리가 유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통섭》이란 책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윌슨의 ‘통섭’의 논리는 지금의 인류에게 큰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 현대과학의 이런 특성과 그릇된 ‘과학주의적’ 가치관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의 ‘과학주의’

  웬델 베리는 윌슨의《통섭》에 담긴 과학기술관을 환원주의적 과학이라고 단정한다. 베이컨이 “아는 것은 힘이다(scientia potestas est)”라고 선언한 이래 인간의 모든 ‘지식’은 독점적인 권력의 토대가 되었고, ‘무지’는 인간이성으로 고쳐야 할 질병이 되었다. 오랫동안 인류에게 신비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경험적 관찰과 귀납적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규칙적인 기계법칙의 정교한 ‘시계’로 환원되었다. 마치 노아의 대홍수 이후 신이 약속의 상징으로 인류에게 보내주었던 ‘무지개’가 빛의 굴절과 산란이라는 과학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식이다. 현대과학은 무엇이든지 쪼개고, 또 쪼개면 모든 존재의 기계적 법칙과 원리를 발견해낼 수 있으며, 인류문명의 발전이란 이런 과학적 지식을 끝없이 축적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윌슨은 과학이란 “자연을 자연적 구성요소들로 쪼개는 것”이며, “자연은 다른 모든 법칙과 원칙이 궁극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물리적 법칙들에 의해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모든 것이 일반적인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분과적인 학문들이 일관적인 법칙 아래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윌슨으로서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중심으로 한 분과학문들의 ‘통섭’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윌슨 식의 환원주의적 과학관은 치명적인 한계를 노정하는데 그것은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싼 다른 존재들 간의 ‘알 수 없는’ 총체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환원주의란 본래 고유한 상황의 구체적인 것을 추상화하여 일반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웬델 베리가 인용한 워즈워스의 시구처럼 자연을 “분해하기 위해 살해하는” 것이다. 문제는 한번 해부된 것은 아무리 일반적 법칙으로 재해석하고 재통합해도 다시 원래의 전체로 복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즉 분해할 수는 있지만, 나아가 분해한 것의 일반적 법칙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이 법칙들을 다시 통합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전체를 되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천연광석에서 우라늄을 분리할 수는 있지만 원자력 폐기물을 다시 천연광석 상태로 복구하여 땅 속에 되묻어둘 수는 없다. 결국 환원주의의 위험성이란 존재를 원래 있던 자리에서 쪼개어 옮겨다 놓을 뿐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점차 자신의 원래 터전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웃한 다른 존재나 생겨난 장소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인 전체성을 지닌다. 당연히 구체적인 장소, 구체적인 시간 속에 뿌리박고 오래 존재해야 아름다움과 역사도 생겨날 수 있다. 미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에머슨은〈부분과 전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은 적이 있다.

 

전체에는 언제나 부분들이 필요한 법,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좋은 것은 없다네.
나는 새벽녘 오리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는
참새소리를 천상의 소리로 생각하여,
저녁때 둥우리째 집으로 가져왔다네.
참새는 여전히 노래 불렀지만 이젠 즐겁지 않았네,
강과 하늘마저 집으로 가져오지 못한 까닭에.
해안에는 고운 조개들이 놓여있었지.
마지막 파도의 거품이
조개껍질에 빛나는 진주를 뿌려주었네.
나는 해초와 거품을 씻어내고
바다가 낳은 이 보물들을 집으로 가져왔다네.
그러나 조개들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역겨운 것이 되었네.
태양과 모래와 거친 파도와 더불어
해안에 그 아름다움을 두고 온 까닭에.

 

  어째서 하늘과 오리나무 가지를 벗어난 새소리가 전만 못하고, 거친 파도와 모래와 태양이 없으면 조개들이 아름답지 않은지 ‘과학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에머슨과 웬델 베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신비를 부정할 수는 없는 거라고 말한다. 존재들이 생겨난 곳을 단지 외적 환경으로만 취급한다면 자연은 더이상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저 우리를 둘러싼 주변세계일 뿐이다. 태양과 모래와 거친 파도가 조개에게 그저 하나의 환경일 뿐이라면 이윤을 위해 얼마든지 자연을 파헤치고, 쪼개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요즘은 사람뿐 아니라 나무도 태어난 자리에서 제 수명을 다할 수가 없고, 바위도 처음 생겨난 곳에서 둥글둥글 다 닳을 때까지 있을 수가 없다. 현대문명에서는 지구상의 존재들 모두 저마다의 고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이 아닌 모든 것이 과학이 되어야 하고, 될 것”이라는 윌슨의 확신은 제국주의적, 혹은 전제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웬델 베리에 따르면 이런 식의 ‘과학의 종교화’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신비나 인간의 한계 등을 환상이나 무의미라고 밀어냄으로써 “현재의 지식뿐 아니라 미래의 지식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도 모두 과학의 소유물”로 만드는, 즉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논리와 같은 논리라는 것이다. 과학이 모든 지식과 경험, 신비와 기적까지도 지배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의 오만은 인간의 무지와 오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데서 나온다. 웬델 베리의 지적처럼 현대과학자들은 “원자나 분자, 유전자, 또는 은하수와 위성, 별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또 생태학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유전자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게 되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처지를 당연시하고 있다. 나아가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엄청난 양의 핵폐기물을 계속 축적하는” 그런 어리석음도 저지르고 있다. 웬델 베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해줄 겸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현대과학에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과학이 해결해주겠다는 세계적인 재앙의 대부분은 애당초 과학의 이런 오만으로부터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겸손이 사라진 곳에서 과학의 종교화나 맹신주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삶의 뿌리내리기

  근대과학의 아버지였던 뉴튼은 자신을 “아직 탐구되지 않은 거대한 진리의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는 아이”에 비유하며 앞으로 과학으로 탐구해나갈 무한한 세계를 마음속에 그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줍는 조개가 바닷가를 떠나는 순간 그 바다는 이제 더이상 아름다운 ‘전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웬델 베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시인인 에드윈 뮈어는 히틀러의 군대가 고색창연한 프라하 시내를 침략해 들어오자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한때 가치 있고 인간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죽고, 썩어버렸다. 기계는 도덕적인 힘이며 인간을 더 낫게 해주리라는 생각은 19세기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증기기관이 인간을 낫게 해줄 수 있겠는가? 히틀러가 프라하로 진군해 들어온 것은 이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지난 백년을 돌아보건대, 우리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고, 우리가 잃은 것은 가치 있는 것들이었던 반면, 얻은 것은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잃은 것은 오래된 것들이고, 얻은 것은 그저 새로운 것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적 사고와 기술주의적 방법으로는 많은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결국 증기기관은 히틀러의 군대와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과학자들의 ‘지각없는 호기심’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웬델 베리가 “진보에 의한 지구의 죽음”을 예언했다면, 생명공학기술의 가공할 공포를 그렸던 메리 셸리는 ‘괴물의 탄생’을 상상했다.《프랑켄슈타인》에서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침범했던 유능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결말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나로부터 배우라, 내가 말하는 교훈으로가 아니라면 적어도 나의 사례를 통해서라도.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며, 본성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인간이 되길 갈망하는 사람보다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세상 전부라고 믿으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새로운 과학을 찾아 실험실과 묘지를 떠돌던 프랑켄슈타인의 삶보다 가족과 함께 고향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삶이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더 값지다는 뜻이리라.

  그 자신 저명한 생화학자이자 과학비평가였던 에르빈 샤르가프는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인류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될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리게 만든다”라고 하였다. 에드윈 뮈어와 웬델 베리와 에르빈 샤르가프가 통탄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적과 신비로서의 온전한 삶”이다. 웬델 베리는 묻는다. 우리는 과연 삶을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아기가 태어나고, 죽음이 찾아오는지 알 수 있는가? 왜 슬픔은 찾아오고, 착한 사람이 고통에 빠지게 되는지 정말 알 수 있는가? 세상의 많은 일들은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도록 짜여져 있다. 하지만 바로 알지 못하기에 인간은 자신을 낮추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신비로운 탄생과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또 알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겪음으로써만 온전한 일생을 마칠 수 있다. 왜냐하면 샤르가프의 말처럼 참된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웬델 베리는 말한다. 사람은 모든 친숙한 다른 존재들에 둘러싸여야 한다고.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기계가 아닌 풀과 흙과 인정(人情)에 둘러싸여야 한다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땅 위에서 한때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녔듯이 이제 아들이 아버지를 뒤따라 걸어가는 것, 이것이 삶의 행진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다시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이 행진으로 우리의 삶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기술이 전해지는 길이며, 공동체의 삶이 온전하게 뿌리내리는 길이다. 언젠가 이 행진이 멎는 날이 온다면, 그래서 함께 걷던 들길도, 들풀도 사라지고 모두가 낯섦 속에 둘러싸이는 그런 날이 온다면, 웬델 베리는 그 날이 바로 지구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한다.


  박혜영

  인하대 영문과 교수.《9월이여, 오라》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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