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레  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1999

가난함의 행복을 찾아서

손경목

 

  김종철 교수가 처음에《녹색평론》을 만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적잖은 독자들은 귀에 익은 듯한 이야기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음직하다. 가령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만물은 나의 형제"라는 말이나, "자연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겸손과 외경", "나무 한그루가 상처를 입으면 자기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같이하는 감수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에서 그렇다.
  이와 같은 말들은《녹색평론》과 김종철 교수가 진지하게 다시 꺼내기 전까지 아마 빈사지경에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승되는 지혜나 교육을 통해 우리가 익히 들어왔으면서도 현실에 비추어 큰 실감을 갖지 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국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었지 외경의 상대였던 적이 없다. 물론 보호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놔두었다가 나중에 이용하자는, 개발의 논리 안에 있는 발상의 표현이었다. 자연은 시장에 내다팔 자원의 창고이거나 경쟁에 지친 인간들을 위한 휴식의 제공자였을 뿐 그 자체로 존중될 상대라는 생각은 있기 어려운 몽상이었다. 나무 한그루의 상처에 대한 비유가 거두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뜻하지 않은 '낯설게 하기' 효과이기가 쉬웠던 셈이다.
  자연이 외경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이 현실의 바탕에 있는 원칙, 곧 자연을 정복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것은 알다시피 근대사회가 추종해온 최고의 율법에 속한다. 그것은 세계의 주류 질서는 물론이고 그것에 대항한다는, 지금은 망해버린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우리가 알기로 심각한 되새김없이 숭배된 원칙이었다. 이 원칙의 옳고 그름은 지난날 우리 사회의 진보적 흐름속에서도 진지하게 따져진 적이 없어 보인다. 맑스주의에 대한 열정이 한때 거세었지만, 맑스주의 전통 안에서 인간의 자연지배가 근대 서구사회 병폐의 핵심에 있다고 본 아도르노 같은 이의 통찰은 거의 눈길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가 변혁하려는 대상의 뿌리에 있는 원리를 부정하지 못하는 움직임이 결국 그 대상에 흡수되고 마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결과였는지 모른다.

  그처럼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한다고 자처한 이들조차 뛰어넘을 의사나 능력이 없었던, 지배와 정복의 객체로서의 자연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김종철 교수의 작업이고 방금 인용한 말들이다.《녹색평론》이 8년 남짓한 세월 동안 지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작업공간의 하나로 자리잡은 지금까지도 이러한 자세가 처음에 불러온 당혹감은 가시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대를 지배해온 이념 및 체제들이 지닌 한계와 맹목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품어져 있다면, 기성의 체제들이 제공해온 삶의 너머를 건너다 보려는 어떤 노력도 자연을 대하는 김종철 교수의 태도와 여기 이어지는 생각들과 진지하게 만나기를 피하거나 생략할 수 없을 것이다.
  김종철 교수에게, 정복의 대상이 아닌 겸손과 외경의 상대로 자연을 대할 까닭은 우선 오늘 치명적인 수준에 이른 생태계 위기에서 긴박하게 생겨난다.《간디의 물레》,《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인간의 편익을 위해 자연에 가해진 폭력이 '유한 체계'인 지구를 인간 자신을 포함한 생명체가 살아남기 불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왔음을 알리는 수많은 전언들을 담고 있다. 김 교수가 보기에 이것은 도구적 이성의 지배 아래 '정복적 인간'을 양성해온 산업화 논리, 산업기술문명의 직접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면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생태계의 이러한 재난이 사람됨의 위기와 정확히 대응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효율적 지배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서로 긴장과 적의, 자기확장을 위한 권력의 추구로 가득찬 관계속으로 들어가며 여기서 인간성의 황폐화 또는 폭력화, 내면의 불안과 우울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닥쳐 있는 것이 생존 터전의 상실과 인간 몰락의 동시적 위기라고 한다면 그것의 극복은 자연의 무제한한 수탈, 그리고 그것을 합법화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와 인연을 끊고 자연과의 조화를 도모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한편 김종철 교수가 자연과의 조화, 자연에 대한 겸손과 외경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오늘의 생태적 위기로부터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대응책이 아니라, 자연과 깊이 조화된 삶이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나 안데스 부족 등의 토착사회의 예에서 보듯이, 타자를 짓밟고 일어설 필요없이 서로간에 우애가 숨쉬고 구성원들의 내면에 평온함이 살아있으며 주어진 인간적 한계인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게 하는,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공동체의 질서야말로 그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양새이다.
  이러한 믿음이 전통사회로 복귀하자는 주장을 품고 있지 않느냐는 것은 그동안 김종철 교수에게 주어진 반응 가운데 특히 낯익은 것일 터이다. 그러나 토착사회에 어떤 의미를 주든, 이러한 사례를 통해 김종철 교수가 던지고 있는 질문 ― 그 사회들이 누리고 있었던 삶의 덕목을 상실한 채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지, 있다면 그런 행복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하는 것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을 물음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냐"는 것은 독립된 주제를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간디의 물레》와《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에 실린 모든 글들의 바탕에 있는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이 책들이 생태적 위기의 심층 맥락에 대한 탐사의 기록이면서 근래 나온 가장 뜻깊은 행복의 이론서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업사회는 물론 나름으로 행복의 이념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떠받치는 강력한 '욕망과 그 충족의 메커니즘'을 가동하고 있다. 산업체제에 대한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이 메커니즘 속에 끌려드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도 김교수의 말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산업사회는 쉬지 않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여 상품의 더 많은 소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는 소비를 통해 나날이 풍요로워지는 사회의 일원임을 확인하면서 현실에 대한 의혹을 잠재운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의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삶의 환경의 악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내면의 망가짐이라면 이 사회가 지닌 행복의 이념은 뿌리에서부터 회의되어야 마땅하다. (《녹색평론》의 독자들이 알다시피 김교수에게 그런 메커니즘의 뚜렷한 상징물은 개인 자동차이다.) 산업체제가 "사회적 약자와 생명에 대한 구조적, 일상적 폭력 없이는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집단자살체제'이고 그 안에서의 삶에 어떤 근본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은 이 체제가 제공하는 행복의 이념에 협력하는 욕망과 감수성과 문화의 탈바꿈, "우리 자신의 인격적 쇄신"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김종철 교수는 본다. "우리는 보다 많이가 아니라 보다 다르게 욕망하도록 교육되지 않으면 안된다."
  산업체제가 장려하는 바와는 다른 욕망을 갖기란 "개인적 이기심을 인간행동의 중심적 동기로 하는 부르주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호협력, 함께 자유로움, 관용, 정의로움, 명상과 같은 초월적인 가치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생태론에서 문학이 부차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 문학은 그와 같은 가치들을 "일상적 생활의 구체적인 경험속에서 발견하고 실감"케 함으로써 바람직한 '욕망의 교육'을 펼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 특히 시의 권능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혹은 사물들 사이의 하나됨을 일깨우는 은유의 능력에 있다. 이 능력은 시인만의 특권이 아니라 사람들 저마다의 심성 깊숙한 곳에 있는 자질이며, 그것을 그는 '시의 마음'이라고 부른다. 가령 아래의 우주비행사가 문득 가닿을 수 있었던 자기초월의 지평 위에서 시의 마음은 생태적 비젼과 아름답게 만나고 있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갔다온 사실로 해서 인류에게 어떤 기여가 있었다면 아마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외계에서 인간이 지구를 볼 수 있었다는 점에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때 탑승했던 우주선 조종사의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달에서 돌아오면서 지구를 보니까 너무 아름답고, 작고, 가냘프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 특별히 시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도 아닌 한 우주선 조종사로 하여금 그러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지구라는 별을 하나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위에 자기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터전으로서의 지구가 허공 중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전지구적 관점에 자연스럽게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넘어서는 더 넓은 질서의 일부임을 깨닫고, 하나로 이어진 생명의 질서에 대한 공경과 겸손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김종철 교수는 이러한 감수성에 바탕하여 자연을 마음대로 조종해도 좋다는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폭력적인 관계를 맺으며, 생태적으로 건강한 가난의 삶을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또 이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나뉘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실천적인 구상이 그의 생각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서처럼 모두 농업에 뛰어들라고 재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구상하는 공동체는 농촌의 자립적인 마을을 한 축으로 하고 그들을 지원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좀더 흙냄새 나는" 것으로 바꾸려는 도시인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연대의 그물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구상과 큰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움직임들이 유기농업, 농산물 직거래운동, 생태마을 건설 같은 형태로 점점 넓고 깊게 자리잡아가는 현실을 보고 있다. 이 움직임들이 김종철 교수의 작업과 구체적으로 얼마만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번에 나온 그의 두 책들이 이런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까닭과 그 심층의 맥락에 대하여 깊이있고 간곡한 해명을 전해주고 있다는 데 우리는 군말없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간디의 물레》와《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오늘의 삶에 닥친 생태적 위기와 그것을 벗어날 길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모색이 한 인간의 실존적 무게가 실려있다는 의미에서의 진정성과 만난 드문 사례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발언들이, 앞에 인용했듯이 참으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이어져 있지 않은 경우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러한 진정성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질문을 독자 자신의 문제로 느끼게 한다. 당대 사회의 질서를 뒤바꾸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잦아든 뒤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을 겪어온 현실에서 이 책들이 갖는 의미도 작지 않을 것이다. 김종철 교수는 오늘의 생태적 위기가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라고 말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우리 앞에 드넓은 실천의 영역이 남아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감수성과 욕망의 구조, 삶의 방식에 총체적인 전환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김종철 교수의 입장은 본질론적이고 근본주의적이다. 이 책들에 드러나는 그의 생각은 아마 우리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가차없고 철저한 근대비판이자 문명비판일 것이다. 그는 근대 산업체제의 성취를 인정하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추진하려고 하는 기술주의를 거듭 비판한다. 이와는 좀 다른 맥락에서 근대의 모순된 성격을 분별하여 그 해방적 측면을 극대화하자는 '심층 근대화', '근대성의 성취와 근대 극복의 이중 과제'을 말하는 입장들과도 그의 논리는 충돌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 충돌뿐일까?
  김종철 교수의 근대 및 문명 비판의 근본성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는 문자(文字) 문화에 대한 관점이다. 가령 그는 문자의 탄생이 인간 사이의 불평등과 착취의 시작을 뜻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여러군데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위계와 지배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데 대한 거듭된 비판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가 물론 문자의 쓸모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며, 문자가 도구적 이성의 조종 아래 남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역사는 철저히 파헤쳐져야 마땅할 것이다. 20세기 문자문학이 공동의 삶과 언어로부터 유리된 끝에 퇴폐와 타락의 길에 빠져들었다는 그의 시각이 문학사의 한 핵심을 예리하게 찌르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이런 뜻에서 공동체적 구비문화 전통의 가치에 대한 그의 환기는 경청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혹시 말과 문자 사이에 위계를 짓는 것이라면 조금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질서, 구비문화도 지배와 권력의 자장에서 그 자체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가 지닐 수 있는 매판성과 관련하여, "배타적인 공간과 개인적인 고립"이 필요한 독서행위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을 위축시키는 데 다소간 기여해왔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김교수의 말에도 우리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속에서도 잠정적인 고립의 모양을 띤 개인의 자율적 공간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자율성을 배제하는 추상적인 전체성"은 일찍부터 김교수가 경계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오늘의 우리 삶에 결핍되어 있고, 생태적 공동체속에서 되찾아져야 할 것은 조화의 이념이다. 그러면서 조화의 이념은 개인들의 자율과 차이를 포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개인들이 지닌 경험의 한결같지 않음에 대한 존중을 뜻하고 또 여기서 사회적 삶의 복합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불가피하게 요청된다면, 근대사회와 문명에 대한 김종철 교수의 근본적 비판이 근대의 해방적 측면을 심화함으로써 근대를 넘어서야 한다는 관점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갖는 어떤 상념도 김종철 교수의 두 책이 오늘의 현실에 보내는 통찰의 힘을 덜어내지 못한다. 예전에 김수영이 물었듯이 우리가 비인간적인 질서속에서 어느새 마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김종철 교수의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사경(四更)에 끼얹어지는 찬물처럼 독자를 각성시킨다.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삶을 통하여 여기 응답할 일이 남아있다.

(녹색평론 제48호 1999년 9-10월호)  

 


  손경목

  문학평론가.《당대비평》편집위원.

 

녹색평론사  (02)738-0663, 0666  fax (02)737-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