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무위당 장일순을 기리는 생명의 이야기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녹색평론사 2004

나와 너는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입니다

공동체적 삶에 대하여

 

옛 말씀에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 세상 만물은 나와 한 몸이나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일체의 현상을 유기적 관계에서 보면,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민은 다 예수님 말씀대로 한 형제요, 온 우주 자연은 나의 몸과 한 몸이나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적 삶은 이 바탕 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물에 대해서 선악과 애증을 갖게 되면, 취사선택(取捨選擇)이 있게 마련이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선호(選好)의 관념은 이(利)를 찾게 되고, 이것은 자연히 현실에서 이웃과 경쟁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말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악의의 경쟁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인간이 자기 분열을 한없이 전개함으로써 자멸(自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영성적인 절대만을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여 상대적인 현상을 무시하는 삶도 아니고, 상대적인 다양한 현실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도 아닌 바탕에 공동체적 삶은 있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나누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검소한 삶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또한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서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꾸밈이 없을 것입니다. (1983년)

무위당 장일순  


무위당 선생 연보

1928년  9월 3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부친 장복흥(張福興)과 모친 김복희(金福姬) 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호(號)는 호암(湖岩)이었으나, 60년대에는 청강(靑江)으로, 70년대에는 무위당(无爲堂)으로, 80년대에는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씀.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 밑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공경의 자세를 배움.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서 서화를 익힘.

1940년  원주국민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서울로 유학.

1944년 배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

1945년 미군대령의 총장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제1회)에 입학.

1950년  6 · 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옴. 이후부터 줄곧 원주에서 생활.

195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 이후 5년간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봉직.

1955년  봉산동에 손수 토담집을 지어서 살기 시작함.

1957년  이인숙(李仁淑)과 결혼. 슬하에 3남을 둠.

1958년  장남 동한(東漢) 출생.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960년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낙선.

         차남 동호(東祜) 출생.

1961년  5 · 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서대문형무소와 춘천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름.

1963년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당함. 정치활동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모든 활동에 철저한 감시를 받기 시작함.

1964년  이 해부터 몇해 동안 포도농사에 전념.

1965년  삼남 동천(東天) 출생.

1968년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함.

1971년  10월에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시위를 주도. 이 시위는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촉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함. 이후부터 민주화운동을 막후에서 전개.

1973년 전 해 여름에 닥친 큰 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

1977년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되겠다고 깨닫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

1983년 민주세력을 결집시켜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민족통일국민연합〉을  발족하는 데 일조함.

        10월 29일 도농직거래조직인〈한살림〉을 창립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

1988년  한살림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 개최.

        이후 다섯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1989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군 호저면 솔골(松谷)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움.

1991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 데 고문으로 참여.

        6월 14일 위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수술.

1992년   연세대학교에서 5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생명사상을 주제로 강연.

1993년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냄.

       9월에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 

        11월 13일 민청학련운동 승계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음. 평생의 동지였던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기 위해〈지학순주교 기념사업회〉의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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