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산과의사  미셀 오당/ 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 2005

폭력의 문화를 넘어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편집인)

 

  시내의 한 중학교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옛 제자가 모처럼 내 사무실에 들러 최근에 겪은 자신의 출산 경험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다. 이 여성은 예전에 대학 재학시 강의실에서 이따금 내가 생명이나 환경윤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늘 주의 깊게 들었다고 했다. 이미 자기 또래의 많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런 문제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이었던 만큼 내 강의를 통해서 그가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하여튼 그는 그가 겪은 최근의 경험을 내게 꼭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나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요지는 단순했다. 그의 출산은 이번이 첫번째 경험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왕절개 수술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는 너무도 빈번히, 거의 당연지사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서 보통 산모들은 긴급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왕절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압력을 받고 있음을 자신의 체험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자연분만이 점점 줄어들고, 산부인과에서는 제왕절개를 통한 분만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나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고, 이 이야기를 들려준 그 여성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여성의 ‘유난스러움’은 이제 뿌리깊이 만연해 있는 이러한 분만 관행을 그 자신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임신기간 내내 정기적인 검진을 위해 다니던 산부인과에서도 제왕절개 수술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출산 직전에 병원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도 놀라웠던 것은 수백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 자연분만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출산 후 태어난 아기에게 바로 모유를 먹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병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까스로 발견한 병원은 시내 변두리의 한 작은 동네병원이었는데, 출산 직전에 의사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마침내 허락을 얻어 출산에 임박해서 그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병원에서도 일은 간단하게 풀려나가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지 예정보다 분만이 지연되었고 그러자 인공분만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는 그 병원 의사도 산모와 그 가족들에게 제왕절개를 강력하게 권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로부터 오는 항거하기 어려운 압력은 말할 것도 없고, 산모 자신이 지금까지의 자신의 신념과 온갖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제왕절개 수술에 동의하는 종이에 서명하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면서, 그 동안의 자기 교육을 통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산부인과 의사들은 모르거나 관심이 없지만 자기는 알고 있는 몇가지 방법―기도와 명상과 요가를 포함한―에 끈질기게 매달렸고, 그 결과 조금 늦게 나오긴 했지만 건강한 옥동자를 아무 탈없이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산 한달이 가까워온다는 이 엄마의 얼굴에서는 엄청난 일을 치러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지난 일년 동안 스스로 찾아서 열심히 학습했던 태교와 출산에 관한―의과대학에서 보지 않는―다양한 책들을 날더러 참고로 하라면서 두고 갔다.

  이 조그만 에피소드를 내가 여기서 들먹이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물론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출산과 같은 가장 자연적인 생명과정마저 어느새 빈번한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오늘날 우리의 삶이 뿌리에서부터 뒤틀려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생활의 시초부터 수없이 많은 세대에 걸쳐 가장 자연스럽게 수행되어온 출산이라는 종족보존행위를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되풀이하려고 해도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개인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비상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 전체가 거의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처에서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모든 문제는 다른 모든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이 문제 또한 간단하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 돈과 권력이 개입해 있듯이 제왕절개가 쉽사리 권장되는 산부인과의 관행 역시 돈 문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병원에서의 기술적 개입이 크면 클수록 의료수가는 높아지고, 병원의 소득이 증가되는 것이라고 할 때, 건강보험제도의 보편화로 병원 운영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조그마한 빌미가 있다면 산모에게 제왕절개를 통한 출산을 권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원칙에 대한 고려보다도 모든 것을 쉽게, 힘들지 않게 처리하고자 하는 편의주의가 가세할 때, 병원이나 산모 어느 쪽에서도 특별한 동기가 없는 한 제왕절개는 굳이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의료행위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윤리의식이 아니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 대다수 의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기술주의적 세계관이다. 오늘날 한국의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가 매우 예외적인 기술이 아니라 거의 보편화된 일상적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적어도 이 일을 수행하는 의사들에게는 제왕절개라는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약하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도 그들은 자연분만과 제왕절개를 통한 분만은 그 둘 사이에 거의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양심적인 의사들로서 그들이 지금처럼 빈번한 제왕절개를 용인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따져 보면, 생명이나 건강에 기술적으로 개입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료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태도는 오늘의 한국에서 대부분의 일반 대중이 갖고 있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발전된 기술의 도움으로 가능한 한 고통 없이 출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인지 모른다. 하기는 자연스러운 분만만이 옳고, 제왕절개와 같은 인공적 기술의 개입에 의한 분만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누구든 얼른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확실히 증명해 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자연분만과 제왕절개에 의한 분만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많은 전문가와 대중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영국의 런던에서 ‘초기 건강연구 센터(Primal Health Research Center)’라는 연구조직을 이끌고 있는 미셀 오당(Michel Odent)에 의하면, 임신중의 태아기와 출산시, 그리고 태어나서 일년 남짓 동안의 건강상태가 한 개인의 평생에 걸친 건강을 좌우하는 가장 큰 잠재적인 원인이라고 한다. 미셀 오당은 본래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국영병원에서 수십년 동안 외과 및 산과의사로서 일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수중분만 등 새로운 출산방식의 개발을 통해서 자신의 산과에서의 자연분만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그동안 병원출산에서 소홀히 되어왔던 자연분만의 중요성을 널리 일깨움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미셀 오당이 자연분만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 것은, 물론, 오랜 산과의사로서의 체험에 근거한다. 그는 수많은 출산과정에 조력하는 과정에서, 분만촉진제 투여, 회음수술, 제왕절개와 같은 의료적 개입이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산모들의 생리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병원출산이라는 부자연스러운 환경과 메커니즘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분만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의료라는 기술적 수단에 의한 인위적 개입과 간섭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만큼 아기를 낳는 일은 더 순탄하게,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따져 보면, 오늘날 기계화, 화학화에 거의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현대적 농사법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농민과 도시 소비자들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는 농사가 안된다고 믿고 있지만―그리하여 오염된 식품은 현대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경향이 있지만―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땅의 본성을 무시하고, 온갖 화학물질과 기계에 의존하여 생산성 제고에만 골몰해온 결과, 땅이 생명력을 잃어버렸고 거기에 억지 농사를 계속하자니 더 많은 화학물질을 퍼붓지 않을 수 없는 악순환이 확대되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셀 오당의 발견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수많은 의료 및 건강과학 연구자들에 의해 축적되어온 방대한 연구논문들을 읽고 검토하는 것과 함께 세계 전역에 걸쳐 다양한 문화권에서의 출산 관행에 대한 실제 탐사를 통해서, 사람의 태어나는 방식이 한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문화의 성격에도 근원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출산시에 기술적 개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인은 보다 공격적인 성향의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따라서 그러한 개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문화는 좀더 폭력적으로 될 잠재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오당은 수많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셀 오당은 개인의 건강이라는 차원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 건강한 문명의 회복을 위해서도 좀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출산, 즉 기술이라는 ‘폭력’의 개입이 최소한도로 되는 출산 관행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발언하는 생태주의 사상가인지 모른다.

  실제로, 아직은 소수이지만, 미셀 오당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않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교육자 칠턴 피어스(Chilton Pearce)도 지금 80이 넘은 고령이지만 쉼없는 강연과 계몽활동을 통해서, 지금 미국의 아이들을 망치고, 따라서 미국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다름 아닌 병원출산과 텔레비전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피어스가 이렇게 말할 때, 그도 역시 오당과 같은 근거, 즉 병원출산과 텔레비전에 노출된 아이들이 불가피하게 공격적, 폭력적인 성향을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움직일 수 없는 과학적 증거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비주류 사상가, 과학자, 활동가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 문화와 과학계가 일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과학기술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숭상과 너그러운 태도의 배후에 있는, 은연중 자연적 지혜보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우월하다고 믿고 있는 ‘교만성’(Hubris)이다. 지금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는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많은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이 모든 위기가 언젠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쉽게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과학기술의 진보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문명사회가 본질적으로 집단자살 체제로 되어오는 데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의 책임이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태적 위기가 심화, 확대되는 데 무엇보다 큰 책임이 있는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과 지구의 장래에 관련하여 좀더 크고 근본적인 틀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문젯거리이지, 그 자체가 결코 구원의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류를 형성해온 과학기술의 발전은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배타적인 지배와 우위를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온 인간중심주의적―따라서 가부장적, 남성본위, 서구중심, 강자중심적―세계관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져 왔고, 그 결과 그것은 근원적으로 폭력의 기술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냉철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을 단순히 인간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마구잡이로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이 지배하는 한, 오늘의 당면한 무수한 사회적?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이 내면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영영 회복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제왕절개를 통한 출산의 경험이 개인에게 어떤 건강상의 후유증을 남기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물어보아야 할 것은 자연적 순리를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갈수록 편의주의와 기술을 앞세우는 문화 속에서 인간다운 삶의 존엄성과 그것의 토대인 영성(靈性)이 과연온전히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얘기이긴 하지만, 수십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기를 받아온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그의 병원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맨 처음 만나는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 생각으로 인해 그는 다음부터 아기들을 극히 정성스럽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단순한 직업의식에서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아기들을 받아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돌연한 깨달음이 있은 뒤 그의 일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게 생명을 섬기는 일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삶은 비록 겉으로는 예전과 다름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지극히 풍부한 것으로 변화하였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그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들은 더없이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 속에서 지극히 만족스럽게 세상과의 첫 만남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미를 보면 밟아 죽이는 아이가 있는 반면 개미가 쉽게 움직이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아이도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신의 내면이 평화로운 사람은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경쟁, 폭력, 공격성으로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짓이겨져 있다.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의 하나는 세상에 갓 태어나는 아기들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는 일일 것이다. 폭력 없는 세상은 내면적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고, 인간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태어날 때의 분위기에 깊이 좌우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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