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

역자 후기
 

  이 책은 현재 일본에서 활동중인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 C. 더글러스 러미스의 최근 저서《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일부내용은,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두편의 에세이와 함께, 이미《녹색평론》의 지면을 통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소개된 바 있다. 아직 충분히 많은 글이 소개된 것은 아니지만,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제 국내에서도 그리 낯선 이름은 아니다. 실제, 그동안《녹색평론》에 그의 글이 소개될 때마다 오랜 평화운동 및 정치사상가로서의 경험과 사색에서 우러나온 러미스 교수의 비범한 통찰은, 그의 명석한 언어와 함께, 적지 않은 예민한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경제성장, 민주주의, 평화, 지속가능한 문명, 미국의 패권주의 등등 ― 이 책의 저자가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테마는, 실제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역사적 대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21세기 초두(初頭)의 상황에서, 인류사회 전체의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특히 지난 수십년간 고도경제성장을 경험해온 사회들에서는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절박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한 것임이 틀림없다. 일본이나 일본의 경험을 답습해온 한국과 같이, 그러한 고도경제성장을 전형적으로 밟아온 사회는 전대미문의 생산, 소비의 증대를 통해 엄청난 물량적 풍요와 낭비에 근거한 소비주의 문화를 만들어오는 과정에서, 인간다운 삶의 기반이 끝없이 훼손당하고, 앞으로의 지속적인 생존가능성이 불투명하게 되는 가공할 만한 생태적 재난에 봉착하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 모든 근본적인 어리석음의 근간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우리의 검토되지 않은, 맹목적인 신앙이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해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고용문제를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문명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假定)을 의심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통해서, 경제적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물질생활의 측면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간적 풍요로움의 성립조건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풀뿌리 민중이 자신의 삶을 선택,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점점더 약화되고, 오늘날 산업노동자의 생활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부자유스러운 '노예'의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낡은 논리, 낡은 가치관에 의지하여, 이 절박한 문제들에 접근하는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제비판적인 지식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진보,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경제성장'은 아직도 대다수 지식인들에게는 사회진화의 자명한 전제이다. 그들은 '경제성장'의 허구와 신화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러미스 교수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참으로 적절하게 규정하고 있다. 생존의 자연적 기반이 사라져가고 있는 마당에, 무엇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이 현실을 무시하고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의 문제의식은 진정으로 책임있는 지식인이라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또다시 전쟁의 암운이 드리워지려 하고 있다. 이 책은 비록 두해 전에 구술(口述) 기록된 것이지만, 작년 9월 11일의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공격, 그리고 지금 이라크 공격 직전의 세계적 위기상황에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바가 많다. 평화의 문제는 정치, 군사, 외교의 문제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현대세계가 개발과 경제성장이라는 논리의 포로가 되어온 사실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난'이라든가, '부유함'이라든가 하는 개념이,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하는 러미스 교수의 견해는, 따져볼수록, 탁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정치적 판단과 선택에 의하여 결정하여 마땅한 것을,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라고 오인 . 착각함으로써, 우리의 개인적 . 집단적 삶에 본래 내재되어온 참다운 '풍요로움'의 가능성을 파괴해왔던 것이다. 이제 늦게라도,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에 우리가 얼마나 겸손하게 응답하느냐에 우리와 다음 세대의 운명이 달려있음이 분명하다. 러미스 교수는 우리에게 더이상 '유토피아'를 실현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한다. 이미 세계는 오염될 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방사능으로 오염된 유토피아'일망정 희망을 품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노력 이외에 지금 우리에게는 다른 윤리적 행동의 가능성은 없는 게 아닌가.

2002년 11월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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