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적이다  웬델 베리/ 박경미 옮김, 녹색평론사 2006

  

"살아 있음"의 신비, "알지 못함"의 인식론

박경미

 

1.

  웬델 베리의 이 책은 얼핏 보면 아주 긴 서평이다. 웬델 베리는 여기서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의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Alfred A. Knoph, Inc. 1998)를 세밀하게 분석,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보면 이 책은 현대 과학문명 전반에 대한 저자 웬델 베리의 비판적 성찰이다. 작게 보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이라는 윌슨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대한 심도있는 비판서이지만, 크게 보면 현대과학의 방법론적 전제로서 물질주의와 환원주의, 기계론적 사고, 그리고 현대과학의 외적 맥락이자 동시에 현대과학이 내면화하고 있는 산업주의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급진적이고도 근원적인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 과학비평을 매개로 현대문명 전반의 야만성과 착취적인 성격을 뿌리까지 파헤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문화의 전달자로서 대학의 학술 시스템이 가지는 폐쇄적 전문가주의를 비판하고 구체적인 삶에서 체화되는 예술과 종교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이 책은 포괄적인 문명비판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에드워드 윌슨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과학자이자 저술가이며,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사회생물학》(1975),《인간 본성에 대하여》(1978),《개미 세계 여행》(1990),《생명의 다양성》(1992),《자연주의자》(1995),《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1996)가 출간되었으며, 최근에《생명의 미래》(2003)가 나왔다. 그러고 보면 웬만한 윌슨의 책은 거의 다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Consilience는 2005년 4월,《통섭》(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통섭》은 2005년 국내 출판도서 중 우수도서로 자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하버드대학의 생물학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생물학자, 진화생물학자로서 저자의 명성에 걸맞는 대접을 받았다.

  에드워드 윌슨은 Consilience에서 새로운 생물학적 연구성과에 근거하여 인문학과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종교까지 포괄하는 지식의 대통합을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로 윌슨이 이 책에서 하고 있는 것은 과학주의적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윌슨은 겸손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과학적 사실을 발견하여 제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유전생물학 연구를 통해 발견해낸 사실들과 방법론으로 모든 인간현상과 사회현상을 해명하고자 하며, 이러한 그의 시도는 오늘날 지배적인 과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철학과 종교사상을 재형성하고 주도하고자 하는 이념적 의도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과학자가 과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과학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시도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이 윌슨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는 자연과학이 해명할 수 없는 영역을 해명하고자 하며, 스스로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17세기 가톨릭교회가 갈릴레오에게 했던 일을 이제는 거꾸로 과학자가 인문학과 종교, 예술을 향해 하고 있다. 힘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지성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17세기 가톨릭교회가 과학이 실제로 입증한 것을 논박하려 했다면, 윌슨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갈릴레오에게 했던 행위가 폭력적이고 전제적인 측면을 지닌다면, 윌슨이 하는 일 역시 전제적이고 폭력적이다. 이것은《통섭》이라는 번역본 책의 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윌슨은 대통합의 개념으로서 “부합, 일치”를 뜻하는 consilience란 개념을 쓰는데, 이 말은 “함께(con)” “뛰어오르다, 도약하다(salire)”에서 온 말이다. 이 책의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최재천 교수는 이 말을 “통섭(統攝)”으로 번역하고 “큰 줄기를 잡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말은 “섭정(攝政)”, “삼군(三軍)을 통섭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통치자적이고 지배자적인 개념이며, 지식의 대통합을 꾀하는 윌슨의 시도가 가지는 전제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consilience라는 말은 서로 다른 것들이 보다 높은 자리로 비약하고 도약해서 부합되고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즉 상향일치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실제로 윌슨이 하고 있는 것은 하향일치다. 윌슨은 물질보다 높고 큰 존재인 생명, 그보다 더 높고 큰 존재인 정신과 영을 보다 낮은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시켜 물리적 법칙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생명에는 물질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고, 정신과 영에는 생물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다. 돌멩이와 민들레, 개미와 인간, 영은 각기 다른 존재의 층위에 속한다. 개미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 예컨대 유전학이나 분자생물학으로 인간 현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적 오만이며 폭력이다. 만일 어느 한 차원에서 통합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층위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즉 상향통합, 상향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자연과학과 생물학이 상대화되고 겸허해져야 지식의 소통과 통합이 가능해진다.

  최재천 교수는 이성의 설명능력을 낙관하는 윌슨을 따라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nnaro, ergo sum)”라는 명제를 제안한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사물 그 자체만 못하다. 그리고 사물 자체는 어떠한 설명에 의해서도 소진되지 않는다. 위의 명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타당하다. 환원주의적 추상화 과정에서는 사물 자체와 사물에 대한 형식화된 지식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생명과 존재의 세계는 물리적 법칙이나 생물학적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자연과학 이론은 가설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발견과 통찰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 또 어느 측면과 부분에서 타당할 수 있어도 생명과 존재의 전 차원을 아우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의 이론과 설명 역시 겸허하게 자신의 상대성과 한계성을 인정해야 한다.

 

2.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윌슨의 계획은 공학적이다. 외견상 그는 물질적 환원주의라는 공법을 사용하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등 수많은 고립된 방들로 나누어 놓았던 벽을 허물고 여러 지식의 분과들이 한데 모여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동의 학문지평을 수립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는 벽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과학의 방이 건물 전체로 확대되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한 물질적 환원주의라는 공법 자체가 인문학이나 예술, 종교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윌슨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알 수 있고,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함으로써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에 근거하여 지식의 대통합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가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론적 도구는 물질적 환원주의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합법칙적인 물질세계”이며, 모든 법칙들은 경험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고, 과학적 증명에 종속되어 있다. 그는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는 물질적 진행과정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그는 인간의 문화가 자연과학과 인과적 설명으로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물질주의자로서 윌슨은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우주와 인간을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유전자와 문화의 공동진화를 말하면서 인류가 유전적 진화와 병행하여 문화적 진화를 덧붙였으며, 이 두 진화는 상호 연결되었다고 한다. 유전자와 문화의 공동진화라는 개념 자체가 자연과학의 영역 안에서 설명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생명현상의 심오하고 다양한 차원을 몇가지 자연과학적 물리법칙들로 환원시키고 자연과학의 인과적 설명으로 귀결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놓고 그것을 지구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윌슨은 지식의 통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식의 통합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삶은 원래 통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윌슨은 원래 살아 있는 전체로서 하나였던 생명을 물질적 환원주의라는 칼로 죽여서 분해하고 쪼갰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놓고서는 그것이 삶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이고 진정한 이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합하고 통합하는 과학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만큼만 끼워맞추고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해부했던 것을 다시 전체로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원래 하나였던 것을 쪼갰다가 다시 어설프게 한데 모아놓고 자기 공이라고 내세워서도 안된다. 이렇게 분해했다가 다시 붙여놓은 것은 살아 있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체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 종교가 동경하는 세계는 원래 살아서 통합되어 있던 전체로서의 생명이다. 인문학과 예술,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물의 이 “살아 있음”에 다가가고자 한다. 특정한 요소나 범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독특하게 자기가 속한 장소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개체 사물의 존재 그 자체에 다가가고자 한다. 추상과 추상화의 범주들을 깨부수고, 고유한 생명과 가치를 지닌 사물 그 자체와 대면하고 싶어한다. 사물의 고유한 구체성, 결코 지식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삶의 신비한 차원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 세계는 윌슨이 말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에 의해 포획되는 “알 수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알 수 없음”의 세계다. 시와 춤, 종교는 이 “알 수 없음”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달리는 표현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빛이되 저 생명의 나무는 영원히 푸르다.”(괴테,《파우스트》) 생명나무가 간직한 푸르름은 입증 가능한 사실도 아니고, 통계적인 수치도 아니다. 그것은 설명될 수 없고, 단지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모든 노래와 춤, 시와 기도는 괴테가 말한 저 생명나무의 영원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 보편주의, 환원주의는 생명나무의 푸르름을 회색빛 죽은 이론으로 탈색시킨다.

  웬델 베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로서의 삶, 삶의 기적적인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점에서 윌슨의 “통합”은 삶의 기적적인 성격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웬델 베리는 이 책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수차례 인용하고 있다. 그중 하나를 여기 옮겨보겠다.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블레이크의 이 시구는 삶의 기적적인 성격을 일깨움으로써 우리의 인식을 고양시킨다. 그러나 윌슨이 말하는 과학은 모래 한알에서 세계를 보지 못한다. 윌슨은 모래알을 더 잘게 쪼개고 분류하여 가능한 한 최소단위로 환원시킬 뿐이다. 삶을 기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또 알 수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결국 삶을 축소시키고 환원시키는 일이다. 윌슨이 삶을 환원하고 축소한다면, 블레이크는 삶을 고양시킨다. 블레이크는 모래 한알에서 세계를, 한송이 들꽃에서 세계와 그 너머를 보고 있다. 블레이크의 시 속에서는 모래알 하나가 도약하여 세계와 동일시되고, 들꽃 한송이가 도약하여 천국과 동일시된다. 세계와 그 너머, 천국의 수준으로 모래알과 들꽃이 고양되고 그 수준에서 일치를 이룬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consilience, “함께 도약하여 일치를 이룸”이다. 통합은 삶의 고양을 이루는 것이어야지 삶을 조잡하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누구나 물화(物化)된 삶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윌슨이 말하는 과학은 결코 모래 한알에서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는 단지 모래알을 분류하고 명명하며 주어진 한계 안에서 설명할 뿐이다. 만일 윌슨이 자신이 하는 일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 안에서 성실하게 그 일을 한다면, 그 자체로서 그가 하는 일이 가치가 없다거나 쓸모없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이해한 모래알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즉 모래알을 구성하는 아주 미세한 단위들로 세계를 환원시키고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의 행위는 어리석은 지적 오만(hubris)으로 변한다. 과학자로서 에드워드 윌슨의 지적 근면성은 시인으로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재적인 상상력과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웬델 베리는 “환원의 과정 후에 과학자들이 종합과 통합을 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애정으로 가득 찬 세계로, 우리가 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세계로, 모든 과정들에 앞서면서 동시에 그 뒤에도 살아남는 세계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3.

  이 책《삶은 기적이다》에서 웬델 베리는 “우리는 신비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는 과학자 에르빈 샤르가프의 말을 인용한다. 세계와 삶이 지니는 “알 수 없음”, “신비”의 측면을 지키는 데 웬델 베리는 대단히 강경하다. 자기가 아는 유전학적 지식에 의해 이 모름의 세계,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윌슨의 주장을 그는 혐오한다. 윌슨에게 알지 못함이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고, 따라서 그는 신비나 인간의 한계 같은 것들을 환상이나 무의미라고 간단히 밀어내버림으로써 현재의 지식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지식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까지도 과학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웬델 베리의 말대로 만일 우리가 결국에는 알아내고야 말 대상으로 자연과 그 안에 있는 유기체와 생명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현재, 혹은 미래의 이해를 위한 하나의 주제로 자연을 포획하는 것이고, 그러한 이해는 극심한 산업적?상업적 낙관주의의 토대가 될 것이며, 공동체와 생태계, 지역 문화에 대한 극심한 착취와 파괴의 발판이 될 것이다. 아무리 윌슨이 환경보호론자로서 지구의 미래와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을 염려한다 해도 그것은 단지 시늉일 뿐 기본 정신에서는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종의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행위의 철학적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윌슨의 과학적 “신앙”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신앙이다. 윌슨은 경험주의를 지배적인 교리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경험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한 어떠한 생각에 대해서도 고려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화된 과학이며, 웬델 베리에 의하면 “현대의 미신”이다. 윌슨은 이 신앙에 근거하여 인문학과 자연과학, 종교와 예술의 통합을 꿈꾼다. 그가 말하는 통합은 자연과학적 환원주의에 의해 인문학과 예술, 종교의 차이를 해소시키고 통합된 하나의 학문체계로 만드는 것이다. 윌슨에 의하면 통합은 “학문분과들을 넘어서서 사실들과 사실에 근거한 이론을 연결시킴으로써 공동의 설명을 위한 기초를 만들고, 문자 그대로 지식이 ‘함께 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통합을 이루거나 반박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자연과학에서 발전된 방법론들이다.…물질적 우주를 탐구하는 데서 그 효과가 입증된 사고의 습관에 충실해야 한다.” 결국 과학적 환원주의를 종교나 예술 같은 문화의 영역에까지 강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은 가능하지 않으며, 해서도 안된다. 오늘날 인문학과 자연과학, 과학과 종교 사이의 분리와 간격, 대화와 소통의 단절을 염두에 둘 때 윌슨의 이러한 노력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보고 있다.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자연과학이 자연과학으로 머무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 없는 것은 각자 자신의 전문성에 함몰되어 삶의 구체성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요구들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채 자본의 요구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지, 인문학과 자연과학, 종교와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통합된 학문체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자연과학이건 인문학이건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데 있고, 노예는 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노예가 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만든다고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윌슨은 과학자로서 환원의 작업 후에 종합과 통합을 하겠다는 만용을 부릴 것이 아니라, 웬델 베리의 말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세계로, 모든 추상화와 환원의 과정에 앞서면서 동시에 그 뒤에도 살아남는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이 대화와 소통은 다시 각자의 영역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윌슨은 통합과 종합의 만찬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각자 자신의 언어를 쓰면서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윌슨이 제안하는 통합은 환원주의적 과학의 방법과 가치들을 예술과 종교에 강요함으로써 본래 통합을 통해 치유하고자 했던 불연속성과 분열을 더욱 강화할 따름이다. 윌슨은 두개의 측면을 화해시킬 수 있는 길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두 측면 중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웬델 베리의 입장은 강경하다. 그는 말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통합에 대해 윌슨과 대화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의 제안은 천상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천상과 지상을 화해시키자는 제안이고, 거기에 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이 책의 저자인 웬델 베리는 미국의 농부이자 시인, 작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한때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얼마 후 그만두고 고향인 켄터키의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많은 시집, 소설, 에세이집을 냈다. 그는 자신은 늘 학교 밖에 있을 때가 훨씬 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점이 자신과 윌슨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일 거라고도 했다.

  웬델 베리의 글은 친절하지 않다. 그는 자신과 반대되는 사람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해박한 그의 인문학적, 예술적 소양은 때로 번역자를 힘들게 했지만,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은 반감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나는 그대와 친구가 될 수 없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시오”라고 나즈막히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는 사람은 더욱 깊이 그에게 빨려들어 깊은 유대감과 일치감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을 나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과학기술의 영향력과 그 지배 아래서 매일매일 그 은혜와 파괴력을 실감하며 살아가면서도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제기하는 문제와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할지 그 방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책은 과학에 대해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현대 산업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적인 지주인 과학과 기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과학과 자본의 공모, 그로부터 파생되는 폐쇄적인 전문가 시스템과 대학의 탈지성화, 그로 인한 인간성과 생태계의 파괴 등 그의 관심사는 과학에서 시작하여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른다. 그리고 사물의 핵심에 놀랍도록 빨리 정확하게 도달하고 있다. 이 책이 신비와 기적으로서의 삶에 대해 열린 마음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즐겁고 기쁘게 읽힐 수 있기를 기대한다. 책이 나오도록 도움을 주신 녹색평론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06년 1월 18일    
역자    


저자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

미국의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문명비평가이자 농부.

젊은 시절 켄터키대학과 스탠포드대학에서 영문학과 문예창작 과정에서 수학, 학위를 받은 뒤 잠시 이탈리아 여행을 하였고, 귀국 후 뉴욕대학과 켄터키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30대 초에 대학을 사직하고, 5대에 걸쳐 조상들이 농사를 지어온 켄터키의 고향마을 헨리 카운티로 돌아와 지금까지 40년 동안 줄곧 전통적인 방법으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독립적인 소농이 중심이 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따라 “인간이 땅에 뿌리를 박고 책임있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천착하는 글을 다양한 형식으로 써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Collected Poems(1957-1982), A Place on Earth(1983), Remembering(1989), Jayber Crow(2000) 등 창작집과 The Unsettling of America:Culture and Agriculture(1977), The Gift of Good Land(1981)에서 최근의 The Way of Ignorance(2005)에 이르기까지 4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해온 그는 현재에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미국의 주요 시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심오한 문명비평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동안 T.S.엘리어트상을 비롯한 여러 저명한 문학상, 저술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지금 여전히 켄터키의 시골마을에서 그의 아내와 자녀들,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박경미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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