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패러다임  백기범 지음  녹색평론사 2004

하늘의 춤, 땅의 춤

 이대일 (명지대학교 산업디자인학부 교수)

 

브라흐마, 비쉬누, 시바.

각기 창조와 유지 그리고 파괴를 담당하는 힌두교의 주신이다. 이는 생성과 존속 그리고 소멸에 관계된 신이기도 하다. 우주·만물은 이 신들의 관장 하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다. 이 리듬에서 자유로운 건 아무것도 없다.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아니, 우주조차 이 대순환의 틀 속에서 꿈을 꾸고 춤을 추며 자신을 전개시켜 나간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포물선과도 같은, 비상과 낙하 운동이며 율동이다. 춤 추는 우주는, 찰나적으로 명멸하며 부단히 모습을 바꿔나가는 무수한 세포들을 그러안고 자기 전개를 지속해 나간다. 바이러스에서 은하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중심으로 한 우주 세포들이자 생성과 소멸을 통해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해내는 우주 춤의 주인공들이다.

그래서 신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춘다. 생성된 것은 잠시 지속성을 보이다가 어느 결엔가 소멸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파괴는 창조로 이어지며 창조는 파괴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생성 속에 소멸이 내재되어 있고 소멸은 생성을 품고 있다. 만물은 창조와 소멸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무지개나 구름 같은 존재다.

그런데 존재가 시간성을 지니고 있음에 반해 그 창생이나 소멸엔 이것이 배제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해 일정한 길이의 직선처럼 시발점과 종점은 무시간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분의 시간성은 가시적인 것임에 반해 그 시작과 끝은 비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창조와 소멸 사이에 유한 지속이라는 연속적 시간성이 자리하고 있다면 소멸에서 창조에로의 이행에는 불연속적 시간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한 몸을 이룬 운동태이다. 만물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내재적 리듬이자 각기 다른 주기를 갖는 소리듬으로서 이것들이 어우러지며 서로를 변화시켜 나간다. 현상계란 만물의 상호 관계와 작용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변화되어 나가는 상호적 리듬이기도 하다. 이것은 존재가 고형적인 실체라기 보다도 부단히 요동하는 파장이요, 변화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러한 변환은 개체이건 집단이건 주기적 순환성을 갖는다.

이러한 운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이것은 역으로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작용을 시작한다. 우리가 바꿔낸 환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주적인 시각에서 인간 또한 이 자연의 리듬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문명의 흥망성쇠를 비롯하여 예술 양식의 변천이나 개인의 일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적 행위들이 거시적으로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일정한 패턴을 그리며 생성과 지속 그리고 소멸을 반복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요 종교를 비롯하여 인류의 교사라고 할 수 있는 세계적인 성인이나 현인들이 대개 기원 직전의 수세기 사이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도 봄날의 꽃들과 같은 자연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또한 무리지어 강물 모양으로 이동을 거듭하는 북구의 순록이나 아프리카의 누우 떼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한 줄기의 물길을 그려내고 있는 또 한 무리의 자연의 아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발길을 내딛고 있으면서도 제가 딛어가는 길에 무의식적이고 더구나 그 의미나 가치를 따져보지 않는 맹목의 열정 속에서 먹이만을 찾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대는 동물 세계의 한 부분일 것이다.

이런 강물이 오랜 세월동안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내려 왔다. 이것은 우주가 독특한 능력을 지닌 개체를 상대로 하고 있지 않음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빼어난 교사나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개인을 따라 움직여왔고 이 속에서 존망을 거듭해 왔으며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장래에 대해 지혜로운 전망을 지닌 이들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라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계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양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두머리를 따라 함께 행동하는 동물계의 특성이 인간 사회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에서다. 벌이나 개미 혹은 수 만 마리의 가창오리나 정어리 떼는 특정한 리더도 없이 전체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인다. 개체가 하나의 몸체를 이루는 단위 세포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여기엔 보이지 않는 어떤 중심핵이 두뇌처럼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동종의 집단을 벗어난 개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개개인은 제 아무리 특출한 능력이나 힘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인류라는 한 몸체의 단위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이나 인간은 좀처럼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변화란 일반적으로 장구한 시간대에서의 점진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생물계의 진화란, 찰스 다윈에 따르면 자연선택으로서 이것은 환경변화에 따른 생명의 새로운 적응 양태이거나 변이다. 다시 말해 우연성과 생존 의지성이다. 여기엔 선·악이나 미·추의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에 반해 인간은 무언가를 지향하며 각종의 문명을 창출해내는, 의지적이고 능동적이며 정신적인 존재다. 우리는 사회 환경과 자연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작용태이자 스스로가 변화의 가능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변화에는 도덕이나 윤리 혹은 가치 개념이 구체적인 인자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지향 방향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사시대 이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여느 생물처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우리는 여전히 집단 간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으며 집단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집단적 광기에로의 함몰이며 의식의 실종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부침을 반복해온 여러 사회 제도나 정체 그리고 사회적 지향 등을 깊이 있게 바라보며 그 의미를 천착해내어 새로운 지향점을 모색해내기 보다는 저간의 동일한 궤적을 색깔 다른 무늬로 반복해내고 있음에서다. 또한 생성과 소멸 사이의 짧은 줄 위에서 선조들과 동일한 삶의 패턴을 반복해내고 있음에서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하나의 소설로 기능하고 있을 뿐 삶 속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더구나 원시시대 이래 우리가 적개심에 따른 공격성이나 파괴성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변화는 없어 보인다. 또한 개인의 우월감이나 집단 간의 패권주의가 동일한 맥락 속의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분별이 없다는 점에서, 나아가 우리네 삶의 지향이 오로지 물질가치로 경도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의 희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퇴행적 변화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냉정한 의미에서 동물은 일반적으로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다. 육식동물의 공격성은 공격성이라기 보다 생존성이다. 공격성이나 파괴성이란 자연의 생물학적 현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간의 불안감이나 공포심에서 비롯되는 특이한 마음의 현상이다. 물론 벌이나 개미처럼 집단적인 공격성이나 파괴성을 보이는 곤충도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존재 유지를 위한 한계 공간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그것과는 사뭇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욕망 공간의 확대를 위해 투쟁하고 몸부림친다.

더구나 개인이나 집단의 우월감이나 이에 기초한 패권주의란 생물학적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동물적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 어떤 형태로서든 폭력성과 억압성을 띄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의 바탕에 인간의 평등이나 만물 동등 의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의 아들 딸이 아니라 인간의 자식이며 우주 속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사회 속의 존재라는, 폐쇄적인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인간끼리만의 작용과 반작용을 반복하게 만들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지근(至近)의 현상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이 지상에서 걸음마를 시작한 이래 자신에게 주어진 특정 인성만을 따라 수동적인 삶을 단순 반복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개인으로서건 아니면 집단으로서건 역사의 지도에 비슷한 크기의 동심원들을 누적적으로 그려온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자각 능력과 아울러 정신적 진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진화란 통합된 의식을 지닌 영성적 존재로서의 그것이다. 이것은 생명체와 비생명체,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아울러낸 통합된 의식을 바탕으로 한 전일적인 존재로의 변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파괴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과 각성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진화란 미시적이고 조야한 의식의 존재에서 성장한 영성적 존재로의 변화일 것이며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수평적 문명 순환에서 상승적 전환으로의 대운동일 것이다. 이것은 영성을 대신한 기술 문명으로부터의 방향 전환이자 인간과 환경에 대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태도로부터 모성적 수용성으로의 전환이기도 하고 제 관계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비로소 진일보한 삶의 자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진정한 의미의 진화일 것이다. 이때 문명은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기 시작할 것이며 인간의 존재 유지의 의미가 비로소 제 값을 갖게 될 것이고 소멸이나 생성 또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주 내에서 인간의 의미를 알고 있지 못하다. 아니,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주 내의 전 존재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상호 작용을 통해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삶은 여전히 수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인간은 대개가 반 무의식 상태로 일생을 보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 각성되지 않은 반 최면 상태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환경과 조건에서 형성된 일정한 삶의 태도와 반응방식 그리고 편향된 사고 습성을 상황 변화에 관계 없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해내는 고형적인 삶을 말한다. 달리 말해 제2의 천성이라고 하는 습관에 따른 관성적 삶이며 자동로봇과도 같은 기계적인 삶이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조차 맹목적 습관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물음 또한 귀하기만 하다. 그러나 ‘나는 무얼 위해 왜 살고 있으며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놓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영리한 원숭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역사적인 존재에서 생물학적인 존재로 뒤바뀌는 것이며 심해에 칩거하여 진화를 거부하는 화석 물고기 실러캔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이는 무엇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환경 등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인식을 전제로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특정 욕망이나 호오 아니면 기대감이나 공포심 같은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현실은 쉽사리 왜곡,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얼핏 다이나믹해 보이는 현대의 활성은 오히려 현재 속으로의 매몰 과정에서 드러나는, 유령의 맹목적 활성으로 읽혀진다.

산업자본주의는 이미 투기성 금융자본주의로 변모되었으며 경제는 정치를 뛰어넘어 벌써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정치를 대신하는 독립적인 힘으로 분명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협의로는 정치가 경제이고 경제가 곧 정치다. 그러나 유형·무형의 손에 의한 경제력 중심의 세계가 단지 경제 논리만을 따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제 질서 자체의 붕괴와 아울러 세계적인 공멸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증대되었다는 점에서 이같은 상황은 극히 위험스러워 보인다. 현대 세계가 단 하나의 시계로서, 여러 국가가 통합된 경제 구조 속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음은 지난 IMF를 통해 충분히 검증된 바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것은 세계적으로 빈부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야기시켜 사람들을 기아와 낭비적 소모의 양 극단으로 내몰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류는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존재의 실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전 인류의 20퍼센트 정도가 절대 영양결핍 내지 기아 상태에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음에 반해 또 한편에서는 대중문화 스타나 상품 브랜드에 대한 우상화가 심화되면서 무의미한 현대판 신화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내어 존재의 공허나 부재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저간의 국지적인 양태가 세계적인 양상으로 퇴행 전화된 것으로서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의미있는 삶의 축의 실종을 증거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사회적 담론은 전 지구적 맥락에서의 정치·경제 문제가 거세된 왜곡된 것이거나 아니면 지엽말단적이고 미시적인 것으로 위축되어 그 자체가 생산적 의미를 갖기 어려운 것이 되고 있다. 사회·문화란 그 어떤 형태로건 정치·경제 문화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서가 갖는 의미는 각별해 보인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정체와 우리의 상황을 조감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담론의 거시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문제를 아울러 그 역학 구도와 양상을 심도 있게 규명해냄으로써 세계 갈등과 모순의 집약처이자 능동적 수용처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의 정치·경제 문제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되짚어 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상의 이면에 내포되어 있는 동인과 구조를 선명하게 부각시켜 20세기 후반부의 한·미·일의 정치·경제 관계에 대한 통찰 및 향후 인류사의 전개 방향에 대한 어림을 가능케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행 현상이 곧 대혼돈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와 혼돈의 징조는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 과잉과 집중이며 적의 부재다. 여기에서 과잉과 집중은 생물학적 불균형의 문제와도 연계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사회 전체의 혼돈과 붕괴의 조짐으로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것은 또한 저간에 반복되어온 경제 공항과 파국의 전조라는 측면에서도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더구나 우리 인간은 이러한 파국적 상황을 견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여 수시로 크고 작은 파국의 덫에 걸려들곤 했다. 이는 자가증식을 통한 숙주의 완전한 파괴와 더불어 제 자신마저 사라지는 전염성 세균의 생성·소멸 메커니즘과 비슷한 양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구에 도래할, 아니 저자에 따르면 벌써 시작된 것인지도 모를 이 대혼돈의 전제 가운데 한 축이 왜 ‘적의 부재’인가. 그것은 현대사회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따른 군산복합체로서 이것이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초석으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소멸은 거꾸로 자본주의의 존립 근거를 상실해버리게 만듦으로서 ‘죽은 자가 산 자의 발목을 잡는’, 해괴한 양상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저간의 이데올로기나 사회 체제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서 이것들 또한 제 수명을 다하고 나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어 있는, 잠정적인 사회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간 국제적으로 작동해온 사회가치의 해체와 붕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의 소멸은 우리가 새로운 방향 모색을 통해 또 다른 좌표점을 찾아 나서기도 전에 자기 리듬을 따라 이미 스스로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면 이를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것은 현대 물질문명의 피드백으로 야기된 환경 문제로서 장차 전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이 환경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라고 본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사랑이란, 복음서에서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의 것으로서 인류 생존의 문제로까지 소급되는, 대단히 중요한 키워드로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과 우주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과정에 동참하게 되는 시대적 패러다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나 실천적 의지 여부에 상관없이 인류가 이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가 급속히 움터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지는 세계사의 대전환에 자연과 우주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의 의지와 하늘의 조응 문제를 중심적인 문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미국의 생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제 인종이나 민족간의 문명 전개의 상이성에 대한 원인을 인간의 지력이나 의지와 무관한, 병리학이나 유전학 혹은 생태학이나 언어학 등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제 종족의 흥망성쇠나 역사전개의 상당 부분이 그간 우리에게 숨겨진 코드에 따라 이루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지구에서의 인간의 의미와 역할을 재고해 보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즉 여러 민족이나 문명의 부침에 자연이 철저히 개입하여 역사의 일정 부분을 담당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온당한 의미에서 개입이라기 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작용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하늘의 조화가 바로 순명(順命)일 것이며 이 조화로부터의 일탈이 무질서이자 혼돈이고 파국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많지 않은 원고에도 불구하고 매우 의미심장한 문제들을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의미 깊은 사실들의 체계화와 탁월한 직관력을 바탕으로 급전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 맥박을 짚어내 병든 문명의 원인과 실체를 밝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적당 시간 앓아야만 치유가 가능하다는 문명사적 진단을 통해, 나아가 이제는 우리가 삶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한다는 암묵적 담론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아울러 자아에 대한 각성을 묵시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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