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학과 평화학  토다 키요시(戶田 淸)/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3

'허위의 풍요'와 폭력구조

이윤숙

 

  폭력에 내몰린 일상들

  전세계에서 수천만명의 어린이들이 굶어죽고 힘없는 민중들의 머리 위로 무자비한 폭격이 퍼부어지지만 어김없이 아름다운 해가 떠오르고 아이들이 또 태어나고 장미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이 틱낫한 스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고통의 세계 이면에서 빛나는 '삶의 경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삶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보고 깊이 향수하는 데 대단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일상적으로 너무나 빈번하게 난무하는 '폭력의 구조'에 내몰려 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이든 버스에서든 승용차 안에서든 도시의 아침 출근길은 흔히 표현하듯 '전쟁'이다. '전쟁'이란 타인을 제압하고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상황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사는' 일은, 특히 요즘 같은 불경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각오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사회에서 생존할 힘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밤낮 없는 입시전쟁, 취업전쟁에 나서야 한다.

  끊임없이 허위의 욕망이 부추겨지는 지독한 소비중심의 물질만능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명품 구매와 다이어트에 열광하고, 카드 회사들은 무서운 대가를 담보로 이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준다. 이 욕망 실현의 대가에 부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장기를 팔아서라도', '납치를 해서라도', '매매춘을 해서라도' 돈을 갚으라는 카드 회사의 무시무시한 협박이 가해지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완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가족들과 함께 동반자살을 한다.

  그뿐인가. 일상적으로 군대, 학교, 교도소 등에서는 제도적으로 정당화되고 묵인된 폭력이 난무하고, 폭격을 퍼부어대고 찌르고 때리는 액션영화들과 전자게임들이 고단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여가마저 폭력으로 장악해버린다.

  전쟁, 가정폭력, 아동학대, 성폭력, 군대 내 성폭력, 카드빚과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 납치와 유괴, 외국인 노동자 학대, 조직폭력배의 난투극, 주한미군의 단죄되지 않는 범죄들, 개발의 명분 아래 국토와 산맥들을 찢고 파헤치는 환경파괴들, 여전히 빈번한 자동차 사고들, 젊은이에게 빈발하는 각종 암들 ….

  매일 매일의 뉴스들은 이러한 폭력상황으로 가득 차지만, 사람들은 이런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들을 자신 앞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이것들에 둔감하다. 이 엄청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사는 한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이 폭력의 구조에 가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폭력적 구조들과 문화들은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명확히 바라보기 어렵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요한 갈퉁을 비롯한 평화학자들이 말했듯이,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과 건강, 행복, 아름다움과 지혜의 추구 등에서 자기다움의 실현을 방해받지 않는 것이라면, 넘치도록 물질을 소비하면서도 늘 불안해 하고 억압감을 느끼고 불행해 하는 지금의 우리 삶은 지극히 '비평화'적이고 폭력적인 삶일 것이다. 비록 머리 위에서 직접 폭격이 퍼부어지고, 린치가 가해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국가, 국제기구, 기업, 엘리트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들

  패권국가 미국에 의해 자행된 더러운 보복전쟁으로 얼룩진 시기에 간행된 토다 키요시의《환경학과 평화학》은, '폭력'이 어떠한 목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저질러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지구 생태계의 파괴와 밀접한 구조적 연관을 갖는지 치밀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둔감'해지도록 길들여진 폭력적인 구조의 가공할 만한 실상들에 전율하게 된다. 가해 구도가 명확히 보이는 '직접적 폭력'과, 그것이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거나 생명을 앗아가도록 하는 '구조적 폭력' 모두에서 말이다. 마치 전자게임을 하듯, 폭력으로 인한 고통에 무감하도록 구조화된 하이테크 전쟁(전쟁의 공업화), 제3세계의 숲과 지하자원은 물론 마실 물과 동식물의 유전자마저 사유화하는 다국적기업들의 탐욕스런 착취, 그리고 제3세계에 구조조정프로그램(SAP)을 강요하는 등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착취적 기업활동에 대한 합법화와 지원, 원죄(억울한 죄)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형제도, 방사능 및 화학물질을 배출하며 가장 큰 사망원인의 하나가 됨에도 불구하고 '환경운동가'들마저 무감해져 있는 담배의 소비, 이윤을 위해 필요도 없는 가공의 소비를 만듦으로써 생긴 무수한 약해(藥害)들, 남성에 의해 가치 절하된 여성의 몸 위에 벌어지는 의료화된 폭력 ….

  저자가 방대한 문헌과 자료 속에 꼼꼼히 제시하는 구체적 사례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 국가, 국가간 기구(국제기구), 기업, 그리고 그 속에서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과연 무엇이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명확하게 보게 된다. '전쟁, 테러, 사형, 고문' 등의 직접적인 폭력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개발'을 앞세운 환경파괴와 오염에서 '국가'는 가장 지대한 역할을 한다. 특정국가에 벌이는 전쟁과 경제제재, 다국적기업의 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데서 국가간 기구는 대단히 중요한 활약을 하고 있고, 전세계의 자원을 약탈하고 제3세계 민중의 삶의 지속성을 파괴하는 다국적기업의 활동은 거의 범죄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폭력구조의 핵심에 있는 정부관료, 기업가, 국가간 기구의 책임자 등의 전문 엘리트들의 책임에 대해서도 저자는 집요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미 전작인《환경정의를 위하여》에서도, "가난한 자가 파괴하고 부자와 엘리트들이 이익을 얻는" 환경파괴의 피해와 수익의 불공정성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그 문제의식을 "평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의 구조"로 확장시켜 놓은 이 책을 통해 또한 우리는 직접적 폭력이든, 구조적 폭력이든 그 희생과 피해는 생물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에 집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환경파괴'와 '폭력의 구조'는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환경학과 평화학》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단순히 학제적 학문으로서의 공통점을 넘어, 이 두 영역이 같은 근원을 갖고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얼마전 국내 초청강연을 통해 재차 강조한 바 있듯이, 전쟁을 일으키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평화를 위협하는 엄청난 폭력의 본래 목적은, 20%의 부자나라 사람들이 80%의 지구자원을 소비하는 지금의 착취적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동시다발 테러 이후 부시정권의 움직임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의 세계화'가 군사의 세계화를 요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런 미국적 소비양식을 따라가기 위해 수많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환경파괴와 오염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이라크 파병 등 그 낭비적 자본주의 사회를 더욱 강화·보장하기 위한 더러운 전쟁에 손을 보태주고 있다. 이 세계가 모두 미국적 생활양식대로 살려면 지구가 4-5개로도 모자라는 데도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20 대 80의 불평등한 구도는 지역사회, 국민사회, 세계사회 등 모든 차원에서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고, 그것을 위해 환경의 파괴와 민중의 고통과 희생을 가져오는 '폭력의 구조'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그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전쟁'이다.

 

  평화사회를 위하여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의 주체는, 그가《환경정의를 위하여》에서도 밝힌 환경파괴의 범죄자들과 동일하다. 즉, 국가, 기업, 국가간 기구, 그리고 거기에 복무하는 소수의 전문가들(엘리트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경파괴와 폭력의 악순환 고리 속에서 환경정의를 실현하고 평화를 이룩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폭력구조를 재생산하는지를 면밀히 파악함과 동시에, 이들 소수 엘리트들이 멋대로 민중의 참여를 제한하여 의사결정을 마음대로 하고, 정보를 독점·조작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토다 키요시는, 무엇보다 민주화(실질적 참여민주주의)를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고 환경보전이나 차별 극복까지도 포함하는 적극적 평화의 불가결한 요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실질적인 민주사회에서는 소수의 낭비적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인 군대제도 등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경제개발주의에 의한 환경파괴도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가 종합해낸 참여민주사회의 경제활동이란, 자연생태계의 순환구조에 맞춰 "지속가능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하며 존재의 풍요로움을 실현하는" 서브시스턴스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서브시스턴스 관점으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은, 마리아 미즈, 마리 멜러 등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제3세계 여성들의 삶 속에서 발견한 비전이기도 한데, 그것은 단순히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자급자족의 경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나키스트들과 에콜로지스트들에 의해 주장되고 실험되고 있듯이 '자립한 지역사회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경제활동이다.  

 

  "허위의 풍요로움을 버린다면"

  저자는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평화사회,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사회로의 전환에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인류의 평등, 민주주의, 비폭력(탈군사화, 탈원자력, 사형폐지 등), 단순하지만 윤택한 생활, 자연과의 공생을 기본으로 끈질기게 서로 상의하면서 나아간다면 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다. 허위의 풍요로움을 버린다면 그것은 가능하다"라고 썼다.

  나는 저자의 맨 마지막 말을 읽으면서, 그의 낙관성이 전혀 나이브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독한 물질만능의 소비사회의 폭력을 그저 묵묵히 견디고만 있지는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후들이 우리사회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반세계화' 데모의 저항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97년, 우리사회가 IMF 관리 체제하에 고통을 당할 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일본의 텔레비전 뉴스는 대형마트에서 라면이나 연료 따위를 사재기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보도했는데, 그때 일본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어느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여기에 아무리 물건이 넘쳐나두유, 옛날에 그런 거 없어도 군불 때고 오순도순 살 때가 더 좋았으유. 우리 아들은 하루 웬종일 일하는대두유, 지금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지하셋방에서 새끼들하구 아주 힘들게 살아유."

  그렇다. 그 아주머니 말대로 우리사회가 쫓아가려는 미국식 대형마트의 풍요는 진정한 풍요가 아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하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통찰한 바대로 지금 이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동적인 소비자이거나, 그 소비를 위해 창조의 기쁨을 박탈당한 소외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철저히 물화된 이 자본주의 소비사회,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폭력의 구조에 의문을 가지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자본에 의해 부추겨지는 욕망의 허망한 실체를 바라보고 그것을 유지하는 폭력구조에 가담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단순하지만 풍요로운 삶, 자기다움의 충만함을 실현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회사인간이기보다는 뭔가 사회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박봉의 NGO단체를 택하는 탈상품화된 젊은이들, 보수가 적어도 창조적인 일을 하는 데 보람을 느끼는 자유로운 예술가들, 모두들 떠나는 농촌에서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을 실험해보는 귀농자들 ….

  얼마전 쓰레기 매립장이 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생태보존 지역이 된 '서강(西江)'에 갔다가 강둑의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그 나무는 곁에서 자라던 '쓸모 있는' 재목들이 젓가락 공장의 칼날 아래 무참히 잘려나갈 때, 몸에 생긴 큰 상처자국 때문에 '효용 없음'으로 평가받는 바람에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저 광포한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칼날 아래 살아남으려면, 그 미루나무처럼 '자본' 따위에는 도저히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쓰고 버리는' 자본의 효용에 부응하지 않고, 진짜 '만들어내고, 살려내고, 순환시켜내는' 새로운 '무용(無用)'의 삶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우리사회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낙오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공포를 조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가난하지만 고르게 나눠가지는 상호부조의 공동체가 더 활력있고 풍요롭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환경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함께 일하고, 서로서로 보살피며 지내는 삶이 좀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데 있다"고 했던 이반 일리치의 말이 저자의 낙관적 전망 속에서 큰 울림으로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윤숙

  페미니스트 그룹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 회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일본 오사카시립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졸업.

 《녹색평론》제73호 2003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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