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박승옥  녹색평론사 2007

책머리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75년 5월 22일,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해 서울대학이 관악산으로 옮겨오고,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던 박정희가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나는 그때 시흥동 산동네 판자촌 루핑집에서 살고 있었다. 수도도 변소도 없었다. 산 중턱에서 나오는 샘물이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산동네 사람들은 물지게를 지고 꾸역꾸역 샘으로 기어올라가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한 시간도 넘게 서성거리고 나서야 간신히 물동이 두개에 물을 담을 수가 있었고, 곡예에 가까운 물지게질을 한 뒤에야 겨우 밥을 지어먹을 수 있었다. 산동네 사람들 거의가 다 날품을 팔거나 공장에 나갔다. 국민학교를 나오고 서울로 와 당시 영등포 봉제공장에 다니던 이웃집 젊은 여성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커피 한잔 값도 되지 않았다. 당시 미싱사 월급이 1만원, 시다는 5천원에서 9천원 사이였다. 쌀 한 가마가 1만6천원, 블라우스 한 장 3천원, 스커트는 4천원 정도였다. 그럼에도 해마다 한해 평균 50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농촌에서 잡초 뽑히듯이 뽑혀 도시로, 도시로 내팽개쳐졌다.

5월 22일. 서울대 사회대와 인문대 사이에서 꽹과리 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금은 대학교수가 된 사대 학생 하나가 사복경찰의 손을 뿌리치고 옷이 찢긴 채 도망다니면서 꽹과리를 두들겼다. 순식간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긴급조치 철폐”와 “유신 철폐”를 외치는 최초의 시위였다.

나는 시위대열에 ‘단순가담’해서 시위대열이 스크럼을 짜고 정문 앞 널찍한 길바닥에 앉아 연좌농성을 벌일 때에 맨 앞쪽 중앙에 앉아 있었다. 흉물에 가까운 정문의 서울대 조형물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가운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진압경찰이 그 흉물 아래 갑자기 나타났다 싶더니 연좌대열을 순식간에 포위해 들어왔다. 눈깜짝할 새에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내 눈에 우악스런 진압복과 몽둥이가 보이고 목덜미를 잡힌 채 허리가 꺾여 끌려가는 친구가 보였다. 나와 내 주위의 학생들은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 안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죽어라고 아스팔트 길을 뛰고 또 뛰어 단숨에 인문대 강의실까지 도망쳤다. 아마도 내 평생 가장 빠른 속도의 달리기였을 것이다.

학교를 빠져나오면서 수위 아저씨가 학생들의 구두와 운동화를 산더미처럼 포대에 담아 들고 대학본부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 신발의 주인들은 그 뒤 어떤 삶의 길을 달려갔을까.

 

  1980년 5월 19일에도 나는 ‘거기’에 있었다. 전두환 일당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서울역에서 벌어진 서울 지역 최초의 계엄 반대 시위대열이었다. 그때 대우빌딩 위로 보이는 하늘이 그렇게 처절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맑은 5월의 하늘이 그렇게 비장할 수도 있음을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절감하였다. 시흥동 산동네는 여전히 거기 있었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간신히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최저 수준의 기아임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남대문경찰서에서 나는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때 온통 광주로 가야만 한다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어디로 끌려갈 것인지, 거기서 어떤 고문을 받고 어떤 조사를 받게 될지 따위는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광주 시민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과 자괴감, 그리고 어떻게 경찰서를 탈출해서 광주로 갈 것인지, 그 강박관념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1987년 3월 3일에도 나는 ‘거기’에 있었다.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고 그에 항의하는 시위가 2월 7일부터 연이어 계획된 날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의 거리에도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의 소용돌이 속에도 나는 기꺼이 ‘거기’에 함께 있고자 했다. 그것이 이 말도 안되는 비리와 부정과 모순의 현실, 도저히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억압과 착취의 감옥을 부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해방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때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외치던 수많은 청년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을까. 그때 노동해방과 사회변혁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자 했던 열정의 청년노동자들은 지금은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 뒤 세상은 바뀌었다. 그야말로 오래고 오랜 경찰국가,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온갖 억압과 공포가 서서히 뒤로 물러서는, 진도(震度) 6.29 정도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반공 정신병동’의 수형자 생활에서 벗어나 그나마 자유로운 숨을 한 모금이라도 쉴 수 있는 날이 비로소 도래했다. 구로동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운영을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비록 생활은 곤궁하고 피곤할지라도 나날이 자유와 해방의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구(舊)소련이 붕괴되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현실사회주의’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사회주의 이념 자체의 몰락을 지켜보아야 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스스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던 내게는 무참한 충격이자 또한 신선한 도전이었다. 이념이 얼마나 허망하고 좁은 창문인지 나는 그때 비로소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92년 나는 시골로 내려갔다. 그리고 10년 동안 어느 한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여기저기 구석진 산골짜기를 찾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로부터 또 세월이 지났다. 그리하여 2007년 오늘 나는 도대체 어디에 서 있고 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1975년의 어떤 젊은 청년과 한 세대 차이가 나는 2007년의 젊은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1970년 스무살을 갓 넘긴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울부짖으며 산화해간 지도 벌써 37년이나 지났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전태일의 1970년이다. 1987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직접행동으로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전국의 노동자들이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대투쟁을 벌인 지도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전태일의 1970년이다.

최저임금도 못되는 임금을 받고 일하다 불에 타 죽고 만 할머니 노동자들이 있는 곳, 참으로 ‘풍요로운’ 세상이 지금 여기 이곳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 없는 곳, 참으로 노동의 자유는 거의 없고 기업의 자유는 넘치고 넘치는 사회가 지금 여기 ‘민주화’된 한국사회이다. 전국토가 화학물질 쓰레기로 오염되어 있고 포클레인과 온갖 중장비로 피투성이가 되어있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살 길은 다시 박정희가 부활하는 것밖에 없다고 개발과 경제성장을 소리높이 외치는 끔찍한 세상이 바로 지금 여기 이곳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의 압축 산업화는 분명히 한국사회를 ‘풍요’의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풍요의 대가는 공동체의 파괴와 공동체정신의 해체였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는 한국사회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과 투쟁만이 존재한다. 오늘날 학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만이 진리라고 배우는, 노예노동자들만을 대량생산하는 양성소일 뿐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오직 돈과 자본주의 기업만이 승자로서 개인과 사회, 심지어 국가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엄연히 자본이라는 제왕(帝王)이 군림하고 있는 사이비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민주화 20년’조차 한국사회를 철저히 원자화된 개인들,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개인들을 양산해내고 사회 자체를 파편화로 내몬 ‘사막화 20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제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절약은 전혀 미덕이 아니다. 오직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만이 미덕이다.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는 우리들 자신까지 헐값으로 대량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월수입 100만원 정도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대부분 ‘차상위 빈곤계층’에 속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한달 수입은 북한과 동남아 노동자들의 2년치 연봉과 맞먹는다. 이들 차상위 빈곤층의 소비생활 수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대 어느 제왕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세종대왕이 겨울에 수박을 먹지는 못했을 것이며, 여름에 에어컨 나오는 근정전에서 일을 하거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가마를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대부분의 노동자들과 일반 서민들은 나날의 삶이 여유롭고 행복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풍요’는 물론 값싼 석유와 자연자원 덕택이다. 우리는 지금 무자비하게 석유와 자연자원을 착취하고 있으며 무자비하게 미래세대의 저금통장을 까먹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풍요 속의 빈곤’, ‘풍요 속의 불행’이라는 역설은 또한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우리 안에 갇혀 자본주의와 석유문명에 중독되어 있는지 깨닫게 한다. 우리는 지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길들여진 일벌레들일 뿐이다.

 

  물론 당연히 이런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물질문명과 풍요는 전혀 지속불가능하다. 석유정점(피크오일)은 석유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지구상의 모든 천연자원이 점차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일깨워 주는 경종(警鐘)이다. 수억년 동안 잠자고 있던 화석연료를 지상으로 꺼내 불태움으로써 마구 풀려난 이산화탄소와 그로 말미암은 기후변화는 파국을 예고하는 경고의 사이렌 소리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경종과 사이렌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귀가 먹고 눈이 먼 중독자들이, 아무런 삶의 의미도 없이, 그 어떤 삶의 지향도 없이, 그저 미친 듯이 자동차 가속페달을 밟아대고 있을 뿐이다. 기계처럼 밤낮없이 땅을 파헤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입과 코로 들어올 독성 화학물질을 마구 뿌려대고 있을 뿐이다. 

조만간 닥칠 석유정점은 자본주의 산업문명 붕괴의 전주곡이다. 석유정점과 함께 끔찍한 식량위기가 닥치는 것은 거의 필연이다. 그야말로 ‘잔치’는 끝나가고 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잔치가 끝나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출구 없는 미로에서 무기력한 개인이 무엇인가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만큼 자본주의 산업문명 체제와 국가는 너무나 거대한 철벽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의 광신에 가까운 사람들의 경제성장 중독증과 광소비(狂消費) 행렬은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같은 ‘미친 사회’를 바꾸는 일에 우리는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손자와 손녀를 위해서, 아니 우리들 다음 세대인 아들 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 ‘생태적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지속불가능한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일은 아마도 ‘혁명’보다도 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부터 이런 전환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런 경제성장과 비정상의 풍요, 미친 소비는 이제 범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나날의 생활은 우리들 손자의 저금통장을 훔쳐 마구 꺼내 쓰고 있는 도둑질에 다름 아님을, 미래세대의 미래 그 자체를 낭비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뼈저린 자기성찰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각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생태적 전환 노력도 사실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시 농촌으로 가자는 브나로드 운동을 펼쳐야 한다. 마을공동체의 복원이야말로 착취와 억압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들이 평화롭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는 지름길이다. 식량─농업과 에너지의 자립·자치가 없는 민주주의는 사실 ‘허구의 민주주의’이다. 한국의 선거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전쟁과 기아 앞에서 군사독재와 파시즘으로 치달을 수 있는 허구의 민주주의임을 직시해야 한다.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맹인할마()’란 말이 나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창끝으로 쌀을 일어 칼로 불을 때서 밥하기, 곧 전쟁도 아니다. 백살 먹은 늙은이가 마른 나뭇가지에 오르는 일도 아니다. 우물의 도르래 위에 어린아이가 누워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다름 아닌 “눈먼 사람이 눈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우물가에 이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맹인할마’가 아니라 ‘맹인할차()’라고 할 정도로, 밝은 대낮에 눈먼 사람이 눈먼 자동차를 타고 절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솔직히 나 자신조차 과연 ‘맹인할차’를 벗어나 제대로 각성된 상태에서 사회전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다. 농사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 글을 쓰면서 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럼에도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해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미욱한 중생의 소임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여기에 모은 글들은 그동안 여기저기 요청이 있는 대로 그에 맞추어 쓴 글들이다. 두서없고 때로는 중복되기 일쑤인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낸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도 하다. 그나마 에너지 문제와 생태적 전환을 요구하는 이런 종류의 책이 별로 많지 않음을 핑계로, 녹색평론사의 후의를 입어 책을 내기로 했다. 김종철 선생과 변홍철 주간을 비롯한 녹색평론사 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 또 때로는 분에 넘치는 우정과 환대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들의 따뜻한 손길과 보이지 않는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엮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일생을 궁핍함 속에서 살도록 한 내 가족들에게는 정말 오직 미안한 마음뿐이다. 특히나 지금까지 가난과 결핍을 무슨 숙명처럼 끌어안고 살게 한 최영희와 두 아이들에게는, 그저 인내해줘서 고맙다는 말밖에는 달리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끝으로 이 책을, 37년 전 늦가을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쳤던 전태일에게 바친다. 전태일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횃불이다. 그 횃불을 들고 나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숙명이다.

2007년 9월  
박승옥  


  박승옥

  1980년부터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을 역임했고, 1985년부터 90년까지 서울노동운동연합 정책실장, 구로노동상담소 상담간사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2005년부터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연구원을 맡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경기도 양평, 여주, 경북 김천 등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2005년 6월부터는 재생가능에너지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대표를 맡아, 농업 및 에너지의 자립·자치와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풀뿌리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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