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96호 2007년 9-10월호    

 

  책을 내면서

  김종철

 

  노신(魯迅)의 작품 중에〈사소한 사건〉이라는 소품이 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씌어졌음이 분명한 짧은 작품이지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겨울날 ‘나’는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인력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길을 건너려 하던 한 노파가 그 인력거에 가볍게 치어 길바닥에 넘어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별로 심각한 충돌도 아니었고, 노파는 쓰러지기는 했지만 곧 혼자 일어나서 걸어갈 만했다. 그래서 마음이 바빴던 ‘나’는 인력거꾼에게 지체하지 말고 그냥 가던 길을 달려가라고 일렀다. 하지만 인력거꾼은 ‘나’의 명령을 묵살하고, 노파를 정성스럽게 부축하여 일으킨 다음에 바로 근처의 파출소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나’의 눈에 갑자기 그 남루의 인력거꾼의 뒷모습이 크게 보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벼운 일화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는《阿Q正傳》을 비롯한 걸작과 수많은 ‘잡문’을 통해서 민중의 어리석음과 노예근성을 끊임없이, 그리고 가차없이 질타하면서 ‘진정한 혁명’을 위한 싸움에 평생을 바쳤던 작가 노신의 사상적·정신적 뿌리가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근대적인 습속과 신앙의 세계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민중의 현실을 가혹하리만큼 예리하게 파헤치면서도, 노신은 또한 그 민중의 ‘전근대적인’ 세계의 심층에서 ‘진정한 혁명’의 가능성의 원천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할 것도 없이, 인력거꾼의 뒷모습에서 ‘큰 사람’을 보는 시선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작가 노신의 인간으로서의 기본 자질, 즉 삶에 대한 ‘근원적 겸허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겸허함이야말로 노신 문학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결정적인 요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약자와 작은 사람들의 진실에 가닿고, 그것을 옹호하려는 충동 없이 진정한 문학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신이라는 작가 개인의 자질 이외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이야기 속에 묘사되어 있는, 풀뿌리 민중 공동체 속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면면히 전승되어온 토착적 가치이다. 여기서 ‘토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오랜 민중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장에서의 교환이나 국가에 의한 수직적 분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내의 상호부조, 호혜적 관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획득된 윤리적·실천적 덕목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령〈사소한 사건〉에서, 한 이름 없는 인력거꾼이 지체 높은 손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쓰러진 노파를 먼저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적 교육이나 학습을 통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행동은 그가 태어난 공동체 속에서 자연과 친밀하게 교섭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오는 동안 저절로 몸에 익혀진 정서와 습속과 믿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거의 무의식적인 야생(野生)의 삶의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우애와 환대’의 윤리는 오랜 세월 동안 풀뿌리 민중 공동체의 공생공락의 삶을 지탱해온 근원적인 토대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토대가 끊임없이 훼손되는 과정을 근대화, 개발, 경제발전, ‘세계화’라고 불러왔고, 그것을 문명된 삶을 위한 역사적 진보로, 혹은 적어도 불가피한 시대적 추세로 받아들여왔다. 그 결과, 오늘날 대다수 민중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농촌 공동체는 총체적인 붕괴에 직면하였고, 우리들 대부분은 자연과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한경쟁의 시장에서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적 주술(呪術)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인 사나운 짐승이 되어버렸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유례없이 남루하고 비참한 것이 되고, 우리 자신의 인간성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자본주의적 근대란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의 역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와 자연세계와의 공서(共棲)에 토대를 둔 풀뿌리 민중의 자립·자치·자급적 삶을 일관되게 파괴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대지(大地)에 뿌리를 내린 삶이란 정말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동경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지금 ‘세계화’니 ‘자유무역’이니 하는 이름 밑에서 실제로 자행되고 있는 것은 세계 전역에 걸친 생태계 및 문화의 획일화, 몰개성화, 추상화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태계나 인간문화의 건강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과 개성과 구체성은 빠른 속도로 소실되고 있다. 오늘날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로 표상되는 소비주의 단일문화의 지배 밑에서 ‘뿌리에 흙이 묻어있는 언어’를 말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학문과 교육의 장(場)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의 대학에서는 멀쩡한 자기 언어를 버리고 한국인 교사가 한국인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한다는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 기괴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제 한국어는 교육과 학문과 문화어로서는 자격이 없다는 것일까? 영어공용어화를 주창하고, 대학에서의 영어강의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말할 것도 없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것이지만, 이런 기괴한 방식으로 경쟁력을 길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오늘날 싱가포르는 “제3세계의 조건에서 제1세계의 수준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 이렇다할 부존자원도 없이 출발한 이 나라는 한 지도자의 ‘탁월한’ 리더십과 엘리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중개무역국가로서의 위상을 견고히 하는 바탕 위에 교육, 주택, 의료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복지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이른바 ‘살기 좋은’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지(2007년 8월 29일)는 그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李光耀)와의 회견기사를 싣고, “1965년 건국 이후 지난 42년간 싱가포르가 성공적인 나라로 살아남았지만, 앞으로 42년 동안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싱가포르의 지도자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싱가포르 국토 전역을 제방으로 둘러쌀 계획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리콴유는 지금까지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일부로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싱가포르의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을 더욱 견고히 하고, 확대함으로써 계속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피력하고 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예를 들어, 미국의 국내소비가 둔화될 때 발생할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공이 “이념보다 실용주의를 택한” 이 지도자의 통치철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여,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공이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나 민주주의적 권리에 대한 심각한 제약 위에 이루어져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리콴유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복지국가’일지는 모르지만, 그 국민들은 극히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체제에 순종하면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를 ‘일류국가’로 만들겠다는 지도자의 의지 때문에 지금도 이 나라에서는 길거리에서 침을 뱉는다든지 하는 공중도덕상의 사소한 위반행위도 법적인 처벌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싱가포르의 비판적인 지식인에 의하면, 이 나라는 ‘쁘띠부르주아적인 가치의 일방적인 고양(高揚)’에 의해서 오로지 ‘쇼핑센터의 나라’가 되어버린 ‘문화적 사막국가’이다. (C.J.W.-L.Wee, “Singafore”, The Future of Knowledge and Culture: A Dictionary for the 21st Century, ed. Vinay Lal and Ashis Nandy(2005)) 그리하여 고급문화는 일반적으로 발을 붙이지 못하고, “교육에 있어서도 이상주의는 미덕이 아니라, 약점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문화와 언어는 압도적으로 ‘도구적’인 견지에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비이성적일 정도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영어학습이며, 영어는 오늘날 싱가포르의 공용어가 되어있다. 인간의 언어가 단지 이성적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으로 ‘시적(詩的)’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시적 차원은 인간다운 삶에서 불가결한 것이라는 인식이 이런 ‘정신적 불모’의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은―오늘날 한국의 상황을 생각하면―사실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위의 인터뷰에서,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지구온난화를 유발해온 세계경제 시스템에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계획하고 있는 리콴유의 모순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근본적인 모순이 중요하지 않거나, 거의 의식되지도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싱가포르가 세계경제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면, 예전의 가난한 ‘어촌’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해온 정책노선을 실용주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과 같은 세계경제의 패턴 자체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킬지도 모를 지구온난화나 ‘피크오일’과 같은 위협적인 사태가 밀어닥칠 때, 그 상황에서도 그와 같은 ‘실용주의적’ 노선이 과연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방을 쌓음으로써 지구온난화의 재앙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 이 세계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큰 망상 속에 빠져있는가를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국토 전역을 제방으로 둘러싸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사태로 전개된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세계경제의 틀이 지속될 리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세계의 질서를 주도하는 엘리트들은 타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단순히 ‘지금까지 해온 방식의 반복적인 확대’를 통해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는, 사고력(思考力) 결핍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예전과 같은 ‘어촌’으로 돌아가는 것을 끔찍한 재앙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싱가포르가 ‘어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도리어 축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어촌’에는 어떤 국가, 어떤 자본도 제공할 수 없는 ‘밑으로부터의 복지’ 즉, 호혜적 삶의 질서가 있고, 그러한 삶에서 얻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철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한국의 정치가와 그들의 조언자들이 내놓는 정책 공약들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경제성장 논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씁쓸하다. 이번에는 심지어 “시대정신은 경제다”라는 말이 되지도 않는 정치적 구호까지 등장하였다. 고용문제를 포함한 온갖 사회적·인간적 고통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쉽게 ‘돈 문제’로 환원시켜, 경제제일주의 논리에 빠지는 것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겪고 있는 대부분의 고통이 본질적으로 경제성장 논리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가난’은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화된 빈곤’이기 쉽다. 즉, 그것은 경제발전 혹은 개발과정에서 뿌리뽑히고, 고립되고, 원자화된 삶에 수반된 고통이며, 성장의 필연적인 소산인 사회적 양극화, 불평등, 좌절, 실패에 기인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풀뿌리 공동체에서 가난은 견딜 수 없는 비참한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공생공락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선거에 임하는 모든 정치세력이 성장논리를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현성 여부와는 별개로 지금 성장 못지않게 분배에 관해서 말하고, 국가적 복지체제의 확립에 관해서 말하는 정치세력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경제논리의 지배 하에서 약화일로에 있는 국가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국가의 기능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주장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지국가체제란 기본적으로 계속적인 성장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이며, 나아가서는 자연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끝없는 공격을 그 내재적인 원리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확대와 연장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복지국가체제는 근본적으로 의심스러운 체제이다. 복지국가에서 사람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제도적인 보살핌’을 받는 ‘국민’이라는 피동적인 객체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안전망’을 필요로 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 무료로 교육을 받고, 무상의료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제공되는 교육체제와 의료체제가 궁극적으로 과연 무엇을 위한 체제인지,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따져보면, 풀뿌리 민중의 자립·자치·자급의 능력을 훼손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정신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복지국가가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합된 거대 시스템의 지배 밑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갈수록 비소(卑小)해지고, 인간정신은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다. 우리가 정말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삶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넓혀가는 일에 헌신하는 수밖에 없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야생(野生)의 토착적 문화를 뿌리로부터 소멸시키는 ‘사막화’의 추세를 더이상 허용해서는 안된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녹색평론사  (02)738-0663, 0666  fax (02)737-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