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86호 2006년 1-2월호    

 

  어떻게 살 것인가

  황우석과 과학, 그리고 '발전의 신(神)'

  박경미

 

1.

  진즉에 ‘상황 끝’으로 보였던 황우석 스캔들이 꼬리가 길어 해를 넘기고 있다. 속은 사람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법,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원천기술’ 논란에 목을 맨다. 황우석류 지식인들에게 따라다니게 마련인 사기꾼 혐의가 이 나라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에게는 당최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무엇이 그리 놀랍고, 무엇이 그리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나 사기꾼은 있게 마련이고, 사기꾼이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사기행각을 밝히고 사기꾼을 잡아내야 할 사람들까지 사기꾼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똑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참으로 봐주기 괴롭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보기에 “참담하다.” (근래 황우석과 황우석의 사람들이 이 말을 자주 입에 올려 유행시키고 있다.)

  황우석은 곧 들통날 거짓말을 끊임없이 하고, 한 언론을 막기 위해 다른 언론을 끌어들여 ‘청부취재’ 의뢰까지 하는 등 마지막까지 살겠다고 발버둥치며 협잡꾼을 능가하는 술수를 부렸다. 그럼에도 과학계 원로라는 사람들은 나서서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의 본뜻인즉, 황우석이 다음 단계의 논문을 발표해서 작금의 논란을 잠재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논문 돌려막기’라는 기막힌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언론과 정치인 역시 논문조작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 불보듯 뻔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실상 황우석의 ‘국민사기극’을 거들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실을 덮겠다는 그들의 부도덕함에 화가 나기 이전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아둔함에는 아예 질렸다. 우리사회 담론형성 그룹이라는 사람들의 정신적 천박함은 제쳐두더라도 그 미련함은 끝을 모른다. 정말로 이런 자(者)들에게 나라를 맡겨도 되는 것일까. 걱정스럽다.

  그동안 끼리끼리 갈대밭에 모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어른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된 공은 “임금님은 벌거벗었어요”라고 외친 어린 소년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프레시안〉, (MBC가 아니라) ‘PD수첩’, 논문조작의 증거를 파헤친 젊은 과학도들이 그들이다. 이들의 근성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용기와 근성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천하의 황우석도 소위 과학의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을 비켜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사회적 역할’ 역시 충분히 의제가 될 수 있었으나, 그것은 국익우선과 난치병 환자 치료라는 씩씩한 구호들에 밀려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무소불위의 ‘국익우선’ 구호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과학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다. 이것은 때에 따라 “미국에서는 이 경우라면 이렇게 한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황우석은 과학적 절차와 검증방식의 세계적 기준에 맞추는 시늉은 했지만, 본질적으로 조작된 데이터에 기초했고, 따라서 어차피 세계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 언젠가는 탄로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위의 ‘소년들’은 집요하게 황우석 연구의 과학적 진실성 여부를 파헤쳤고, 그 과정에서 과학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충족시키지 못한 황우석 연구는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황우석은 ‘세계 줄기세포 허브’라는 황금거위에 눈이 멀어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지켜서 세계적 수준의 줄기세포 연구를 수행하고, 그렇게 해서 ‘가짜’가 아닌 ‘진짜’ 실력을 갖추어 정정당당하게 황금거위도 잡자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황우석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줄기세포 관련 토론이나 기고문들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전제되었던 생각이다. 지금 생명과학과 줄기세포 연구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과학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 ‘글로벌 스탠더드’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일 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전제하고 복무하는 현대과학 자체가 ‘황우석 현상’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황우석 스캔들이 소위 주류 학계 내에 자생적 검증 시스템은 수립되어 있지 않은 반면 학술에 대한 욕심만은 유별난 한국 같은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예외적 현상이라면,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온 세계 앞에 국가적으로 망신당한 것이 잠시 자존심 상하고 또 누군가의 눈물을 뿌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수치심이란 오래 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 절망할 일도 아니다. 그저 노력해서 예외를 정상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과학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해도 그다지 반가운 상황이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절망이든 희망이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간적인 질문 앞에 나를 세우는 것도 이 지점에서부터다.

  실제로 과학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제대로 작동하는 모범적인 국가라는 미국의 경우도 조무래기 ‘황우석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 모양이다. 12월 20일자〈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70-80년대 예일, 하버드, 콜럼비아 대학 등에서 벌어진 과학 스캔들로 인해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 내 조사기구를 설립했다고 한다. 이 기사의 기본취지는 황우석 스캔들을 계기로 과학계의 조작을 감시할 절차와 기구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함께 언급하고 있는 최근 미네소타 대학의 과학자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그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이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었던 3,427명의 과학자들 중 3분의 2 이상이 모순된 사실을 무시하고 데이터를 조작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물론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과학 검증시스템에는 심각한 격차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기사는 현대과학에서 ‘황우석’은 보통명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오늘날 과학계에는 간 큰 ‘황우석’과 간이 작은 ‘황우석’이 있을 따름이다. 이제 미국의 전철을 밟아 감시의 절차와 기구를 강화함으로써 이 크고 작은 간을 가진 ‘황우석들’을 박멸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과학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되고, 오늘날 그 누구도 과학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감시의 눈을 더 크게 부릅떠서 실현되는 ‘과학의 꿈’이 내게도 축복이 될 것인가? 그러나 황우석의 꿈은 내게는 악몽이고, 그래서 나는 그의 실패가 도리어 고맙다. 이렇게 말해도 역시 입맛은 쓰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나는 과학적 진리추구의 내용이나 방법에 대해 말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과학의 은혜와 그 파괴력 아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우리 삶을 지배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2.

  오늘날 과학실험은 황우석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비용이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기업의 투자나 정부 차원의 대규모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순수과학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현대과학은 그냥 과학이 아니라 “과학-기술-산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것은 현대과학에서 특허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과학의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 점에서 현대과학은 본질적으로 응용과학이다. 이제 과학은 기업의 노골적인 탐욕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학은 기업과 정부의 후원을 이끌어내는 거간꾼 노릇을 한다.

  대학에서 순수과학이 쇠퇴하고 “과학-기술-산업”이 지배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과학연구 역시 생산성과 이윤추구의 원리에 따라 운용되는 자본주의 기업경제 체제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되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고도의 생산성과 영구 기술혁신이라는 근대적 산업경제의 이상에 복무한다. 그래서 다들 “월화수목금금금” 실험실에 틀어박혀 일하고, 죽기살기로 논문을 써대지만, 각자의 열심이고 각자의 성실성일 뿐, 무엇을 위한 열심이고 무엇을 위한 성실성인지 그 의미를 따져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것은 그 어떤 고상한 학문적, 공동체적 이상을 위한 것도 아니고, 다만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함이며,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정해놓은 통제방식에 복종하는 것일 따름이다. 대학의 평가제도와 정년보장제도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본주의적 경쟁원리에 대학 구성원을 길들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그래서 보다 많은 연구비를 끌어오고 보다 경제효과가 큰 연구업적을 내는 사람이 지식사회 내에서 권력을 형성한다. 이러한 대학 내의 학술풍토는 날치기식의 급조된 논문과 크고 작은 조작과 날조의 가능성을 조장 내지는 방조하며, 공명심으로 가득 찬 황우석류의 인간을 양산하고, 격려한다. 감시와 상벌 시스템을 강화한다 해서 이런 종류의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황우석류의 인간을 양산하는 것은 현재의 대학 시스템 안에 고유하게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득세하는 장소로서 오늘날 대학은 급진적이지도, 지적으로 모험적이지도 않으며, 가장 인습적이고 방어적인 집단이 되었다. 대학이야말로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산업주의적 근면성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현대과학은 이러한 오늘의 대학과 아무런 모순이나 갈등관계를 이루지 않으며, 도리어 그 선봉에 서 있다. 그리고 인문학을 비롯한 여타 분야는 지적 무기력증에 빠져 있으면서도 과학의 ‘모범’을 따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본과 결탁한 현대과학의 원죄는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한 생명과학 분야에서 더욱 가공할 파괴력을 행사한다. 현대의학의 역사라는 것이 동물만이 아니라 죄수나 전쟁포로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몸을 대상으로 행한 온갖 엽기적인 생체실험에 근거해서 발전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과거에 그것은 떳떳치 못한 비정상적인 행위로 음지에서나 행해졌고, 드러날 경우에는 범죄시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우리는 백주에 그런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난자를 짜내서 핵을 제거하고 체세포의 핵을 이식하는 이른바 젓가락기술 장면을 TV에서는 신기한 마술쇼처럼 반복해서 틀어주었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그림은 공격성이란 무엇인가를 눈앞에서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궁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몸속의 거룩한 성전이 공격받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자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사람의 몸을 공격한다. 우리 밖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재화가 돈이라는 교환가치로 환산되던 시대는 옛날이고, 이제 자본주의는 생명과학의 힘을 빌려 우리 몸을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거대자본이 투입된 현대과학은 인간의 몸 자체를 공격하여 교환 가능한 죽은 살덩어리로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미우나 고우나 정든 내 몸인데, 이제 정든 내 몸이 아무 몸하고나 똑같아진다. 끔찍하다.

  황우석팀의 연구에 1,600개가 넘는 난자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달걀 1,600개도 아니고, 야수의 심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1,600여개의 난자를 돈으로 사서 찌르고 짜고 전기충격까지 가할 수 있겠는가. 국익을 위해 고문당하고 폐기처분된 난자들이니 이들을 “조국을 위한 난자들”이라 불러야 할까? 물정 모르는 난자는 핵이식 후 전기충격을 가하면 정자가 들어온 줄 알고 세포분열을 시작한다. 서글프게도 수백만년 동안 견우와 직녀가 만났을 때 해오던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견우와 직녀는 사라지고 난자는 차가운 금속 앞에 벌거벗긴 채 누워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사라지고 대신 생명을 빼앗긴 난자가 고깃점이 되어 기계를 상대하고 있다. 난자가 기계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제 물질이 되고 기계가 된 난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인간에게 복수할 것이다.

  애초에 시험관 아기부터가 문제였다. 인간배아 복제연구가 시험관 아기 시술 후 남은 냉동 수정란 처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상에 새로운 생명 하나가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백만년 동안 인류가 해왔던 다정한 몸짓 대신 난자와 정자, 수정 같은 육두문자가 난무한다. 내 몸 밖에서, 내 몸과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출생은 더이상 생명의 신비를 간직할 수 없다. 그것은 탄생이 아니라 번식이고, 신성모독이기 이전에 인간모독이다. 현재 생식 목적의 인간배아 복제연구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치료 목적의 연구만 허용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목적이 다르다고 연구 내용 자체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치료 목적의 인간배아 연구라 할지라도 인간 생명의 가장 내밀하고 시원적인 부분을 기계화, 물질화해서 다루기는 마찬가지다. 막돼먹은 짓이기는 치료 목적 연구나 생식 목적 연구나 똑같다.

  이런 막돼먹은 행동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 것일까?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일시적으로 고통을 달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오랜 세월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삶을 지속시키면서 길을 내고 그 길을 걸으며 갈고 닦아온 마음의 습관, 그 습관의 총화로서의 우리 자신을 잃는다. 사람이 영혼을 잃고 온 세상을 얻은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담이 이브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의 존재를 깊이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내지르는 환호성이다. 어쩌면 이 환호성은 인류 최초의 연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신비를 잃은 이 시대의 남녀가 이런 연가를 부를 수 있을까? 아마 그들은 사랑의 연가를 부르는 대신 해부학적 섹스를 택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 옆에 선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시와 노래와 춤을 보고 들을 기대를 접어야 할 것이다.

  생명과학이 순수하게 이타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있을 수 있다. 난치병 환자나 장애인 치료도 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목상 이타적으로 보이는 과학이라 할지라도 황우석의 예에서 보듯이 사실상 경제나 정치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과 정부의 이익추구 동기가 원래의(?) 이타적인 동기를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과 환자 당사자는 심각한 언어와 개념의 혼란을 겪게 된다. 황우석의 경우 이러한 언어의 혼란은 실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는 입만 열면 “난치병 환자와 장애인의 희망”을 들먹였고, 난자 기증 여성들을 일컬어 “성스러운 여인들”이라고 했다.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내딛는 것”이며, 이제 “대문은 열렸고 사립문만 열면 된다”고 했다. 조작 전모가 드러나는 최후의 순간에도 “창밖은 캄캄한 어둠”이라고,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다”고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인위적 실수”라는 기묘한 언어의 조합은 그의 난잡한 언어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언론은 이런 그를 가리켜 “언어의 마술사”라 불러주었다.

  이처럼 문란한 언어구사가 언론과 대중에게 여과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위가 난치병 환자와 장애인 치료라는 이타적이고 고귀한 목적을 위한 것이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행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일의 중심에 돈이 있었을 뿐이다. 황우석과 그의 사람들은 입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해도 속으로는 돈과 실리 생각밖에 없었다. 난자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여인들, 난치병 환자의 희망, 국익, 이런 말을 하면서 뒤로는 여성의 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놓고 돈거래를 하고, 특허지분을 챙기고, 아직 실체가 있지도 않은 바이오 벤처산업의 주가 올리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연구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돈과 실용적인 목적이 과학과 학술을 접수했을 때 생기는 이러한 종류의 언어의 혼란, 내지는 언어의 남용은 견디기 힘들다. 굳이 공자의 정명론(正名論)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언어와 실제의 불일치, 언어문란은 우리사회 지배집단의 정신적 파탄상태, 자의식의 부재를 드러낸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무조건 선이라는 확신은―웬델 베리의 말을 빌리자면―“현대의 미신”이다. 이 현대의 미신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의 결과나 영향력 때문에 주저하거나 행동을 포기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발전’은 이들이 떠받드는 신이다. 언론은 과학 분야에서 뭔가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면 덮어놓고 추켜세우며 떠들어댄다. 이들은 과학이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전지구적 재앙의 많은 것들이 애초에 과학으로 인해 생겨난 것임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본과 공모한 과학은 지금은 기적으로 각광을 받지만 나중에는 재앙이 될 일을 일단 저질러놓는다. 그리고 ‘병주고 (잘 듣지도 않는) 약주기’ 식으로 그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이러한 작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발전이라는 이 시대의 신의 실상이다.

  발전이라는 이 시대의 신은 있지도 않은 거짓 미래를 위해 과거와 현재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이 신이 펼쳐 보이는 가설적 미래는 번쩍이는 신상품들과 미끈하고 싱싱한 육체들, 기기묘묘한 편리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미래는 과거의 객관적 한계와 현재의 윤리적 요구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설적으로 무엇이든 가능한 유토피아다. 진보와 발전의 신은 이 미래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괴로움도 없어질 거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한번도 온 적이 없고,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와 발전의 신은 이 가짜 미래를 위해 살아있는 현재의 삶을 배반하도록 우리를 종용한다. 그러나 이 가짜 미래는 “끝없이 확장되는 산업경제의 최전선이자 가상의 영토”일 뿐이다. 우리는 “현재의 모든 손실을 미래의 빚으로 떠넘기고, 실패 역시 미래로 추방해버림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현재의 책임성을 방기하게 된다.”(웬델 베리) 미래마저 사고파는 상행위의 대상이 될 뿐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사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정당하게 누려야 할 미래를 빼앗는다. 우리는 그럴 권리가 없다.


3.

  현대과학과 그것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불만족과 불화를 느끼지만, 과학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다. 웬델 베리는《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라는 책에서 오늘날 횡행하는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과학을 비판하면서 과학의 기준과 목적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그는 오늘날처럼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시장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과학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적 유형을 정교하게 만들고, 삶의 뿌리내리기를 지향하면서도 정태적이지 않은” 과학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스터트(George Sturt)의《수레바퀴 가게(The Wheelwright's Shop)》(Cambridge, 1980, 초판 1923)라는 책의 한 대목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도 일부 인용해보겠다.


  이 쓸모있는 물건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앞바퀴 지름이 4피트인 것은 말에 맞춘 것인가, 아니면 바퀴에 맞춘 것인가? 또는 짐을 싣기 좋게 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돌기 좋게 하기 위한 것인가? 크기가 그 정도로 고정된 것은 평균적인 마부의 키 때문인가, 아니면 바퀴 제조인의 기술이 그 정도이기 때문인가?…나는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었고, 지금도 답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시골 사륜마차 전통이 이루어낸 놀라운 타협의 결과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것뿐만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모든 시골 마차의 수백가지 세부사항들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 같아서, 그 곡선과 생김새 하나하나가 그것이 만들어진 시골의 특수한 필요를 반영하거나, 어쩌면 마차 제조자가 그 지역의 나무를 가지고 만들면서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어려움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는 과학의 지역적 적응에 대한 글쓴이의 관심과 애정이 가득 담겨있다. 그는 전통적인 영국 시골의 수레와 마차를 “오랜 세월 영국인들이 영국에 밀착되어 적응한” 결과라고 하면서 그 우아함과 단순함, 실용성에 거듭 탄복하고 있다. 과학과 과학자가 깃들어 살아가는 지역의 산과 들, 거기 사는 동물과 식물,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상에 적응한 겸손하고 다정한 과학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은 거대자본과 결탁한 산업주의적 과학과는 대척점에 있다. 산업주의적 과학은 천태만상인 지역의 풍경과 토양을 향해 무조건 자신에게 맞추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과학이 지역의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더러 과학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일반화, 추상화가 실질적으로 내포하는 무차별적 폭력이다. 우리는 지역의 자연을 과학에 복종시키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시화호에서, 새만금에서, 천성산에서, 그리고 시대의 ‘어린 양’인 우리 농촌에서 보고 있다. 거기에 연루된 과학은 하나같이 크고 돈이 많이 들며 소란스럽다. 지역의 자연과 사귀려 하지 않고 군림하려고만 하는 과학이다. 황우석류의 과학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고 그럼으로써 후손들로부터 미래를 빼앗는다면, 지역에 순응하는 과학은 그 지역의 자연과 생명을 실현하고, 그럼으로써 후손들의 미래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삶이란 추상적 다수의 삶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상처받는 수많은 개체 생명들의 삶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인류를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먼저 상대방을 이웃으로 만들어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귀어야 하고 친해져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되어야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웬델 베리와 스터트가 말하는 “지역에 적응한 과학”이란 지역의 자연, 또는 사람들과 이웃하며 사귀는 과학이다. 이 경우 당연히 과학에서 규모와 목적이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 지역과 친해지려면 당연히 작은 규모를 지향하는 과학일 수밖에 없을 테고, 지역의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과학자의 과학행위에 의해 누구보다도 과학자 자신과 그의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향받을 수 있을 때 “지역에 적응한 과학”은 가능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친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파괴되거나 착취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에 적응한 과학”이란 과학자가 자기가 몸담아 살고 있는 지역의 나무나 꽃, 계절의 변화 같은 것들을 속속들이 알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과수원의 사과나무 중 어디 있는 것이 제일 먼저 탐스러운 꽃을 피우는지 알고, 자신이 키우는 소 울음소리만 듣고도 소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농부와 목동이 가장 유능한 과학자일 수 있고, 그들의 과학이 가장 훌륭한 과학일 수 있다. 


4.

  과학은 과학을 하는 사람을 닮는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란 실재하지 않는 하나의 이념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과학자들이 스스로를 지적으로 멋있어 보이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신구에 불과하다. 과학은 가치지향적이다. 이 때문에 과학자와 그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과학의 내용을 대부분 결정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5장 1-9절에는 38년간 병을 앓았던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다섯 행각이 있어서 행각 안에는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 환자들이 몰려 있었다. 때때로 못의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낫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못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비규환 속에 38년을 앓아누운 사람이 못의 물이 일어날 때 누군가 자신을 못 속으로 데려다주려니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어릴 적에 이 장면을 무용극으로 본 적이 있는데, 누더기를 걸친 거지꼴의 온갖 ‘병신’들이 아글아글 몸서리치며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목구멍에서부터 무엇인가 뭉클하고 치밀어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베데스다’라는 연못의 이름이다. 이 이름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 그럴듯한 것이 ‘자비’라는 뜻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자비’의 연못이다. 자비의 연못 주변에는 아파서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즐비한데, 연못은 어쩌다 한번씩 저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그때마다 가장 먼저 뛰어드는 병자 꼭 한 사람만을 고쳐준다. 연못의 물이 움직였을 때 온갖 병자들과 ‘병신’들이 못으로 달려들어 아우성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아무래도 이 연못 이름은 고쳐야 할 것 같다. ‘경쟁의 연못’이라고. 아무도 자신을 움직여줄 사람이 없었던 이 병자는 그저 습관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자리를 걷고 일어나 걸으라고 했고, 그는 일어났고, 나아서 걸어갔다.

  진보와 발전의 신이 펼쳐주는 미래의 모습은 휘황하다 못해 자비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 현대의 신이 도깨비 방망이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번쩍 아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래의 모습은 현란해서 일단 거기 눈이 팔린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옆 사람에 한눈을 팔았다가는 일등으로 연못에 들어가지 못한다. 베데스다 연못 옆에 사는 사람들은 연못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래보아야 자비를 입는 사람은 한명으로 정해져 있다. 이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자비의 연못은 사실은 경쟁의 연못이지만, 그 연못 옆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현대의 대사제이자 서기관들인 언론과 지식인들은 줄곧 연못 옆에서 찬미가를 부르고 축복기도를 한다. 그리고 난치병 환자가 치유되고 장애인이 일어나는 기적 같은 미래의 자비왕국에 다들 홀려 있는 동안, 옆에서는 가난한 루게릭병 환자가 얼어터진 보일러물에 온몸이 얼어붙어 죽어간다.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된다. 발전의 신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자들마저도 괴물로 만들어버린다.

  베데스다 연못은 장애인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38년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잔인하다. “침상을 걷고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의 말은 아마도 연못을 떠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연못에 마음을 두고 사는 한 현재의 삶은 임시방편이 될 수밖에 없다. 일등으로 연못에 들어가기 전까지 삶은 연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생에 연습은 없고, 어느 누구의 삶도 임시방편이어서는 안된다. 장애인도, 난치병 환자도 완치된 미래를 위해 지금 현재의 삶을 저당잡힌 채 살아갈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아프고, 언젠가는 죽을 사람이니 아픔과 죽음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권리가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서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포기하는 데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인간다운 삶은 시작된다. 장애를 받아들이고, 병과 친구가 되는 데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인간다운 삶은 시작될 것이다. 먼저 거짓된 ‘자비의 연못’을 떠나야 한다.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장애와 아픔, 죽음의 사실을 품위있고 우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에 대한 관념은 불건전하다. 황우석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의학은 거의 엽기적으로 죽음과 질병에 저항하며, 거기서부터 참혹함이 시작된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우리 삶을 둘러싼 신비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잘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죽음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부추기지만, 잘 죽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지는 못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동일한 질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대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에 둘러싸여 기계로 살아온 사람은 죽을 때도 그렇게 죽을 것이다.

  히틀러의 군대가 프라하 시내를 침략해 들어올 때 당시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 에드윈 뮈어는 이렇게 썼다. “한때 가치있고 인간적이었던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죽고 썩어버렸다. 기계는 도덕적인 힘이며 인간을 더 낫게 해주리라는 생각은 19세기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증기기관이 인간을 더 낫게 해줄 수 있겠는가? 히틀러가 프라하 시로 진군해 들어온 것은 이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지난 백년을 돌아보건대, 우리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고, 우리가 잃은 것은 가치있는 것들이었던 반면 얻은 것은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잃은 것은 오래된 것들이고, 얻은 것은 그저 새로운 것들일 뿐이기 때문이다.”(Edwin Muir, The Story and Fable, Rowan Tree Press, 1987)

  뮈어의 이야기는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을 하는 지금도 부끄러운 숨을 쉬고 있다. 그래도 생각과 말만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경미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본지 제81호에〈희생―지율과 예수〉, 제82호에〈‘진보’와 ‘희망’에 대하여〉, 제83호에〈‘경쟁’과 ‘품위’〉, 제84호에〈사람됨과 교육〉등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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