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81호 2005년 3-4월호    

 

  성장사회의 종언을 위하여

   세르게 라투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작년에 지도적인 기상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환경문제를 진보적으로 푸는 데는 경제성장이 관건입니다. 왜냐하면 청정기술에 투자하기 위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은 해결책이지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익의 입장만이 아니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좌익도 공유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반세계화 운동가들도 성장을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보다 공평한 부의 분배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파브리스 니콜리노는 환경전문 기자인데, 그는 최근에 자신이 근무하던 파리의 주간지《폴리티스》(반세계화 운동 편에 서있는 언론)에서 지금 프랑스 정치에서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어있는 연금개혁에 관해 내부논쟁 끝에 사임을 하였다. 그 논쟁의 경과를 보면 좌익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드러난다. 한 독자가 말했듯이, 그 분쟁은 니콜리노가 “거의 모든 프랑스 정치계급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통교리, 즉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보다 많은 성장, 보다 높은 생산성, 보다 큰 구매력과 소비라고 하는 생각을 감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수십년에 걸친 광란적인 낭비 끝에 지금 세계는 폭풍을 예고하는 먹구름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우리의 기후가 갈수록 불안정해짐에 따라, 우리는 석유 때문에 전쟁을 하고 있다. 물 전쟁이 뒤따를 것임에 틀림없고, 그와 동시에 예견되는 생물유전자상의 재앙을 통해서 필수적인 식물과 동물 종들이 소멸하고, 전염병들이 만연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확장하는 성장사회는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축소된 사회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급적 조용하게, 그리고 공생공락(共生共樂)이 가능한 방식으로 경제규모를 줄일 것인가를 긴급히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성장사회는 성장경제에 의해 지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장경제에 강박적으로 붙들려 있다. 그것은 ‘성장을 위한 성장’을, 삶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삶의 본질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생물권의 한계를 넘어서 가고자 하기 때문에 지속불가능하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환경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각 개인의 소비량이 지구표면을 얼마만큼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계산해볼 때, 자연자원에 대한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와 그 자원의 재생 능력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지속불가능한 생활방식이라는 게 드러난다. 미국 사람은 평균적으로 일인당 9.6헥타르, 캐나다 사람은 7.2헥타르, 그리고 유럽 사람은 4.5헥타르를 소비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지금 평등한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지속가능한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만일 평등이 유지되면서, 지속가능한 세계가 되자면 그때의 소비수준은 일인당 1.4헥타르 미만이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인구증가를 고려하지 않을 때 그러할 것이다. 

  성장과 환경이라는 모순적인 요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자기들이 하나의 마술적 공식―‘생태효율성’―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한다. 생태효율성은 지금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논리의 중심개념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우리의 자연자원 소비의 강도를 줄여나가서 그 결과 지구의 최대수용능력과 양립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한다는 생각이다.

  생태효율성이라는 면에서 그동안 여러 진보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에 극단적인 성장에 수반되어왔고, 그 때문에 환경에 대한 충격은 실제로 더 악화되어왔다. 효율성에 있어서 개선된 개개 품목이 환경에 대해 미치는 충격의 감소분은 더 많은 상품이 시장에 나옴으로써 상쇄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리바운드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경제가 상대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이거나 어떻든 덜 물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낡은 경제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시키고 있다. 모든 지표는 우리의 자원소비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장차 과학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고, 자연은 끊임없이 인공적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려면 정통 자유시장 논리에 대한 완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경제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장사회의 계획된 종언은 반드시 음울한 것일 필요가 없다. 이반 일리치는 언젠가, 우리가 현재와 같은 생활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어떤 좋은 것의 부정적인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마치 맛있는 요리의 즐거움이냐 그 위험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요리 자체가 내재적으로 역겨운 것이고, 우리가 그것 없이 지낼 때 우리는 좀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과는 다르게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장사회에서는 불평등과 불의가 반드시 생겨나게 마련이다. 성장사회가 낳는 안락한 삶은 흔히 환상에 불과하다.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사회는 즐겁지도, 쾌적하지도 않다. 그것은 스스로의 부에 병들어 있는 반사회이다. ‘북(北)’ 쪽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소비재와 서비스에 보다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러한 물건과 서비스에 포함된 비용을 잊고 있다. 오염된 공기와 물 그리고 환경의 열악화로 인해서 삶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현대적 삶을 위한 비용(의료, 교통)은 증가되는데, 거기에는 점점 희소해져가는 자원(물, 에너지, 열려진 공간)의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허만 데일리는 진정한 진보를 알려주는 척도를 고안한 바 있다. 그 척도는 한 나라의 국민총생산을 오염과 환경 열악화로 인한 손실에 따라 재조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척도에 의해 계산할 때 미국에서는 GDP가 계속해서 증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진보는커녕 정체와 쇠퇴가 기록되어왔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른바 잘 나가는 경제, 선진 소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출구도 없이 벼랑을 향하여 빠르게 돌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제규모를 축소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탈개발 사회의 유일한 목표도 아니고,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대안적 세계의 유일한 목표도 아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것을 미덕으로 만들면서, 경제의 축소가 ‘북’쪽 사람들에게 어떤 이득을 줄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축소’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저 분별없는 성장을 위한 성장이라는 교의(敎義)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축소는 마이너스 성장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것은 모순적인 말이다. 그것은 뒤로 진보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어로 비성장(decroissance)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영어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영어에서 위축(shrinkage), 감소(decrease), 축소(reduction)와 같은 말은 프랑스어 비성장(decroissance)과는 달리 부정적인 내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유시장 경제학이 지금 세계를 얼마나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성장률의 둔화에 의해서도 우리사회가 얼마나 큰 혼란으로 빠져드는지를 보아왔다. 그것은 실업을 초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적 조건의 유지에 필요한 사회적, 환경적 프로그램들을 파괴한다. 그러니까, 성장률이 실제로 마이너스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에 기반한 사회에서 일이 없는 것처럼, 성장사회에서 성장이 없는 것보다 더 가혹한 사태가 없을 것이다. 주류 좌익 그룹은 자신의 가장 뿌리깊은 믿음에 대한 근원적인 재검토 없이는 이러한 사고에 계속 갇혀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모축소는 비성장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데, 비성장 사회라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정의해보도록 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아무런 만족감도 주지 않는 활동들이 주는 환경적 충격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데서부터 정책이 출발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영역이 규모축소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사람과 상품이 지구 전역을 가로질러 저토록 많이 움직일 필요가 있는지 재검토하고, 우리의 경제를 다시금 지역 중심적인 것이 되게 함으로써 장거리 운송이 초래하는 오염과 기타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침범하고 부식시키는 저토록 많은 광고가 과연 필요한지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또 일회용 물품들이 대량생산 기계를 살찌우는 용도 외에 정말로 일회용이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경제규모의 축소는 반드시 좋은 삶의 축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1848년에 칼 맑스가 사회혁명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공산주의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가 될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다고 믿었다. 면직물과 생산품들의 놀라운 과잉생산은 적어도 서구세계의 모든 인구가 먹고, 입고, 주거하는 데 충분한 정도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렵의 물질적 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플라스틱도, 컴퓨터도, 생명공학도, 살충제도, 화학비료도, 핵에너지도 없었다. 산업혁명이라는 유례없는 사회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의 인간욕구는 소박하였고, 인간행복은, 혹은 적어도 행복의 물질적 기초는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규모가 축소된 사회를 상상하고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제’를 넘어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경제가 이론에서든 실제에서든 우리의 삶 전체, 특히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든 일자리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작업시간을 대폭 축소하는 일일 것이다. 1981년에 벌써, ‘축소’를 제안한 최초의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자크 엘루는 어느 누구도 하루 두 시간 이상 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다른 출발점은 1992년 리우에서 열린 유엔지구정상회의에서 마련된 소비와 생활방식에 대한 협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협약은 6개항의 ‘R’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재평가(reevaluation), 재조정(restructuring), 재분배(redistribution), 축소(reduction), 재사용(reuse), 그리고 재활용(recycling). 이러한 목표는 협력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선순환 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리스트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재교육(reeduation), 방향재조정(reconversion), 재정의(redefinition), 리모델링(remodelling), 재고(rethinking), 그리고 재지역화(relocating).

  문제는 이기심을 포함하여 현재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 노동윤리와 경쟁심리 등이 성장 시스템으로부터 나왔고, 또 그것들은 이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더 단순한 삶을 살겠다는 윤리적 선택은 이 추세에 영향을 미치고, 이 시스템의 심리적 기초를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인 변화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결집된 힘에 의한 근원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안이 하나의 허황한 유토피아적인 아이디어로 무시될 것인가? 폭력적인 혁명 없이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심리적 혁명이 난폭한 사회적 소요 없이 성취될 수 있는가?

  환경 훼손을 극적으로 줄인다는 것은 물질적 재화상의 금전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비물질적 제품을 통해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들 제품은 부분적으로 시장적 요소를 유지할 수 있다. 시장과 이윤이 여전히 인센티브로 작용하겠지만, 이미 시스템은 더이상 시장과 이윤의 논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위한 진보적인 조치들과 단계들을 우리는 지금 구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로 인해 손해를 볼 사람들이 순순하게 따라올 것인지, 혹은 심지어 현재의 시스템의 희생자들―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시스템에 의해 중독된―이 시스템의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지 어떨지 말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금년 여름 유럽을 휩쓴 열파(熱波)는 어떤 논리보다도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주는 데 더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3년 12월호)



축소경제는 제3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오늘날 미디어는 너무나 깊이 광고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면―물질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무조건 팔아먹을 만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것 팔아먹기 전략에서 열쇠말은 ‘개념’이다.

  그래서, 비성장(decroissance)에 대한 토론이 확산됨에 따라 미디어는 당연히 그 개념이 무엇인가, 라고 묻기 시작하였다. 미디어를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비성장’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경제학의 성장이론에 대응할 만한 축소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성장은 단지 성장이론에 대한 래디칼한 비판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용어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탈개발/발전 정치를 위한 대안적인 프로젝트를 제안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정통경제학의 틀에서 모두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실제로, 비성장은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의 열쇠말이다. 사회는 그동안 진보주의적 성장경제학에 의해 지배된 사고 속에 갇혀 있었다. 이러한 경제학의 전제(專制)적 지배는 이 틀 바깥에서의 창조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왔다. ‘축소’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라는 아이디어는 대안적 삶에 관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이 아이디어를 제창하는 사람들을 현존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내에서 경제가 축소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고 그들이 저개발 사회들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무지나 자기기만의 소산이다.

  축소경제의 제창자들은 ‘북’이나 ‘남’이나 어느 곳에서든 통합적이고, 자기충족적이며,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비성장(degrowth)이라는 말보다도 무성장(non-growth)이라는 말을 쓰면 더욱 정확하고, 아마도 더 충격적으로 될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무신론(a-theism)’에서처럼 ‘무성장주의(a-growthism)’에 관해 말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현재의 경제적 정통교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체계, 즉 종교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개발/발전(development)이라는 문제를 치열하게 능동적으로 해체할 필요가 있다. ‘개발/발전’이라는 용어는 너무나 많이 재정의되어왔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마술적인 개념에 대해 여전히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다. 성장을 궁극적인 선(善)으로 여기고 있는 ‘경제주의’라는 교의는 참으로 목숨이 질긴 것 같다. 심지어 반세계화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도 역설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 그들은 성장의 해악을 잘 인식하면서도 계속해서 성장을 통해서 ‘남’쪽 국가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북’쪽에 관해서는 그들은 잘해보아야 기껏 성장의 ‘둔화’를 제창할 수 있을 뿐이다. 점점더 많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은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성장이 생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속불가능하고 또 유해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성장을 별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개발의 기회가 박탈되어온 ‘남’쪽 세계에서는, 비록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시기 동안에는 성장의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성장도 축소도 적합하지 않는 딜레마적 상황이다. 그리하여 논쟁 끝에 성장의 둔화라는 타협안이 제시되지만, 이 타협은 비성장의 의미에 대한 논쟁 쌍방의 오해를 근거로 한다. 우리의 경제를 좀더 느리게 성장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끊임없는 성장에서 해방된 사회(즉,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고, 충분히 통합되고 자기충족적인)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결코 주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그것은 급속하고 불평등적이며, 환경적으로 재앙을 일으키는 팽창경제가 주는 한가지 부인하기 어려운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고용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비성장 사회의 창조가 ‘북’과 ‘남’ 어느 곳에서든 왜 반드시 필요하고 또 바람직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아이디어의 역사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자기충족적이고 물질적으로 책임감 있는 사회에 대한 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개발/발전에 대한 오랜 비판작업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40년도 넘게 한 국제적 논평가 그룹은 ‘남’쪽 국가들에 있어서의 경제개발을 분석해왔고, 그것이 끼친 해악을 규탄해왔다. 이들 논평가들은 단지 최근의 자본주의적이거나 극단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발/발전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적이고, 참여주의적이며, 자립적이고, 민중적 연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부메디엔느의 알제리아와 니에레르의 탄자니아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개발은 종종 인도주의적 비정부기관들에 의해 수행되거나 그 기관들의 지원을 받아왔다는 점도 주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몇몇 산발적인 성공담을 제외하고는 개발/발전은 압도적인 실패담이었다.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 시작된 개발은 오직 부패와 혼란과 구조조정 계획을 낳았을 뿐이고, 그 결과 전통적인 가난은 비참으로 대체되었다.

  ‘남’쪽 사회들이 성장경제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려면 비성장은 ‘북’쪽에 대해서만큼 ‘남’쪽에 대해서도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직 시간이 있는 곳에서는 ‘남’쪽 사회는 개발이 아니라 이탈, 즉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이상화된 형태의 비공식 경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쪽이 어떤 형태건 경제적 축소를 채택하지 않는 한 ‘남’쪽에 있어서의 변화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티오피아와 소말리아가 ‘북’쪽 사회의 애완용 동물 먹이를 수출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우리가 먹는 고기가 파괴된 아마존 우림에서 기른 콩을 사료로 사육된 동물의 것에서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과잉 소비는 ‘남’쪽 세계에 있어서의 진정한 자기충족성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이 비성장 사회를 창조해내고자 시도하려면 그 사회는 재고하고, 재지역화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쪽 국가들은 ‘북’쪽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의존상태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고, 뚜렷한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의 역사―식민주의, 개발, 세계화에 의해 중단된―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회들의 문화적 역사는 그 사회에 내재적으로 반(反)경제주의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가치들이 그동안 무시되거나 잊혀져왔던 물건들, 전통적인 공예와 기술들과 함께 부활되어야 한다. ‘남’쪽 사회에서 성장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성장을 강조하는 것은 오직 더한층의 서구화를 초래할 수 있을 뿐이다. 개발에 대한 제안들은 흔히 진정한 선의로부터 나온다. 즉, 학교와 병원을 세워주고, 물 공급체계를 만들어 주고, 식량 자급을 실현하도록 돕겠다는 선의 말이다. 그러나 그 제안들은 모두 개발이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와 결부된 인종 중심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다.

  ‘남’쪽 정부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라. 혹은 미디어에 현혹된 대중들의 여론을 조사해보라. 그들은 서구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자들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교나 병원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에어컨과 휴대전화와 냉장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동차(폭스바겐과 GM은 지금 중국에서 연간 300만대를 생산할 계획을 하고 있고, 퓨조 역시 거기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를 원한다. 이들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는 또한 원자력발전소, 전투기, 그리고 탱크를 그 리스트에 추가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알랭 그라스가 인용하고 있는 과테말라 지도자의 다음과 같은 분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제발 혼자 내버려두고, 개발 운운하는 이야기는 당장 중지하라!” 인도의 반다나 시바로부터 세네갈의 에마뉴엘 엔디온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중운동 지도자들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개발 주창자들은 식량의 자기충족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에 대해 건방진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회복―자체가 자기충족성은 한때 실현되고 있었으나 그동안 잃어버려진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개발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들이닥치기 시작하던 1960년대까지 자기충족적이었다. 제국주의와 성장경제, 그리고 세계화가 그 자기충족성을 파괴하고, 아프리카 사회를 보다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과거에 물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물은 산업폐기물이 물을 오염시키기 전까지 마실 만한 물이었다.

  학교와 병원은 정말로 좋은 교육과 건강을 성취하고 유지하는 올바른 방법일까? 위대한 논쟁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이반 일리치(1926-2002)는 학교와 병원의 효력에 대해―심지어 ‘북’에 있어서도―심각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란의 경제학자 마지드 라흐네마가 말하듯이, “우리가 원조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빈곤을 생산하는 구조를 강화할 뿐이다. 실질적인 자산을 잃어버리고, 세계화된 생산 시스템 바깥에서 자기들에게 더 적합한 대안적인 삶의 길을 찾는 희생자들에게 그 원조금이 도달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옛날의 방식으로 단순히 되돌아갈 수 있는 전망은 없다. 마찬가지로 축소나 비성장에 관한 하나의 보편적인 모델이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발이 오직 빈곤과 배제를 의미할 뿐인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린 전통과 그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근대가 약하게 뒤섞인 어떤 것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그들이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성취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일단 인간의 창조성과 재간이 경제주의와 개발 광기의 속박에서 풀려나온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직면한 과제에 훌륭히 맞설 수 있으리라고 우리가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각 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전을 갖고 있다.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아랍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이븐 칼둔(1332-1406)이 사용한 ‘베움란’(번창 혹은 꽃핌), 간디의 ‘스와데시-사르보다야’(자급 혹은 행복), 서부 아프리카 투쿨레르의 언어로 ‘밤타레’(나눔에 의한 행복), 혹은 이티오피아 보라나 사람들의 어휘로 ‘피드나/가비나’(배불리 먹고 근심걱정 없는 사람의 빛나는 모습) 등이 될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개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파괴를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있는 새롭고 독창적인 대안들은 성공적인 탈개발 사회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북’이든 ‘남’이든 집단적이고 포괄적인 해독(解毒) 프로그램 없이는 그들의 성장에 대한 중독현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성장이라는 교의는 질병이나 마약과 같다. 라흐네마가 말하듯이, 경제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은 처녀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두개의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에이즈처럼 작동했고, 다른 하나는 마약 상인처럼 행동했다. 성장경제학은 에이즈처럼 사회적 질환에 대한 사회의 면역체계를 파괴한다. 또한, 성장은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의 끊임없는 공급을 필요로 한 나머지, 그것은 마약 상인처럼 고의적으로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욕구와 의존심리를 만들어낸다. 공급 체인에 있어서 이 상인들이 주로 초국적기업들이며, 이들이 우리의 중독상태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의 극복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갈수록 증가하는 소비는 지속가능한 게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2004년 11월호)

 


  세르게 라투세(Serge Latouche) ― 프랑스 경제학자. 남(南) 파리 대학 명예교수. 최근 저서에《무한정의:세계화된 경제 속에서의 윤리의 도전》(파리, 2003년),《개발을 넘어서:경제의 탈식민화에서 대안사회의 건설로》(파리, 2004년)가 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프랑스 시사교양지《르몽드 디플로마티크》최근호들에 연속적으로 실렸던 두편의 에세이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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