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80호 2005년 1-2월호    

 

  과학기술의 덫에 갇힌 언론

   강양구

 

  지난 11월 과학기술부는 황우석 교수에게 2005년에 265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는 개별 과학자에게 지원하는 금액으로는 파격적인 것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하지만 이런 과학기술부의 방침은 민주노동당 등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이런 파격적인 지원에 당연히 따라야 할 공식적인 선정 과정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번 지원은 ‘이종간 장기이식’, ‘인간배아 복제 연구’ 등 첨예한 윤리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연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이런 ‘정당한’ 지원철회 요구는 언론과 정부로부터 묵살당했다.1) 더 놀라운 사실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던 민주노동당의 한 ‘스타 의원’도 황 교수에 대한 문제제기를 ‘자살골’에 비유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일도 있다. 지난 11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의원들이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황우석 교수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의원들이었다. 일부 의원들은 황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보조석에 앉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없어 하는 의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 ‘진풍경’이었다. 그날 강연회에서 황 교수는 매우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연구에 쓰인 난자를 어떻게 얻었는지, 여성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난자를 기증했는지”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이 황 교수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언론에서는 ‘과학기술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황 교수의 모습만이1)보도되었다.2)

  잠시 살펴본 것처럼 2004년은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기자들에게는 아주 ‘보람찬’ 한해였을 듯싶다. 진보, 보수 구분 없이 전 언론사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이 황우석 교수를 ‘스타 과학자’로 만드는 데 나섰고, 그 결과 그는 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이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슈를 만드는 것이 드문 현실을 감안한다면 기자들로서는 뿌듯했을 법도 하다. 물론 인간배아 복제 실험이라는 감히 다른 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미국의 과학잡지《사이언스》에 게재한 황 교수의 능력(?)이 그 바탕이 됐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모두가 한목소리로 황우석 교수와 생명공학 띄우기에 나설 때, 명색이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황 교수나 생명공학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학기술 발전의 발목을 잡는 ‘반(反)과학기술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지내면서, 언론이 과학기술을 보도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이 글은 이런 개인적인 고민의 결과물이다.

 

  과학기술 보도, 어디로 가는가

  최근 들어 언론의 과학기술 관련 보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과학기술이 삶에 주는 큰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관심의 증가는 반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의 증가와 함께 언론의 과학기술 관련 보도에 대한 문제점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 보도가 양적으로는 늘었지만 그 질은 여전히 낮다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과학기술 보도의 질에 대한 비판은 보통 ‘전문성의 결핍’에 대한 지적으로 모아진다.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기자를 만나는 일이 제일 싫다”며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심지어 경멸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런 인식 때문이다. 과학기술 보도에는 아주 높은 전문성이 요구되는데, 비전문가인 기자들이 과학기술 연구를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왜곡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는 흔히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 강화’가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과학기술자들뿐만 아니라 언론 스스로도 이것에는 깊은 공감을 표시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과학기술 분야를 오래 담당해온 기자들이 아예 ‘과학기술 전문기자’를 자칭하며 과학기술만 담당하는 게 큰 추세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일부 언론에서는 전문인력을 기자로 채용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이미〈동아일보〉의 경우 총 10여명의 이공계 출신 석사 졸업 이상자를 과학기술 담당기자로 뽑아 잡지와 신문에 배치했고,〈중앙일보〉와〈한겨레〉에서는 의사를 공채해 의료분야를 전담하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번 근본적인 의문을 품어봄직하다. 도대체 과학기술 보도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대개 언론은 과학기술 시대에 과학기술(자)의 목소리를 잘 대변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과학 기사의 배포를 위해 최초로 만들어진 통신사인 ‘사이언스 서비스’가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래 언론은 지속적으로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3)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보도가 지향하는 것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할수록 과학기술(자)과 대중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대중은 과연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에 대해서 과거에 비해서 더 호의적인가? 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갈수록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 그 불신의 정도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최소한 그 추이를 짐작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 한가지 방법으로서 대중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영화 속에서 과학기술이 어떤 식으로 비춰지는지 살펴보자. 영화 속에 비친 과학기술 이미지를 계속 추적해온 한 과학기술 학자는 “영화 속에 비춰지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의 전망이 우세하며, 과학자의 이미지 역시 이타적이고 선하기보다는 사악하고 미친 과학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한다.4) 상업적인 영화들이 대중들의 정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영화 속 과학기술 이미지는 대중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근본적인 우려와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중은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대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져올 미래를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살펴보자.《코스모스》,《콘택트》등의 저자로 국내에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평생을 ‘과학기술 대중화’에 노력해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책인《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미국에만 국한해 볼 때 ‘과학기술 대중화’는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있다.5) 대중들이 현대 과학기술에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현대 과학기술이 부정하는 ‘사이비 과학’이나 ‘반(反)과학’에 더 경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이건의 완고한 ‘과학주의’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그의 지적을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와 연관해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비록 세이건이 ‘과학기술 대중화’가 실패한 한가지 원인으로 언론의 상업적 접근을 지적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언론은 훨씬더 일찍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졌고, 그 질도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과학기술자의 성과를 언론 또는 대중에게 매개하는 세이건과 같은 훌륭한 과학 저술가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이런 미국에서도 과학기술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은 현대 과학기술이 주는 여러가지 ‘확신’들에 반감을 갖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는 현실, 이 현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상황에서 ‘전문성 강화’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해법인가?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 강화가 언론과 과학기술자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대중과 과학기술자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기술 보도의 현실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의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근 한 언론사 과학기술 담당기자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보도의 특징을 크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요약했다. ‘최초’의 힘, 경제적 관점, 애국주의, 재미있는 ‘이야기’.6) 이 네가지는 사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보도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과학기술 보도의 특징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먼저 기자들은 그 속성상 끊임없이 ‘최초’를 좇는다. 특히 항상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주목을 받는 과학기술 영역의 경우 이 ‘최초’가 더욱더 힘을 발휘하는 분야이다. 기자들은 “이런저런 자연의 비밀이 국내에서 처음 규명됐다”, “이런 구조의 물질이 개발되기는 이번이 세계 처음이다” 등의 의미를 과학기술 연구를 보도할 때 찾고자 한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특별히 주목받아 미국의 과학잡지《사이언스》에 실린 것도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복제 줄기세포를 추출해냈기 때문이다.

  한편 과학기술이야말로 현재와 미래의 경제성장 동력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과학기술 보도의 큰 특징이다. 보도내용 가운데는 “이것이 실용화 또는 상용화하면 수입 대체효과는 ○○○억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된다”, “이 분야의 미래 세계시장은 ○○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등으로 연구결과를 경제가치로 환산하는 표현이 빈번히 등장한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도 각 언론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것은 “10년 후 황우석 교수 연구가 우리나라를 먹여살린다”는 내용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민족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우리나라에서 ‘애국주의’가 과학기술 보도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과학기술 선진국에서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나라 과학기술자가 해냈다는 사실은 과학기술 연구 자체보다 더 대중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언론보도에서 “태극기를 꽂고 왔다”는 제목이 등장한 것은 과학기술 보도의 ‘애국주의’를 가장 선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7)

  과학기술은 재미있는 읽을거리로 보도되기도 한다. 최근 각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과학기술면이나 국제면의 과학기술 기사에서 특히 이런 보도를 찾기 쉽다. 이 경우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하면서 도래할 장밋빛 미래가 은근히 제시되곤 한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을 정복할 길을 열었다”는 식의 보도 역시 이런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제시한 과학기술 보도의 네가지 특징은 과학기술이 언론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과학기술이야말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과학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사회와 비교적 무관하게 발전하며 그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 사회의 발전 방향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런 통념이야말로 과학기술 보도를 재구성하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유럽의 근대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적어도 과학기술에 대한 접근만을 놓고 봤을 때 언론은 아직 18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세가지 특징

  언론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주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것과 달리, 정작 현대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세기 현대 과학기술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현대 과학기술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특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이 글의 과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특징 세가지를 포착할 수는 있다.
 

  (1) 자본의 힘

  우선 과학기술에 대한 자본의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국가는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과 관련한 자원을 배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미 과학기술에 대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자본이지 국가가 아니다. 단적으로 2005년도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은 7조원 정도지만, 삼성의 연구개발 예산은 삼성전자 4조 8,000억원을 포함해 총 7조 3,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에 다른 기업들의 연구개발 예산을 넣으면 자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은 정부의 그것을 압도한다. 더구나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 7조원의 상당 부분은 기업의 연구개발 예산이 쓰이는 분야를 보조하거나, 그것과 경쟁하는 용도로 쓰일 게 뻔하다. 과학기술 영역의 경우에는 국가와 자본의 시각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학기술에 자본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8) 미국의 경우 과학기술 연구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학은 기업의 막대한 후원에 의존하게 되면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생명공학처럼 이윤추구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는 장려되는 반면 생태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여러 분야들은 지역사회, 환경 등을 고려할 때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존폐 위기를 맞고 있다. 심지어 유전자조작 작물(GMO)을 생산하는 초국적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학의 경우 GMO의 안전성에 대한 연구가 제약을 받게 됐다.

  과학기술 연구와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관행이 사라진 것도 큰 문제다. 우선 기업들이 연구를 설정하는 데 깊숙이 개입하고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과학기술자 사이에 연구 과정에서 얻은 여러가지 정보를 공개하는 전통적인 관행이 사실상 중단됐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연구와 관련된 비밀을 지킬 것을 과학기술자에게 요구하고, 이를 승낙할 때만 연구비를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는 상당수의 과학기술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들도 다른 실험실보다 더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내, 기업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은 현재의 과학기술 연구를 ‘전쟁’으로 인식한다. 이기면 막대한 ‘부’가 약속되는. 과학기술 연구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한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는 관행이 설 자리는 없다.

  이렇게 기업이 깊숙이 개입한 과학기술 연구의 성과는 고스란히 기업의 것으로 귀결된다. 영국의 노벨상 수상 생물학자인 존 설스턴은 영국 쪽 책임자로 10여년이 넘게 참가한 ‘인간 유전체(게놈) 프로젝트’를 회고한 책에서 이런 현대 과학기술의 경향을 통렬히 고발한다.9) 현대 과학의 최전선에서 연구를 수행한 그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이 시대 자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세기에는 과학과 인간성 사이에 균열이 있었다…더욱 좋지 않은 것은 개발과 탐구가 단기 이윤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향후 4반세기의 이익을 위해 개인, 기업과 국가가 광적으로 성급하게 서로 경쟁하도록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거대한 초국적기업은 이제 국가보다 더 강력해졌다. 도처에서 그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부자 나라의 수도에서 집중적으로 로비를 하는 경우, 그 힘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우리는 지금 개인 소유권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공공의 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유전자 시대의 적들》385, 400, 403쪽)
 

  (2) 무너지는 과학기술자

  과학기술 연구가 그 기반부터 기업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과학기술자 공동체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현실은 암담하다. 현대 과학기술의 두번째 특징은 과학기술자 공동체가 이미 ‘자기비판을 통한 쇄신’과 같은 ‘반성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우선 과학기술 활동이 분화되고 개별 분야의 전문성이 심화되면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검증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초끈 이론’이라는 물리학의 최신 이론이 있다. 우습게도 우리가 접하는 이 ‘초끈 이론’은 최소한 두 단계의 중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초끈 이론’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들이 내놓은 논문을 이해할 수 있는 과학자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초끈 이론’에 대한 최초 논문을 해설하는 2차 논문이 나온 뒤에야, 과학 저술가나 언론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최초 논문의 똑같은 진술에 대해서 2차 논문들조차도 상이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최초 논문의 진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과학자들끼리 논란을 벌이는 상황이 발생한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긴 했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전 분야에 걸쳐 이와 같은 검증의 어려움이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과학기술자들은 의도적인 기만행위에 나서기도 한다. 연구결과에 대한 과학기술자 공동체 내의 검증이 어려워진 현실을 틈타 그 결과를 조작하거나, 다른 연구를 표절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2002년 과학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던, 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의 논문조작 사건일 것이다. 독일출신의 30대 초반의 물리학자인 쇤은 1997년 미국의 벨 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뒤 약 4년여에 걸쳐 약 100여편의 논문을 쏟아내며 동료 물리학자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4년여에 걸친 쇤의 연구는 모두 날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아무리 애를 써도 쇤의 실험을 재연하는 데 실패한 몇몇 과학자들이 실험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결국 쇤이 데이터를 날조하는 방법을 통해 연구결과를 조작해왔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과학계는 수차례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저명한 연구소에서 실험 관리가 허술하게 이루어졌다는 점,《네이처》,《사이언스》같은 유명한 잡지에도 쇤의 조작된 연구가 25편이나 실렸다는 점 등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들 연구소나 유명 과학잡지들이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기업으로부터 관심을 끌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성과에 목을 매면서 과학기술 연구의 검증을 소홀히 한 것이다.10)

  사실 이런 기만행위는 오히려 부분적인 문제이다. 이미《네이처》나《사이언스》같은 유명한 과학잡지들조차도 초국적기업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2002년에 있었던 ‘GMO의 유전자 전이’ 연구에 대한《네이처》의 미심쩍은 태도일 것이다. 버클리대학의 대학원생이자 환경과학자인 데이비드 퀴스트와 그의 지도교수인 멕시코인 생물학자 이그나시오 차펠라는 멕시코의 유전자조작 옥수수의 유전자가 인근 농장에서 재배되는 토착 종자에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2001년 11월에《네이처》에 보고됐고, 2002년 4월에《네이처》에 게재될 예정이었다. 만약 이 논문이《네이처》에 발표된다면 그 파장은 매우 컸을 것이다. 하지만《네이처》는 이 논문을 싣는 대신 그것을 반박하는 두편의 글을 게재했다.《네이처》가 GMO를 생산하는 초국적기업의 압력 때문에 이런 무리수를 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네이처》에 실린 반박 글의 저자들이 모두 버클리대학에, GMO를 생산하는 초국적기업 노바티스의 막대한 지원금을 끌어오는 데 직접 관련된 인물이라는 사실만이 진실을 짐작케 할 뿐이다.11)《사이언스》역시 만만치 않다.《사이언스》는 2003년 1월에 생명공학 기업인 몬산토의 후원을 받고 있는 과학자 로저 비치가 쓴 GMO 지지 글을 게재해 큰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업과 과학기술자 사이에 일종의 유착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기업들은 때로 자기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연구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한다. 쉘과 같은 석유 메이저들이 지구온난화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해온 것은 그 단적인 예다. 과학기술자들이 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는 것을 넘어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는 경우도 이런 유착관계에 해당된다. 신약의 부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주식을 갖고 있는 기업의 주가가 떨어질 것을 감수하면서 부정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데는 큰 이해갈등이 따를 것이다.
 

  (3) 되돌릴 수 없는 현대 과학기술

  앞에서 살펴본 현대 과학기술의 두가지 특징이 다분히 현상적인 것이라면, 지금부터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본질에 관계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과학기술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그 효과 자체가 되돌릴 수 없다는 큰 특징을 갖는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생명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또 이 세가지를 극적으로 결합시켜주는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은 과학기술자 스스로도 그 결과를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과학기술자의 불안감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빌 조이의〈미래에 우리는 왜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이다.12) 2000년 4월에《와이어드》에 발표한 이 글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토론을 촉발시키고 있다. ‘IT업계의 현자’로 칭송받는 과학기술자이자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창립자인 그는 이 글에서 “생명공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의 결합이 가져올 미래 과학기술이 결코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이 세가지 기술이 ‘인류의 절멸’에 이르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을 묵시론적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그는 대신 과학을 인간을 위한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타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과 같은 강력한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빌 조이의 글이 현대 과학기술의 압도적 영향력과 그 돌이킬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과학기술자 내부의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라면, 최근 국내외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는 현대 과학기술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특히〈한겨레〉에서 계속 연재하고 있는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에서 보이는 인문·사회과학 지식인들의 모습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유전자 복제’를 놓고 황우석을 만난 뒤 글을 쓴 왕년의 ‘진보적 지식인’ 이진경 교수는 단연 돋보인다.13)

  이진경 교수는 황우석 교수에게 끊임없이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인위적인 변이’가 가능해졌다면, 이제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이’의 가능성을 봐야 한다”는 식의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심지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황우석 교수에게 실망했는지 “생물학 자체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이 됐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하지만 이진경이 몰랐을 뿐이지 현대 과학기술은 그 공공성 때문에 처음부터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현대 과학기술은 그 영향의 범위가 국지적이고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연구와 같은 최신의 과학기술 연구는 처음부터 그 공공성 때문에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대부분의 현대 과학기술이 그 연구개발 재원을 시민들의 세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는 점이나 공공성을 갖는 과학기술 연구에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과학기술 활동을 ‘탈정치화’하려는 시도들이야말로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황우석 교수 역시, 글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2005년에 세금 265억원을 지원받을 예정이다.

  이진경 교수가 과학소설(SF)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이런 현대 과학기술 활동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이해가 결여된 탓으로 보인다. 사실 이진경 교수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의 글에서 과학주의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런 무비판적 태도야말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다르게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반(反)과학기술’이 아니라 과학기술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적 성찰의 부재이다.

 

  현대 과학기술에 포섭된 언론

  앞에서 거칠게나마 현대 과학기술의 세가지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언론은 과학기술의 변화된 모습을 예의주시하고 이런 세가지 특징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가? 변화된 과학기술의 모습을 공론화하고 이에 대한 사회의 대응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자극했는가?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한가지 두드러진 예를 살펴보자. 앞에서 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의 과학 기만행위를 소개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상 최대의 과학 기만행위가 국내 언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주 흥미롭다. 황우석 교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평소 우리나라 언론들이 ‘맹신’하는《네이처》나《사이언스》는 2002년 10월 초 머릿기사로 쇤의 기만행위를 다루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언론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의혹이 제기된 시점인 그해 6월에〈중앙일보〉에 한번 보도되었고, 기만행위에 대한 조사결과가 발표된 9월 말에〈동아일보〉에 짤막한 기사가 실렸을 뿐이다.〈연합뉴스〉가〈뉴욕타임스〉를 인용해 꽤 긴 기사를 송고했지만 언론들이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은 것도 의아한 일이다. 언론들이 쇤의 기만행위를 몰랐을 리는 없다. 쇤의 기만행위를 다룬《네이처》에 같이 실린 말라리아 모기의 유전자 판독에 대한 기사는 거의 모든 언론에서 대서특필했기 때문이다. 한가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쇤의 ‘조작된 연구’가 나노기술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해 왔다는 점이다. 2002년 말은 우리나라가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하는 등 전세계적인 ‘나노기술 열풍’에 본격적으로 편승하던 때였다.

  이처럼 오늘날 언론은 현대 과학기술의 변화된 모습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은 정부, 기업, 외국의 과학기술 관련 잡지들에서 보도할 거리들을 찾는다. 이들 정부, 기업, 외국의 과학기술 관련 잡지들이야말로 앞에서 살펴본 현대 과학기술 활동의 변화를 선도하는 핵심 행위자들이다. 언론은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공고화, 재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보도함으로써 현재 진행되는 생명공학 연구의 방향을 시민들이 수긍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분야에 정부의 예산이 더 많이 투입되도록 한다. 또 언론은 기업의 연구개발 활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해 비판적 접근을 차단한다. 물론 언론의 보도는 기업의 주가를 높이고 자본에 대한 과학기술의 예속을 더욱더 가속화한다. 언론을 통해 이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기존 과학기술의 구조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발전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언론은 기존 과학기술의 방향과 다른 흐름을 철저히 보도에서 배제한다. 지역사회, 인권, 환경 등을 고려한 과학기술은 그런 흐름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소중한 성과들도 언론에서 배제돼 아예 사회적 공론화의 기회를 잃는다. 그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구성원들이 합의만 한다면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 수준으로도 충분히 실현가능한 ‘사회적으로 유용한 과학기술’이 계속 포기된다. 이미 1960년대 말 영국 루카스 항공의 노동자들이 간파했던 것처럼 “소리의 속도보다 빨리 가는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적 정교함을 가지고 있지만 혼자 살아가는 노인들을 체온저하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간단한 난방체계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현대 과학기술 시대의 역설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1969년 루카스 항공 노동자들은 비용감축을 위해 일부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려는 경영진에 맞서 그때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들은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협력해 그때까지 그들이 만들었던 전투기 엔진이 아닌 150개의 혁신적 제품을 설계하고 그중 일부를 시제품으로 내놓았다. 여기에는 저렴한 의료기구, 저연료 엔진, 도로?철도 겸용 버스, 태양 집열장비 등 인권, 환경, 지역사회의 필요를 고려한 제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1970년대 10여년 동안 진행된 이 계획은 경영진에 의해 거부되었고, 결국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해고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만다.)14)

 

  ‘전문성 강화’, 대안이 아니다

  언론이 현대 과학기술 구조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인식하면 앞에서 품었던 의문이 어느정도 해결된다. 왜 언론이 대중들에게 과학기술을 더 전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대중과 과학기술(자)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는가?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가 대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변화상을 대변하고 심화시키는 역할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대안으로 언급되는 ‘전문성 강화’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현 구조에서 언론이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곧 정부, 기업, 과학기술자의 이해관계에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잘 갖춘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즉 정부, 기업, 과학기술자들이 생산하는 여러가지 기사거리들을 더 잘 받아쓰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그 전문성의 정체인 것이다. 이 경우 언론은 전문성을 강화할수록 기존의 과학기술을 둘러싼 구조를 더 단단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연구결과가 나온 이후 5월,《네이처》는 ‘한국의 줄기세포 스타들, 윤리적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황우석 교수의 난자 획득 경위, 기관심사위원회(IRB)의 통과 문제,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공동저자로 포함된 경위에 대한 의문 등 여러가지 윤리적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프레시안〉,〈한겨레〉,〈동아일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들은《네이처》가 제기한 윤리 문제의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짧은 설명을 붙인 후 바로 황우석 교수의 반발과 해명을 그대로 싣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네이처》가《사이언스》의 경쟁지이고 특종을 놓쳤기 때문에 황우석 교수의 연구성과를 훼손시키려 한다고 크게 보도했다.〈프레시안〉을 제외한 전 언론이 식물학자인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논문의 공동저자로 포함된 것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정부에 흠집을 내는 기사라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던 일부 보수 언론들도 이 대목에서는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한 이번 건에 관한 한 언론들은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과학기술계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동일시한 셈이다.15)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과학부에서 정치부로 옮긴〈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과학기술계와 거리두기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정치 관련 기사를 쓰니 예전에 과학기사를 쓰던 때보다 훨씬더 자유롭게 느껴지더군요. (과학부 기자가) 과학계로부터 거리를 두기란 매우 어렵죠. 지금은 내가 지닌 기자로서의 타고난 감각을 동원해서 대통령에 관해 기사를 쓸 수 있습니다. 과학부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16) 황우석 교수 연구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언론의 조심스러운 문제제기가 나오자마자 일제히 “황우석 죽이기가 시작됐다”고 나선 과학기술 담당기자들 중에서 이런 고백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가지 덧붙이자면 언론이 이렇게 과학기술 핵심 행위자들의 충실한 대변자로 자처할수록 장기적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언론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기자들이 ‘받아쓰기’도 제대로 못한다고 불평하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기자들보다도 훨씬 ‘전문적 능력’을 갖춘 과학기술의 대변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10여년 사이 기자들보다도 훨씬더 정확하게 최신 과학기술 연구의 성과와 의미를 짚을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기자들보다 더 쉽게 대중들에게 이것을 중개해주는 과학 저술가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언론은 결국 그들의 목소리를 싣는 공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상당수의 과학기술 담당기자들은 과학기술자들의 말을 받아쓰는 수준으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비판적 과학 저널리즘’의 조건

  이제 긴 글의 결론을 맺을 때다. 지금은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선회가 필요한 때다. 과학기술 시대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현대 과학기술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그것의 사회적 영향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그 감시와 성찰의 결과를 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언론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비판적 과학 저널리즘’의 상이다.

  언론이 이런 역할을 맡고 나설 때 오히려 요구되는 것은 과학기술자-정부-기업의 시각이 아닌 전혀 다른 전문성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시민적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지식을 습득하거나 과학기술과 관련된 기존의 행위자들(과학기술자, 관료, 기업가 등)의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하고 과학기술 보도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회학자 넬킨은 이미 1990년에 미국 언론의 과학기술 보도를 분석한 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언론은) 과학 활동이 내포하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함의들, 의사결정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성격, 그리고 인간사에 적용되었을 때 과학이 보여주는 힘뿐만 아니라 그 한계까지를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17) 이것은 기자들이 항상 추구해야 할 사실에 대한 철저한 조사, 대담한 해석, 비판적 탐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요구’라고 볼 수도 없다.

  녹색평론사가 주최하는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의 첫번째 강연자로 나선 일본의 토다 키요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양으로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교양’, 두가지를 강조했다.18) 우리나라의 언론이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 교양을 가지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가? 바로 이것을 진지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계속해서 과학기술의 사제들(과학기술자, 관료, 기업가)의 시종이나 나팔수 역할만 한다면, 결국 성난 시민들이 몽둥이를 들이댈지 모를 일이다.

 

1) “‘황우석 수백억 지원’ 놓고 과기부-민노당 격돌”,〈프레시안〉2004년 11월 16일.
2) “‘난자’ 질문에 분노하는 황 박사”,〈여성신문〉인터넷판, 2004년 12월 1일.
3) 도로시 넬킨〈과학과 언론보도〉,《대중과 과학기술》김명진 편저, 잉걸, 2001, 155쪽.
4) 김명진〈영화 속에 나타난 과학기술 이미지〉, 2004년도 한국과학기술학회 후기 학술대회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 자료집, 한국과학기술학회, 2004년 12월 4일;〈대중영화 속의 과학기술 이미지〉,《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
5) 칼 세이건《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상헌 옮김, 김영사, 2001.
6) 네가지 특징은 이 글을 참고했다. 오철우〈과학과 언론의 소통 가능성〉, 2004년도 한국과학기술학회 후기 학술대회 ‘대중의 과학기술 이해’ 자료집, 한국과학기술학회, 2004년 12월 4일.
7) “‘인간복제, 설계도’ 황우석 교수, ‘미 생명공학기술 고지에 태극기 꽂고 왔다’”,〈동아일보〉2004년 2월 9일.
8)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서 관찰되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미국 대학을 중심으로 인상적으로 서술한 다음 글을 참고. 에이열 프레스·제니퍼 위시본〈닫힌 대학〉,《시민과학》통권 제29호,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2001년 7월.
9) 존 설스턴 · 조지나 페리《유전자 시대의 적들》유은실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10) 쇤의 기만행위에 대한 더 자세한 정리는 다음 글을 참고. 김명진〈과학계를 강타한 ‘역사상 최대’ 기만행위 사건〉,《시민과학》통권 제41호,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2002년 11월.
11)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다음 글을 참고. 프레드 피어스〈멕시코 옥수수 스캔들〉,《시민과학》통권 제39호,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2002년 8월.
12) 빌 조이〈미래에 우리는 왜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녹색평론》통권 제55호(2000년 11-12월호).
13) 이진경 “자연을 거슬러 자연을 꿈꾸다”,〈한겨레〉2004년 11월 15일.
14) 마이클 쿨리〈루카스 항공에서의 협동계획〉,《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송성수 편역, 녹두, 1995.
15) “‘황우석 교수 연구, 윤리적으로 문제있다’ 파문”,〈프레시안〉2004년 5월 7일.
16) 넬킨, 같은 책, 165쪽.
17) 넬킨, 같은 책, 166쪽.
18) 토다 키요시 · 김종철 대담〈환경과 평화의 세기를 위하여〉,《녹색평론》통권 제73호(2003년 11-12월호);“미국의 패권은 오래 못 간다”,〈프레시안〉2003년 10월 1일.

 


  강양구―인터넷 신문〈프레시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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