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79호 2004년 11-12월호    

 

  책을 내면서

   김종철

 

  세계의 민중법정에 기소되어, 처벌을 받아 마땅한 A급 전범(戰犯)이 또다시 유일 초강대국의 최고 권력자로 선출되는 비극적―혹은 희극적―사태가 일어났다. 이 세계에는 정말 정의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4년 전 실제로 투표에 지고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기이한 모습을 온 세계에 보여준 미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당장 세계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국의 대다수 유권자들의 이익에도 철저히 반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펴온 인물에게 또다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위임하는 불가사의한 선택을 하였다.

  4년 전 부시 2세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지구온난화 대책을 위한 국제적인 협력의 산물인 교토의정서를 거부함으로써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초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9·11테러를 빌미로 아프간의 무고한 풀뿌리 민중을 향해 폭격을 가하고, 드디어는 ‘예방전쟁’이라는 전율할 만한 논리를 내세워 이라크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침략전쟁에 동의하지 않는 전통적인 동맹국들은 거짓 정보에 의해 기만당하거나 회유 혹은 위협에 시달렸다. 유엔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미국정부로부터 끝없는 냉소와 모욕을 받으면서 유엔의 권위는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적 패권추구는 대외관계뿐만 아니라, 미국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심대한 훼손을 가하여, 미국 내에서의 인권유린과 시민적 권리의 제약은 유례없이 심각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좀더 근본적인 문제, 즉 평화와 환경과 민주주의의 훼손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실감하고,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간에, 부시 집권 4년간의 치적은 미국의 대다수 시민들 자신의 생활현장에서 볼 때도 결코 지지할 만한 게 아니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소수의 부자들을 일방적으로 살찌게 하는 대규모 감세정책, 의료·교육비를 포함한 사회적 복지예산의 축소 등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서민생활에 위협적인 방식으로 일관하였다. 지난 4년간 미국에서 2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정부의 비호 아래 기업의 부패는 심화되었다. 게다가 명분없는 전쟁을 위한 막대한 군비조달 문제로 국가의 재정적자는 위험한 수준으로 악화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재선에 성공하였다. 선거라는 것은 물론 경쟁상대에게 달려있다. 부시의 성공은 곧 민주당 후보 케리의 패배를 의미하고, 케리의 패배는 그가 미국의 다수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리는 분명히 좀더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따라서 좀더 예측가능한 인물로서 비쳐졌지만,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약한 것으로 매스컴에 의해 전달되었다. 그 결과, 무엇보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만연해 있는 오늘날 미국의 분위기에서 대다수 유권자들에게는 많은 약점과 과오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대테러전 사령관으로서의 부시의 모습이 더욱 믿음직스러웠을 것이다―라는 게 선거 직후 대부분의 분석가들의 해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할 도덕적 책임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한 공격 가능성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피해자의 심리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9·11테러는 미국으로 하여금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숙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는커녕, 그 반대로 미국의 배타적인 이기심이 강화되는 촉매제가 되었을 뿐인지 모른다. 그리하여, 이 이기심이 다른 인종, 문화, 종교, 세계관에 대한 두려움을 증가시키고, 그 두려움 때문에 오늘날 미국사회는 매우 긴장된 불관용의 사회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내면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람만이 남들의 자유와 행복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이치를 생각해볼 때, 오늘날 미국이 갈수록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회로 되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를 위해서 더없이 불행한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 2일의 선거일이 임박해감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는 예측불허의 박빙의 승부를 계속 예고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부시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늘날 미국사회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자폐증적인 자기중심주의는 매우 넓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부시만 아니면 누구든 좋다”라는 필사적인 구호 아래 미국 안팎의 반전, 평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유례없이 결집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온 이번 선거의 결과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케리는 선거운동의 시작단계에서 이미 패배의 길로 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선거의 중심적인 쟁점이었던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자폐적인 애국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는 ‘여론의 풍토’ 속에서 처음부터 이 전쟁의 부도덕성과 침략성을 명확히 지적하는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고, 그 결과 이 문제에 관한 한 시종일관 부시에게 끌려다니며, 소극적인 자기방어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케리 자신이 이 전쟁의 부도덕성과 침략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면 자기 역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던 케리의 말은 단순히 ‘애국시민들’을 고려한 ‘정치적’ 발언이라기보다는, ‘국익’과 ‘안보’에 관해서는 부시 못지않게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케리 자신의 신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공화, 민주 양당 간의 정권교체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오래된 민권운동가로서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 이어 이번에도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랄프 네이더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한 정권교체는 기득권층의 옹호와 다수 민중의 소외를 구조적으로 강화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의 영구화에 이바지할 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미국 정치에 있어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혹은 공화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대립은 건국 초기, 즉 헌법초안이 작성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 두 대립하는 가치의 차이는 물론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낙태나 동성애자의 문제에서 보수적 입장과 리버럴한 입장이 보여주는 차이는 인권개념의 기초적 해석에 대한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두 해석 중 어느 것이 정책결정의 근거가 되느냐 하는 것은 개인들의 삶에 심대한 현실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국익과 안보의 논리를 움직일 수 없는 제1의적 국가적 과제로 섬기면서, 어느 때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대외적 침략을 망설이지 않고, 다른 나라의 주권을 유린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이 지배적인 두 정치적 세력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라크 전쟁에 관련한 케리의 부시 비판은 전쟁의 침략성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절차상의 문제, 즉 유엔과 동맹국들로부터 협조를 받지 않고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었다. 실제로, 노엄 촘스키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평균 2년마다 전쟁을 하거나 남의 나라 깊숙이 군대를 보내어 그 국민의 주권을 유린하는 노골적인 침략을 감행해왔지만, 이 과정에서 민주, 공화 양당의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는 없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건국의 아버지이다. 그는 권력의 집중화를 경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는 철저히 분권적이며, 지역에 바탕을 둔 독립적인 소농을 토대로 한 사회체제에서만 꽃필 수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미국의 역대 정치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래디칼한 민주주의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 그런 제퍼슨조차도 이러한 미국의 정치 전통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카리브 해의 섬 하이티가 오랫동안의 독립투쟁 끝에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것은 1801년이었다. 오랜 식민주의 지배 아래서 노예로 살아온 하이티의 흑인민중은 독립된 나라를 세우면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예제를 전면 폐지하였다. 노예제라는 인류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한다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근대적 인권개념을 표방하고 있던 프랑스혁명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제퍼슨의 반응은 “노예제 폐지라는 이 악성 괴질이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기필코 박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하이티는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또다시 유린되는 비극을 경험하고, 수세대에 걸친 피나는 투쟁 끝에 다시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미국 군대의 점령통치 하에 들어갔다가, 그후 미국이 심어놓은 압제자들의 폭압정치 밑에서 허덕여왔다. 그러는 동안, 원래 카리브 해에서도 가장 숲이 무성했던 아름다운 섬 하이티는 이제 깡그리 헐벗은 황무지로 변했고, 유엔의 통계에 의해서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가난과 절망의 땅으로 떨어졌다. 우루과이의 작가 에듀아르도 갈레아노는 이런 하이티의 운명에 대해서, “세계 최초로 노예제 폐지를 실현한 데 대한 대가로서 가차없는 징벌”을 받은 결과라고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아마도 미국의 근본문제는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이 미국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토대 위에 세워진 제국”(아룬다티 로이)인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충분히 숙고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역사는 “수많은 토착민을 대량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도둑질하고, 뒤이어 자신들의 땅에서 부려먹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수많은 흑인들을 유괴, 노예로 만들어온”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남의 불행을 대가로 나의 행복을 추구해온 역사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미국의 역사는 유감스럽게도 전혀 과거지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여 되풀이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의 풍경이다. 이라크 침공과 같은 사태는 노골적인 군사적 수단에 의한 주권유린과 약탈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경우라 하겠지만, 오늘날 세계화라는 이름 밑에서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경제적 침탈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는 오늘날 전세계를 거대 기업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다름아니다. 세계화 프로젝트가 강요하는 시장개방화에 의해 세계 전역에서 소농민의 생존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대규모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의해서 노동자의 권리는 뿌리로부터 부정당하고 있다. 지금 미국식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딜 가나 풀뿌리 민중의 삶은 뿌리로부터 망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중들이 ‘잠자는 미녀’의 게임을 계속하면서 이런 절박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동안, 지구의 생태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 세계의 저명한 기상학자들은 금세기 중에 지구 기온이 적어도 5-8도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이 기온상승의 폭은 2억5천만년 전, 즉 이첩기(二疊紀)의 말, 지구상의 생물종 95%가 소멸되었던 당시의 기온상승 폭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는 비선형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 재앙을 불러올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을 넘는 대재앙일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갠지스강과 메콩강, 양자강을 포함한 아시아의 많은 강들에 물을 흐르게 하는 히말라야의 빙하들이 앞으로 40년 안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이 강들이 말라버린다면, 인류의 3분의 1이 의존하고 있는 쌀농사는 전면적으로 붕괴될 것이며, 세계는 대량 기아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상상하기도 두려운 이런 모습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우리의 미래이다. 이미 지구온난화 자체를 방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나마 온난화 과정을 좀더 지연시키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은 부시 행정부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고 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기적’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우리가 부시의 재선이라는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스운 노릇인지 모른다. 케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한들 사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리라는 희망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선거결과를 보면서 우리들 가운데 적지않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분노와 슬픔과 좌절은 비록 무너져가고 있는 세계일망정 아직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증거를 보고 싶어 하는 열망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결과에 한국인들보다 더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지 모른다. 이미 캐나다로의 이주를 결심하고 있는 미국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 같은 데서 엿볼 수 있듯이, 마이클 무어를 포함한 미국의 전체 유권자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선거 후 느끼는 좌절과 실망감은 당연하다고 해야겠지만, 그들 못지않게 많은 한국인들이 부시의 재선에 실망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당면한 북핵 문제에 관련해서 한반도에서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황폐화시킨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길들여진 생활방식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심하면 우리의 생명도 안전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지면, 다른 무엇보다도 안전 혹은 ‘안보’에의 욕구가 강화되고, 그런 상황에서 사회적 삶의 개선을 위한 우리의 정당한 정치적 행동은 위축되고,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적 표현과 실천은 제약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파시즘의 논리가 활개를 치기 쉽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는 상황에서 인간은 생명과 세계의 근원적인 신비를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경이로움’과 ‘놀람’을 차단하는 불모의 공간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가장 근원적인 자질이자 선천적인 권리, 즉 세계를 “시적으로 향수하는” 능력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파시즘 체제는 인간의 시적(詩的) 능력을 뿌리로부터 부정하는 체제이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미국에서―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만연하고 있는 배타적 애국주의 내지 쇼비니즘은 많은 경우 이른바 ‘미국식 생활방식’을 ‘안전하게’ 고수하려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욕망에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낭비를 끝없이 부추기는 이 ‘미국식 생활방식’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행위에 기초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주류 미디어와 헐리우드 영화가 끊임없이 제공하는 기만적인 정보와 이미지 조작에 현혹된 채 풍요로운 상품과 서비스가 제공하는 안락 속에 마비되어 있다. 무서운 것은 정치적·군사적 파시즘만이 아니다. 인간정신을 뿌리로부터 마멸시키고, 비판적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데 ‘안락에의 전체주의’(후지타 쇼조)만큼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약도 없을 것이다.

  비판적 상상력은 주어진 삶의 테두리를 넘어 대안적인 삶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의 진상을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식 생활방식이 대변하는 산업문명은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가장 기초적인 사실에 철저히 눈을 감고 있다. 경제학은 자연자원이 조만간 고갈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구 생태계가 오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허황한 수사일 뿐, 진심으로 이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 정치, 언론, 교육, 학문, 의료는 거의 없는 게 아닌가.

  이런 상황이니만큼, 예컨대 고령화 시대에 대한 대책으로서 국가적인 출산장려 정책의 필요성이 말해질 때,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드문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좁은 땅에 5,000만이든 6,000만이든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논리가 어떻게 생태적 수용능력이라는 근본한계와 조화될 수 있는지, 마땅히 물어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현실인 것이다.

  비단 고령화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거의 모든 현안의 핵심이라고 흔히 생각되고 있는 경제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즉, 현재 경제가 날로 어려워지는 것은 누구나 실감할 수 있는 현실인데, 여기서 불황의 주요 원인이 소비의 위축현상이라는 진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정말 소비가 활성화된다면 한국경제가 안정될 수 있는가. 그리고, 소비가 활성화되고, 고도의 성장이 다시 실현된다면 그것은 결국 생태적 파국을 앞당긴다는 의미일 텐데, 그러면 그런 경제는 언제까지 지속이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지금보다 경제규모를 대폭 줄이고,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생활방식으로의 전환이 장기적인 경제안정을 위한 올바른 길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까지 있어온 산업경제의 추진방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 즉 어렵더라도 소농 중심의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지역 분권적 ‘태양에너지 경제’ 시스템으로 가려는 노력으로 방향전환을 할 때만 비로소 장기적으로 희망이 있는 사회로의 길이 보일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의 이른바 국가적 현안이라고 하는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과제를 정당하게 해결하고, 따라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우리에게 지금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보다 더 절박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도, ‘현실주의’의 지배 밑에서 이러한 질문이 제기될 만한 공간은 계속해서 봉쇄당하고 있다.

  어떤 각도에서 보든, 지금은 암울한 시대이다. 경제성장, 개발을 통하여 세계의 빈곤과 불평등 구조가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기업가와 정치 지도자, 교육받은 엘리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대중 역시 경제성장과 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때 세계가 알아주는 고도 경제성장을 기록해왔던 한국에서 이제 많은 사람들은 불황기의 고통에 직면하여 ‘개발독재’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면서, 경제를 살리는 일 이외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개혁 프로그램도 중단되거나 보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성장을 위해서 민주주의는 미루어도 된다는 개발독재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한때 한국사회는 가난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된다는 논리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도 한참을 통과한 이 시점에 이르러 경제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보류해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듣게 되었다.

  결국, 경제성장, 개발, 산업화는 그것이 진전되면 될수록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본래 경제적 불평등, 즉 빈부격차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또한 동시에 경제성장은 기왕의 경제적 불평등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대전제는 경제적 자립과 독립성을 가진 시민들의 존재, 즉 경제적 민주주의라는 기초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경제위기는 본질적으로 경제성장의 둔화가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본질은 민주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청년 실업자가 나날이 증가하고, 서민가계의 회복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다른 한편에, 어마어마한 떠돌이 자금이 투자될 곳을 찾아 헤매고, 해외여행과 해외송금액이 폭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사회의 부가 극도로 편중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이다.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해묵은 논쟁은 이런 상황에서 부질없는 말놀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사회는 경제성장이라는 유령에 붙들려, 불황을 타개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한국판 뉴딜정책, 즉 대대적인 환경파괴에 나서려 하고 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우리가 믿을 데는 정말 ‘기적’밖에 없는가.

  그러나, ‘절망 속의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세기는 비극과 재난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낸 시대이기도 하였다. 시베리아의 유형지나 나치의 수용소와 같은 차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혹독하고 처참한 역경 속에서 끝까지 인간적인 위엄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구든 ‘절망 속의 희망’에 대해 언급해왔다.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 부시 재선이라는 서글픈 사태를 보면서 미국의 민중사가(民衆史家) 하워드 진은 이러한 어둡고 불길한, 불투명한 상황에서 우리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의 짧은 에세이를 썼다. 그 에세이의 말미에서, 그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방식일지라도 실천적 행동을 한다면, 우리가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다음에,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미래는 현재의 무한한 연속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비타협적으로, 인간이라면 마땅히 살아야 한다고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산다는 것 자체야말로 찬란한 승리일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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