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79호 2004년 11-12월호    

 

  도롱뇽 소송 재판부에 올리는 탄원문

   김곰치

 

  존경하는 재판장님,

  법치(法治)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는 참으로 어려운 직분에 임하시느라 밤낮으로 애쓰는 재판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부산시 부산진구 연지동에 거주하는 34세 젊은이입니다. ‘김곰치’라는 필명으로 10년 가까이 글쓰기를 해왔는데, 호적상의 이름은 김경태(金京兌)입니다.

  지난 11월 4일, 그러니까 나흘 전의 일입니다.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열흘째 단식중인 지율스님을 찾아갔다가 세간에 ‘도롱뇽 소송’이라 알려진 이번 재판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노심초사하는 스님을 보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을 했고, 제 정직한 마음을 담은 탄원서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스님과 저의 관계에 대해 간략히 밝히고자 합니다. 2002년 이른 봄, 한 잡지사의 부탁을 받고 북한산 관통터널 문제를 취재하다가 우연히 스님을 만났고,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첫 인연이었습니다. 작년 봄, 시민들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초록의 공명’이란 천성산 산행 행사에서 스님을 다시 만났고, 그후에도 인연이 이어져 몇차례 더 뵈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추석연휴 어느 날, 부산시청 앞에서 삼천배 기도수행중인 스님을 뵙고 더는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제 인생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갑자기 늘어나 스님의 신상이나 천성산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나흘 전, 약 1년 만에 스님을 다시 뵌 것인데, 제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너무 달라 놀랐습니다. 사람이 줄어들기라도 한 듯이 몸피가 작아져 있었습니다.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고는 작별인사를 드리며 스님의 어깨를 잠깐 안아드렸는데, 마치 병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 같았습니다. 단식도 자주 하면 길이 드는지 스님의 말씀은 너무 유려하였고 수행을 오래 한 분 특유의 강단이구나 싶었지만, 어깨에 손을 짚었을 때는 뼛속의 영양분까지 길어올려 하루하루 견디고 있구나, 하고 더럭 겁이 났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 며칠만 더 단식이 이어지면 스님의 뼛속은 대나무처럼 텅 빌 것입니다. 저의 이런 느낌이…주관적인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과도한 것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천성산을 살려달라는 스님의 호소에 저는 공감을 해온 편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분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려운 형편에 처하면 심리적 탈출구라도 찾게 되듯, 군대시절에 저는 때때로 불경을 펼쳐보았는데, 구도자가 성불하기 위해 독수리에게 자기 한쪽 팔을 잘라 던지기도 하고 “이번 세상에서는 부처 되긴 틀렸다!” 하며 벼랑에서 몸을 던지는 등의 이야기를 읽고는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들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치 않는구나, 한 개체의 생명이 멸할 뿐, 자기 속의 어떤 본유의 생명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라고 믿기에 이리 과감할 수 있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가 경전 속에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정말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네 인생은 절망에 이르는 긴 우회로를 헤쳐 걷는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에게 진리만을 추구할 용기는 없었지만, 사랑과 지혜의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는 그들의 무서운 집념만은 흠모하고 싶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지율스님의 무모한 단식수행을 볼 때도, 저는 그런 옛 수행자들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번에 시청 앞에서 뵌, 다시 단식을 시작한 지율스님은, ‘초록의 공명’ 행사 때 보던 것처럼 너무도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스님은 커피를 좋아하십니다. 어느 날 ‘초록의 공명’ 행사 때도 하루 일정을 다니는 동안 석잔의 커피를 달게 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 좌정한 스님께 다른 손님이 와서 저 혼자 살짝 자판기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몇모금 남은 것을 무의식결에 들고 왔는데, 스님은 바로 “혼자 커피 마시네” 하시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커피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드실 수 없을 테고요…”라며 미안해 했는데, 스님은 “왜 못 마셔” 하더니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얼결에 잔을 건넸더니 코로 가져가 한참 흠향만 하시고는 “역시 자판기 커피가 맛있어”라며 잔을 돌려주십니다. 저는 이런 분이 전설 속의 구도자와 같다고 하기가 도무지 힘들었습니다. 작은 물건과 미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아기자기하고 아이 같은 고운 마음씨를 가진 누이 같은 분인 것입니다. 

  천성산을 지키겠다고 수차에 걸쳐 목숨을 건 단식을 한 지율스님을 저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정말 지금의 노선대로 터널이 뚫리면 천성산의 늪이 마르고 도롱뇽 등 많은 생명체가 죽음에 몰리게 된다고 스님은 정말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설사 지금과 같은 노선의 터널공사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해도, 국책사업을 제 목숨을 바쳐 중단시키거나 크게 수정하게 할 수 있다고 정녕 믿는 것일까? 어디서 그런 무서운 믿음이 나오는 것일까?

  제 속에는 그와 같은 믿음의 자리가 없기에, 지율스님이란 분은 제게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어떤 부모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야, 어떤 훈육을 받으며 자랐어야, 청소년기에는 어떤 책을 읽었어야, 어떤 친구와 우정을 나누었어야, 어떤 훌륭한 스승을 만나 무슨 귀한 가르침을 받아야, 어느 누구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잃고 지독하게 마음 아팠어야, 하여 자신의 마음을 궁극까지 탐구하겠다고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얻어가는 피 흘리는 정신의 수련을 해야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는, 제 판단과 의지를 믿고 온몸을 던지는 그런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요량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지율스님이 너무나도 먼 존재로 여겨질 때면,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는 그저 외로워지고 맙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어쨌든 이와 같은 연유들로 저는 이 탄원서에 스님이 줄기차게 하신 그간의 주장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주장을 제것인 양 한다면, 이 글은 가식적인 탄원서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쳐 스님의 단식은 열나흘째(58+14일째)입니다. 환경부, 한국철도시설공단, 환경단체 등 이 3자가 함께 ‘전문가 조사’를 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환경부가 단독으로 2박 3일 현장조사를 하고 터널공사가 천성산의 습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재판장님께 제출했기 때문에 이번 단식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약속파기’ 문제는 당장의 한 직접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현행 노선대로 터널공사가 강행되면 천성산 자연환경이 크게 훼손된다고 스님은 극단적인 저항과 함께 몇년째 줄기차게 주장해 오셨고 지금의 단식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이번에 환경부의 의뢰로 현장조사를 한 지질전문가, 지하수전문가, 습지전문가 등 3인도 그간 축적된 연구문헌을 충분히 검토하고 전문직의 자존심을 걸고 “천성산 습지는 토양수와 강수에서 기원하고, 지하수와 습지 사이에 불투수층이 있어 터널공사로 습지가 영향받을 가능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놓은 것으로 저는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선 그렇게 믿고 싶어도 조사결과 요지를 신문 지상을 통해 읽으며 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년 가을, KBS의 환경스페셜팀이〈다시 쓰는 환경영향평가서〉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영했는데, 그때 저는 어느 지질 전문가가 역시 전문직의 자존심을 걸고 동래단층과 양산단층이 산 밑을 지나고, 또 지금의 고속철 계획노선을 자르듯이 법기단층이 지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단층이 발달한 지질에는 파쇄대가 형성돼 지하수가 풍부하기 마련이고, 산 전체적으로 물의 유통이 아주 원활하다는 것을 그래픽으로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양편의 전문가들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저는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질과 지하수 문제를 둘러싼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경우, 혹자가 주장하듯이 시추검증으로 천성산의 불투수층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만이 천성산을 둘러싼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추 자체가 천성산 늪지를 훼손시킨다고 환경단체가 반대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생각건대, 설사 몇 군데를 시추한다고 하여도, 십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천성산 터널 전체를 감싸야 할 그야말로 거대한 불투수층을 제대로 조사했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이런 의구심이 미리부터 듭니다. 시추검증을 한 몇 특정 지점은 불투수층의 밀도가 높아 터널공사가 산정 습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이 날지 몰라도, 시추검증 지점에 속하지 않는 훨씬더 광대한 곳에서는 고지의 습지까지 닿아있는 수없이 복잡한 지하수의 우회로가 형성돼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천성산의 습지가 겨울에도 얼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지하수가 습지까지 물을 대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환경단체의 주장은 시추검증을 할 필요도 없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알 수 없다는 기분에 빠지고 맙니다. 터널공사를 원안대로 해나가도, 총탄 열발을 맞고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파트 14층에서 떨어져도 찰과상 외 다른 상처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터널이 용케 산의 굵직한 지하수 줄기를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도박적인 기분마저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정말 천성산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일단 뚫어보고 어느 정도 시일을 두고 기다렸다가 산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그 답을 알 수 있는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한 미약한 작가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탄원서를 쓰는 입장에서 재판장님께 용기백배하여 말씀드려 본다면,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저로선 누구의 말이 맞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수없이 반복해 확인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어떤 일방의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결국 이 문제에 멀찍이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도 눈앞이 번쩍 하는 듯한 어떤 깨달음의 순간은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해 하나의 커다란 의혹입니다. 어느 전문가의 말이 맞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데, 천성산 문제를 둘러싼 양 당사자들은 진실로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또 저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떻게 땅속의 일을 환히 알 수가 있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안을 놓고 팽팽히 의견이 갈릴 때, 누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누가 전적으로 틀리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밖으로는 강하게 주장을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진실 하나는 천성산을 뚫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래, 사실은 누구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닐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양측이 제출한 산더미 같은 자료와 보고서를 사심없이 읽어내고 가장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재판장님도 인간의 자리에 속한 분이기에 “모른다”라는 큰 진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하여 우리 모두 소리높여 외쳐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 우리는 모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껏 해온 이야기와 좀 다른 차원에 속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 인간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모른다”라는 너무나도 강력한 진실에 힘입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난 여름 청와대 앞에서 지율스님의 단식이 50일을 넘자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죽음이 두려워 단식을 중단하라고 호소했을 때, 지율스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가 주었는지 왜 내가 받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생명, 어쨌든 내 속에 들게 된 그것이 자라나 지금의 나로 있는 것, 그러니 내가 죽고 싶대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이 탄원서를 읽는 재판장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이 순간 이렇게 엄연히 있음, 이 사실, 이 자각이 참으로 신비스러운 생명현상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탄생이 어째서 전적으로 가능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한 개체의 죽음에 이를 때의 그 현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지 진정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게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지 모릅니다. 정말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가 과연 인간답게 죽을 수 있을까요? 제 마음에 떠오르는 한 죽음의 풍경일 뿐이지만,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마지막 한방울의 생명력까지 쥐어짜내 알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의 문을 두드리듯 어떤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죽을 수 있는 용기마저 낼 수 있는, 물론 그럼에도 마침내는 그 세계를 도무지 알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절대생명이라고 할 우주 본유의 큰 존재에 자신을 의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이 순간도 신비롭지만, 죽음 자체도 단지 공포스럽다기보다 너무 신비로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천성산 터널공사라는 아주 현실적인 사안을 두고도, 인간의 자리에 서서 그런 큰 차원의 겸손한 태도의 표명으로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설사 전문가가 그렇게 말하더라도, 결코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잘은 모르지만 어떤 여러가지 이유에서 터널을 뚫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고, 또 잘은 모르지만 터널을 뚫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성산의 경우, 터널을 뚫어보지 않는 한 산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우리 모두 자신의 진실을 고백하고, 그런 고백이 있은 후, 다시 머리를 맞대고 숙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단 6개월, 아니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길지도 않을 그 숙의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제가 재판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뿐입니다. “모른다”라는 인간의 자리에서 누구도 벗어나려 하지 말라고, 그런 만용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저는 이런 태도가 인간 사고의 순수한 힘이나 정신에 깃든 인식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작년 봄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는 천성산 화엄벌에 올라 지율스님과〈국제신문〉의 한 기자분과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님이 한 이야기를 재판장님께 마지막으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천성산’이, 그런 산의 이름이, 원효스님이 이 산에 드셔서 화엄강의를 하시고 천명의 성인을 배출해냈다고 붙여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율스님은 언젠가 다른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어느 보름달 환한 밤에 이 화엄벌로 올라와본 적이 있다고 하셨고, “지금 낮의 정경과는 다른, 아주 환상적인 분위기가 펼쳐져 있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덧붙이시더군요. “때때로 혼자 화엄벌을 지날 때, 보름달 아래 원효스님이 젊은 스님들을 모아놓고 화엄의 진리를 설하시는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귀에도 문득 천여년 전 원효스님의 명석한 사고, 탁월한 직관, 그리고 만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이 청정무구한 천성산 화엄벌에 모여 앉아 원효스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젊은 스님들의 맑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도 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춘원 이광수의《원효대사》라는 장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 그 정경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계곡의 물도 법문을 하고, 나뭇가지 위 작은 새도 법문을 하고, 흙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깨진 막사발도 법문을 하신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천성산에 깃들어 사는 미물들도 법문을 설할 입이 있을 것이고, 입이 있으니 듣는 귀도 있을 터, 어딘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잠이 깬 보름달빛 속의 도롱뇽 몇마리도 저 스님네가 무슨 말씀 하시나 하고 젖은 피부의 귀를 활짝 열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저는 천성산 화엄벌이란 지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홀연히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큰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지난 1년간 지율스님을 만나지 못하고 생활에 쫓기며 살 때도 천년 전 그 화엄벌의 정경만은 마음속에 자주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시로 기뻤고 행복하였습니다. 그런데…그 천성산 화엄벌 밑을 뚫는…고속철도 터널의 이름이 ‘원효터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대체 그것은 어떤 역사적 감각의 소산인가, 하고 너무 서글펐습니다. 이 사실을 원효스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는지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 국민의 모두가 경제적 수익만을 추구하고, 국가기관의 부서를 포함한 거의 모든 집단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져든 지금의 현실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이 나라 산천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저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겁이 납니다. 설사 습지가 마르고 계곡의 물이 끊기고 도롱뇽이 사라지더라도 고속철이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직선노선의 터널공사가 무조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압니다. 천성산말고도 도롱뇽이 잘 살고 있는 여러 국립공원 내의 인적 드문 곳이 있으니,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천성산이 좀 희생할 수 있는 문제 아니냐, 하고 이렇게 결론내린 분들도 상당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균열을 내려는 몇사람들의 시도는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났습니다. 현실의 벽은 너무도 강고합니다.

  저는 제 경험과 지식의 영역 안에서 탄원서를 썼을 뿐이지만, 한동안 재판장님은 저보다 천배 만배 현실의 복잡하고 깊은 연관관계를 다 살펴보아야 하는 엄청난 정신적 노동을 치르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역사적인 재판에 임하는 재판장님의 사명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을 것 같습니다. 하여 재판장님의 하해와 같은 큰 지혜의 판결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어떤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판결문 하나하나에 담긴 재판장님의 고뇌어린 마음만은 같은 인간으로서 저 역시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늘 청강하시기를.

2004년 11월 7일 일요일 밤    
탄원인 김곰치(김경태)   


  김곰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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