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70호 2003년 5-6월호    

 

  핵폐기물과 수소혁명에 관하여

  "최선의 선택은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이다"

   이필렬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열화 같은 성원과 지지를 받으며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지만 적어도 에너지정책 면에서는 새 정부나 옛 독재정권이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젊고 민주적이고 토론을 좋아하는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핵발전과 관련해서는 새 대통령도 구태를 전혀 벗지 못했다. 아니, 4월 21일과 23일 일간지에 게재한 담화문을 보면 새 정부가 한술 더 뜬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2월 4일 김대중 정부는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후보지 네곳을 공고했고, 다음날 건설이 시급함을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날부터 후보지로 선정된 네곳에서는 주민들이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왔다. 주민들의 주장은 종종 지역이기주의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핵폐기물 처분장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과 논쟁의 근본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에너지정책에 있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에너지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는 미뤄둔 채 핵폐기물 처분장이 없으면 전기가 끊어진다는 '협박'과 이를 받아들이는 곳에는 보상금을 주겠다는 '회유'를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 핵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두개의 정부 담화문은 진정성도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조차 왜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월 5일 정부 담화문의 골자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핵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지 못하면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기를 얻지 못해서 산업과 사회가 마비되는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이 이토록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건설을 허락하는 지역에는 우선 3,000억원을 지원하고 그후에도 계속 지원금을 주는 등의 대대적인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원자력발전이 안전하고 에너지를 값싸게 안정적으로 공급한다는 주장과 외국에서는 모두 핵폐기물 처분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핵폐기물에는 저준위 핵폐기물, 중준위 핵폐기물,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 핵연료)이 있다. 핵폐기물 처분장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모두 처분하는 곳이다. 현재 정부에서 계획하는 핵폐기물 처분장은 중 . 저준위 핵폐기물 영구처분장과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핵폐기물) 임시저장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원자력발전을 우리보다 훨씬 오래 한 나라 중에서도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운영하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정부에서는 마치 원자력발전을 오래 해온 나라는 모두 핵폐기물 처분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적어도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에 관한 한 사실과 너무 다른 것이다. 50년 가까이 원자력발전을 한 영국과 미국조차도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들 나라는 수십년 전부터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아직도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독일은 1979년부터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추진해왔지만 25년이나 된 지금까지도 조사와 논의단계에 머물러 있다. 2000년 10월에는 정부에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앞으로 10년 안에 다각적인 검토와 논의를 거쳐서 처분장을 선정하겠다고 한 상태다. 우리 정부에서, 핵폐기물 이야기만 나오면 모범사례로 선전하는 스웨덴조차도 중준위 . 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만 있지,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은 없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이야기하듯이 중준위 . 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이 원자력발전을 하는 대부분의 나라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운영하는 나라는 여럿 있다. 프랑스, 일본, 미국, 영국, 스웨덴, 스페인 등에 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준위 핵폐기물 처분장을 운영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중준위 핵폐기물은 저준위 핵폐기물보다 방사능의 정도가 훨씬 높다. 따라서 처분에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준위 핵폐기물은 임시저장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정부에서는 저준위와 중준위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취급하고 있고, 이것들을 모두 섞어서 처분하는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정부의 담화문 내용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인지 드러난다. 담화문에서는 원자력발전을 오래 해온 대부분의 나라가 핵폐기물 처분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중준위 핵폐기물 처분장도 없고 방사능의 정도가 가장 낮은 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만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원자력발전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기만 하면 원자력이 에너지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2월 5일과 4월 20일경에 발표한 담화문에도 원자력이 장기적으로 값싸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이 또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쓰이는 연료인 우라늄도 땅속에 묻혀있다. 당연히 우라늄도 화석연료와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제우라늄협회에서는 현재와 같은 경제성을 지닌 우라늄은 앞으로 50년 쓸 것이 남아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우라늄을 다 쓰고도 계속 원자력발전을 하려면 경제성이 크게 떨어지는 우라늄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 가격은 현재의 2-4배나 된다. 지금도 미국의 월드워치연구소나 유럽의 여러 연구소에서는 원자력의 경제성이 화력발전의 경우보다 크게 떨어진다고 말하는데, 원자력전기의 "가격이 저렴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저렴한 기간은 50년 정도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원자력에 계속 의존하고 대대적으로 원자력을 확대한다면 그후에는 아주 비싼 값으로 원자력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원자력의 경제성에 대한 정부의 주장과 구미 여러 연구소의 주장이 왜 큰 차이를 보이는지 생각해보자. 원자력발전의 원가에는 연료비, 운영비뿐 아니라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한 후 관리하고 해체하는 비용과 핵폐기물 처분비용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이중에서 연료비와 운영비는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이 되지만 발전소 해체비용과 핵폐기물 처분비용은 정확한 수치를 얻기 어렵다. 추정비용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정부에서 발표한 원자력발전소 해체비용은 1기당 1,600억원인데 이것이 적정한 비용인가에 대해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원자력발전소 해체비용과 비교할 때 1,600억원은 너무 적다. 국제에너지기구에서 2001년에 발표한 OECD 국가의 원자력발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고리 1호기 해체비용은 약 7,000억원에 달한다. 다른 나라의 발전소의 경우 해체비용이 가장 낮게 책정된 것이 100만킬로와트를 기준으로 할 때 2,400억원이다. 1,600억원은 이것보다도 낮은 것이다.

  정부에서는 발전소 해체비용과 핵폐기물 처분비용으로 매년 기금을 적립하고 있고, 지금까지 3조원 이상 적립했다고 말한다. 이 기금이 해체비용과 핵폐기물 처분비용으로 충분할까? 독일은 지금까지 약 35조원을 적립했다. 물론 우리보다 원자력발전소가 1.5배 더 많고 원자력발전을 더 오래 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이 적립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10배 이상 난다는 것은 한국이 원자력발전소 해체비용과 핵폐기물 처분비용을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낮게 책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부에서 말하는 원자력전기의 저렴함은 바로 이러한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2월 4일 핵폐기물 처분장 후보지 네곳이 발표된 후 지역주민들이 반대운동을 벌여왔는데, 느닷없이 4월 21일에 또다시 문화부장관까지 연명한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갑자기 담화문이 발표된 배경이 어디 있는 것일까? 우선 정부의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강행의지의 표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담화문의 기본 내용이 2월의 첫 담화문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다른 점은 '양성자가속기 사업과의 연계'라는 말이 들어가있다. 담화문이 나온 또 한가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처분장과 양성자가속기가 함께 들어서게 해주겠다는 것, 양성자가속기까지 얹어서 더 크게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양성자가속기가 그토록 매력있는 것일까? 지역주민 중에는 양성자가속기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정부나 원자력연구소에서 아주 좋다고 하니 그렇게 믿는 사람이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다만 그것이 핵폐기물을 가지고 연구도 할 수 있는 기기라는 것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부 담화문에는 "양성자가속기 사업은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 NT(나노기술) 등 첨단산업과의 연계가 커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외국의 가속기 사례를 아무리 참조해봐도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양성자가속기를 얹어준다는 말이 지역주민에게는 더 큰 모욕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정부는 돈이면 모두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지역주민들을 그 정도로만 보는 것일까? 양성자가속기의 첨단산업과의 연계 운운은 독재정권 시절 원자력발전소가 그냥 큰 공장이고 그것이 들어서면 지역이 발전하게 된다고 선전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아직도 정부는 돈만 뿌려주면, 그리고 선전만 하면 뜻대로 된다고 보는 것 같다. 이는 독재시절의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역주민은 그 시절의 주민이 아니다. 그때보다 훨씬 깨어있고 이성적이고 민주적이다.

  양성자가속기는 핵폐기물 중에서 강한 방사능을 가지고 있고 붕괴에 비교적 긴 시간이 걸리는 세슘, 테크네슘, 요오드, 아메리슘, 큐륨, 넵투늄 등을 처리해서 방사능이 줄어드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짧게 만드는 일도 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이들 세슘 등을 양성자가속기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준위 핵폐기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이 분리과정은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와 비슷한 화학적 분리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양성자가속기가 들어서면 핵폐기물 재처리도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재처리는 꽤 위험하고 다량의 액체 핵폐기물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물론 양성자가속기 처리를 위해서 세슘 같은 핵종을 분리할 때에도 해당된다. 국제에너지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양성자가속기로 핵폐기물을 처리한다 해도 전체적인 방사능 줄임효과는 크지 않고 오히려 처분비용만 크게 높인다고 한다.

  양성자가속기가 이러한 장치로서 가동하려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다량의 중 . 저준위 핵폐기물이 만들어지며, 효과는 크지 않은 반면 비용은 훨씬더 든다면, 정부에서는 양성자가속기를 한국에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놓고 먼저 국민의 의견을 물었어야 했다. (정부는 이미 1991년에 한국 내에서는 재처리를 결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4월 21일 담화문에서 정부는 국민의 의견을 묻는 것은 고사하고 양성자가속기가 정보기술, 생명공학, 나노기술까지 몰고와서 지역발전에 굉장한 기여를 한다고 크게 왜곡된 내용을 발표했다. 정부에서는 아직까지도 돈으로 지역주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는 구시대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4월 담화문이 발표된 후 핵폐기물 처분에 관한, 한 텔레비전 토론에 패널로 참가했다. 거기에는 원자력연구소의 핵폐기물 연구자도 패널로 나와 정부에서 추진하는 핵폐기물 처분장이 안전하다는 주장을 폈다. 토론 말미에 재생가능 에너지를 개발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원자력연구소에서 나온 연구자는 재생가능 에너지로 많은 양의 전기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론을 펴면서 수소에너지 연구에 장래성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수소에너지 이야기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퍼져가고 있다. 원자력발전을 하는 사람도 태양에너지나 풍력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지만 수소는 꽤 괜찮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레미 리프킨의《수소혁명》이란 책도 번역되어 나왔고, '수소경제'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수소혁명, 수소경제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한다고 떠들 무렵 '원자력혁명'이나 '원자력경제'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에너지를 모두 원자력으로 얻는다는 환상이 널리 퍼진 일이 있었다. 당시에 원자력경제 또는 원자력혁명이라는 말이 있었다면 원자력 찬양자들은 이 말을 아주 즐겁게 사용했을 것이다.

  수소혁명, 수소경제란 말은 바로 원자력혁명에서 원자력이 에너지 시스템의 중심이 되는 것과 같이 수소가 에너지 시스템의 중추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소를 자동차 연료로 쓰고, 수소로 가정과 대형 건물에서 전기를 만들고 난방을 하고, 공장에서도 상품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수소로부터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오는 것은 분명하다. 전기생산이 소규모 . 분산적이 될지 모르고, 이는 중앙집중적인 에너지 공급 시스템의 변화와 함께 사회체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다. 수소는 재생가능 에너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소는 기존의 에너지로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뿐만 아니라 원자력을 가지고도 만들 수 있는 것이 수소이다. 석유 등은 분해하면 수소가 얻어지고, 원자력으로는 물을 전기분해해서 수소를 얻을 수 있다. 수소는 말하자면 에너지 저장물질일 뿐 우리가 영구히 쓸 수 있는 태양에너지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자원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수소경제나 수소혁명은,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몰아내고 재생가능 에너지로 100% 에너지전환을 실천하고 이 전환에 담긴 생태적 . 사회적 . 경제적 의미에 대해서 역설하는 에너지전환 운동가들의 담론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딕 체니가 중심이 되어서 만든〈미국 에너지 보고서〉에는 "수소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로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자력, 태양에너지, 수력, 풍력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로도 만들 수 있다"고 나와있다. 딕 체니 등도 한국의 원자력 찬양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자력을 재생가능 에너지로 분류하고 싶어하는지 아니면 표현상의 실수인지 원자력을 재생가능 에너지로 부르지만, 이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원자력으로도 수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수소 그 자체를 가지고 혁명이니 경제니 하는 말을 붙여서 엄청난 변화가 올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예전의 원자력의 경우와 같은 환상과 유포리아를 퍼뜨릴 수는 있겠지만, 수소만 가지고는 진정으로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물론 에너지전환에서 수소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소는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에서 부분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에너지 저장물일 뿐 수소 자체가 결코 혁명을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수소혁명과 수소경제가 굉장한 것인 양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이 지닌 깊은 의미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이 만일 에너지전환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다면 수소혁명에 대해 그렇게 크게 떠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수소혁명》저자 제레미 리프킨도 종종 재생가능 에너지로 모든 에너지를 공급하기는 어렵다는 회의론을 편다. 에너지전환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는 이야기다.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은 생태적으로는 기후변화를 해결하고, 사회적으로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국제적 분쟁과 전쟁을 해소하고 핵무기 개발의 바탕을 제거하며, 경제적으로는 선진 산업사회의 구조적 실업을 해소하고 지방의 경제와 정치를 강화한다.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중동의 걸프전쟁, 체첸전쟁, 나이지리아의 내전 같은 전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에너지전환은 세계평화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수소 예찬자들은 수소만 생산해서 수소만 이용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편향의 결과 에너지의 효율적 이용이란 측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된다. 제레미 리프킨은 주택에서 태양광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한 후 이것으로 수소를 만들어서 연료전지를 돌려 다시 전기와 열을 생산하고, 이들 주택이 서로 연결되어 '월드 하이드로진 웹'을 구성하는 '환상적'인 시스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시스템에서 주택들은 독립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여기에 중앙집중적인 에너지 공급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웹을 관리하는 관리자만 필요하다. 거대한 송전회사, 배전회사가 필요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꽤나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토록 수소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리프킨의 경우 모든 에너지원은 수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바이오매스도, 풍력도, 수력도 모두 수소로 변환되고, 연료전지를 통과하면서 전기와 열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는 화석연료도 거부하지 않는다. 천연가스로도 수소를 만들고 석탄으로도 수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수소만 웹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양광전기로도 분산적인 전기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 수소로 변환시켜 연료전지를 통과시키지 않고 태양빛으로 만든 전기를 바로 쓰고, 남거나 모자라는 전기는 재생가능 전기 네트워크를 통해서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전기를 직접 쓰고, 바이오매스를 가지고 직접 열을 만들어 쓰는 것이 수소로 변환시켜서 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물론, 수소로 변환했을 때 비록 효율은 크게 떨어지지만 다른 장점은 있다. 석유나 가스와 같이 아무때나 필요할 때, 저장되어 있는 수소를 연료전지에 통과시켜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 때문에 모두 수소로 변환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근대주의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자연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간섭해서 손에 넣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 강박이 오직 수소로만 변환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이 항상 관리가능한 것으로 사람들 곁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수소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수소혁명은 일견 소규모 . 분산적이지만 수소와 연료전지만이 존재하는 모노컬쳐에 바탕한 수렴적인 것, 근대주의적인 것이다. 거기에서는 바이오매스로 펠렛을 만들어 불을 때고, 바이오매스로 열병합발전을 하여 전기와 열을 얻고, 식물성 기름으로 자동차를 굴리고, 땅속에서 더운 기운과 찬 기운을 끌어내서 집을 데우고 식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는 먼저 수소로 변환된 다음에 연료전지를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수소가 훌륭한 에너지 저장물질이고 저장만 되어있으면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재생가능 에너지원이라고 해서 그렇게 못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광발전기와 풍력발전기, 바이오매스 열병합발전기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으면 어느때나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비상시에 대비해서 전기저장 장비까지 갖추어놓으면 항상적으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낮에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태양빛에서 에너지를 얻고, 밤에 해가 들어갔을 때는 바람으로부터 얻고, 바람도 안 불 때는 바이오매스로 에너지를 얻는 시스템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수소혁명의 찬양자들은 수소만 에너지 저장물질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수소만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성능 축전지도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 주택에서 수소를 저장하려면 상당한 장비와 공간이 필요하다. 축전지로 에너지를 저장할 경우도 공간과 비용이 든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수소혁명은 기존의 에너지 공급자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는 것 같다. 조지 부시도 수소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원자력 찬양자들도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수소를 화석연료로도 만들 수 있고 원자력으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소공급 인프라도 석유나 천연가스 공급 인프라와 겹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소혁명 찬양자들이 선의를 가지고 수소혁명을 예찬한다 해도 자칫 이들 기존 에너지 공급자들의 술수에 말려들어갈 수 있다.

  수소의 경우와 달리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은 기존 에너지 공급자들이 의혹과 우려의 눈을 가지고 대한다. 이 전환은 그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재생가능 에너지가 퍼져갈수록 점점더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재생가능 에너지로 수소를 만들어서 저장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부분일 뿐 전체는 아니다. 수소혁명으로 가지는 않는 것이다.

  리프킨이 말하는 혁명적인 변화는 재생가능 에너지로 100% 에너지전환을 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재생가능 에너지는 매우 다양하고 전지구에 아주 골고루 퍼져있다. 이것들을 수소로 환원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슬기롭게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화석연료와 원자력이 쫓겨나고 새로운 사회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수소혁명이 아니라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100% 에너지전환이 되어야 한다. 


  이필렬 ―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방송통신대 교수.《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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