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65호 2002년 7-8월호    

 

  책을 내면서

  김종철

 

  결국 돈 이야기인가. 한달 동안 계속된 축구 열기가 가라앉을 때가 되자 이제는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운위되고 있다. 외국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높아졌고, 이것을 국운 상승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쉴새 없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국운 상승이란 구체적으로 세계시장에 한국상품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집약되고 있다. 축구도 성공했으니 이제는 경제도 4강에 못 오를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많은 부정적인 계기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경기는 재미있고, 유익한 점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을 웃음 띤 얼굴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보기에 유쾌했다. 전통적인 축구의 강호들을 잇달아 누르고, 예상 밖의 성적을 올리는 '우리' 팀 선수들의 활약을 보고 감탄하고, 열렬한 응원을 보내는 일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기쁨이었다. 그런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유난스러운 애국자나 민족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인간에게는, 아니 모든 목숨붙이들에게는, 자신의 생존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적인 영토감각이란 게 엄연히 존재한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의 삶과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땅에 대한 사랑은 실은 본능적인 사랑이며, 이러한 향토애 없이 인간의 생존도 문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른바 애국심이니 동포애니 하는 감정은 근본적으로 향토애를 뿌리로 해서 나오는 감정이고, 따라서 이것은 결코 비난받아야 할 감정도 아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 승부를 겨루는 마당에서 같은 동포들끼리 심리적 일체감을 느껴 '하나됨'의 경험에 쉽게 이른다는 것은 아무것도 신기할 게 없는 현상이다. 이미 현대사회에서 스포츠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한 육체적 활동을 동반하는 투쟁이자 유희이면서 동시에 소속집단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유지, 강화하는 데 특이한 효험을 발휘하는 일종의 '종교적 제전'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현대적 상황에서는 이미 다른 방법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기 때문에, 스포츠는 많은 국가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장려하는 '축제'가 된 것이다. .

  그런데, 지금 언론매체들은 이번 축구경기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이 '공동체'를 깊이 체험하였다고 ― 하고 있다고 ― 호들갑스럽게 떠벌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언어사용의 예를 보여줄 뿐이다. 공동체는 일시적인 흥분상태에서 형성될 수도,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는 스포츠를 통해서 고양되는 단순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현대세계에서 스포츠가 진정으로 살 만한 공동체의 성립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오늘날 자본과 국가의 적극적 장려 아래에서 번창하고 있는 스포츠는 진정한 공동체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희석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관건적인 메커니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는 혁명에 대한 열정을 잠재우는 유력한 도구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건의 소유와 권력의 확대를 위한 이해(利害)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호혜적 관계가 지배하는 삶, 다시 말해서 경쟁과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상호부조와 보살핌이 주된 삶의 원리가 되어 있는 공간이다.

  만일 한국의 언론들이 진실로 공동체에 관심이 있다면, 그래서 모처럼 월드컵 경기를 통해서 소생하였다는 공동체 감각을 진실로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동안 공동체가 파괴되어왔는지를 좀더 진지하게 검토해보려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그동안 철저히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존재"로 여겨왔던 새로운 세대들이 알고 보니 공동체에 굉장히 굶주려 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들이 정말 결핍을 느꼈던 공동체적 삶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체되어왔고, 어떻게 되돌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매체와 지식인들이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찬양하고, 공동체 의식의 '부활'에 감격해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의 결론을 '국운(國運)'이라는 개념으로 집약하고, 그리고 이때 국운 상승의 구체적인 의미가 '한국이라는 상품의 브랜드 가치'의 상승이라면,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란 결국 위선적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가 망가진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 지상주의 때문인데, 또다시 자본과 상품의 논리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따져보면, 문제는 축구를 둘러싼 열기가 아니라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그 열기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지적 무능력과 상상력의 빈곤이다. 무엇보다도, '국운'이라는 말부터 얼마나 치욕스러운 뉘앙스를 풍기는가. 이번 월드컵 경기를 통해서 우리는 또다시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외국인, 특히 서양인들의 눈을 통해서 보고자 하는 뿌리깊은 콤플렉스가 쉴새 없이 발현되는 모습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오로지 외국인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 이것은 따져보면, 서해 바다에 양이선(洋夷船)이 나타난 이래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왜곡해온 족쇄였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알게 모르게 유형무형의 박래품(舶來品)에 대한 선망과 강자숭배주의에 결합되어왔고, 그 결과 우리는 늘 자신의 땅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살지 않을 수 없는 자기소외를 강요당해왔다.

  서양의 언론들이 이번 월드컵 경기의 진정한 승자는 한국인이었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게 진정한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태도이다. 어떤 서양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인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또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의 발로였을 가능성이 크다. 분석, 평가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자신과 다름없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끊임없이 삶의 고통과 기쁨에 마주치며 살아가는 복잡하고, 궁극적으로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있는 한, 그리고 그러한 근원적인 존엄성을 공유하면서 대등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면, 상대방을 분석,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 그 결과에 따라 일정한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하게 평등한 관계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미적 평가의 대상도, 통치의 대상도 아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울 때 차라리 분노나 증오를 표시하는 것이 대등한 인간관계의 바른 표현법일 것이다.

  히딩크에 관한 이야기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가 우수한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서 축구선수로서의 자질에 관계없는 다른 인간적 요소들을 배제했다는 것이 널리 이야기되고, 우리도 이런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왜 지연, 학연에 얽매여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자탄하는 소리들도 많지만, 우스운 것은 우리가 히딩크라는 외국인이 한국의 지연, 학연을 고려할 아무런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그런 인간적 요소를 배제한 것은 그것이 축구를 위해서 소용없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지연, 학연이라는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가 그의 눈에 보였을 리도 만무하지만, 설령 보였다 하더라도 그에게 이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서, 물론 지연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으로 우리가 괴로운 세월을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런 요소를 우리의 삶에서 다 배제하고 그야말로 철저히 '합리주의적'으로 사는 게 과연 바람직하기만 할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히딩크의 합리적인 행동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오랜만의 공동체 체험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히딩크류의 합리성은 물론 축구를 잘 하는 데, 또 그밖의 많은 인간사의 경영에 필수적인 요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합리성이 모든 일의 일관된 원리가 될 때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경쟁의 원칙을 공정하게 적용함으로써 능력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고 응분의 보답을 받는 사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약자와 무능력자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이며, 극소수의 승자를 위해서 대다수가 좌절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구조를 타파하는 일이다.

  한국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축구시합의 진행에 따라 열광한 것은 남다른 민족의식이나 애국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는 깊은 소외와 구속과 좌절로부터 일시적이나마 큰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며칠 동안만은 지긋지긋한 시험도 점수도 과외도, 경쟁사회에의 적응을 요구하는 온갖 자잘한 규율과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한국의 '붉은 악마'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세계에 달리 유례가 없이 인상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은 한국인의 '저력'이니 민족적 역동성이니 하는 것으로 미화할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 사회에서 인간적인 손상이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되어왔는지를 암시하는 병리적인 증상이라고 보아야 할 측면이 큰 것이다. 승부를 가리는 경기에 사람의 마음이 자극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토록 이기고 지는 일에 극성스럽다는 것은 심리적인 균형과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반응이기 때문이다.

  또, 열광적 축제라고 하면서 이렇다 할 혼란도 일탈도 없는 "질서정연한 축제"가 가능했다는 사실도 한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법상으로 모순되는 두 개념이 양립할 수 있다는 희귀한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축제는 무엇보다 질서를 깨뜨리는 데서 성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에 어긋나는 축제가 가능했고, 그것도 매우 열광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열광은 대체 어떤 종류의 열광이었을까. 아마도 그 열광의 배후에는 암암리에 어떤 종류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외국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라는 소심한 계산 말이다. 이 경우 외국인은 이른바 선진국 사람들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콤플렉스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존재로 보지 않게 한다.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선택적이고, 심지어 차별적이다. 우리의 서양 콤플렉스와 강자숭배주의가 얼마나 기막힌 수준까지 와 있는가는 네팔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 겪은 참혹한 이야기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던 찬드라 구릉이 어느 일요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지 못했다는 죄 때문에 경찰에 연행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행색이 남루하고, 경찰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주거불명의 정신병자로 오인되고, 그후 6년 반 동안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 찬드라 구릉이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터무니없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우리가 찬드라의 이야기에서 큰 절망을 느끼는 것은 설령 경찰이나 정신병원에서 시초에 본의 아닌 오인이 있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여성이 적어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을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방치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찬드라가 수용되어 있던 병원 쪽에서는 얼마 있지 않아 이 여성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그래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 잘못 파악한 이름 ― 찬드라 고름 ― 이 법무부에 비치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 명부에 보이지 않는다는 컴퓨터 조회의 결과 때문에 다시 몇년을 허무하게 정신병원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찬드라 고름'이 '찬드라 구릉'을 잘못 발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섬세한 배려만 있었던들 이 여성과 딸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던 네팔의 가족들의 비극은 좀더 일찍 마감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야만주의는 차별을 바탕으로 출발하고, 차별은 타자를 절대적인 인격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상상력의 결핍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의 결핍은 개인적인 자질 이전에 우리 각자가 그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화 공동체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기인한다. 영어가 아닌 다른 변방의 외국어를 하기 때문에, 행색이 초라하다는 이유 때문에 함부로 한 인간을 재단하고, 정신병원에 6년 반이나 방치해 둘 수 있다는 것은, 뒤집어서 볼 때, 멀쩡한 단일 겨레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영어공용화가 외쳐지고, 영어를 위해서라면 아이들의 혀를 수술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투쟁적인 열기와 공격적인 자기주장이 넘쳐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찬드라 구릉의 일화는 꼭 외국인에 국한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다. 찬드라 구릉은 지금 이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모든 사회적 약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다. 축구경기장과 도시의 광장에서 태극전사와 대한민국이 소리높여 외쳐지는 동안에도 북한산도, 새만금도 망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로 더이상 되풀이하여 말하고 싶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토대 중의 토대인 농업과 농촌공동체가 괴멸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공동체는 공허한 수사로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면서 남들보다 앞서고자 하는 뿌리깊은 욕망의 구조, 그리고 그것과 결합하여 끝없는 성장, 팽창을 되풀이함으로써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경제 시스템, 거기에 매달려 있는 소비주의 생활방식 ― 여기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시도하지 않는 한 공동체 운운은 한갓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인류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시대이다. 지구온난화는 단순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가공할 사태로 이미 목전에 닥쳤다. 우리는 우리의 잔치판이 아무리 흥겨운 것이라 해도 우리가 탄 배가 타이타닉호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이상의 자기도취가 아니라 항로를 바꾸기 위한 협동적 노력에 온몸으로 가담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닌가.


  김종철 ― 본지 발행 겸 편집인. 영남대 교수.

녹색평론사  (02)738-0663, 0666  fax (02)737-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