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62호 2002년 1-2월호    

 

  창간 10주년 기념모임을 마치고

  변홍철

 

  '위  침통히 무겁고도 화안히 가벼운 한권의 책이 된
  재생종이는 이제 스스로 싱싱한 영혼이었다
  먼 숲의 바람과 새소리와 빛나는 향기와
  우람한 나무로, 그는 또한번 재생하였다
  이전에 무심히 분지르고 쓰러뜨렸던
  그 나무가 다시 내게로 푸르른 팔을 벌렸다

 

  조향미 시인이 녹색평론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쓴 시〈그 나무가 다시 내게로 팔을 벌렸다〉를 직접 낭송하고 있다. 지난 12월 8일, 대구 가톨릭근로자회관 강당에서 열린 '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모임'. 행사장을 가득 메운 2백여 독자들이 시낭송을 들으며, 녹색평론의 지난 10년을 함께 반추하고 있다.

  "비록 작은 목소리로나마, 녹색평론이 오늘의 주류문화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간의 정신적 연대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김종철 발행인이 지난호(통권 제61호)〈창간 10주년을 맞이하며〉에서 이렇게 회고한 바 있지만, 이 행사에 참석한 독자 한분 한분이야말로 그동안 그 '정신적 연대'를 함께 형성하고 성장시켜온 주체들이기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저마다의 감회가 결코 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녹색평론 지난호가 발행된 직후인 11월 중순부터 편집실에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는 독자들의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10주년을 맞게 된 것을 많은 독자들이 함께 기뻐하고 있음에 우선 감사하면서도, 그때까지 '기념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던 편집실 측으로서는 이어지는 문의에 조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들의 이같은 문의와 독려를 계기로,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11월 말부터 '창간 10주년 기념모임'을 기획하고 준비를 시작하게 되어 이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녹색평론은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현실에서는 지구상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은 물이 없습니다. … 그것이 비록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도 녹색평론이 오염되지 않은 물과 같은 맑은 정신을 앞으로도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녹색평론과 같은 귀한 잡지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처럼 고난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상을 향해 진리를 '외치는' 사명을 다하여 주길 바랍니다."

  반핵운동가인 김원식 선생과 '정농회' 고문 오재길 선생의 말씀에 이어, 그동안 각지에서 치열한 실천을 통해 땅과 지역에 뿌리박은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던 여러 분들이 축하와 아울러 당부와 가르침의 말씀을 해주셨다. 오랫동안 유기농업에 헌신해 오신 김영원 선생과 김성순 선생, 두밀리 자연학교 채규철 선생, 대구한살림의 천규석 선생, 전국귀농운동본부 이병철 선생 …

  특히 김성순 선생은 말씀 가운데 러시아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다차'의 예를 소개하면서, 우리사회도 모든 개인과 공동체들이 농업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깊이 인식하고 땅에 뿌리박은 건강한 문화를 회복해야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야만적인 광풍 속에서도 우리의 생존과 존엄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지 이번 호에 실린 김선만 씨의 글〈러시아를 받치고 있는 '다차'〉는 바로 이날 김성순 선생이 소개해준 자료이다.)

  "녹색평론이 변하지 않는 정신 속에서도, 그 형식과 방법에 있어 끊임없이 내적인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 주기를 바란다"는 이병철 선생의 당부도 마땅히 귀기울여야 할 말씀이었고, "우리 녹색평론의 메시지가 이 세상에 충분히 전파되고 그 이상이 실현되어, 10년쯤 뒤에는 녹색평론이 부디 문을 닫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천규석 선생의 '덕담'에도 참석자들은 모두 깊이 공감하였다.

  그동안 풀뿌리 언론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꾸준히 강조해온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장호순 교수는 "모든 언론매체들이 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오염된 현실' 속에서 일관되게 약자의 입장, 풀뿌리의 입장에서 발언해온 녹색평론의 지난 10년은 우리 언론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매우 귀중한 역사"라고 언론학자로서 평가하였다. 이어서 광주 '좋은책방'의 김민해 대표가 녹색평론과 인연을 맺고 있는 전국의 서점들을 대신하여, 그리고 경기남부지역 독자모임의 대표 김성균 씨가 각 지역 '독자모임'을 대신하여 축사를 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모든 분들의 말씀은 결국 성장과 팽창만을 좇는 산업문명을 넘어 농업을 토대로 한 새로운 문명, 자급과 공생의 사회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다는 요지로 모아졌으며, 이를 위해 자립 . 자치적 공동체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다함께 노력하자는 촉구와 다짐이 이어졌다. 녹색평론의 창간 10주년을 우리가 다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방향전환'을 끊임없이 호소하고 이에 동감하는 예민한 영혼들을 잇는 역할에 녹색평론이 작게나마 기여해온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회고하고 축하하는 이 자리에서도 우리의 '희망'이 아직은 '절망 속의 희망'이라는 인식은 여러모로 다시한번 확인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지난 9 . 11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은 이번 행사 내내 언급된 주제 중 하나였는데, 김영원 선생은 병환으로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연단에 올라 일본의 한 농민이 이번 테러와 전쟁에 관해 쓴 편지를 번역하여 읽고, 이를 녹색평론 지난호에 실린 권정생 선생의 글〈제발 그만 죽이십시오〉와 견주면서, 이제 평화와 공존을 염원하는 세계의 풀뿌리 민중들이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연대하자고 촉구함으로써 모든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름다운 동요와 정겨운 기타연주가 행사의 분위기를 한껏 풍성하게 해준다. 멀리 마산에서 이선관 시인이 불편한 몸으로 기념모임에 와주신 것만도 반가운 일인데, '동요 부르는 어른 모임'의 회원들이 이선관 선생과 동행하여 이 행사를 위해 몇곡의 연주를 들려준 것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노래는 이내 참석자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따뜻하게 번져 모두들 마음을 모아 노래를 불렀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다 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잠든 아기를 염려하여 허겁지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어머니의 마음, 노래를 부르는 모두의 마음끝이 하릴없이 찡해지고 애틋해졌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희생되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미래의 아이들, 그리고 전쟁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형제들과 그곳의 어머니들에게로 모두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더하여 김용락 시인과 나희덕 시인은 시낭송을 통하여 녹색평론의 의미와 메시지를 다시한번 되새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행사는 김종철 발행인이 녹색평론 10년을 회고하고, 황대권 선생이 '뿌리내리기'라는 제목의 기념강연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기념강연의 내용은 본지 이번 호에 실려 있다.)

  2백여 참석자들의 말씀을 모두 청해 듣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몇몇분을 더 연단에 모시지 못한 것은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었다. 어떤 분들은 일정 때문에 부득이 일찍 떠나기도 했고, 또 어떤 분들은 먼 길을 달려오느라 늦게서야 도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분들이 방명록에 남겨주신 뜻깊은 메시지들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기억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이 행사를 일찌감치 계획하지 못한 결과, 모든 독자들께 소식을 충분히 알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전국 11개 지역에 조직되어 있는 '독자모임'과 후원회원들, 대구지역의 독자들, 그리고 그동안 녹색평론 지면에 글을 써주신 필자들을 중심으로 소식을 띄우고 본지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고를 올렸다. 하지만 좀더 일찍 계획이 되었더라면 지난호 지면을 통해서라도 더 많은 독자들께 알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소식을 받지 못하신 많은 독자들께 사과드린다.

  또한 먼 길을 마다않고 기념모임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많은 독자들이 각 지역과 소속 단체의 크고 작은 행사들과 일정이 겹침에도 불구하고 귀한 시간을 쪼개어 달려오신 것을 알기에 참으로 황송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아울러 대구한살림에서 공급하는 유기농산물만으로 150인분이 넘는 저녁식사를 손수 준비해주신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어머니 모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일들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신 대구지역의 독자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행사를 후원하여 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행사가 끝난 후, 참석하셨던 많은 분들로부터 "녹색평론다운 행사였다", "시골 마을잔치처럼 소박하면서도 훈훈하고 뜻깊은 자리였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나마 이번 행사가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것으로서 기억에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안팎으로 보살피고 도와주신 여러 독자들의 덕이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변홍철]


  변홍철 ― 녹색평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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