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61호 2001년 11-12월호    

 

  창간 10주년을 맞이하며

  김종철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고 창간사의 첫머리의 운을 떼던 일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기억에 생생한데,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창간 당시에 이 잡지가 두서너 해를 더 넘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냉전체제의 퇴각과 더불어, '세계화'라는 미국의 새로운 패권적 전략이 세계 전역에서 파장을 일으키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우리의 90년대는 고삐 풀린 상업주의, 소비주의가 우리의 오랜 문화적 관습을 뿌리로부터 파괴하면서 시작되었다. 30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틀은 어떤 식으로든 일단 무장해제되었으나 그 대신 이제부터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은 세계를 향해 무방비로 개방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적 경쟁논리,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모든 것은 상품가치로서만 측정될 수밖에 없다는 한층더 강화된 현실주의 경제논리였다.

  오랜 세월 위선적이든 아니든 우리가 삶의 제일차적 규범의 기초라고 믿어온 정신적, 초월적 가치들은 그것들이 시장에 내놓을 만한 상품으로서의 잠재성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가차없이 밀려났고,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장기적인 비젼 속에서 우리의 삶과 문화가 기획되고 평가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낙오하면 죽는다는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 그래서 새치기를 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새치기를 당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삶과 문화의 전 영역을 침투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갈수록 천박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 자체가 급속히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경고가 울려오는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최소한도로나마 인간답게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지구라는 유한체계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일 것이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90년대의 초입에《녹색평론》을 시작한 것은 주로 이러한 절박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이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록 작은 목소리로나마《녹색평론》이 오늘의 주류문화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간의 정신적 연대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다행하게도, 이 연대의 그물은 ―《녹색평론》의 오래된 독자들을 포함한 많은 개인 및 조직의 구성원들 속에서 ― 꾸준히 성장하여 이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실천적 움직임들을 통해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이것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현재 가파르게 황폐화하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 한가닥 희망의 신호를 찾는다면, 이런 움직임을 떠나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여전히 '절망 속의 희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 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貧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유사 이래의 전면적인 생태적 위기로 인해 우리가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적 증가를 통한 부의 분배라는 종래의 논리는 아무리 기술적 수단이 발달된다 할지라도 결국 생태적 파국을 불가피하게 하며, 따라서 타자들 ― 사람이든 아니든 ― 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우리가 인간다운 위엄과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하게, 겸손하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딴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조용해져야 새들이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그 기간은 대부분 거의 절망적으로 농업중심 순환형 사회로의 꿈이 가차없이 깨지는 과정이었다. '세계화'의 거센 압력 밑에 사실상 주권을 포기한 정부는 우리 삶의 토대 중의 토대인 농업적 기반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간단히 방기하고, 이 땅을 근본적으로 기업식민지로 전락시키는 데 부심해왔다.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들은 우리가 땅의 자식들이라는 사실, 우리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부가 궁극적으로 땅을 공경하고 보살피는 우리의 능력에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간단히 망각하고, 농사를 이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일로 만들어버리는 데 앞장서왔다.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다.

  생각해보자.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우리의 농촌에는, 매년 곳곳에서 폐교되는 학교의 증가가 말해주듯이 오래 전부터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지금 농촌인구의 대부분이 고령층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이 더이상 농사일을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날이 바로 우리의 농업이 사실상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라는 데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고민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가. 과연 땅은 포기해도 좋은 것일까. 그리고 식량은 해외로부터 사들여오면 그만일까. 언제까지나 어느 때든 사들여올 경제력은 보장되어 있을까.

  다가오는 선거철을 앞두고 그린벨트의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한 정부는 또다시 쌀의 재고를 이유로 쌀 증산정책을 포기할 것을 공공연히 선포하였다. 식량자급도가 겨우 20퍼센트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사회에서 쌀이 남아 돌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또, 만약 쌀 생산이 감소하였을 때 국외로부터 들여오는 밀과 콩과 옥수수가 어떤 이유로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한다는 믿을 만한 대책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작년에 일본정부가 2010년까지 일본의 식량자급률을 50퍼센트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농업중시의 방향으로 나가겠다고, 새로운 정책을 발표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저장이 문제될 만큼 쌀이 현재 남아 돌아가기 때문에 앞으로 쌀 증산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환경운동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기후변화이다. 이미 지구온난화의 징후를 가리키는 이상기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상적인 체험에 속하게 되었고, 벌써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남태평양의 여러 섬나라 주민들은 국제사회가 온난화 현상에 대하여 대책을 세워줄 것을 필사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21세기의 중반까지 지구의 평균기온이 섭씨 3-6도나 올라갈 것이라는 국제적 과학자 모임으로부터의 경고가 있었다. 이러한 수치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당장 실감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결과 종래의 인류사회를 유지하던 근간이 뿌리로부터 흔들릴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실은, 이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의외의 가뭄, 홍수, 지하수 고갈, 이상난동 등으로 농사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상은 거의 일상적으로 되었다. 기후변화는 단순히 지구의 지도를 바꾸어놓을 뿐만 아니라 생명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기반을 붕괴시킬지 모른다. 오늘날 지구환경이 이러한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인데, 유독 한국의 정부관료들과 경제학자들만 이런 사실에 무지하다는 말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가롭게 쌀 농사 감축 운운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경제문제만 살펴보더라도 지금이 농사를 경시할 수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 지금 세계경제는 이미 경제공황 또는 대불황의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신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물을 편견 없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씩 분명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현실을 못 보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부관료와 기업 경영자들과 이른바 경제전문가들뿐 아닐까.

  설령, 경제공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안심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세계경제가 걸어온 길 ― 그리고 거기에 기생하는 한국경제가 추구해온 길 ― 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속 불가능한 경제형태라는 것은 다시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구적 근대화를 이끌고, 동시에 근대적 산업화를 통해 강화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계를 오염시키며, 세계 도처의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사회적 약자의 노동력을 약탈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내재적인 원리로 하고 있는 체제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는 이러한 시스템의 연장으로서 제국주의적 지배력을 무역자유화와 자유시장의 이름으로 한층더 강화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생명과 인간에 대하여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경제체제가 그 주창자와 옹호론자들에 의해 아무리 그럴듯하게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그것의 본질적인 야만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세계 도처에서 세계화 경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다양한 형태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다.

  

  9월 11일의 미국 중심부에 대한 테러는 이러한 맥락에서도 주목해야 할 사건일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야만주의의 완화로 이어질지, 또는 야만주의의 강화로 이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서 아프간의 무고한 백성들과 땅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미국 ― 기독교 국가 ― 의 선택에서 우리는 몹시 불길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지상에서 가장 힘없고, 가장 가난한, 굶주림에 지쳐 있는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세계무역센터 등에서 희생된 미국 사람들의 목숨이 귀하듯이 헐벗고 굶주린 서아시아 산악지역의 풀뿌리 백성들의 생명도 한없이 귀한 목숨이다.

  9월 11일의 테러가 가공할 범죄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테러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아닌가. 왜 미국 또는 미국의 어떤 요소가 이토록 상상을 초월한 테러를 유발시킬 만큼 크나큰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러나, 테러 직후 미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주류언론은 테러의 원인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국적 생활방식'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또다시 그들의 뿌리깊은 편견이나 무지 또는 교만을 드러내었다. 테러조직과 그에 연루된 집단, 국가들에 대한 가차없는 군사적 응징을 요구하는 열광적 애국주의자들은 제외한다 하더라도, 이른바 진보적이라고 알려져온 ― 또는 그릇되게 알려져온 ―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대표적인 언론은〈뉴욕타임스〉일 텐데, 이 신문의 오래된 논설 필자 앤서니 루이스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비행기를 충돌시킴으로써 자살 테러를 감행한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종말론적 허무주의'라고 논평했다. 이런 용어의 사용에 암시되어 있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엘리트들이 ― 좌우를 막론하고 ― 미국의 패권적 세계지배로 인하여 비서구 문화권 또는 제3세계의 대다수 민중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거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관념의 유희에 빠져있는 제1세계의 지적 엘리트들로서 그들에게는 사태를 폭넓은 시각에서 깊이있게 이해할 만한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세계 전체가 가파른 벼랑으로 치닫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는 세계 전체를 통하여 지적 엘리트들이 공통하게 드러내는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의 빈곤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근거없는 지적, 정신적 오만에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항상 옳고, 세계 어느 곳이든지 미국이 보기에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언제나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깊은 오만은 실제 미국의 엘리트 문화 전체를 물들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하필이면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건물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정말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것을 오늘날 미국 주도하의 세계화 경제의 비인간성과 그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패권적 군사주의에 대한 ― 왜곡된 형태이지만 ― 도전이나 저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가 쉽기 때문이다.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부시 대통령은 말했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미국의 주류 엘리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낯선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적 생활방식 또는 미국적 문명이란 대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 전체 인구의 5퍼센트에 해당되는 인구가 세계 전체 자원의 대부분을 독점적으로 점유, 소비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 그러면서도 인종적, 계층적, 성적 불평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 이른바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결코 부러워할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의 평화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재앙일 뿐이다. 석유의 낭비를 무한정 자극하는 미국적 생활방식이 아니라면 중동을 비롯한 세계 도처의 무고한 사람들의 자주적인 삶이 터무니없이 유린되지도, 토착민들의 땅이 무참히 훼손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어느모로 보나, 지금 이 세계의 폭력의 주된 원천은 바로 미국적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거의 모든 나라, 거의 모든 개인들이 도처에서 미국적 생활방식을 모방하기에 급급해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그러한 생활방식의 잠재적인 파괴성은 이 추세로 간다면 시간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갈 것이고, 그 결과 그것은 지구공동체 전체에 어마어마한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일찍이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하여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게 못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간디에 의하면,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으로 물욕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된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면, '미국적 생활방식'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적으로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 자신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배타적 권력욕망도 동시에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간디는 사람들의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이 지구는 극히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 앞에서 지구는 지극히 결핍된 곳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 지상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간명한 진리를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본뜨고, 그것이 사회발전의 모델이라고 여겨온 미국적 생활방식의 근간에 있는 것은 결국 배타적인 탐욕이다. 그 탐욕을 토대로 하여 마천루와 세계무역센터가 세워지고, 핵무기와 생물 및 화학무기가 개발되고, 아마존 숲이 뭉개지고, 지구가 더워지고, 무수한 죄없는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참혹한 굶주림과 죽음을 당해왔다. 9월 11일의 테러는 테러의 직접적인 동기와 상관없이, 미국뿐만 아니라 오늘의 이른바 문명사회 전체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경고였다.

  무고한 아프간 백성들에 대한 공격을 당장 그만두라는 우리의 외침이 위선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미국적 생활방식'과의 결별을 준비하고, 우리의 삶을 자립적, 자치적인 것으로 바꾸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한경쟁의 자유시장 경제에 우리가 속절없이 매여있는 한 우리는 투기꾼들이 판치는 노름판의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야만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자립적, 자치적 삶의 유일한 토대가 동시에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유일한 삶의 토대와 일치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거품과 같은 뿌리없는 산업경제-소비주의문화를 넘어 자급능력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농촌공동체 중심 지역문화로 깊이 뿌리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종철]


  김종철 ― 본지 발행 겸 편집인.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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