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54호 2000년 9-10월호    

 

  가사미산 기슭에서

  김명수

 

  처서도 지나니 하늘에 구름이 한결 엷어졌다. 햇빛은 따갑지만 이미 온누리에 가을빛이 완연하다.
  산업도로 너머 가사미산 허리에 옥수숫대가 바람에 흩날린다.
  산업도로 밑을 지나 검문소를 지나면 가사미산 초입이 나온다.
  산허리를 지나 등성이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그 길 양편으로 농사를 짓는 밭들이 펼쳐진다. 모두들 빈땅에 새로 일군 밭들이다.
  밭둑에는 어느새 메뚜기가 뛰고 강아지풀도 여뀌풀도 한해살이 이삭을 맺었다.
  들깨는 바야흐로 하얗게 꽃을 피워 남은 가을볕에 까맣게 익는다. 맏물고추를 따낸 고추밭에 지난 여름 장마비를 견딘 고춧대가 서있다.
  고춧대 위로 먹잠자리가 꼼짝않고 앉아있다. 옥수숫대 위엔 고추잠자리가 맴돈다. 잠자리도 종류에 따라 노는 모습이 다르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온 지 벌써 3년. 시간이 나면 틈을 내어 이 길을 찾는데, 그동안 이 길에 정이 들었다.

  봄이면 쑥과 냉이가 돋고 여름이면 토끼풀 엉겅퀴가 핀다. 가을이면 찔레열매가 또 빨갛게 익는다.
  산길로 접어들면 애매미가 울고, 나무들 사이로 새소리가 들린다. 눈여겨 바라보면 관목 사이로 노루발, 무릇, 삽주싹이 보인다.
  삽주싹은 이곳에서 처음 안 식물이다. 가을에 채취하면 약초가 된다 한다. 창출(蒼朮), 백출(白朮)이 그것이라 한다.
  지난 봄에 여기서 새로 많은 풀이름을 알았다. 둥글레, 마타리, 참마, 맥문동. 맥문동은 일종의 야생난이다. 겨울에도 파랗게 잎이 안 진다. 6월에 가느다란 꽃대가 오르더니 7월에 섬약한 담자색 꽃이 핀다. 약수터 가까운 작은 골짜기에 혼자 보기 아까운 애릿한 모습이다.
  발길을 옮기면 골짜기는 좁아지고 어느새 차차 언덕이 다가선다. 언덕에는 여기저기 나무들이 자란다.
  진달래, 산벚나무, 개암나무, 도토리나무. 왼쪽 경사지엔 잣나무를 조림했고 그 옆 맞은편에 소나무가 서있다.
  신록의 계절에 여기 오르면 잎새마다 피어나는 초록의 합창을 듣는다. 나는 이곳에 오면 요즈음 눈여겨보는 곳이 생겼다. 진달래 수풀 사이 낙엽이 쌓인 곳에 오늘도 보랏빛 도라지꽃이 수줍게 피어있다. 굽어보면 산 아래로 고층아파트가 서있고, 산업도로 위에는 차들이 빠르게 질주하는데, 청초한 산촌 아가씨 자태처럼 보랏빛 도라지가 꽃을 피우다니!
  산야에 자생하는 초화(草花) 모두가 애잔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을까만 그중에도 청초하고 섬려(纖麗)하기로는 도라지꽃이 으뜸이다.
  이제 이곳에도 인구가 늘고, 반월, 시화공단에도 공장이 늘게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질 텐데?. 그러면 여름부터 내가 남몰래 눈을 맞추던 저 도라지꽃도 해마다 온전하게 볼 수 있을까?
  가사미산 꼭대기에 이르르면 시야가 트이고 서해바다가 보인다. 저녁 낙조는 서해가 으뜸이다. 장려하고도 비장하다.
  인간의 꿈을 담은 공장 굴뚝은 멀리 흰 연기를 뿜어내고 나는 그 흐린 연기 사이로 서울을 떠나온 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을 떠올린다.
  한숨을 돌려 산길을 내려오면 안산 토박이 농부가 있다. 도시가 개발되고 공장이 들어서자 살던 곳, 살던 땅을 잃어버린 노인이다. 자기가 부치던 논밭이 수용되어 거처를 나라에서 정해준 이주단지로 옮기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이곳을 찾아 옛날에 버려둔 괭이를 찾아 들고 채전을 가꾼다.
  이제 곧 가을이 된다. 고구마밭에서 노인의 공력대로 고구마를 거두면 햇볕은 하릴없이 스산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내 서리가 내리면 가사미산 허리에도 단풍이 들고 숲도 차차 성기어갈 것이다.
  아, 어느새 들국화가 피어있다. 애잔하고 애틋한 꽃, 저 들국화! 사람은 한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저 꽃은 혼자서 무더기로 피어있다.

  兩行秋柳一灣沙 拂袖亭亭野菊花
  莫向西風怨搖落 古來白髮似君多

  황매천(黃梅泉)은 저 국화를 보고 이런 시를 지었지만 나는 저 들국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가?
  오늘은 산길에서 들국화의 애잔한 자태를 마음속에 새긴다.

 

  안동포

  잠이오네 잠이오네 이내눈에 잠이오네
  진보청송 긴삼가리 영해영덕 뻗혀놓고
  오리오리 삼을적에 이내눈에 잠이오네
  샛별같은 이내눈에 구름같은 잠이오네
  이내눈에 오는잠은 가시성을 하고싶고
  남의눈에 오는잠은 은다리를 놓고싶네
  삼사월에 앞구뎅이 갯밭가에 삼씨뿌려
  칠월중순 절기되면 무럭무럭 좋아올라
  낫을들어 베어다가 삼굿에다 넣었다가
  앞내물가 낙동강에 삼단을랑 담가놓고
  동네사람 모여들어 삼껍질을 벗겨내네
  겨릅은 겨릅대로 발을메어 널어놓고
  가닥가닥 물에째서 삼톱으로 톱아내면
  살결고운 개추리가 새하얗게 윤이나네
  오리오리 길게이어 광주리에 담아내어
  필필이 짜낸삼베 열한새라 열두새라.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이 민요는 내 고향 낙동강 강마을에서 우리 고향 아녀자들이 길쌈을 하고 베를 짜면서 부르던 노래였다.
  6 25 전만 하더라도 이 땅에는 피륙이 귀했던 터라 목화를 심어 집에서 무명을 짜고 삼을 갈아 삼베를 짜서 옷감을 충당했다.
  그중에서도 삼베는 안동에서 짜낸 안동포를 전국에서 으뜸으로 쳐주었고 그 안동포 중에서도 내 고향 대추월, 내앞, 신덕, 금소 등지에서 짠 안동포가 최상품으로 꼽혔다.
  내가 어린 시절, 여름 저녁 멍석이나 들마루에서 잠이 들었다가 서늘한 밤기운에 잠을 깨 보면, 동네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이 지게뿔에 초롱불을 걸어놓고 밤 늦도록 삼을 삼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어머니들은 삼을 삼으시던 꺼끌꺼끌한 손으로 내 이마를 쓰다듬어 주셨고, 어느덧 시각은 삼경을 넘어 어머니들이 오는 잠을 쫓으려고 부르던 이 민요소리를 어슴프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 소견으로는 어머니들이 삼을 갈아 베를 짜는 일이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여겨졌었다. 그것은 아마도 선잠을 깬 내 이마를 꺼끌꺼끌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시던 그 자애스런 손길과, 저녁 밤참으로 이웃 아낙들이 햇감자를 쪄와 나눠 먹던 인정과, 그리고 자욱한 강마을의 야기(夜氣)와 초롱초롱한 별자리와 함께 어머니들이 부르시던 노랫가락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 그 길쌈과 베틀일이 손쉽고도 간단한 일이었으랴!
  내가 자란 후 비로소 느낀 그 일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노역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짜기가 어렵고 힘든 특산품 안동포가 어찌하여 우리 고향에서 생산되었는지.
  아마도 우리 고향의 토질이 삼베의 원료가 되는 삼을 갈기에 적당한 토질이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낙동강 상류가 되는 길안천(吉安川)과 반변천(半邊川)이 마주치는 합수목에 자리잡은 우리 고향은 오랜 세월 동안 물줄기가 날라준 물티가 앉아 토질이 비옥했고, 고향 어른들은 바로 그 낙동강 상류,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그 합수목 앞구덩이라는 벌에 삼씨를 뿌려 삼을 키웠던 것이다.
  그 삼은 하지 무렵이 되면 굵기가 새끼손가락만큼 커지고 키는 어른들의 키보다 더 크게 자란다. 그렇게 되면 어른들은 강너덜에 삼굿을 마련하고 푸나무를 태워 돌자갈을 달군다. 그리고 다 자란 삼을 베어다 잎은 추리고 단으로 묶어 그 삼굿에 찌는 것이다.
  이렇게 쪄진 삼은 낙동강 맑은 물에 푹 담궈 껍질을 벗겨낸다. 이때 껍질을 벗긴 삼의 속대궁은 하얀 겨릅이 되고 벗겨진 삼껍질은 가닥가닥 물에 적셔 삼톱으로 톱아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톱아낸 삼껍질은 겉에 붙은 꺼먼 껍질을 벗어버리고 살결 고운, 새하얗게 윤이 나는 껍질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향에서는 개추리라고 불렀다.
  이렇게 공이 든 개추리를 가지고 바로 삼베를 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일은 바로 이때부터인데 고향마을 아낙네들은 이 개추리를 가지고 삼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삼삼기란 개추리를 더욱 가늘게 쪼개 가느다란 끈을 하나로 잇는 작업을 말한다.
  이 일이야말로 삼을 심어 삼베를 짜는 일 가운데 가장 공이 많이 드는 일로서 이 일을 할 때면 온 동네 할매 아지매들이 한데 모여 두레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이 너무나 힘이 들고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웃 마을로 시집간 딸도 모이고 고모들도 모여 밤을 새워 일을 돕게 되는 것이다.
  아, 그때 그 정성이라니!
  삼삼기는 가닥가닥 갈라진 가는 개추리를 무릎에다 손으로 비벼 삼끈으로 잇기 때문에 여인네들의 하얀 무릎에 피가 맺혀 발갛게 부풀어오른다.
  이때 고향에서는 집집마다 남에게 질세라 삼삼기를 서두르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아마도 집에서 부리는 머슴들에게 여름을 날 시원한 중의 적삼을 어서 해 입히고, 또 집안 노인들께도 무더운 여름을 날 시원한 삼베옷을 지어 드리기 위해서 다툼을 하게 되는 것이었으리라.
  아마 누구 집에서 가장 먼저 삼베를 짰다 하면, 그 집 며느리나 안주인들이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일지 몰라도, 집집마다 삼베를 짜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렵고 지루한 삼삼기를 경쟁적으로 치러냈던 것이었다.
  바로 이때 아낙네들은 밤을 새워 지게뿔에 초롱을 걸어놓고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내 눈에 오는 잠은 가시성을 하고 싶고, 남의 눈에 오는 잠은 은다리를 놓고 싶네"라는 민요를 불렀던 것이다.
  내 집에서 먼저 삼을 삼기 위해 내 눈에 잠이 오는 것을 가시로 성을 만들어 막고 싶고, 남의 눈에 오는 잠은 은(銀)으로 다리를 놓아서도 어서 잠이 오게 했으면 하는 노래는 오늘날 입에 올려보아도 흐뭇한 미소가 감돈다.
  그러나 내 고향 마을 아낙네들은 정말로 서로 시샘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같은 노래는 모든 노동요가 그렇듯이 고되고 힘든 노동의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저절로 흥얼거리는 가락에 불과했을 것이리라.
  마침내 며칠 낮밤을 새운 삼 광주리가 가득 차면,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날틀에 걸어, 가닥가닥을 합쳐 실을 풀고 감고 하는 돌곳이라는 기구에 감아 베 날기를 마친다.
  이렇게 베 날기를 마치면서 다시 베 짜기의 마지막 공정인 베 메기를 하는데 이 일은 대개 할머니들이 하신다.
  베 메기는 된장과 조당수를 끓여 이겨 바르고 솔로 빗겨 벳불에 말리는 작업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고 나면, 비로소 눈부신 햇살이 올올이 스며드는 삼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손끝을 거친 삼실은 드디어 도투마리에 감겨 베틀에 오르게 된다. 그때 어머니들이 쪽을 찐 뒷모습으로, 뒷산에서 우는 뻐꾹새 소리에 맞춰 이루어내던 그 베짜던 소리는 숱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아직 내 귀에 삼삼히 살아나는 것이다.
  "달그닥 찰칵! 째그락 딸깍!"
  그때 어머니들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면 베틀은 흡사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용두머리 고운 소리에 맞춰 눈섶대가 오르내리고 잉앗대가 갈라주는 날실 사이로 북이 날고, 바딧집이 내리치고, "달그닥 찰칵! 째그락 딸깍!" 어머니 눈앞에 있던 짜여진 베가 어느새 두루마리에 감기면 점심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좀체 베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다. 며칠밤 며칠낮을 땀띠에 시달리며 모기에 시달리며, 도투마리에 감긴 삼끈이 다 풀릴 때까지?.
  이렇게 해서 드디어 다 짜여진 베는 올의 굵기에 따라 아홉 새, 열한 새, 열두 새 베로 갈라지고 삶지 않은 베는 생냉이로, 겨릅이나 콩깍지 잿물에 적셔 가마에 쪄낸 베는 익냉이로, 비로소 황금빛 40자 안동포가 마당의 빨랫줄에 휘널리는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종로에 있는 어느 서점에 들렀다가 나오면서 보신각 옆에 있는 주단가게에서 노랗고 고운 열넉 새 안동포 한필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정말 내가 어렸을 적 고향에서 보았던 그 열넉 새 안동포 그것이었다.
  "아, 아직도 고향에서는 삼베를 짜는가?"
  나는 이같이 놀라면서 다시 한번 그 진열장 앞으로 다가가 그 안에 들어있는 안동포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자욱한 강마을의 야기(夜氣)와 함께 긴긴 밤 삼경이 다 되도록 지게뿔에 초롱불을 걸어놓고 삼을 삼으시던 그 고향마을 여인네들의 비녀 가른 모습이 떠오르고 또 그들이 부르던 강물 같은 노랫소리가 다시 귓전에 어려왔다.
  그때 그분들은 한가롭고 아늑하던 고향마을에 한창 꽃같던 나이의 아낙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어 동족상잔의 6 25가 터지고 그녀들의 남정네는 전쟁터로 나가고 그녀들이 겪었던 엄청난 풍상은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그때 그 고향마을 여인네들은 늙어 더러는 죽고, 더러는 머리끝이 희끗희끗 세어져 허리조차 꼬부라지고, 모처럼 고향에 들르는 나조차 몰라보시다가 내가 누구라는 이야기를 하면 그제서야 반색을 하시며 눈물을 글썽거리신다.
  아, 이제는 좀체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잘 눈에 띄지 않는 안동포. 어느날 우연히 종로의 한 주단가게 진열장 안에 외롭게 놓여있는 안동포. 이제는 실용적인 옷감에서 많이 벗어나버린 안동포. 한때는 그토록 화려한 명성을 지녔던 안동포는 이제 마치 그 베를 짜던 고향마을 여인들처럼 잊혀져간다.
  그러나 어디 그 안동포의 가치가 정말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마도 오늘날, 모든 것이 물량위주, 속도위주로 치닫는 이 시대에서 그토록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많이 드는 안동포는 대접을 못 받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천으로 흔해빠진 화학섬유의 범람 앞에 그래도 그때 그 올올이 짜지던 수공(手工)의 정성이 그립고, 그리고 또, 베 한필을 짜기까지 그토록 고생을 하던 시절에 비해 물자를 너무 귀히 여기지 않는 풍조가 안타깝고, 내 고향 아름답던 마을에서 여인네들이 부르던 그 서정적인 민요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도 서글프다.


  김명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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