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49호 1999년 11-12월호    

 

  세계화의 질곡과 풀뿌리 공동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공산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즉, 세계가 거대기업들에 의해 지배되는 규제 없는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규제의 철폐가 거대한 다국적기업들을 풀어놓음으로써 그들이 지구 구석구석의 소비자들에게 전에 없이 다양한 생산품을 공급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계화 경제 덕분에 우리는 장바구니를 케냐산 사과와 값싼 뉴질랜드산 버터를 비롯하여 온갖 외래식품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생산품이 국내산보다 저렴하다면, 그것은 공급자가 더욱 효율적이고 더욱 큰 규모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세련된 홍보와 광고 캠페인은 회사가 클수록 그들이 공급하는 식품도 더 안전하다고 믿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서구식 경제발전의 확산이 국내 소비자들이 얻는 이같은 이익에 덧붙여 서구식 민주주의의 전파를 수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들은 세계화가 저렴한 항공여행과 다양한 문화간의 밀접한 교류를 가져왔고, 이것이 하나의 평화로운 '지구촌'의 등장을 이끌고 국가들의 적대적인 대립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마찬가지로 환경위기 ― 기후변화에서 생물종 고갈에 이르기까지 ― 가 분명히 국경을 초월하는 문제인 까닭에 세계화는 또한 지구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협력을 향한 필수적 단계로 간주되고 있다.

  세계화 경제는 이처럼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가정을 넘어서 아예 불가피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다 ― 그것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그것은 만족을 모르는 소비문화가 낳은 결과이다. 그것은 거대기업이 원하는 것이며,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도 그것을 멈추게 할 힘이 없다. 결국 세계화는 사람의 간섭이 미칠 수 없는 '경제법칙'에 의해서 규정된 경제의 '명백한 운명' 같은 것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들 법칙이 소규모 생산자보다는 대규모 생산자를, 분산된 지역적 생산보다는 세계 차원의 집중생산을 편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큰 것이 값싸고 효율적이고 더 좋게 마련이다! 하지만 진실은 '규모의 효율성'이란 하나의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크다고 해서 꼭 '싸다'거나 더 '효율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상투적 지혜의 가정과 좁은 경계를 넘어서 보려고만 든다면, 거대기업들이란 직접 및 간접의 보조금을 통한 정부지원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편파적인 경기

  여러 세대에 걸쳐 우리가 낸 세금은 작은 것보다 큰 것에 유리한 경제적 틀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선택 ― 교육에서 에너지 사용, 수송, 통신에 이르기까지 ― 이 전에 없이 집중화되고 전에 없이 세계화된 경제에 맞추어 틀이 잡히고 일그러지고 있다. 이 값비싼 희생을 수반한 보조금이 투자와 결합하여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인 체제를 만들어낸다. 이 체제가 효율적인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세금이 많은 비용을 메워주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자신의 힘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 소규모 지역 생산자의 희생이 전제된다.

  대규모 초국적기업들은 또한 정부들을 압박하여 흔히 중소 규모의 경쟁자를 파괴하려는 고의적인 의도가 담긴, 대규모 생산자에게 유리한 법규를 통과시킬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이익을 얻는다. 흔히 대규모의 집약적 생산이 본질적으로 더 많은 오염을 유발한다는 사실 또한 역설적이게도 결국에는 소규모 생산자보다 대규모 생산자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공장식 축산의 경우를 따져보자. 많은 동물이 폐쇄된 우리에 갇혀 사육될 때, 언제라도 악성 질병이 창궐할 수 있다. 이 경우 소규모 생산자보다 더 많은 통제 및 규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소규모 생산자는 그들이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드는, 똑같이 엄격한 (그리고 그들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은) 안전규칙을 따를 것을 강요당한다.

  수송과 첨단기술 통신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다국적기업이 소규모의 지역 경쟁자들을 무너뜨릴 수 있게 만든다. 상품의 대부분을 지역에서 사들이는 영국의 한 마을상점의 경우 위성, 대형 고속컴퓨터, 대규모 수송 기반시설, 컨테이너선, 엄청난 보조금을 제공받는 항공기연료 등이 필요치 않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형 슈퍼마켓은 이러한 것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이 모든 보조금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소비자들의 눈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상품이 더 값싼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머니속의 돈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금이 어떻게 우리에게 불리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먼 데서 온 장기저장용 가공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편파적인 경기규칙 때문에 그들은 자기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한 식품을 살 여유가 없게 된 것이다.

  현대 산업경제의 핵심에는 지역과 국가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생산을 촉진하기보다는 수출을 위해서 생산을 특화하는 것이 항상 한 국가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비교우위'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그 때문에, 무역을 장려하는 경제정책들은 끊임없이 성장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다국적기업이 되어버린 상사들을 지원해왔다. 이미 세계시장의 주요 상품 ― 커피, 코코아, 면 등 ― 은 극소수의 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국제무역에 대한 이러한 지원은 지역 차원의 생산자 및 사업체에 비해서 세계적인 생산자 및 사업체들에게 불공평하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그 결과 하루가 다르게 크고 강해지는 독점기업들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근년에 이들의 힘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마스트리히트 조약, 가트, 다자간 투자협정(MAI)과 같은 일련의 '자유무역 협정'에 힘입어 극적으로 강화되어왔다. "다국적기업의 헌장"이라고 알려진 MAI는 이들 기업의 권리를 국가와 국민의 권리에 우선하는 지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것은 기업들에게 국내법이 그들의 장사에 장애가 될 경우에 정부를 고소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이다. 이러한 협정들은 국가간의 교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초국적기업이 방해받지 않고 모든 국내시장에 침투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것이다.

  비밀리에 협상되어 고도로 복잡하고 전문적인 언어로 포장된 이 협정들을 선출직 관리들은 이해하기는커녕 거의 읽지도 않는다. 정부들은 이런 협정에 서명을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권한을 갉아먹고 있다. 사실상 정부들은 국가 및 지역 차원의 소규모 사업체들을 희생시키면서 기동성이 매우 높은 세계적인 기업을 지원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빈곤화를 자초하고 있다.

  국내무대에서 활동하는 작은 기업들은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반면에 초국적기업은 과세를 피하기 위해 자산을 순식간에 옮길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세입이 점점 떨어져나가는 가운데 정부의 힘은 약화된다. 그리하여 국가는 점점 가난해지고, 정부는 보건, 복지, 교육 및 여타의 공공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정책이 거대기업으로 하여금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찾아 전세계를 샅샅이 누비게 만들면서, 자본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속에서 사회 및 환경 기준들이 갈수록 낮추어졌다.

  그 결과 우리는 누구나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주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일자리와 사회적 화합, 환경, 심지어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마저도 위협을 받고 있다. 얄궂게도 우리는 세금을 냄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와 직업의 안정, 환경 보호장치를 좀먹는 힘들을 지원하고 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더 빠르게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 거주지 이동과 기술 재훈련 모두에 있어서 ― 처지에 놓여있는 지금,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의 직업이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느낀다. 직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나 자녀, 혹은 삶의 즐거움을 위해서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갈수록 스트레스가 쌓인다. 전에는 노숙 및 절대빈곤 문제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부유한 북쪽 국가 ― 스웨덴, 노르웨이, 캐나다 등 ― 에서조차 극단적인 사회적 박탈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 과정속에서 생산이 제3세계와 동유럽의 저비용 지역들로 옮겨가고 있다. 이들 지역으로 거침없이 밀려든 투자의 물결은 금융혼란을 빚었고, 결국 멕시코와 극동, 남미, 러시아에서 그랬듯이 경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남쪽 국가들이 겪게 된 빈곤의 증가는 엄청나다. 농촌에서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TV와 광고, 관광객이 한결같이 서구적 도시생활과 소비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몹시 민감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거부하도록 설득당하고 마는데, 특히 땅위에서 하는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무시된다 ― 이제 이들에게 고기잡이와 농사는 원시적이고 더러운 일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지만 극소수만이 성공한다 ― 그들은 대개 불안정한 서구시장을 위해 소비상품을 대량생산하는 노동착취 공장에서 일한다.〈인디아 타임스〉 98년 8월 26일자는 이 과정을 잘 그려놓고 있다.

 

  급속한 세계화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점점더 많은 시골 사람들을 멀리 떨어진 도시로 내몰면서, 남아시아에서는 여자와 어린이가 새로운 '인간 환금작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싸구려 품팔이꾼이나 매춘산업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생산이 북에서 남으로 이전되면서, 사람들의 이같은 고통에 덧붙여 지역적인 대기오염과 독성 폐기물 및 기타 환경위험들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뉴델리와 방콕, 멕시코시티 같은 도시들이 두드러진다.

  거대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화 경제의 겉보기 매력이 무엇이든, 그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환경의 악화와 빈곤의 증가, 불안정과 불평등의 심화 등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이다. 세계화는 경제적 및 정치적인 통제의 상실을 야기한다. 이같은 힘의 박탈은 필연적으로 좌절과 분노 그리고 민족갈등의 심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힘을 잃어버린 정치

  어째서 대부분의 정책입안자들은 정치적 힘의 상실, 사회와 환경의 붕괴, 점증하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둘러싼 경제적 숙명론에 매달려 있는가?

  한가지 대답은 그들이 과학기술의 변화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적인 카지노경제의 탄생이 고속통신의 발전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통신의 발전은 카지노경제를 조정, 감시 및 규제하기 극히 어려운 존재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과학기술의 변화는 '진화'로 간주되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는 과학기술의 변화와 그로 인한 경제적 결과를 껴안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인 컨센서스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이 자리잡게 된 데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이 과학기술적 . 경제적 발전에 적합하게 스스로를 만들어왔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단편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세계관을 제공하고 있는 교육체계이다.

  그 결과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전체를 이어주는 연관관계들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경제적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기술을 빚어내는 것은 ― 예컨대 연구개발 투자를 통해서 ― 경제정책이다. 이 물고 물린 관계들은 인간에 의한 정책선택의 산물이지 어떤 결정론적인 점에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일단 이 관계들이 명백하게 드러나면 국민국가가 경제적 괴물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 또한 똑같이 명확해질 것이다.

 

  희망의 씨앗

  오늘날 매우 희망적인 조짐의 하나는 스스로 큰 그림을 보고 세계화를 둘러싼 일부 기본가정들을 고쳐 생각하려고 애쓰는 경제 및 정치부문 고위 정책입안자들이 비록 적지만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고(故) 제임스 골드스미스 경이나 죠지 소로스, 심지어 미국 연방준비은행 총재 앨런 그린스펀 같은 금융가들은 시장들의 커지는 불안정과 급격한 붕괴에 자극되어 고삐 풀린 과열된 시장의 위험을 경고해왔다.

  최근에 죠지 소로스는 미국 의회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는 거덜나고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캐나다의 전 부수상 폴 헬리어 같은 정치인들은 세계화 경제가 자유무역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다.

  "세계화는 무역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힘과 통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중앙은행들과 상업은행들 및 다국적기업들의 독재가 지배하는 국경 없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최근 들어 대중적인 저항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 또한 희망적이다. 세계화의 대항세력으로서 지역경제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풀뿌리 차원에서 증가하고 있다. 세계전역에서 지역공동체들이 삶에 대한 주체적인 통제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관건적인 문제의 하나는 식량과 관계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 먹는 음식은 그야말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온 것이다. 지역소비를 위한 지역생산을 장려함으로써 지역공동체들은 세계화 경제의 질곡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먹을거리는 건강에 더 이롭고, 낭비적인 포장과 수송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돈이 지역사회 안에 머물고 생물학적 다양성이 커지고 시골생활의 활기가 되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은 농민과 소비자를 직접 연결시킨다. 지금 영국에서는 4만여 가정이 일상적으로 지역농가로부터 '야채상자'를 건네받는다. 미국에는 2,400개의 등록된 농민시장이 조직되어 있는데, 전체 거래액이 수십억달러에 이른다.

  많은 곳에서는 지역은행 및 대출펀드가 설립되었고, 이로 인해 지역주민이나 사업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본이 늘어나고 또한 사람들이 먼 곳의 기업보다는 자기 이웃과 공동체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동시에 지역통화의 창출은 지역공동체로 하여금 국가(그리고 국제) 경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게 한다. 미국 뉴욕주의 작은 도시 이타카에서는 250개가 넘는 상점이 지역통화를 받고 있다.

  10개 이상의 나라에 생겨난 '레츠'(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s)는 재화와 서비스를 돈 없이 거래할 수 있게 한다. 영국만 해도 이미 400개가 넘는 레츠조직이 형성되어 있다.

  "지역 생산품 사기" 캠페인은 작은 사업체들이 심지어 엄청난 보조금 혜택을 누리는 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캠페인은 돈이 지역경제로부터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값은 더 싸지만 멀리서 생산된 상품을 구매할 때 따르는 감춰진 비용 ― 환경과 지역공동체가 치르는 대가 ― 에 대해서 알려주는 데도 보탬이 된다.

  야생지와 개방공간 및 농지를 개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지역 토지이용 법규를 개정하는 노력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토지신탁제도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270만에이커가 넘는 땅을 보호하고 있다. 때로는 지방정부들이 공공자금으로 농지개발권을 사들임으로써 도시팽창으로부터 토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재정부담을 덜기도 한다.

  또한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어린이와 학부모로 하여금 그들의 공동체에 보다 큰 소속감을 갖게 하고, 지역내에 절실히 필요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작은 도시와 마을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필요한 정책의 변화

  하지만 이러한 지역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국가와 국제적 차원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대기업의 독점시대에 '지역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는 지역공동체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무력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풀뿌리 조직이 초국적기업과 초국가기관의 손아귀에 권력이 엄청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유럽의 많은 녹색주의자들은 유럽연합과 더불어 권력이 지역분산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국민국가의 해체에 기꺼이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풀뿌리 조직이 국민정부들의 도움 없이는 권력을 지역 차원으로 되돌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무역' 협정들의 영향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고, 단일 유럽통화와 미국의 '신속처리' 정책(fast track policy = 미국에서 대외무역 협상시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해 대통령에게 주는 포괄적 협상권한. 대통령이 알아서 협상을 진행하고 타결된 협상안에 대해 의회가 사후 가부(可否) 결정만 내린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고 관련 법안의 통과와 함께 종료되었으나, 이 권한의 폐지로 인해 미국의 대외협상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최근 부활 논의가 활발하다 ― 옮긴이)과 MAI의 의미를 대중에게 경고하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이 모든 시도는 상당히 지체되거나 중단되었다.

  동시에 유권자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세계화 경제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서, 그리고 주류 정치집단이 자신들의 문제들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새로운 정치의제가 출현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의제는 금융시장과 초국적기업의 힘에 기꺼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정부대표들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정치 지도자들이 협상테이블로 돌아가서 기업독점에 대한 지원을 종식시킬 수 있는 새로운 협정들의 필요성을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권국가들이 뜻을 같이한다면, 그들은 기업독점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환경권과 인권을 국제적으로 보호하는 세계적인 경제 경기장을 만들어낼 힘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협약의 상세한 사항은 시민사회의 참여속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기적'의 경제들이 속속 붕괴하고 갈수록 실업문제가 심화되고 생물권에 미치는 충격이 뚜렷이 드러남에 따라 깨달음도 틀림없이 확산될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지금처럼 국가들이 떼를 지어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역블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제를 보호하는 데 바탕을 둔 협력체를 만들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세계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인구의 50퍼센트는 아직 산업경제에 의해 삼켜지지 않았다. 세계화 과정을 늦추거나 역전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북쪽의 정책입안자들은 흔히 이 절반의 인류 ― 대부분 남쪽 제3세계의 마을에서 살고 있다 ― 를 무시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세계화 경제는 얘기가 '다 끝난 일'이다.

  그러나 절반의 인류가 얼마든지 다른 하부구조, 다른 경제모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이 글에서 제시한 탈중심화에 의한 해결책들이 보다 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 미래를 위한 선택에 대해 숙고할 때 덜 편협하고 더 지구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국가주도의 경제와 기업자본주의 둘 모두의 집중화를 거부할 수 있다.

  탈중심화는 지역경제와 국제무역에 대한 의존 사이에 균형을 회복한다는 문제에 관계되어 있다. 농촌과 도시 사이의 균형, 지역공동체와 멀리 떨어진 익명의 기관 사이의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 말이다.  

  경제적인, 따라서 정치적인 힘을 지역공동체와 그들의 선출된 정부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우리의 세금이 사용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살아날 것이다. 이같은 경제의 탈중심화는 또한 문화적 다양성과 생물계의 풍성함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를 건설하는 하나뿐인 길일지 모른다. (이민아 옮김)


  이 글은《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이끌고 있는 국제적 생태운동조직 International Society for Ecology and Culture에서 1998년 10월에 발간한 책자 Small is Beautiful, Big is Subsidised의 서문을 옮긴 것인데,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논리를 넘어서야 할 긴급한 필요성을 명료하고 설득력있게 말하고 있는 이 책의 한국어판은 곧 따님출판사에서 나올 예정이다. 사전 수록을 위해 도움을 주신 출판사측과 역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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