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3호 1992년 3-4월호    

 

  간디의 오두막

   이반 일리치

 

  마하트마 간디가 살았던 오두막에 앉아있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이 오두막의 정신과 전언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내게는 두가지가 크게 감명적이었다. 하나는 그 정신적인 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쾌적함이었다. 나는 그 오두막을 지을 때의 간디의 관점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내게는 그 집의 단순성과 아름다움과 청결함이 참으로 좋았다. 간디의 오두막은 모든 사람과의 사랑과 평등의 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멕시코에 있을 때 내게 제공되었던 집이 여러 가지로 이 오두막과 비슷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이 오두막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오두막에는 일곱 종류의 장소가 갖추어져 있다. 입구에는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신체적, 정신적 준비를 위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대가족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중간방이 있다. 세 번째 공간은 간디 자신이 앉아서 일하던 곳이다. 두개의 방이 더 있는데, 하나는 손님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노천 베란다가 하나 있고, 또한 넓은 욕실이 있다. 이 모든 방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이 이 오두막을 본다면 아마 웃을지도 모른다. 내가 소박한 인도사람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는 간디의 오두막보다 더 큰 가옥이 있어야 할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오두막은 나무와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오두막을 짓는 작업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졌고, 단 하나의 기계도 사용되지 않았다. 나는 오두막이라고 불렀지만, 실은 훌륭한 집이다. 집과 가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가옥은 사람들이 가구들과 소유물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것은 사람들 자신보다는 가구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마련된 곳이다.

  델리에서 내가 머문 가옥은 많은 편의시설이 있었다. 그 건물은 이러한 편의시설들의 관점에서 건축되었다. 그것은 시멘트와 벽돌로 만들어졌고, 가구와 기타 편의시설들이 잘 어울리는 상자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집하는 가구나 기타 물품들이 우리에게 내면적 힘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물건들은 불구자의 목발 같은 것이다. 그러나 편의물들을 우리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는 더 커진다. 다른 한편, 간디의 오두막에서 내가 발견한 가구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가구에 사람이 의존적으로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병원에 의존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학교에 의존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병원의 수는 그만큼 사람들의 불건강을 나타내고, 학교의 수는 그만큼 사람들의 무지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유물의 증가는 창조성의 표현을 줄어들게 한다.

  역설적인 것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우월한 존재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의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월한 존재로 간주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간디의 오두막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이러한 뒤틀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마음이 슬펐다. 간디가 살았던 이 오두막보다 더 큰 장소를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마음과 몸과 생활방식에서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연과 거의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으며, 그들의 동료 인간들과 거의 아무런 친밀성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설계가들에게 어째서 그들은 간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박한 접근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가고 물었을 때, 그들은 간디의 방식은 너무 어렵고 사람들이 그걸 따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단순한 원리가 이해되지 않고 있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실제에 있어서, 일반 민중은 그러한 단순성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간디의 오두막이 함축하는 것은 인도사회와의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해지는 기쁨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불필요한 물건이나 상품들은 주위환경으로부터 행복을 섭취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간디의 이 오두막은 평범한 사람의 존엄성이 어떻게 고양될 수 있는가를 세상에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단순성과 봉사와 진실성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치 ― 가톨릭 신부, 교육자, 사회철학자, 중세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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