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58호 2018년 1-2월호  

  책을 내면서

  김종철

지금 미국의 정치가들,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많은 양식 있는 시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대통령 트럼프의 정신건강 문제이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이 문제는 적잖은 고민거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정파적 이해관계로 볼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정신과의사협회의 규칙에 따르면, 환자에 대한 충분하고 직접적인 면접에 근거하지 않은 의학적 진단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경우에 한해서는 이 규칙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지금 미국의 정신의학계에서는 꽤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군 통수권자로서 언제라도 미국과 세계를 파국으로 빠뜨려 놓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고, 대통령이 된 이후 그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온갖 상식 이하의 기괴한 언행들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을 볼 때, 이것은 마땅히 ‘국가적 비상사태’로 봐야 한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미 27명의 정신건강 관계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쓴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증례》(2017.10.)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트럼프의 정신 상태를 평가하는 전문적 증언들이 공개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단은 트럼프라는 인물이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는 분석·진단이다. 이는 흔히 보는 나르시시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증상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평가, 타인들로부터 과도할 만큼 관심을 받고 칭찬을 받고자 하는 강한 욕구, 병적인 인간관계, 타자에 대한 공감의 결여” 등의 증세를 나타내는데, 이 과도한 자기중심주의의 배후에는 “아주 사소한 비판만으로도 상처를 받을 정도로 실제로는 매우 허약한 자존감이 잠복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기는 ‘트럼프라는 왕의 광기’(Japan Times, 2017. 12. 5.)는 미국인들에 국한된 관심사가 아니다. 아니, 지금 가장 다급한 세계적 현안이 되어 있는 북핵문제에 관련해서 트럼프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의 주민들에게는―그리고 나아가 지상의 평화를 희구하고 인류의 절멸을 원치 않는 세상사람 모두에게―트럼프의 ‘건강’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한국의 일부에서는 오랜 경험을 가진 ‘거래의 달인’으로서 트럼프가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술책으로 ‘미친 척’할 뿐이라는 관점이 있지만, 그가 정치적인 유불리를 고려하지 않고 별반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문제에 관련해서도 시도 때도 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떠는 것을 보면 그것은 별로 설득력이 있는 관점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정작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아무리 봐도 도저히 지도자다운 최소한의 자질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려운 인물이 어찌하여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게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연적인 사건이었을까. 하기는 만약에 상대 후보였던―교육배경이나 정치경험 등 모든 점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좀더 잘 싸워 이겼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러나 힐러리는 원래 트럼프 못지않게 미국의 일반시민들의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유권자들은 자기들이 가장 싫어하는 두 사람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고, 그 결과 실제로 전체 유권자 중의 절반은 선거 때 투표장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 상황에서 가난한 백인 유권자들은 일부지만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중산층 백인이나 유색인종 사람들 중 힐러리의 지지자들은 극히 ‘미온적’인 자세로 투표에 임했다는 것이 선거 직후 언론들의 분석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에 관계없이, 사후에 선거 분위기를 되돌아보면서 거의 모든 미디어가 공통적으로 내린 진단은 오늘날 기성의 정치권과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을 구성하는 ‘엘리트들’에 대한 보통의 미국인들의 불신과 반감이 매우 위험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세계의 논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 출신 작가 판카지 미슈라가 강조하고 있는 게 바로 이 ‘분노’라는 현상이다. 미슈라에 의하면, 오늘날의 이 광범한 대중적 분노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것으로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최신 저서 《분노의 시대》(2017)의 집필 동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은 예컨대 중동의 테러조직 IS(이슬람국가)나 국민투표로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결정한 영국의 ‘브렉시트’, 그리고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기이한 현상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일견 무관계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현상들의 배후에 공통한 ‘감정적’ 뿌리가 있다는 관찰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이 감정적 뿌리는 자본주의적 산업발전을 통해서 이른바 ‘근대문명’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킨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요점만 말하자면, 대서양 연안에서 시작된 근대문명은 계몽주의적 이성과 합리적 제도의 구축, 그리고 과학기술의 힘으로 ‘진보’를 계속해 나감으로써 그 혜택은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것이라는 약속하에서 전개되었으나 실상은 수백 년의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실제로 혜택을 받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다수 대중은 언제 어디서나 근대화 혹은 진보를 위한 ‘제물’이 되어왔을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중들이 이러한 희생을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느끼자 지금 보는 것과 같이 지배층 엘리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과 분노가 폭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슈라의 이러한 관점이 꼭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세계 도처에서 노출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태들’이 그동안 수세기에 걸쳐 지구사회를 압도해온 자본주의적 근대문명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실제로 갈수록 많은 지식인·사상가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슈라가 말하는 ‘분노의 시대’를 특징짓는 징후들은 논자에 따라 ‘자본주의의 종말의 시작’ 혹은 ‘성장시대의 종말’ 등을 가리키는 징후들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근대체제는 사실상 그 유효성이 끝났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한 체제의 논리가 관성적으로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오늘날 세상은 온갖 형태의 기괴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동안 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온 근대적 ‘선거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보자.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확인해둘 필요가 있는 것은, 본시 민주주의는 ‘선거’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제도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아마도 민주주의는 바로 선거를 뜻한다고 오랫동안 교육받아온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반드시 돌아봐야 할 원점, 즉 고대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통치의 시스템이었지, 특별히 뛰어난 인물에게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위임하는 시스템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테네 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으나, 실제로 모든 시민들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참석하여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 그들은 민회 이외에 평의회와 민중법정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거기서 시민들의 대표자들이 국사에 관한 다양한 업무를 관장하고 재판을 하게 하였다. 그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대의제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이 대의제에서 특기할 것은 시민대표의 선정 방법이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였다는 점이다. 즉, 아테네인들은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선거란 필연적으로 명망가, 재산가, 특권층에게 권력을 내주는 방법이라는 것, 따라서 그 방법으로는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방법이 제비뽑기였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제비뽑기’가 필수적이라는 고대 아테네인들의 아이디어는 그들이 인류사회에 남겨준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본주의 근대세계가 열린 이후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자신들이 정치를 독과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선거민주주의를 생각해내었고, 수세기 동안 그것을 확고부동한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포장해왔다. 하기는 어느 정도 자본주의와 산업화라는 메커니즘이 순조롭게 작동하는 동안에는 이 선거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저항을 받음이 없이 그런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세계 전역에서 농촌과 공동체들이 해체되고, 사회가 분열되고, 지하자원이 고갈되고, 생태계의 오염과 손상이 극단적으로 진행되면서 종래의 ‘성장’이 정지되는 상황으로 접어들자 여태까지 은폐되어왔던 숱한 모순들이 일거에 노정되기 시작했고, 이로 말미암아 그동안 자본주의 근대문명과 보조를 같이해온 선거민주주의 역시 기능부전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고, 그렇게 본다면 그의 등장은 선거민주주의가 마침내 파탄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트럼프라는 개인이 아니라, 트럼프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정치의 질과 정치가 작동되는 방식이다. 실제로 흔히 정치무대의 전면에 서서 활동하는 소위 엘리트 정치가들이 드러내는 자아도취에 빠진 몰상식한 행태를 보면, 그들 역시 대부분은 트럼프와 별로 다르지 않은 인격적 장애자들임이 분명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만큼 오늘의 정치가 저열한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징후이겠지만, 이 저열화 현상은 근본적으로 정치가들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선거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의 효력 상실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은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갈수록 뒤틀려가는 세계질서를 생각하면, 정치의 저열성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보다 긴급한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점에서 새삼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중국의 동향이다. 중국은 서구식 선거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시스템으로 서구 국가들보다 더 견실하게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전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마침 지난 10월의 19차 중국공산당대회에서 중국의 지도부는 중국이 지향하는 사회를, 모두가 고르게 잘사는 샤오캉(小康)사회, 생태문명, 아름다운(美麗) 사회로 요약하고, 중국이 세계의 난제를 푸는 데 적극 협력할 것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오늘날 중국은 세계 제1의 태양광에너지 설비 생산자가 되어 있고, 농업과 농촌사회의 중요성에 대한 중국 지도자들의 인식 수준은 오늘날의 국가 지도자들로서는 예외적으로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공산당대회에서 중국 지도부가 밝힌 구상은 단순한 슬로건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편전쟁 이후 150년 이상의 굴욕의 시대를 거쳐 이제 미국을 따라잡거나 능가하기 시작한 중국이 지속가능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창조적인 정치·경제적 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우리가 가져보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공산당대회가 막을 내리고 불과 한 달 남짓 지난 후, 베이징의 빈민지구에서는 화재 사건을 계기로 시 당국이 그곳의 농촌 출신 노동자(농민공)들에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거처를 떠나도록 명령하고, 낡은 주거 건물들을 강제적으로 철거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 때문에 졸지에 엄동설한의 거리로 쫓겨난 하층민들이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농민공들은 실제로 매우 값싼 임금을 받으면서 중국이 단기간에 새로운 산업국가로 굴기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해왔던 계층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와서 베이징의 환경정비 때문에 이렇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면, 중국이 지향한다는 저 아름다운 사회, 생태문명이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이징시 당국의 야만적인 폭거에 분노한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격렬하게 항의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국가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을 삼가왔던 지식인, 학자, 문화인, 예술가 5,000여 명이 이 ‘인간의 도리’를 거역한 당국의 반성과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는 공개서한에 서명을 했다는 뉴스가 들린다.

그러니까 중국의 경우에도 결국 관건은 공동체의 의사결정 시스템(즉 정치제도)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겨울의 베이징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어떻게 하면 질 높은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중국을 포함한 세계가 풀어야 할 오늘의 가장 긴급한 과제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주고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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