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55호 2017년 7-8월호  인쇄용  

 

  서평| 37년 동안의 싸움 ― 5·18 기억투쟁을 위하여

  최재봉

 황석영·이재의·전용호 지음,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창비, 2017년)

 

우리 세대의 대학생활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떼놓고 말하기 어렵다. 5·18 이듬해에 들어간 대학 캠퍼스에는 ‘짭새’라 불린 사복경찰들이 주인처럼 활보했고, 학생들은 불만과 불안을 감춘 채 그들의 눈길을 피해 다녔다. 이따금씩 누군가가 도서관 꼭대기 창 너머로 유인물을 뿌리고 밧줄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다가는 이내 붙잡혀 가곤 했다. 짭새들 몰래 챙긴 유인물에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인 전두환 타도 주장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짭새가 물러가고 교내시위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뒤부터는 스크럼을 짓고 행진하면서 부르는 노래에 〈오월의 노래〉가 빠지지 않았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자취방과 동아리방 등에서 몰래 돌려 보곤 했던 ‘광주 동영상’의 참혹한 장면들이 노랫말에 포개지면서 투쟁의욕을 북돋웠다. 그리고 5·18 5주년인 1985년 5월, 학살과 저항이 어우러진 5월 광주의 전모를 담은 최초의 단행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하 《넘어 넘어》)가 출간되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광주’의 진실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불온 도서’는 출간되자마자 몽땅 압수되었고 집필자로 이름을 올린 작가 황석영과 출판사 대표는 당국에 붙들려 갔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대학가 서점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유통되면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렇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넘어 넘어》 전면 개정판이 광주항쟁 37주년인 올해 5월에 출간되었다. 초판에 비해 분량이 두 배 정도로 늘었는데, 초판이 광주시민들의 증언과 기록을 위주로 쓰인 반면 개정판에는 그 사이 광주 청문회와 재판기록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과 자료들이 추가되어 책의 신뢰도를 한층 높였다. 증언한 시민들의 실명을 밝혔고, 국내 언론이 침묵을 지키거나 왜곡 보도를 일삼는 가운데 사실 보도를 위해 노력했던 외신 기자들의 기사와 증언도 곁들여졌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이라 되어 있던 저작권 표시도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으로 제자리를 잡았다. 〈개정판을 내며〉라는 글에 상세히 설명된바, 《넘어 넘어》 초판은 5·18 당시 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던 이재의가 초고를 썼고 황석영이 머리말과 서문을 추가하는 등 책의 완성도를 높였는데, 여러 상황을 고려해 저명 작가인 황석영을 집필자로 내세웠다. 32년 만의 전면 개정판을 통해 최초의 집필자를 비롯해 이 역사적인 책의 탄생에 기여한 이들의 이름과 역할이 비로소 공개된 것이다.

《넘어 넘어》 개정판은 더이상 압수의 대상이 아니다. 집필자도 더는 신변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4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한 5·18 기념식에서는 또다른 5·18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적으로 불리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박근혜 탄핵 뒤 새로 들어선 정부가 5·18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넘어 넘어》 개정판이 나와야 할 시대적 필요성은 다소 희박해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개정판 준비가 벌써 서너 해 전부터 진행되어왔고 그 배경에는 5·18의 진실을 곡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월 항쟁에 북한 인민군이 개입했다는 식의 마타도어가 뻔뻔하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현실은 5·18을 둘러싼 진실투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5·18의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토대로 진실을 세우는 일은 《넘어 넘어》 초판이 나왔던 32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작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넘어 넘어》가 확인하고 구축한 5·18의 사실과 진실은 어떤 것인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5·18에 앞서 10·26이 있었다.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대통령 박정희가 쓰러진 순간, 5·18은 예비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 권력자 박정희의 죽음으로 공백이 된 권좌는 전두환 등 신군부의 집권야욕에 불을 지폈다. 신군부는 수도권 공수특전부대를 상대로 소요 진압을 위한 ‘충정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했으며, 군대는 1980년 4월 말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동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5월 17일 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신군부는 그날 자정 무렵에는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지역 대학들에 군 병력을 배치했다. 다음 날인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과 후문에 모인 학생들을 상대로 한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폭력진압이, 27일 새벽 도청 함락으로 일단 마무리될 열흘간의 학살과 저항의 시작이었다.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 김대중과 그 지지기반인 광주·전남의 민심을 집권의 최대 걸림돌로 여겼고, 이 지역에서 저항의 싹을 초장에 뿌리 뽑아야 권력 장악의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항쟁 초기 광주시민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군인들의 불필요해 보일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인 시위진압은 그런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맨주먹과 돌멩이로 맞섰던 시민들이 나중에 경찰과 직장예비군 본부 등에서 탈취한 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기에 이른 것은 단순한 시위진압이 아니라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서슴지 않은 군인들의 폭력에 대한 방어적이며 생존권적 차원의 조처였다.

시작은 대학생들과 군인들의 충돌이었지만, 5·18의 주역은 학생들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가령 전남도청을 최후 방어선 삼아 시민들에 맞섰던 군인들이 일단 광주 외곽으로 물러나기 하루 전인 21일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 트럭 등을 몰고 나온 시민군 면면을 보더라도 이 공장 노동자와 재수생, 재봉견습공, 고교생, 점원, 야채가게 운영자 등으로 다양하다. 도청 앞 광장집회에서는 주최 측이 앰프 등 방송장비를 다루지 못해 애를 먹자 모여 있던 시민들 중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는 이들이 분수대 무대 위로 올라와 장비를 가동시켰다. 20일 밤부터 방송장비를 갖춘 차량으로 이동하며 시민군들을 격려하고 계엄군을 규탄하는 선무(宣撫)방송을 한 전옥주와 차명숙은 각각 무용 강사와 양재학원 수강생이었다. 도청 앞 상무관 강당에 입관조차 못한 채 뉘어진 희생자들의 맨발에 흰 양말을 하나하나 정성껏 신겨준 여성은 술집 접대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주부와 식당 주인 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을 먹였고, 약사들은 피로회복제와 드링크제를 박스째 시민군 차량에 올려주었으며, 슈퍼마켓과 구멍가게 주인들은 담배도 몇 보루씩 건네주었다. 계엄군이 도청을 비운 해방 기간 중에는 도청 민원실 지하 구내식당에 마련된 취사실에서 여성들이 2교대로 24시간 계속해서 밥을 지었다. 시장 아줌마들은 수시로 김치와 김밥을 광주리에 담아 리어카에 가득 실어 도청으로 가지고 왔다. 빵집을 하는 젊은 형제는 매일 새로 만든 빵을 가져다주었다. 이른바 ‘주먹밥 공동체’의 탄생이다.

주먹밥 공동체는 또한 ‘절대 공동체’이기도 했다. 공수부대의 야만적 폭력을 경험한 광주시민들은 “우리끼리 뭉치지 않으면 모두 몰살당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떨칠 수 없었고, 제 한 몸을 희생해서라도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는 연대의식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시청과 경찰 등 국가권력의 진공상태에서도 오히려 평상시 정부 통제 아래에서보다 광주시내 범죄 발생률이 훨씬 낮았다는 사실은 이런 공동체정신과 주인의식의 결과였다.

역시 공수부대가 일차 철수하기 전날인 21일 낮 도청 앞에 도열한 군인들과 주변 건물 옥상에 배치된 저격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사격을 가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잠시 사격이 멈추자 시위대 속에서 청년 몇이 뛰어나와 쓰러진 이들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다른 청년들이 다시 태극기를 들고 금남로 한가운데로 뛰쳐나와 구호를 외쳤다. 또 총성이 울렸다. 그 청년들도 공중에 피를 뿌리며 금남로 한가운데서 맥없이 쓰러졌다.” 이런 장면이 대여섯 번 되풀이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윗옷을 완전히 벗어버린 상태로 태극기를 흔드는 한 청년을 태운 장갑차가 도청 광장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저격수들이 그 청년을 향해 집중적으로 총탄을 퍼부었다. 장갑차 위 청년의 머리가 푹 꺾어졌다.” 범인(凡人)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런 헌신성과 희생정신이, 패배와 죽음이 불을 보듯 뻔했던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입 순간까지 도청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광주시민들의 이런 공동체가 외부와의 단절과 절대 고독 가운데에서 빚어졌다는 사실이다. 광주시내에서 무자비한 학살과 필사적인 저항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철저한 보도통제로 광주·전남 이외 지역에는 사태의 진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일부 불순분자들이 군인들을 공격해 사상자를 내고 방송국 등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있다는 식의 전도된 뉴스만 공급되는 형편이었다. 도청에서 일차 퇴각했던 계엄군의 재진입을 앞두고 시민군 지도부는 항쟁파와 수습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는데, 항쟁파의 논거 가운데에는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만 더 버티게 되면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으로 항쟁이 파급될 것”이며 “만약 다른 도시에서 광주와 같은 투쟁이 시작된다면 저들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소망적인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27일 새벽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계엄군의 도청 재진입으로 항쟁이 일단락되기까지, 나주와 화순, 목포 등 전남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광주시민들의 외로운 싸움에 동조하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계엄군의 진입을 불과 몇 시간 앞둔 26일 저녁, 끝까지 도청에 남겠다는 자원자들 앞에 나타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고등학생과 여학생 들에게 귀가를 종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목격한 이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 역사의 증인이 돼주시기 바랍니다.” 계엄군이 도청을 공격하기 직전인 27일 새벽 3시 50분쯤 홍보반 소속 대학생 박영순은 도청 상황실 내 방송실에서 마이크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원고를 읽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역사의 증인이 돼 달라’는 말,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말이 작게는 나와 같은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학내·외 시위를 촉발했고, 크게는 이 책 《넘어 넘어》의 출간으로 대표되는 5·18의 진실 규명 노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넘어 넘어》를 비롯한 개인적·공적 기록물이 5·18의 진상을 어느 정도 드러내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아직도 규명하고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남아 있다. 21일 도청 앞의 최초 발포명령은 누가 내렸는지, 그날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같은 무렵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사실인지, 23일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최소 28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10명을 제한 나머지 18명의 시신은 누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등. 그런가 하면 《넘어 넘어》 개정판은 초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몇몇 확인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해놓았다. 특히 계엄군의 진입을 앞둔 마지막 순간 도청 상황실에서 자폭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거나 수류탄을 움켜쥔 고등학생들이 흐느껴 울었다는 기록, 그리고 차량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방송을 했으며 가두방송을 듣고 집을 뛰쳐나와 도청으로 향하던 젊은이 수백 명이 계엄군에게 체포되거나 도망치다가 사살되었다는 초판의 기록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어 개정판에서 바로잡혔다. 아마도 극적인 효과를 노린 과장 또는 급박한 상황 속 기억의 왜곡에서 비롯되었을 초판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 또한 5·18의 객관적 진실에 다가가는 중요한 걸음이라 하겠다.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내가 살던 목포의 상황을 다룬 부분을 읽기가 특히 힘들었다. 부끄러운 기억 때문이었다. 고3 수험생이라는 핑계로, 매일 열렸던 시민궐기대회에조차 나가지 않았던 비겁한 처신을 떠올리면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은 한층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부채의식이 대학시절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게 등을 떠밀었고, 오늘날 이 책 《넘어 넘어》의 서평을 쓰게 하는 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가 임철우로 하여금 다섯 권짜리 장편소설 《봄날》을 비롯한 일련의 ‘5월 소설’들을 쓰게 한 것도 부끄러움과 증언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 후배인 한강도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된 계기가 어려서 들은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5·18 화보였다고 밝힌 바 있다. 요컨대 5·18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한 도청 함락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나 같은 비겁한 방관자를 포함해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투쟁을 향해 여전히 열려 있는 것이다. ‘학살 원흉’ 전두환은 올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항쟁을 폭동이라 주장하고 북한군 개입설을 되풀이하는 등 사과와 반성은커녕 적반하장식 궤변을 늘어놓았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5·18을 검색하면 극성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마타도어와 왜곡에 맞서 5·18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기억투쟁의 필요가 남아 있는 한 《넘어 넘어》의 유효성은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최재봉 ― 〈한겨레〉 선임기자. 최근 저서로 《그 작가, 그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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