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53호 2017년 3-4월호  

  책을 내면서

  김종철

탄핵정국이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3월 둘째 주까지는 나올 것이라고 지금 언론들은 대체로 일치된 예측을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를 기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으나, 그것은 이 나라의 최고 헌법 해석 기관을 극도로 불신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관측이다. 만에 하나 탄핵소추가 기각된다면 이 나라는 완전히 카오스 상태가 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가 그런 예상을 무릅쓰고 상식 이하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이성’ 그 자체를 모욕하는 심히 불경스러운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탄핵 결정 이전에, 더이상 추한 꼴을 드러내지 않고 대통령이 자진 사임한다면,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좋고 또한 아마도 예견 가능한 사회적 분열·혼란을 얼마간 방지해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아집(我執)과 어리석은 권력욕망 때문에 상황을 이토록 악화시켜온 장본인이 과연 뒤늦게라도 이성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 중요한 것은, 설령 탄핵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이며, 또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코 근거 없는 낙관주의의 표명이 아니다. 지난 여러 달 동안 우리들 다수는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와 촛불을 켜 들고 끊임없이 이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열렬히 말해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나라가 절망의 나라에서 희망의 나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경이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실제로 작년 10월 하순 첫 촛불이 켜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앞날은 암울했다. 썩을 대로 썩은 기득권층의 부도덕한 행태가 끝없이 활개를 치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이 현실을 타개할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야당 정치가’라는 가면을 쓴 부패집단도 포함된) 기득권세력의 영구적 집권 가능성은 높아 보였고, 그 때문에 우리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소위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고, 이를 도화선으로 사회의 저변에서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정의(正義)에 대한 잠재된 욕구가 폭발하듯이 분출하여 ‘촛불’로 나타났던 것이다. ‘촛불’은 단순한 분노나 항의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성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를 보고 싶다는 강력한 민중적 열망의 표현으로 일관되어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함께 모여서 우리의 뜻을 강력히 표출할 때, 국가라는 시스템이 더이상 소수 기득권층의 탐욕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국민들 다수의 이익을 지켜주고 보편적 인권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선(善)한 도구로 변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지난 몇 달간 이 나라의 다수 언론은 모처럼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보여주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른바 한국사회의 절대강자라고 하는 ‘삼성’의 총수를 구속하는 데까지 온) ‘특검’의 활동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아무리 썩은 사회라고 할지라도, 검찰이 권력의 충견 노릇을 그만두고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기만 한다면, 사회 속에서 정의가 살아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어쨌든 검찰을 비롯하여 언론, 국회, 법원, 경찰 등등, 국가기구들이 종래의 억압적 혹은 권위주의적 태도와 자세를 다소간 누그러뜨리고 국민 대다수의 요구에 보다 순응적으로 된 것은 촛불집회와 촛불시위의 위력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촛불이 겨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통령 하나를 바꾸는 수준, 혹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촛불은 모름지기 권력과 민중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확실히 뿌리를 내리고, 우리 모두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좋은 사회’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근본적으로 묻고 거기에 대답하고 실천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하여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한 싸움, 즉 4·19와 5·18 그리고 6월 항쟁의 연속선상에서 새로운 시민혁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현재 한국의 상황은 트럼프라는 특이한 정치 ‘아웃사이더’의 등장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는 미국사회와 매우 대조적인 그림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예상했던 대로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갖가지 반문명적이고 반사회적인, 혹은 반환경적인 조치들을 난폭하게 밀어붙임으로써 미국 시민들은 물론, 온 세계의 양식 있는 사람들의 경악과 분노를 사고 있다. 하지만 이런 트럼프의 거친 행동은 실은 선거운동 중 예견된 일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파쇼국가로 전락할 것임은 그의 거침없이 폭력적인 언행으로 미루어 거의 확실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선거에서 이겼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경위이다. 그가 당선된 것은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지지 때문이 아니라 상대 후보가 너무나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고학력의 교육배경과 지식, 그리고 풍부한 정치 및 외교 경험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트럼프와는 비교가 안될 인물이지만, 그의 오랜 공직생활에서 드러난 엘리트주의와 위선적인 언행은 기성 정치에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큰 반발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때문에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이 선거를 아예 포기하거나 극히 미온적으로 투표에 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개표 직전까지 대부분의 언론과 여론조사는 힐러리의 낙승을 장담하거나 점쳤다. 이것은 미국의 언론과 여론조사기관을 지배하고 있는 ‘엘리트들’이 미국사회의 ‘밑바닥 심리’를 읽어내는 데 얼마나 무능한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미국의 기득권층과 민중사회 사이의 괴리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적인 지표가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선거운동 중, 충분히 계산된 공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트럼프가 거침없이 제시한 공약들―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의 개정 혹은 폐기, 해외로 나간 미국 기업들의 본토 회귀 등등―은 결국 지난 수십년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세계화 경제’의 틀을 깨뜨리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세계화 경제’는 자본과 물자와 사람이 국경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이동함으로써 세계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온 세계에 미증유의 부를 가져다준다고 끊임없이 선전·옹호되었지만, 실은 그 혜택은 기득권층에 국한되고 있음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 결과, ‘세계화’ 덕분에 증가된 부가 이른바 ‘낙수효과’를 통해서 하층민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엘리트들’의 논리는 완전히 거짓말이 되고,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 현상은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 사회 속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수많은 저소득계층 사람들이 당면한 가장 쓰라린 생활실감이 되어왔다.

따라서 그들은 기성의 엘리트계층이 만들어낸 세계화 경제시스템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시스템을 변경할 생각이 전혀 없는 기성 정치에 대해서 크나큰 반감과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반작용으로 어쨌든 경제를 ‘세계화’에서 미국 중심의 경제로 바꾸겠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자연스럽게 끌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트럼프의 등장은, 과연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될지 모르지만, 일단 세계화 경제 시대와의 결별을 고하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들여다보면, 트럼프가 하려는 것은 기실 미국의 역대 정권이 하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아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는 문제만 하더라도, 이미 1992년에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시 클린턴 정부는 협정이 발효되면 곧바로 타격을 입을 멕시코 하층민과 농민들이 대거 미국 땅으로 몰려들 것을 내다보고 광대한 국경지대에 철조망을 설치했던 것이다. 자유무역협정들의 경우에도, 미국은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끼면 빈번히 여러 방법으로 해당 조항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켰다. 기후변화라는 절체절명의 세계적 긴급 현안을 대하는 태도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는 기후변화 자체를 날조된 허구라고 부정하지만, 역대 정부들도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는 세계인들의 노력에 늘 비협조적이었다는 점에서 트럼프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요약하자면,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당선시킨 것은 결국 ‘경제’ 때문이었다. 버니 샌더스라는 보다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인물이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힐러리가 아니면 트럼프였고, 현상 변경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트럼프는 힐러리와 달리 적어도 “경제를 살린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결국 승리한 것이다. 트럼프라는 인물 됨됨이가 위험스럽고, 그가 민주주의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생활고로 시련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트럼프의 국수주의적 정책으로 미국 경제가 일시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결국 반짝 경기로 끝나고 곧 시들어버릴 공산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세계화 경제시스템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이 더이상의 경제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요인이란 크게 두 가지, 즉 세계자본주의의 자기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변경’―착취나 수탈이 가능한 새로운 시장, 자원, 혹은 값싼 노동력―이 사실상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석유를 포함한 화석연료가 급속히 고갈되어가고 있고, 또한 동시에 (기후변화 때문에) 그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경제학자들은 경제현상을 흔히 가격과 돈의 흐름으로 설명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경제란 근본적으로 물자와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변경’의 소멸과 화석연료 고갈화라는 현상은, 실은 1970년대의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에서 이미 명확히 예견되었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자본주의는 보다 철저한 착취·수탈 방식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경제의 추진, 그리고 카지노경제와 부채의 확대를 통해서 지금까지 명을 이어왔던 것인데, 이제 더는 뚫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오늘날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적 기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거의 모든 정치가들의 사고와 상상력은 4년 내지 5년마다의 선거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그들의 시각은 늘 단기적이고 협소한 지평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경제성장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직시하고, 대책을 강구할 능력과 용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엄연한 현실을 용기 있게 대면하여 대안을 찾자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가》(2016)의 저자 볼프강 슈트렉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경제학자, 지식인들이 이미 자본주의의 종언을 단언하기 시작했고, 그들 중 일부는 자본주의의 종식에 따른 대안 체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포함해서 자본주의와 성장시대의 종언을 말하는 지식인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더 필요한 것은 보다 질 높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탈성장’ 시대의 ‘좋은 삶’은 ‘공유경제’, 즉 공동체 전체의 부를 구성원들이 고르게 나누면서 살아가는 지혜가 얼마나 발휘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부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수준 높은 민주주의의 확립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인들이 이 기본적인 ‘나눔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면, 트럼프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실은 선거제도가 갖는 근본적 결함 때문에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파쇼정치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즉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경제’를 선택했으나, 그 결과는 민주주의도 경제도 모두 잃어버린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점을 생각하면, 한국의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근본 테마에―일부 퇴영적인 집단을 제외하면―거의 일치된 사회적 합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합의가 실제로 좋은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제도권 정치가들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다. 《녹색평론》 지난호(152호)에서도 제안된 것처럼, ‘촛불’을 승화시켜 민주주의를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민들이 명실상부한 주권자가 되어 국가운영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존의 국회와 정부의 일을 감시·평가·통제할 수 있는 별도의 대안적 의회라고 할 수 있다. 즉,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방식을 채택한 ‘제비뽑기’로 대표단을 뽑아 ‘시민의회’(Citizens Parliament)를 구성하자는 제안인 것이다.

탄핵정국이 끝나면 즉시 차기 대통령 선거로 모든 관심이 쏠려버릴 것이지만, 그 와중에서라도 우리는 이 ‘시민의회’라는 개념이 조그마한 불씨처럼 살아서 시민들 사이에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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