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52호 2017년 1-2월호  인쇄용  

 

  촛불시위와 '시민권력'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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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해자는 근작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물론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 혹은 김밥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 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 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거나 대규모 집회와 시위에 필요한 경비 마련을 위해 모금함들을 들고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돌고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그리고 참가한 뒤 귀가하려면,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실감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요란하게 떠들고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의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정치인, 기성 언론, 지식인들의 발언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생생한 힘이 넘쳐난다. 그것은 풀뿌리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마음과 생각들이 가식 없이 진솔하게 개진되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 갑갑해서 강원도 산촌에서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시골 할머니, 지금 농촌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비통한 어조로 말하는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광화문광장에서 지금 표출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들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새삼 느끼는 것은 종래의 정당정치, 대의제민주주의로써 과연 이러한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민중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반영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런 기준에서 본다 하더라도 지금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은 민중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게 아닌가?

주말의 광장에서 울려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문제, 노동탄압, 인권 및 환경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대통령의 퇴진문제이다. 완전히 무자격자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람이 한순간이라도 더 대통령직에 머무르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스스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물러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대통령의 퇴진문제 이외에 또하나 강력하게 울리고 있는 구호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재벌문제를 척결하자는 외침이다. 실제로 이번 탄핵 사태에서도 역시 재벌이 문제였다는 것은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즉, 이번에도 재벌과의 부당한 거래에 국가권력이 남용 내지는 요용되었다는 언론보도와 검찰의 수사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 지금 광장에서 재벌 척결을 외치는 구호가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제 재벌문제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좌절시키고, 한국사회가 인간다운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원흉이라는 인식이 이 사회에서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돼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이제는 우리사회의 상식이 된 느낌이다. 이른바 정계뿐만 아니라, 나라의 근본 중의 근본인 도덕적·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도 학계도 사법부도 얼마나 금권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 일로를 걸어왔는지는 지금 대다수 시민들이―아이들까지도―뼛속 깊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정치권력과 금권의 부정한 결탁에 의해서 우리들의 삶이 끝없이 훼손되고 피폐해지는 상황을 더는 인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그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전국의 광장과 거리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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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처참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꺾이지 않고 역사의 저류(底流)로 면면히 지속돼온 풀뿌리 저항정신이 다시 전면으로 분출하고 있는 장면임이 분명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금 우리는 심히 긴장된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되돌아보면,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신속히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되새겨볼 가장 중요한 점이 있다. 즉, 지난 몇 년간 공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알지도 듣지도 못한 일개 사인(私人)에 의해서 이 나라 국가운영이 철저히 농단·유린돼왔다는 황당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된 뒤, 국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단계가 된 지금까지, 이 상황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시위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말로 촛불의 위력은 굉장했다. 사태 초기에는 무슨 계산을 하는지 탄핵을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던 국회가 마침내 야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들의 일부까지 가세하여 탄핵안을 처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촛불의 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던 검찰이 결국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여 수사에 돌입하게 된 것도 촛불의 거스를 수 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또한, 법원이 전례 없이 청와대 근접 거리까지 시위대의 행진을 허용하고, 경찰이 습관처럼 취하던 시위대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다름 아닌 촛불의 위력 때문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비록 매우 평화적인 시위라고는 하지만, 촛불을 통해서 발산되고 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열망과 요구가 상상 이상으로 뜨겁고 강력한 것을 확인한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 민중의 뜻을 거역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둔감하고 무책임하다 하더라도 이 엄청난 민중의 결집된 힘을 무시하고서는 결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늦게나마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끈질기게 계속한다 하더라도 광장에서의 항거와 싸움은 어차피 영구적 지속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조만간 촛불의 크기는 줄어들고, 마침내 식어버리는 날이 온다는 것을 냉정히 고려해야 한다. 뭔가 이 상황에 ‘급진적인’ 개입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이 대규모 촛불시위를 통해 전면으로 부각된 ‘시민권력’은 조만간 힘을 잃고, 민초들의 목소리는 또다시 억압되고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는 날이 올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나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순간’은 일시적이고 단명한 것이었다. 민중항쟁에 의해 수세에 몰린 지배층은 일시 물러나서 양보를 하지만, 결국은 상황이 역전되고 역사적 반동이 시작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원래 근대 민주주의라는 게 철두철미 유산자들의, 유산자들에 의한, 유산자들을 위한 정치제도로 출발했고, 그 기본적인 틀이 수세기 동안 조금도 변경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산업시대를 거치면서 무산계층과 여성들에게까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민주주의가 계속 변화·발전해왔다고 보는 견해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근대 민주주의는 그 외관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늘 기득권층의 계속적인 지배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해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대 민주주의가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선거라는 제도가 큰 작용을 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선거라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듯이 본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즉, 선거판에서는 거의 언제나 명망가나 재산가 혹은 그들의 비호와 지원을 받는 이른바 특권적인 ‘엘리트’들이 승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선거란 본질적으로 기득권층이 계속해서 집권하도록 돕는 장치, 다시 말해서 기득권층끼리 돌고 돌면서 권력을 ‘세습’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매우 편리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선거를 통한 정치는 불가피하게 금권에 의해서 오염·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정치가의 자질에 따라 부패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본시 나약한 존재이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든지 거의 예외 없이 특정한 상황에 처하면 타락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 본원적인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치가의 개인적 자질에 관계없이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한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고대 그리스인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 혹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자유도시인들은 매우 현명한,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오랫동안 안정되게 유지했던 민주정이나 공화정 체제는 권력의 세습이나 집중화를 막고, 난폭하고 무책임한 정치가 불가능하도록 미리 구조적으로 설계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의 핵심적인 기제가 바로 제비뽑기였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모두 ‘선거근본주의자’가 되어버린 결과, 선거만이 공정한 정치제도를 보장한다는 근거 없는 미신에 빠져 있다. 하지만 원래 선거는 고대 이래 귀족 혹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과두정(寡頭政)체제가 즐겨 채택해온 제도였다(선거를 통해야 엘리트들이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에). 반면에 민주주의 정신이나 공화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한정된 공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직자는 제비뽑기로 뽑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제비뽑기로 뽑힌 대표자나 공직자들의 임기는 짧았고, 퇴임 이후에는 재임 중의 직무성과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평가와 감사(監査)가 실시되곤 했다. 가장 철저했던 예가 고대 아테네인데, 거기서는 심지어 실제로 아무런 과오도 저지른 바 없는 사람인데도 잠재적으로 독재자가 될 소질이 있어 보이는 인물은 시민투표를 통해서 10년 간 국외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라는 특이한 제도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라고 오늘날의 우리는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테네가 200년 동안이나 인류사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아테네인들이 현명했던 것은 “권력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 대신 부정·부패를 막는 사전 예방장치로서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3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엄청난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다. 이 촛불항쟁은 명백히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금으로서는 불명료하지만, 어떻든 우리가 이 상황을 통해서 보다 새롭고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길은 보다 밀도 높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힘주어 말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상황에 비해서도 한결 더 진전되고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직설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제 한국인들 대다수는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할 때 그 의논과 결정의 주체는 직업적 정치인들도, 관료들도, 소위 전문가들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훨씬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촛불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최근 들어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민의회’나 ‘시민주권회의’ 혹은 그 밖의 이름으로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논의 및 결정 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예전의 시위 때에는 없었던 이런 제안이 지금 여기저기서 동시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것은 지금은 개별적인 사회문제를 하나하나 제기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보다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한 틀, 즉 민주주의의 강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상황은 세계적으로도 예외적인 선진성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극심한 사회적 격차 속에서 날로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미국의 평민들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파쇼적 기질이 농후한 무교양의 부동산 부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선택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선거제도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나 선택의 폭이 극히 협소했다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극우 파쇼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으로 쉽게 기울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일반적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 한국인들은 보다 강화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 이 점은 분명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시민들 중 상당수는 ‘시민의회’ 혹은 ‘시민주권회의’ 등의 제안에 대해서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런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국회가 있는데 왜 별도의 ‘의회’가 필요하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현재의 국회와 정당정치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탄핵정국이 발생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앞으로 국회가 할 수 있을지, 근본적으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번의 대규모 촛불시위에서 우리의 정치가들이 배운 바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환골탈태할지 모른다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가의 선의를 믿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시민들이 상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기성의 정치가들이 민중의 의사를 정당하게 대변하는 정치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새로운 제도로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 중 가장 합리적인 것이 ‘시민의회’(혹은 ‘시민주권회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민의회는 전국의 평범한 시민들 중 (제비뽑기에 의해) 무작위로 뽑힌 대표자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숙의가 가능한 규모의 회의체(mini―publics)를 구성하여, 거기서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아서 국가나 지방의 주요 현안을 의논·결정하여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이 결정을 수용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숙의민주주의’적 제도이다. 그러니까 개헌이든 선거법 개정이든 필요한 개혁에 대한 입안도, 사심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기성 정치가들에게 맡겨놓지 말고, 이 시민의회가 주도적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방법은 근년에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가 개헌을 포함하여 주요 정책을 변경할 때 실행했던 방법이다(2016년 10월, 아일랜드는 낙태 합법화 문제를 비롯하여 몇 가지 현안을 토의하기 위해서 다시 시민의회를 출범시켰다).

시민의회를 잘 활용하면 보다 밀도 높고 건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연간 1~2회 정도 시민의회를 소집하여 정부와 국회가 해당 기간 동안 행한 일들을 검토, 평가, 감사하고, 만약 오류와 부정이 있다고 판단될 때 정부와 국회에 주권자의 이름으로 시정명령을 내리는 제도도 충분히 구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숙고해야 할 것은, 이런 제도를 고안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촛불시위에서 발휘된 ‘시민권력’이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시민의회’는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시도해보지 못한 구상이고 가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염원하는 인간다운 세상은 우리들 자신의 용기 있는 상상력과 집단적 지혜로부터만 열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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