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50호 2016년 9-10월호  인쇄용  

 

  서평| 다른 삶, 다른 길을 묻는다

  윤정숙

 강남순 외 지음, 여성환경연대 기획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시금치, 2016년)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 마지막 장 제목을 ‘가지 않은 길’이라 했다. 마지막 장은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해온 길은 놀라운 진보를 가능케 한 너무도 평안하고 평탄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곤충을 향해 겨눈다고 생각한 무기가 사실은 이 지구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경제성장과 과학의 진보가 풍요로운 삶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던 시대에, 그녀는 ‘다른 길’로 가라고 경고했다. 벌써 반세기도 넘은 일이다. 핵발전소의 붕괴,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오염된 하늘, 물과 땅 그리고 먹거리들.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964년 그녀가 암 투병 끝에 56세로 세상을 떠난 날, 살충제 위험을 조사했던 한 상원의원은 청문회에 앞서 “오늘 우리는 위대한 여성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녀에게 빚이 있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에코페미니즘 역시 그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바닥에 구멍 난 배를 탄 것 같은 위험과 불확실함 앞에서 “이 세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에서 다시 출발하라”는 그녀의 충고는 절박하다. ‘다른 길’을 향한 울력이 어느 때보다 절박하다는 것은 에코페미니스트들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다른 길’을 찾아서

나의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후 내 삶은 달라졌다. 사고 직후 한동안은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재앙은 이렇게 오는구나. 인간은 물론 땅과 나무, 숨 쉬는 모든 생명들을 단숨에 혹은 서서히 사라지게 하는 재앙의 습격이 우리를 비켜 갈 것이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성운동가로서 오랫동안 믿어온 여성주의의 논리와 실천방식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누구를 기준으로 평등해지기를 원하는 것인가. 여성운동이 길이라 믿어온 성평등사회는 여전히 지금의 방식으로 가능한 것인가.

“페미니즘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그렇게 낮은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샌드라 하딩은 《페미니즘과 과학》에서 이렇게 묻는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폭력성으로 재생산되어온 가부장제 구조에 끼어들어 평등해지기를 원하는가. 가능한가. “억압과 착취에 기반을 둔 정치경제 체제 안으로 절반의 여성을 참여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성들이 또다른 경제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생산하지 않는 한, 이러한 권력 나누기는 전혀 쓸모가 없다. 여성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더 나은 성별이 되는 건 아니다.”(마리아 미스·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동연, 2013) 절반의 참여,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른 언어와 다른 길을 상상하지 않는 한,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는 없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여성운동의 전망을 토론하는 자리에 늘 등장했던 끼어들기와 새판 짜기 혹은 이중 전략 논쟁. 그 논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여성환경연대’가 창립(1999)되었다. 당시 많은 여성운동단체들이 젠더 관련 법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또한 정치를 비롯한 남성 중심의 모든 영역에 여성들이 참여하여 주류를 바꾸자는 전략으로 나갈 때, 새판 짜기의 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다.

 

생명이 죽어가고 그 터전이 파괴되어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적 이익만을 좇아온 결과 권력과 자본이 서로 도와가며 우리가 설 땅을 깎아버리고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우리들 나름의 힘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남성의 모습을 따라 뒤질세라 겨루어오지는 않았던가?…우리는 또하나의 커다란 조직을 만들어 관료주의, 권위주의, 경직성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가정에, 일터에, 지역에 흩어져 있고자 한다.…각자가 있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해오던 열정과 경험을 이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조그만 진실이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실천하며, 그런 경험들을 서로 주고받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대안으로 향한 길을 더듬고 만들어가며, 이런 노력들을 저해하는 힘들과는 맞서 싸움도 피하지 않으며 우리는 나아가고자 한다.

―여성환경연대 창립선언문(부분)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자는 에코페미니즘운동의 등장이었다. 한편 “우리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기존의 사회가치와 운동문화에서 우리조차 자유롭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서울여성환경선언문〉, 2003)는 고백처럼, 그들은 새롭고 실험적인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에 대한 되새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전략적 선택이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여성환경인’ 혹은 ‘여성환경활동가’로 불렀고, 한동안 ‘에코페미니스트’는 등장하지 않았다.

에코페미니즘운동이 ‘여성들이 하는 환경운동’이라는 설명은 충분치 않다. 환경운동의 한 부문으로 혹은 기존 여성운동의 한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건 더욱 불충분하다. 에코페미니즘은 경쟁하듯 끼어들어 가부장사회가 만든 낡고 위험한 사다리를 올라가는 길을 벗어나, ‘자연과 인간 모두가 삶의 능력을 회복해가는 다른 문명의 길’로 ‘전환’해가려는 것이다.

 

생명, 연대, 모성, 살림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는 여성환경연대가 기획했다. 2003년에 《꿈꾸는 지렁이들―젊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세상 보기》라는 책이 나왔으니, 번역서를 제외하면 내가 아는 한 이 책은 에코페미니즘 관련한 두 번째이다. 첫 번째 책의 머리말을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게 했던 에코페미니즘을 향한 막연한 갈증”으로 글을 썼으며, 필자들은 자신들을 “암수 양성을 한 몸에 지니고 묵묵히 꿈틀대며 흙을 살리고 기름지게 하는 지렁이”라 불렀다. 온갖 생명체들이 자신의 생기를 한껏 뽐내며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던 당시의 젊은 에코페미니스트 지렁이 몇몇은 완숙한 중년 지렁이가 되어 이 책의 필자 대열에 합류했다.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는 모두 15명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이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은 2014년 첫 에코페미니즘 학교를 기획하면서 또한 강의 중 수강생들의 열띤 반응에 의기투합한 결과이다. 30~60대에 걸친 필자들은 농부, 단체활동가, 교수와 연구자 등 다양하다. 이들은 직업도 생활근거도 모두 다를 뿐 아니라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과 이해도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배경과 차이들은 독자들에게 에코페미니즘을 정면과 측면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준다.

이 책은 열다섯 편의 글을 생명, 연대, 모성, 살림을 주제로 묶었다. 에코페미니즘의 주요 주제들이다.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기, 돌봄과 노동, 여성의 몸, 밀양투쟁과 제주살이, 마르쉐운동, 지역 풀뿌리여성운동, 탈핵운동과 사회적 경제 등 여러 주제들을 횡단하며 에코페미니즘의 다양한 위치와 실천방식을 탐색할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 입문서이다. 지식과 논쟁보다는 일상 경험과 감수성을 더 열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읽기가 쉽지만은 않다. 수록된 글 모두는 ‘행복한 삶’, ‘좋은 삶’이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질문하게 만든다. ‘따라잡기식 소비주의’와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삶의 조건과 전제들을 흔든다. 세월호를 비롯해 우리가 겪은 절망적 사건들, 강을 막고 산을 깎으며 자연에 가한 폭력들, 핵발전소와 GMO 등은 물론 화장품, 생수, 학교 운동장과 농수산물 등 위험은 일상 곳곳에 매복되어 있지 않은가. 이 책은 삶의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위험의 뿌리들을 알려주고, 불안하게 떠 있는 몸을 낮추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들 질문과 맞닥뜨리며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건 이 책을 잘 읽었다는 좋은 신호일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을 정의하는 언어는 다양하다. 에코페미니즘이 “단일한 틀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실천 측면에서 열려 있는, 유연한 정치적·윤리적 연대이자 동맹”이라고 한 이상화 교수의 말처럼, 고정된 틀로 정의되거나 그를 고집한다면 이미 에코페미니즘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에코페미니즘이 대안 패러다임으로서 경쟁과 성장제일주의를 넘어 “새로운 문명을 탐구하는 과정의 페미니즘”이라 정의한다. 장우주는 인간이 자연을 포함해 타자화된 소수들을 ‘의미 있는 타자’로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상호 관계를 맺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을 에코페니미즘이라 말한다. 〈도시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를 쓴 김현미 교수는 “소비적인 삶을 벗어나 감각, 실천, 정치성을 통합하면서 도시를 생활정치의 현장으로 바꾸는 방법론”으로서의 에코페미니즘을 말한다. ‘과정의 페미니즘’, ‘의미 있는 타자로의 관계 맺기’, ‘생활정치의 현장을 바꾸는 방법론’ 등 각기 다른 언어로 구성된 개념들은 각각이 모두 풍부한 토론거리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다른 언어로 설명되더라도 ‘이 세상을 모든 다른 생명체와 공유’(레이첼 카슨)해야 한다는 것과, ‘인간과 자연 속의 생명이 협력과 상호 보살핌, 사랑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에 대한 인식’(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창비, 2000)은 에코페미니즘의 최소한의 인식론적 토대라 할 수 있다.

이윤숙의 글 〈소비사회의 전쟁터가 된 여성의 몸〉은 여성과 자연이 어떻게 가부장제와 연관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약탈적 소비자본주의’하에서는 여성의 몸과 자연은 열등하며 통제 가능한 존재이다. 생태적이고 자연적인 본래의 몸을 거부하고 ‘예쁜 몸’이 되려는 욕망은 성형, ‘안티에지징’, ‘다이어트’를 호황 산업으로 만들었다. 여성에게 몸은 투자와 생존전략의 거점이 된다. 뷰티산업이 연 10조 원 이상의 호황을 누리는 이유다. 그녀는 살과 뼈를 깎고 조형물을 집어넣어 자연의 몸을 인공의 몸으로 바꾸는 것은 강의 흐름을 막는 4대강사업의 폭력적 추진과 놀랍도록 같다고, 땅과 기후에 맞는 다양한 작물을 단일 환금작물로 바꾸는 것 또한 획일화된 몸 만들기의 양태와 다르지 않다고 분석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불안을 잠식시키고 상처 입은 내 몸에 치유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하며, 다른 삶, 다른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무한경쟁의 소비사회에서 벗어난 다른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대체 내 몸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58쪽)

페미니즘에서 ‘모성’은 가장 논쟁적 주제의 하나다. 모성은 여성을 ‘어머니’로 환원하여 ‘자율적 개인’의 존재임을 부정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모성은 억압적인가 해방의 원천인가. 본질적인가 맥락적으로 구성된 것인가라는 논쟁은 팽팽하다. 마리아 미스처럼 이런 이분법적 논쟁이 무익하다는 입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성학자 이경아의 관점은 분명하다. ‘모성의 힘으로 세상을 다시 짜기’이다. 모성을 본질주의화하거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가족주의 안에 가두어두는 것을 경계한다. “모성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고 제약한다는 것은 만들어진 역사일 뿐이다. 이는 사회적 성찰과 정치적 결단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성을 통해 생성되는 문화적·정치적 새로움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다시 사유해보아야 한다.”(142쪽)

그녀는 개인과 모성의 대립적 개념의 틀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성적 감수성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윤리성을 가져다주는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한 모성을 인정하면서 모성이 생성해내는 문화적·정치적 힘을 적극 사유하기를 요청한다.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본질주의로 환원하지 않으며, 모성적 감수성과 가치가 사유지에서 ‘공유지’로, 여성에서 남녀 모두에게로 확장되면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모성은 여성의 것이지만, 사회적 모성은 남녀 모두의 것이다. 결국은 모성을 사유하는 방식이 관건인 것이다.

 

희망의 선택지, 에코페미니즘

체르노빌 사고 이후 “남자들은 생명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연과 적을 정복할 뿐이지요”라고 한 러시아 여성의 통찰력도, 후쿠시마 사고 이후 만들어진 인터넷카페 ‘차일드세이브’의 한 회원이, 어떻게 핵발전소 문제에 관심을 가졌냐는 질문에 ‘엄마로서의 본능’이라 대답했다는 것도, 탈핵운동은 여성들의 ‘본능’이 끈기 있게 지속될 때 더욱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한 탈핵운동가 김혜정의 경험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곳에서 환경파괴나 핵 전멸 위협에 대해 반대활동을 하든, 여성들은 여성과 이민족, 자연에 대한 가부장적 폭력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이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것이 미래세대들과 생명과 이 지구 자체에 충실해지는 길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성으로서의 우리의 본성과 경험을 통해 이 점에 대한 깊고 특별한 이해를 갖고 있다.”(《에코페미니즘》) 더욱 분명해진다. 여성의 모성은 생물학적 본성이다. 부정될 수 없는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모성(모성적 가치)을 사회적·정치적으로 사유하고 확장시켜갈 것인가이다.

1970년대 말, 비교적 최근 등장한 에코페미니즘은 기왕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했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사회구조 등의 관계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다른 페미니즘과 달리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세계관의 중심에 있다. 수명을 다한 근대 산업문명을 벗어나 ‘아직 가지 않은’ 다른 문명의 길을 찾아간다.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덜 소비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바꾸는 일이며, 더 존재한다는 것은 돈보다 삶의 언어에 관심을 갖는 일이다. 이 책은 소비에서 존재로 삶의 방식을 바꾸고, 문명의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에코페미니즘이 희망의 선택지라고 말한다.


윤정숙 ― 여성환경연대 및 녹색전환연구소 이사. 공저로 《여성주의 학교 ‘간다’》, 《여성운동 새로 쓰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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