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8호 2016년 5-6월호  인쇄용  

 

 일본의 '영어화' 정책, 망국으로 가는 길

  세 테루히사/ 시라이 사토시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영어화’

시라이   올해는 패전 후 70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대미종속 구조는 강화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집단적 자위권에 관련해서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관련해서도 정계, 재계, 관료들이 일제히 종속의 강화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근저에서부터 대미종속 구조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게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사회를 ‘영어사회’로 만들려고 하는 ‘영어화(英語化)’ 정책입니다.
세(施) 선생의 최근 저서 《영어화는 우민화(愚民化)―일본의 국력이 땅에 떨어진다》(集英社, 2015)의 서두 부분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영어특구’가 정부의 자문회의에 의해 제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국내의 땅이면서도 영어특구에서는 일본말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거기서 일본말을 하면 적발되어 벌금을 물든가, 아니면 ‘방언표찰’을 목에 걸고 다녀야 합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희희낙락 제안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의 상황 때문에 새삼 암담한 기분이 듭니다.

세   ‘영어화’라고 하면, ‘라쿠텐(樂天)’이나 ‘유니클로’, 최근에는 ‘혼다’ 등 기업이 영어를 사내의 공용어로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머리에 떠오르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기업 내부에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더욱 공적인 영역, 혹은 사회 전체에 걸친 ‘영어화’가 추진되고 있다고 말해도 됩니다. 이대로 TPP가 체결된다면 행정 부문에서의 ‘영어화’도 크게 진전될 것입니다. 교육 분야에서도 영어교육 편중 현상이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비즈니스나 대학교육 등 일본사회의 제1선이 ‘영어화’되고 만다면, 어떻게 될까요? 영어를 잘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교육적 격차가 소득 등 경제 격차로 직결되고, 궁극적으로 사회는 분열될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능력이 있어도 영어 구사력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중간층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그리되면 일본이 자랑하는 중간층이 우민화(愚民化)를 강요당하고 몰락하는 것입니다.
일본인의 영어능력이 향상된다면 미국과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고, ‘영어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비영어권의 선두에 서 있는 일본사회가 영어사회가 된다면 영어에 의한 세계 지배의 피라미드가 강화됩니다. 더욱이 그 피라미드 구조에서 일본은 밑바닥에 위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라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자화자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세 선생의 《영어화는 우민화》는 제가 《영속패전론―전후 일본의 핵심》(太田出版, 2013)에서 묘사한 전후 일본의 구도와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어화’를 통해서 일본은 영원히 패배를 계속하는 것이지요.

  오늘 시라이 선생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문맥에서 이 문제, 즉 ‘영어화’ 정책으로 일본이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시라이   즉 언어에 있어서 ‘영속적 패전’ 상황을 생각해보자는 것이겠지요.
 

‘영어화’는 국가의 자살행위

  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독자들을 위해서‘영어화’ 정책의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해두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교육행정입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대학업계에서도 ‘영어화’는 믿기 어려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어로 하는 수업을 늘리는 대학에는 거액의 보조금을 주는 식이죠.

시라이   세 선생이 계신 규슈대학은 ‘슈퍼글로벌’ 대학으로 인정되었다죠? ‘슈퍼글로벌’이라기보다 ‘슈퍼그로테스크’라고 해야죠. 이런 말, 입에 담기도 치욕스럽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확실히 그로테스크한 제도죠. 교육·연구의 글로벌화를 도모한다는 노력을 보이면, 그래서 인정을 받으면, 최대 10년간 50억 엔의 보조금이 주어집니다. 그 보조금을 얻기 위한 기준의 하나가 수업을 대규모로 영어로 진행하는 것이고요. 규슈대학은 4분의 1의 강의를 영어로 한다고 결정하였고, 교토대학은 일반교양과목의 절반 이상을 영어로 강의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쿄대학의 이학부 화학과는 이미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고 있습니다.

시라이   이 제도를 문부과학성이 시작한 이유는 앵글로색슨이 만든 평가기준으로 선정되는 세계의 대학 상위 100개 가운데 들어가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죠. 랭킹 100위 내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업을 영어로 한다는 거죠.

  우스운 이야기죠. 일본인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일본말을 사용할 때입니다. 영어로 수업을 하면 세계의 일류 대학이 된다는 발상은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시라이   그런 점에서 유럽의 대학은 합리적입니다. 앵글로색슨이 만든 순위 따위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학내에서도 어떻게 ‘영어화’를 추진할 것인가를 논의하려고 각종 회의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영어화’를 지지하는 교수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규슈대학에서는 앞으로 채용하는 신임 교원에게 임용 후 5년간 영어로 수업해야 한다는 것을 의무적으로 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교원을 신규 채용할 때에 ‘원어민’을 선생으로 채용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올 게 뻔합니다. 아니면 일본의 대학원이 아니라 해외의 대학원에서 공부한 연구자를 채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채용 방침이 일본 전체 대학으로 확대되면, 일본의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자가 되겠다고 지망하는 학생은 거의 없어지겠죠. 우수한 학생일수록 장래를 생각해서 해외의 대학원을 선택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일본의 대학원 교육은 실질적으로 소멸되고 맙니다. 일본에 대학원이 일부 남아 있더라도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수업이 행해지겠죠. 이렇게 돼서는 일본의 독자적인 학문연구가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라이   ‘영어화’를 추진하는 것은 대학으로서는 자살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시책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문부과학성은 물론, 대학 관계자 다수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많은 경우 연령적으로 고령층입니다. 이후는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議論)의 장에서 사용되지 않게 된다면, 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어로 전락합니다. 일본어가 그렇게 열화(劣化)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愚民化)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표면상으로는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나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어를 비즈니스나 교육 혹은 행정상 고도의 논의가 필요한 장으로부터 퇴출시켜버리면 어떤 귀결을 초래할 것인가. 당연하지만, 모어로 사고를 하지 않는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앞에서 시라이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빌리면, 나라 전체를 영어사회로 만드는 것은 국가의 자살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시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록 웃기는 일도 없는데, 어째서 정면으로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돼버렸을까요? 반성을 한다면, 우리의 이론 무장이 부족했다고 생각됩니다. ‘영어화’라는 바보짓을 추진하기 시작할 때에 확실히 일본 전체가 이대로 가면 열화(劣化)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한 증거와 논리를 가지고 주장했어야 하고, 지금도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세 선생께서 하신 작업은 앞으로의 투쟁을 위해서 소중한 기여가 될 우수한 책입니다. 저는 마음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우열한 세계화주의자들의 발호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영어화’를 거부하여 성공한 메이지(明治)의 근대화

시라이   ‘영어화’가 일본을 열등한 나라로 만든다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서 세 선생께서는 메이지시대의 일본 근대화라는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메이지시대 일본의 근대적 나라 만들기가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것은 ‘영어화’를 거부했기 때문이죠. 메이지 초기에도 그런 주장이 있었어요. 즉, 영어를 공용어로 하지 않으면 세계의 선진 대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는 논리 말입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나 후쿠자와의 제자인 바바 다츠이(馬場辰猪) 등이 반대했습니다. 결국 메이지시대 사람들은 근대 일본을 건설함에 있어서 일본어를 버리는 게 아니라 발전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외래의 선진 지식을 일본어로 번역함으로써 엘리트뿐 아니라 널리 만민이 지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예를 들면, 우리가 보통 사용하고 있는 ‘사회’, ‘근대’, ‘경제’ 등등의 말은 외래의 추상개념을 메이지 사람들이 번역을 통해서 만든 말입니다. 그들은 일본어의 어휘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대응한 것입니다. 일상적인 언어인 일본어를 고도의 논리적인 토론에도 감내할 수 있는 ‘국어’로 확립했습니다.
일본의 중간층이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은 그 덕분입니다. 일반인 다수가 능력을 연마하고 또 그 능력을 발휘하기 쉬운 일본어의 공공 공간을 확립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근대 일본의 국력의 원천이었죠. 그러므로 국민의 영어능력을 향상시키면 일본 경제도 부활한다는 따위의 언설은 거짓말입니다. 영어를 가지고는 일본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고 발휘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시라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 등 식민지가 되어 언어까지 지배되었던 나라의 비애라는 것을 ‘영어화’ 추진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엘리트들과 모국어로 생활하는 서민들로 사회가 분단되고, 대다수 서민들은 설사 능력이 있어도 영어를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바보 취급을 당하고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상황, 이것은 세계에서는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국제파’로 자처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영어화’ 추진파 사람들은 거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언어의 ‘영속 패전’ 체제

시라이   세 선생의 저서는 아주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지적인 작업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 즉 암묵지(暗默知)와 같은 것을 어떻게 해서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지적 말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그것은 역시 모어(母語)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죠. 언어는 사고의 근원을 규정하기 때문에 학술언어가 소멸된다는 것은 발상의 형태가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과계든 문과계든 마찬가집니다. 학술언어가 영어로 일원화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학술 전반의 빈곤화, 인간의 지(知)의 가능성의 축소를 의미합니다.
세계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게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계에서도 예를 들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을 보라고, 그는 슬로베니아사람이지만 영어를 구사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일본인도 하면 되지 않는가, 라고.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중요한 시점이 빠져 있습니다. 즉 과연 지젝 자신이 그것을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비애와 분노를 느끼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영어화’나 글로벌화가 현재로서는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단히 비애스러운 것, 굴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영어화’ 추진파들에게는 그러한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TPP에 관해서도, ‘영어화’에 관해서도, 일본사회에는 미국 주도의 글로벌화에 대한 노여움이나 회한의 감정이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미국이나 앵글로색슨의 힘에 굴종하는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이 본래 있어야 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어째서 일본인이 이렇게까지 미국이 말하는 것이면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지, 정말 과잉 순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일본인은 심리적인 인지부조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신과 상대방이 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일본인에게는 스트레스인 거죠.
노르웨이 출신의 정치학자 욘 엘스터가 ‘적응적 선호 형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런 현상입니다. 졌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여, 자신은 스스로 상대방에 동조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시라이 선생께서 《영속패전론》에서 예리하게 지적하셨지만, 말하자면 ‘패전의 부인’입니다. 전후에 일본인은 전쟁에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에 의한 통치·지배를 선의나 진보라는 환상으로 변환, 해석해온 셈이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어화’를 추진하는 세력에게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자신들을 미국인이라고까지 착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시라이   적어도 미국은 일본을 사랑하고 있다, 라는 거대한 망상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패권세력 미국에 어떤 식으로든 의존하고 있지 않은 나라는 세계 전체를 보아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대미종속이 기묘한 것은 미국은 일본을 사랑하고 있다는 픽션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으로부터 편애를 받고 있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면서 ‘영어화’도 받아들이고 있는 거죠.

시라이   그게 두렵습니다. 그 때문에 ‘영어화’도 글로벌화도 추진해보았지만 결국 일본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판명될지라도 그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과 동화되는 쪽이 심리적으로는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 결과 얼마만큼 우리가 잃어버렸는가, 라는 사실로부터 눈을 돌려버립니다. 전후 70년이 되었지만 갈수록 일본은 패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끝나지 않는 패전, ‘영속 패전’이죠.
영어가 세계언어로 된 단적인 이유는 미국과 영국이 전쟁에서 계속 승리했다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언어적인 지배가 영속화되면, 그들이 이득을 봅니다. 그 외에 본질적인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본사회를 일본인이 자발적으로 ‘영어사회’로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패배를 계속하는 구도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글로벌화와 함께 진행되는 엘리트들의 ‘우민화(愚民化)’

시라이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게 ‘영어화’ 추진파들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라쿠텐’의 대표이사 미키타니 히로시(三木谷浩史)는 자기 회사의 ‘영어화’ 추진뿐만 아니라 정부의 산업경쟁력 회의의 멤버로서 나라 전체의 ‘영어화’ 정책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학교에서 일본 역사 따위는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저 신흥 부르주아의 자기인식 속에는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역사를 짊어진 존재라는 인식,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살아간다는 인간관이 처음부터 없는 거죠.

  그러한 감성을 지닌 신세대 자본가들은 “언어라는 것은 도구에 불과하다”라고 말합니다. 언어나 문화가 자신의 정신을 좋게도 나쁘게도 한다는 실감이 없습니다. 문화도 언어도 대단한 게 아니다, 라는 거죠.(김형수 옮김)


  세 테루히사(施光恒, 규슈(九州)대학 준교수, 정치학)와 시라이 사토시(白井聰, 교토세이카(京都精華)대학 전임강사, 사회사상) 사이에 진행된 이 대담기록의 출처는 일본 슈에이샤(集英社)의 계간지 《kotoba》(2015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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