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8호 2016년 5-6월호  인쇄용  

 

  성장시대의 종언과 민주주의

  김종철

최근 세계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오늘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경제성장 시대가 끝났거나 끝나가는 징후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중에서 《자본주의의 종언과 역사의 위기》(2014)라는 책을 쓴 미즈노 가즈오(水野和夫)라는 일본의 경제사가는 대표적인 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세계의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국채의 이자율이 2% 이하로 머물거나 혹은 제로 금리, 심지어는 마이너스까지 내려가는 상황이 됐음을 주목하고, 이것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신호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에 의하면, 유사 이래 이자율이 이토록 낮은 적이 없었다. 예외적이나마 굳이 유사한 상황을 들자면, 16세기 초 약 10여 년 동안 이자율이 2% 이하로 머물러 있던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 자유도시들의 상황이었다. 중세 말기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 자유도시들은 16세기 전반기에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경제적 헤게모니는 네덜란드, 이어서 영국으로 옮겨 간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미즈노에 의하면, 낮은 이자율은 낮은 이윤율을 의미한다. 즉, 이토록 낮은 이자율이 지속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극심한 불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상당한 이윤 획득의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새로운 투자를 꺼리게 마련이고, 이러한 투자 위축 상황이 계속되면 경제 전반의 활력의 둔화, 생산 부진, 고용 기회의 축소, 소득 감소, 구매력 부족, 과소소비, 투자위축의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결국에는 헤어나기 어려운 심각한 디플레이션에 빠져버린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시스템의 낯익은 호황―불황 사이클의 최신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2% 이하의 이자율이 장기간 계속된다는 것은 단순한 경기사이클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안되고,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시스템 자체의 수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로 봐야 한다고 미즈노는 말한다.
 

‘프런티어’가 사라진 자본주의

미즈노가 그렇게 보는 이유의 하나는, 오늘의 상황이 16세기 이탈리아 자유도시들의 경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중세 말기의 그 상황은 경제적 헤게모니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미국에 이어서 세계 자본주의를 새로이 주도할 헤게모니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지금은 패권국가 미국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그 패권을 이어받을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기는커녕 세계경제가 총체적으로 동반 추락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점을 이해하자면 자본주의가 본시 ‘외부’, 즉 수탈과 착취를 할 수 있는 ‘프런티어’가 없으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 그리고 성장이 불가능하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관련해서 흥미로운 관점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미국의 역사학자 월터 프레스콧 웹은 《거대한 프런티어》(1951)라는 책에서, 지난 450년 동안 유럽인들이 주도해온 자본주의문명이 놀랄 만한 성장·확장을 거듭해온 것은 기본적으로 1492년 아메리카대륙 ‘발견’ 이후 남북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등 서구인들이 맘대로 지배할 수 있었던 ‘거대한 프런티어’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이라는 중심(메트로폴리탄)에서 보자면 비유럽 세계는 모두 ‘프런티어’인데, 그 ‘거대한 프런티어’에 대한 거침없는 약탈에 의해서 자본주의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확대되는 경제를 근본토대로 의회제 정당정치를 비롯하여, 온갖 사회적·문화적 시스템, 즉 서구문명의 상부구조가 성립·유지돼왔다. 요컨대 서구 근대문명의 번영은 ‘거대한 프런티어’라는 ‘외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립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때 미국역사학회 회장을 지낸 이 고명한 역사학자는 그런 유럽의 근대 문명이 누려온 번영의 시기가 이제는 끝났다고, 1950년의 시점에서 단언하고 있다. 그 이전 450년 동안 자본주의문명을 뒷받침해왔던 성장과 확대의 근본조건, 즉 ‘거대한 프런티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50년 무렵은 세계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대부분 포기하고 이른바 제3세계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프런티어’를 말했을 때 그는 주로 그 식민지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식민지는 과거지사가 되었으나 이른바 신식민주의적 지배와 약탈이 계속돼온 20세기 후반 이후의 세계적 현실을 생각하면, 월터 프레스콧 웹의 관점은 상당히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보면 1950년 시점에서 자본주의경제의 성장조건들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성급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서구식 근대 자본주의문명이란 기본적으로 비서구 세계에 대한 침략과 약탈의 소산이라는 것, 그리고 침략과 약탈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는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고, 그때는 그 문명은 당연히 종식될 수밖에 없다는 이 책의 중심적 메시지는 어김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을 지금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얘기한 그 혜안과 용기는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거대한 프런티어》는 확실히 석유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프레스콧 웹이 석유라는 ‘마법의 물질’에 대해서, 즉 그것이 20세기 이후의 자본주의경제에 끼치는 막대한 역할을 알았다면 자본주의문명의 종식 시점을 1950년대로 성급하게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시기를 좀 앞당겨 예견했으나 자본주의문명의 필연적 종식을 언급한 것은 기본적으로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에너지와 경제성장

자본주의문명의 종식과 성장시대의 종언이 꼭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성장’이 멈추면 자본주의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점에서 프레스콧 웹이 예견한 ‘프런티어’의 소멸은 그대로 성장시대의 종언을 설명하는 데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프런티어’의 소멸은 에너지, 기후변화 그리고 ‘금융위기’등, 지금 지구사회 전체가 직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들과 결부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에너지문제. 여기서 에너지는 주로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문명을 뒷받침해온 화석연료를 의미한다. 근대 자본주의문명은 철두철미 화석연료에 의존해서 전개돼왔다. 특히 2차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의 ‘풍요’는 일차적으로 값싸고 풍부한 석유 공급 때문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발생한 오일쇼크는 석유가 재생 불가능한, 유한한 자원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석유가 고갈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심각한 공급 부족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해주었다.

그 후 원유가격은 상승을 계속하고, 드디어 수십 년 동안 배럴당 5~10달러에 머물던 석유가격은 2010년경에는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상황이 되었다. 석유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제에너지기구(IEA)조차도 2011년의 보고서에서 이미 2006년에 ‘피크오일’이 지나갔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상하게도 최근 국제 원유가격이 갑자기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몇 년째 저유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치상의 알력·대립·책략에 기인한 일시적 이상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기술 개발에 의해 셰일오일, 타르샌드, 석탄액화연료 등, 비전통적인 석유의 풍부한 채굴이 가능해졌으므로 앞으로 몇백 년 동안 석유는 ‘걱정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국제에너지기구마저도 그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희망사항’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석유가 값싸게 풍부히 공급되던 시대는 지나갔음이 확실하다. 그러면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여 움직여온 시스템은 어떻게 될까? 종래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석유가 단지 주요 에너지원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 수송, 농사를 포함한 현대적 의식주 생활에 불가결한 제품들의 기초 원료라는 점이다. 이토록 중요한 석유의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현대적 생활방식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인프라는 물론, 그 인프라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정치, 군사, 법률, 교육, 문화, 학문, 예술까지 포함한)도 근원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의 세상은 질적으로 차원이 전혀 다른 세상일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낯익은 방식대로 우리의 삶이 연장되거나 혹은 확대된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타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우리가 반복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사회에도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것은 경제적 불평등이 날로 극심해지는 시대 현실을 고려하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민주화를 논하면서도 이제 더이상의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생각하면 이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세계가 직면한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대한 약간의 의식이라도 있다면, 경제성장이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별로 큰 지식이 없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석유도 석유지만, 무엇보다 경제성장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것은 기후변화로 대변되는 환경위기 때문이다. 사실 기후변화 자체를 막는다는 것은 벌써 불가능한 단계로 들어섰다. 그런데도 지금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은 앞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즉, 지구 평균기온이 18세기 산업혁명 초기 무렵보다 2℃를 넘지 않도록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의 방출을 억제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관련 과학자들의 견해로는, 이런 목표나마 성취하려면 현재 지하에 매장돼 있는 모든 석탄, 석유는 지금부터 아예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식적인 국제회의 테이블에서 흔히 논의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급진적인 제안이다. 대체로 국제회의에서 제시되는 목표는 세계의 산업국들이 1990년을 기준으로 매년 5% 내지 10%씩 순차적으로 온실가스 방출량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축소조차도 (글로벌경제의 경쟁 압력 속에서 승자가 되거나 적어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붙들려 있는) 거의 모든 산업국가의 정책결정자들은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 현실을 감안하면, 화석연료를 땅속에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견해는 얼핏 보면 황당하다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후변화라는 엄중한 사태를 우리가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화석연료 사용의 극적인 축소를 주장하는 견해는 결코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무시될 수 없다. 오히려 훨씬 비현실적인 것은, 이 모든 이성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화석연료 사용의 계속적인 증가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활동, 즉 경제성장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강박적 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정상상태로의 회귀

경제성장이 정지된다고 가정하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두려움을 느낀다. 성장이 멈추면 고용문제는 어떻게 하고, 연금제도 같은 사회복지 시스템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장구한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매우 짧은 시간의 예외적인 경험이었다. 《거대한 프런티어》에서 프레스콧 웹은 지난 수백 년간 유럽인들이 주도해온 ‘번영의 시대’는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장시대의 종언은 우리가 정상적인 시대로 회귀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전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상당한 기간 동안은 많은 혼란과 좌절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그동안 우리사회는 온갖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거기서 비롯한 대립과 갈등을 경제성장을 통해서 호도하거나 완화해온 측면이 크다. ‘파이’를 크게 만들면 가난한 사람들도 미약하나마 혜택을 받고, 그 결과로 어느 정도 불만을 잠재우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배세력의 의도였든 아니든, 그런 전략이 상당 기간에 걸쳐 비교적 효험을 발휘했음이 사실이다.

물론 한국사회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거의 모든 나라, 모든 산업국가가 기본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국가 체제와 사회질서를 유지해왔다. 껍데기뿐인 민주주의지만, 자본주의국가에서 그동안 대의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경제성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 끝난 상황에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공유재의 재인식

결론부터 말하면, 사회 속에 존재하는 ‘공유재’를 공평하게 나누고 상호협력과 상호부조를 통해서 공생의 삶을 추구하는 길 이외에는 없다. 우선 고용문제를 생각해보자. 종래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일자리는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대규모 생산―유통―소비―폐기의 과정들에서 필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이 과정이 대폭 축소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 것인가? 성장시대의 기본적인 룰과 논리로는 도저히 해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최근 인공지능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조만간 인간노동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사람들이 당연히 걱정하는 것은 일자리 문제이다. 그 결과, 여러 해 동안 일부 서클 속에서 논의되어온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와 함께 모든 국가 구성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생활보조금(기본소득)에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지, 과연 가능할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쉽게 기대는 것은 과세제도 개혁이라는 아이디어이다. 이것은 물론 틀린 생각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나 자치체가 돈을 마련하는 데 꼭 세금에만 의존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조금 자세히 생각해보려면, 우리는 국가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근본적으로 묻지 않으면 안된다. 근대 국민국가는 대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사회계약을 맺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구축한 공동체, 즉 공화국이다. 그러니까 공화국(republic)이란 한마디로 그 공동체가 개인이나 소수 그룹의 사유재가 아니라 구성원 전체에 귀속된 공공재(commonwealth)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란 이 공공재를 특권적인 소수의 강자들이 배타적으로 점유, 사유화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삶터와 생계수단을 빼앗기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노예의 삶을 강요당해온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력적 사태는, 실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함없이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왔다. 즉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약사(略史)》, 2005)은 자본주의의 일관된 작동 기제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공유재(commons)라고 하면 토지나 목초지 등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허다한 형태로 존재하는 게 공유재이다. 재작년에 작고한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宇澤弘文)가 ‘사회적 공통자본’이라고 명명한 것도 결국 공유재이다. 예를 들어 철도, 도로, 항만, 공항, 가스, 전기, 통신 등 인프라는 물론, 문화와 예술, 의료 및 교육시설, 나아가서 국가의 정치 및 행정과 사법체계, 군대와 경찰, 미디어도 모두 공유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다종다양한 시설, 제도, 서비스를 운영한 결과 생기는 이익이 있다면, 그 이익은 공유재를 활용한 소득인 만큼 마땅히 공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매우 정당하게 성립한다.
 

금융화폐제도, 가장 중요한 공유재

공유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금융화폐제도이다. 화폐라는 것은 본시 공동체의 원활한 경제생활을 위한 교환수단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이상하게 발전하여 오늘날 화폐제도는 사적 이윤 취득 수단이 돼버렸다.

주목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돈(약 90% 이상)은 국가나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나 동전이 아니라 단지 숫자상으로만 표시되는 가상의 화폐라는 점이다. 이 화폐는 민간 상업은행이 고객에게 대출을 해주는 순간 생겨난다. 그러므로 지금 통화의 대부분은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 즉 ‘부채’로 구성돼 있는 셈이다. 그것도 기한이 되면 원금과 함께 이자를 붙여서 상환하지 않으면 안되는 부채 말이다.

여기서 잠깐 ‘부분지급준비제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지금 은행이 대출을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처럼, 은행은 고객이 맡긴 예금 중의 일부를 다른 고객에게 대출해주는 게 아니다. ‘부분지급준비제도’란 은행이 자신의 금고에 들어 있는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대출이라는 형식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이다. 그리하여 은행은 금고에 100만원이 있다면 1,000만원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대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대출된 돈은,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가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화폐가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신용창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신용창조에 의해 탄생한 화폐는 대개는 고객의 통장에 숫자로만 기재되어 경제의 순환과정 속으로 투입된다. 어쨌든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실질적인 화폐 발행 주체는 국가도 중앙은행도 아니고 일반 시중은행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신용창조’라는 과정을 통해서 사실상 대부분의 돈이 국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사립 민간은행에 의해 발행된다는 것은 따져보면 실로 중대한 문제이다. 민간은행인 이상, 은행의 근본관심이 공익이 아니라 사기업으로서의 자신과 주주들의 (단기적인) 이익의 극대화에 쏠리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은행은 가급적 많은 대출금을 발생시켜―즉, 새로운 화폐를 가급적 많이 발행하여―공익성이 큰 사업을 지원하기보다는 손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증권, 부동산 등에 투기적 투자를 하거나, 법적 규제가 느슨한 틈을 타서 사행성이 농후한 온갖 종류의 금융파생상품 개발을 통해서 떼돈을 벌 궁리를 자연히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탐욕의 메커니즘은 결국 경제와 사회를 파탄에 빠트리고 만다. 그러면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시민에게 돌아가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실제로 그것은 2008년 월스트리트 금융파산 사태에서 명확히 입증되었다(빌 토튼,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 녹색평론사, 2013 참고).

만약에 지금처럼 화폐를 민간은행이 영리 목적으로 발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중지하고, 정부나 공공기관이 직접 발행하는 구조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되면 우선 이자수입을 비롯해서 화폐 발행에 의한 이득(‘시뇨리지’)이 전부 공공의 부가 되고, 따라서 공익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국채라는 형식으로 국가가 시중은행들의 돈을 빌려 써서 이자를 물어야 하는―따져보면 괴이한―관행이 사라지고, 국가는 필요하면 언제든 스스로 화폐를 발행하여 복지, 교육, 의료 등 경비로 지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수많은 개인이나 단체가 부채에 짓눌려 원금에 이자를 붙여 상환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버둥거리는 처참한 상황이 종식될 수 있다(실제로 기본소득의 재원도 이런 방식으로 간단히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클리포드 더글러스는 ‘사회신용론(social credit)’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1920년대에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민간은행에 의한 ‘신용창조’ 메커니즘을 중지시켜야 할 또하나의 매우 중대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때문에 ‘경제성장’이 강박적으로 강요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금융화폐시스템의 내재적 논리로 보면, 시스템이 지속되려면 끊임없이 은행이 대출을 해야 하고, 이에 이자를 붙여서 원금을 상환하는 과정이 반복, 확대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과정이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으면 곧 시스템은 정지되거나 작동 불능 상태로 된다. 그러면―오늘날 대부분의 돈이 은행 대출금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사회에 필요한 돈이 말라버리고, 그 결과 전면적인 경제파탄이 불가피해진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자면 어떻게든 경제성장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적인 경제성장 없이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게 돼 있는 이러한 금융화폐제도야말로 우리가 경제성장 논리를 극복하는 데 가장 큰 장해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해결책은 결국 현행의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혁파하거나, 아니면 사유화돼 있는 금융기관을 공유화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원래 금융제도와 화폐라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공공재이니만큼, 은행을 공적 기관으로 만든다거나 은행이 ‘부분지급준비제도’를 이용하여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관행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활로는 민주주의의 강화

그러나 문제는, 이 불의한 혹은 부조리한 금융시스템으로 부당하게 이익을 챙겨온 기득권세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참고로 할 만한 것은 2008년 가을,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의 사기행각이 백일하에 드러난 뒤에 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공립은행 설립운동이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예전에는 공공은행이 많았고, 지금도 노스다코타주립은행은 공공기관이다. 그 때문에 노스다코타주는 현재 미국에서 재정이 가장 견실하고 실업률도 가장 낮다고 알려져 있다(Ellen Brown, Public Bank Solution, 2013).

금융제도와 화폐라는 공공재를 다시 민중의 것으로 돌리는 일은 성장이 중단된 시대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현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업의 성취 여부는, 말할 것도 없이, 합리적인 정치에 달려 있다. 그리고 합리적인 정치란 다른 게 아니라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회 구성원 다수의 이익(공공선)을 비폭력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정치, 즉 민주주의 말고는 없다.

민주주의란 단지 선거를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선거는 오히려 과두지배 체제를 정당화해주는 기만적인 책략이기 쉽다. 그 때문에 오늘날 선거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허다한 경우 금권과두세력에 봉사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이비 민주주의로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더욱이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것들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난제 중의 난제들이다. 이 위기상황을 돌파하여 지속가능한 새로운 인간적 삶의 방식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탁월한 지도자 혹은 난세의 영웅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속에 잠재돼 있는 최량(最良)의 지혜를 발굴하는 방식, 즉 대화와 토론을 거쳐 최선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틀을 구축하는 일이다. 사회 속의 최량의 지혜라는 것은 결국 진정으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집한 ‘집단적 지성’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이 글은 2016년 4월 28일 원광대에서 열린 ‘원불교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원고의 수정본이다.

 

녹색평론사  (02)738-0663, 0666  fax (02)737-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