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7호 2016년 3-4월호  인쇄용  

 

 세월호 2년, '책임'도 '위로'도 없었다

  박  진

‘미안하다’의 성찰

은행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번잡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인권 사안이 머릿속에서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으며 못 널고 온 이불 빨래까지…. 4월, 아직 춥다 춥지 않다 할 수 없는 계절, 빨래에 쉰내라도 나는 거 아닐까, 아침 녘 본 뉴스에는 배 한 척이 바다에 좌초되었다고 하던데…. 모두 구조되었다는 뉴스가 바삐 전송되었다. 또 사고군, 또 사고야. 끌끌 혀를 찼다. “이눔의 나라는 조용한 날이 없네.” 그게 다였다. 괜찮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알게 되었듯이,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은 그렇게 되었다. 바다에 그들이 갇혀 있을 때, 먼 거리의 나 같은 사람 말고도 그런 비슷한 심정으로 사건을 바라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도 올렸다. “우리 애가 탄 배가 맞는 것 같은데, 우리 애 수영 잘하니까 괜찮아. ㅋㅋㅋ”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다. 그이에게 ‘ㅋㅋㅋ’는 천형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결론일 줄 몰랐기 때문에 올렸던 글이었다. 당연히 살아날 줄 알았기 때문에 남긴 글이었다. 수학여행 배가 가라앉았다니 아이 옷이 젖었겠구나 싶어, 갈아입을 옷을 챙길 때도, 학교에 모이고, 버스를 타고, 시동을 걸고, 미친 듯한 속도로 진도로 향할 때 모두, 그런 심정이었다. ‘ㅋㅋㅋ’ 하고 웃고 말 일일 줄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기나 했을까. 이렇게 될 수나 있는 일이었는가. 여느 때처럼 하루해가 지났다.

다음 날 해가 다시 뜨고 나서야 이게, 그런 일이 아닌 줄 알게 되었다. “배 안에 시신만 둥둥 떠 있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탈출한 172명에서 멈춘 숫자는 늘지 않았다. 심장이 대장과 소장 아래로 덜컥 내려 앉았다. ‘당신들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기원합니다’라는 글귀를 써서 촛불 들고 역전으로 나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죄책감이 먼저 자리 잡았다. “또 사고네 사고야, 이눔의 나라는 조용한 날이 없네” 했던 순간이 미안함과 아픔으로 찾아왔다. 아무렇지도 않던 마음의 시간에 그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자각은 모질었다. 중학생 딸을 데리고 술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그러니까, 앞에 앉아 있어줄래?” 소주와 사이다를 사이에 두고, 녀석과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열여덟 살, 젊은 생명의 추락이 딸의 얼굴과 겹쳤다. 허겁지겁 안아보기도 했다.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곳에 네가 있었다면, 나는 어째야 할까 싶어, 엄마는.”

겪어보지 못한 충격 앞에, 대한민국은 교복 입은 청소년만 지나가도 눈물 듣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말들 중에 가장 많은 말들은 ‘미안하다’였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현수막도 많았다. 사람들은 왜 미안하다 말하기 시작했을까. 무엇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일까. ‘미안하다’는 여러 의미로 읽혔지만 하나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버텨온 체제의 실패를 성찰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단 한 명도 살리지 못한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서, 제대로 고박되지 못해 넘어간 거대한 화물들처럼, 평형수를 빼고 과적을 일삼아도 모르쇠 하며, 이 위험한 체제를 버텨준 자신 스스로를 탓했을지 모른다.

‘미안하다’에는 희생자 대다수가 청소년이라는 사실이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와 같은 유의 언어에는 ‘보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어른들이 잘못했다’는 직접적 말도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대입되면서 잘못의 진정한 주체는 가려졌다.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책임의 주체는 ‘어른’이 아니다. 위험한 배를 바다 위로 띄운 책임도 어른 일반이 질 문제는 아니었다. 이후 이어진, 진실을 은폐하는 시도를 했던, 피해자와 국민들의 알권리를 방해한 집요한 주체도 ‘어른’은 아니었다. 모든 책임의 정점에는‘권력’과 ‘국가’가 있었다. 피해자를 ‘어린’ 청소년으로 두고, 가해자를 ‘어른’으로 둔 모호한 책임의 말들 속에서 ‘진실을 은폐할 길’을 찾았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이 범인이었으리라. 착시효과를 통해 참사의 책임으로부터 탈출의 길을 모색하는 이들이 참사의 진짜 가해자들이었으리라.

어쨌든 ‘어른’의 잘못이라는 말들의 착시효과는 참사 초기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말들에 포함된, 성찰의 의미는 깊이 읽혔다. 단 한 명도 살리지 못한 국가와 체제에 자신들 스스로를 포함시킨, 직관적 언어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성찰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민 다수를 트라우마 상태에 빠뜨린 상실과 애도의 감정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해자가 눈물만 흘리는 ‘희생자’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등장한 능동적 주인이 된 시간과 겹쳤다.

‘사상 유례없는 구조 작전’이라는 보도 현장에서 거짓말의 실체와 사라진 국가의 진실을 목도한 사람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살아도 살아 있을 수 없음을 체감한 사람들. “아가, 살려줄 생각이 없나 보다. 너무 춥다. 어여 가거라. 엄마가, 아빠가 곧 따라갈게.” 그들도 직관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참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것을.


피해자를 심판대에 세우는 사회

안산 단원고 학부모 유가족들은 청와대와 KBS, 국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참사의 진짜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비정치적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 되는 정점에 피해자, 그들이 있었다. 피해자들이 나선 이유는 이후 이어진 그들의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현장에 등장하는 416TV 지성이네 이야기를 들어보자. “치유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자식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 구술집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2015) 제주도 북콘서트에서 지성 엄마는 유가족이 원하는 치유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배 타는 것이 두렵다는 아이에게 “큰 배는 위험하지 않아”라고 말한 세희 아빠. 배가 기울었다는 딸에게 “지시하는 대로 잘 따르면 돼”라고 전화한 예은 아빠. 그들은 자식 잃은 상처에 죄책감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지성 엄마는 참사 이후 1년이 되어가던 시점에 “그 아이 빈자리, 식구들이 모여서 밥 먹고, 언니와 춤추고, 왁자지껄 북적대던 우리집이 없어졌어요. 아이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시간이 사라졌어요”라고 말했다.

당시는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은 특조위 생명인 독립성을 심각히 훼손하고 있었다. 이러한 집요한 방해공작은 참사 2주년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특조위를 난파선 상태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정황들이 속속히 드러났다. 심지어 여당 추천 위원이었던 이헌 부위원장은 지난 2월 12일 사의를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특별법을 “여야가 정치적으로 타협해 만든 근본적으로 잘못된 법”이라고 규정하며 “특조위원 전원이 모두 사퇴하고 해산하는 게 낫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 부위원장의 사퇴로 17명의 특조위원 가운데 여당 추천 위원 5명의 실제 활동이 중단되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예산 책정과 조사활동 모두가 지체될 우려를 낳고 있다. 해수부(해양수산부)가 작성한 ‘특조위 여당추천위원들의 행동지침’이 담긴 문건이 폭로된 이후였다. 결국 4·16가족협의회(가족협의회)는 진상규명 과정에서 직권남용, 협박 등으로 조사를 방해한 김영석 해양수산부장관과 이헌 부위원장 등 여당 추천 위원 6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가족협의회는 단원고 유가족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다. 생존 학생 가족, 화물기사,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등도 참여하고 있다. 이른바 피해자 집단이다. 이들이 헤쳐온 길을 통해, 우리사회가 피해자를 어떻게 보는지 돌아볼 수 있다.

통곡하는 피사체였을 때 이들은 절대다수에게 동정의 대상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들의 대상자였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특별법 제정과정에 여당의 세월호 TF(태스크포스) 심재철 위원장이 나서서 “과도한 배보상을 요구하는 혐오스러운 유가족”이라는 거짓말을 SNS에 유포한 사실이다. 당시 심 의원이 실제 특별법 내용을 몰랐을 리 없다. 특별법에 그러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감하시면 다른 분께도 전달해주십시오”라는 글로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바로 국정조사 특위 간사 조원진 의원의 조류독감 비유가 이어진다. 이때를 기점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여론이 갈라졌다.

이전까지 참사에 대한 여론은 보수·진보 진영논리로 나뉘지 않았다. 누구나 슬퍼하고 애도했다. 참사 없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 다짐했다. 그러나 문제의 메시지가 회자되기 시작할 때부터 여론은 쪼개졌다. 참사를 기억하자는 쪽은 진보, 이제 그만하자는 쪽은 보수라는 식의 구도였다. 단식농성장에 폭식투쟁이, 엄마ㅤㅉㅘㄳㅤㅉㅘㄳ봉사단이라는 이들의 “누가 죽으라 그랬어? 지겹다”는 망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국회는 세월호특별법 유가족에 대한 참관을 거부했다. 인권의 자리에 모욕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간 속에서

담담하게 말하는, 울지 않는 지성 엄마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기 전날, 찢어질 것처럼 몸에 붙고 짧아서 엄마 마음에 안 들던 교복 치마를 늘려달라 하고 갔어요. 그 작은 게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엄마 마음 좋으라고 선물처럼 남기고 간 거겠지…. 난 그 애가 지금도 너무 아까워요.” 사소한 기억에 울고 웃는 평범한 이들이다. 유민 아빠도 마찬가지다. 이혼한 후 직접 키울 수 없는 만큼 유민이와 동생에게 살뜰했다. 하지만 40여 일의 단식으로 세월호 유가족의 대표 얼굴이 되자, 그에게 집요한 공격이 가해졌다. “이혼했으며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아빠였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권리의 주체가 된 피해자들에게 돌아온 비난은 모질고 독했다. 유민 아빠는 딸들과 나눈 메시지와 용돈 보낸 통장 내역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나쁘지 않은 아빠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한번 오해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진실은 가닿지 않았다. 그에게 가해진 돌팔매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피해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지 않을까? 피해자는 피해자일 뿐이다. 무책임한 부모였을 수 있다. 헤어진 가족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질까. 살아 있을 때 제대로 해주지 못한 아픔, 그 마음의 빚을어떤 방식으로든 갚고 싶어 하면 안되는가? 피해자에게 ‘자격’이 있나? 피해자는 상실에 직면한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피해자는 순결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자체로 상처가 되었다. 술 없이 잠들지 못하는, 담배 없이 한숨도 쉬지 못하는 이들이 숨어서 술을 먹고 취한다. 순결한 피해자로 보여야 하는 강박까지 짊어져야 한다. 소위 ‘대리기사 폭행사건’으로 불린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러운 언급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제정신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유가족들은 사건 당시 바로 책임을 졌다. 전 임원이 사퇴했다.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사라졌지만 아직도 무엇 하나 책임지지 않는 이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는 울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건의 주체가 되어 걸어 나와서는 안된다는, 사람들의 단정 속에서 또다른 참사의 피해를 오롯이 안고 살고 있다.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순결한 피해자일 수 있는가? 바다에서, 강에서, 산에서, 터미널에서, 요양병원에서 갑자기 닥친 재난과 참사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말이다. 그런 불행은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는다.

여름이었겠다. 유가족들이 청운동에서 농성할 때 일이다. 청운동사무소 앞은 세상 온갖 요구가 모인다. 경찰이 청와대까지 못 가도록 막는다. 그래서 집단행동이 가능한 길 끝이 청운동사무소다. 찾아오는 이들은 다양하다. 정치적 스펙트럼도 넓다. 신문고 치는 사람들처럼 규탄하기 위해 오고, 청원하러 오기도 한다. 경찰들 움직임이 분주해지면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집회가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런 어떤 모임이었으리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단체의 기자회견이 끝난 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청운동 앞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 앞을 우르르 지나치고 있었다. 그중 중년 여성이 다영 엄마와 함께 앉아 있는 내게 물었다. “세월호 때문에 계신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래, 이건 정말 제대로 해결해야지. 그런데 배후 조정 세력들이 문제야. 그런 사람들만 없으면 우리도 다 찬성이야. 힘내요” 이러면서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갔다. 함께 있던 다영 엄마는 옆구리를 쿡 찌르며 “배후 조정이나 제대로 하면서 욕을 먹어. 맨날… 제대로 못면서 왜 욕만 먹는 거야?” 했고, 무능한 배후 조정자와 배후 조정당하는 유가족은 뙤약볕 밑에서 큰 웃음을 터뜨렸다.1)1)“세월호 참사 1년…‘무능한 배후 조정자’로 그들과 보낸 1년”, <미디어스>, 2015년 3월 31일.

제대로 된 배후 조정도 못한 채 1주기를 앞두고 있던 작년 이야기다. 단식농성, 노숙농성, 기자회견, 집회, 도보행진, 삼보일배, 속옷까지 젖는 빗속에서 버틴 온갖 종류의 저항 곁에 있었다. 특별법 제정, 시행령 폐기 투쟁, 청문회 그리고 특별법 개정운동, 참사 2주기….

상실의 아픔 앞에 놓인 이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청운동사무소 앞 농성장 아침은 맨바닥에서 느껴지는 차량 소음이 두세 배 커질 때쯤 찾아왔다. 새우잠에서 깨 주변을 둘러보니 같이 잠자던 엄마들이 보이지 않았다. 천막을 걷고 나서니 꽃밭 담장 위에 엄마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왜 이렇게들 일찍 일어났어요?” 말 건네며 얼굴을 보니, 순범 엄마, 영석 엄마, 동진 엄마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다. 등교하는 인근 학교 학생들을 쳐다보고 있는 참이었다. 우연하게도 단원고 아이들과 같은 교복. 기억은 섬세할수록 잔인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애들 학교 가는 거 보고 있었어….” 마침 남학생들, 모두 남자애들의 엄마였다. 그런 이들 앞에 괜찮다, 괜찮아질 거야, 라는 따위의 말은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


잊혀진 사람들

국회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만나러 단원고에서 국회까지 도보행진을 한, 살아남은 아이들의 이야기도 전해야겠다. ‘생존 학생’이라 불리게 된 이들. 전 사회의 관심을 받고 있었으나 참사의 바다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친구들. 도보행진을 결정하고 길 떠나기까지 자신들 앞에 놓인 길을 두려워했다. 또 득달같이 달려들 카메라가 싫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들이대는 마이크가 몸서리치게 미웠다. 허락한 카메라가 아니면 절대 찍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떠난 길이었다. 친구들 이름표를 저마다 가방에 붙였다. 가슴에 붙였다. 하고 싶은 말을 작은 깃발에도 쓰고, 노란 우산에도 썼다. 선두의 노란 깃발엔 “사랑해, 보고 싶어 얘들아” 같은 여러 글귀가 보였다. 여느 또래처럼 밝고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걸었다. 그래서 잘 몰랐다. 아픔의 시간과 조금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국회에 도착하자 소리 없이 무너졌다. 떠난 친구들의 엄마, 아빠들이 굶고 있는 얼굴을 보자 다리를 꺾고 울었다. 인솔했던 남자애는 가족협의회 전명선 위원장의 품에서 흐느꼈다. 다리에 석고붕대를 하고서도 모든 구간을 걸어낸 친구도 있었다. 그들 역시 특례입학이다 뭐다 하는 저간의 삿대질까지 견뎌야 했다. 이제 성인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들 기억에서 2014년 4월 16일은 지울 수 없는 시간이다.

전 재산이 바다에 빠져버린 화물노동자들은 어떠했을까. 아르바이트생으로 배에 탄 아들을 잃은 부모는? 새로운 꿈을 찾아 제주도로 이주하던 가족들은? 구조에 쓰이다 버려진 민간 잠수사들은? 돌아가신 민간 잠수사들의 가족들은? 자원봉사자들의 트라우마는?

베트남 유가족 판반짜이 씨는 돈을 빌려 한국으로 건너왔다. 비행기 삯은 200만원, 베트남 일반 노동자 월급은 10만원이다. 팽목항으로 갔지만 말도 통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아직 사위와 손주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한국을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지만 한국정부는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가까스로 바다에서 살아 나온 일반인 생존자는 공무원으로부터 “선생님은 그래도 살아 나오지 않았냐?”는 막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세월호 생존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살아난 것이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승선한 친구 4명 중 2명은 죽고 2명이 살았다. 입대 영장 받아놓고 탄 배였다. 참사 직후 그들은 군에 입대했다. 연기를 요청했지만 ‘방법이 없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죽은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가 오랫동안 울다 군에 갔다. 그들도 이제 제대할 때가 되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아픔을 배상과 보상 액수만으로 산정한, 국가와 사회의 매정한 얼굴을 확인했을 뿐이다. 수십억을 받았다는 뜬소문 앞에, 당신들이 재난과 참사의 주인공이 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되묻고 싶을 것이다. 마땅히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라는 공감대는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가 없다. 잔혹한 시간이다.


다시 애도의 시작점에서

상실이 일상이 된 시대, 존재를 압도하는 거대한 상실의 경험이 “세계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간의 사명을 방해하는 위험사회에서, 상실에 대한 애도의 기술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애도란 장례를 치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떤 죽음에 대해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감정적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그에 대한 죄의식, 증오 등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으로 나한테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애도의 작업을 회피한다면 10년이 지난 후 그 상실의 경험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는 겁니다. 과거의 상실이 어느 순간 증상을 만들어내면서 삶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되돌아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 ‘상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애도의 기술’, 〈한국일보〉, 2015년 11월 27일자.

 

상실의 기간 충분한 애도를 치르지 않으면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같은 글에서 “애도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슬픔을 실천하는 노동이다”라고 적고 있다. 당사자들이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데, 아직 눈물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제 잊어야 한다거나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는 말들은 위험하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귀에 딱지 앉도록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한다. “언제까지 세월호 참사를 말할 거냐, 언제까지 세월호 참사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냐?”고. 그러나 충분했는가.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애도는 충분했는가 되물어보면 그렇지 않다. 슬퍼할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참사의 원인 규명이라는 원점에 머물러 있다. 진상규명이 그렇다. 6,000만 명의 국민이 서명을 통해 만들어낸 특별법조차 뒤흔들리는 지금, 우리는 애도의 시작점에도 서지 못했다. 오슬로의 폭탄테러와 우토야섬 총기 난사 사건의 홍역을 치른 노르웨이정부는 “이 사건은 민주주의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도 노르웨이인들을 무력으로 침묵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밝혀, 참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성숙을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다. 전국에서 화합을 촉구하는 모임과 침묵시위, 폭력 반대 집회가 이어졌다.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정기적으로 묵념 시간을 갖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에게 관심을 표시했다. 심리학자들은 그룹상담을 주재해 피해자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힘든 마음을 서로 나누게 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용기 내 서로 뭉쳤으며 불행이 일어났던 섬으로 함께 가서 전문가의 안내 아래 일어났던 사건을 파악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마음으로 떠나보냈다.

― 게오르그 피퍼, 유영미 옮김, 《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 부키, 2014.

총리는 테러 직후 보여준 따뜻한 공감을 계속해서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그는 정말로 치유적인 말을 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선함과 기쁨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 같은 책.

 

힘 있고 ‘빽’ 있는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참사가 벌어진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아직도 유가족과 피해자들은 참사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실시간 생중계로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우리들은 어떤가. 쉽게 잊힐 수 있는 참사라고, 이제는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충분히 애도하고 상실의 시간을 견뎌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참사 초기에 쏟아졌던 ‘미안하다’는 고백은 해소되었는가. 304명의 생명이 사라졌고, 476명의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그 배에서 내린 사람은 있을까.

분명한 것은 아직 누구도 용서받을 만큼 책임지지 않았고, 잊을 수 있을 만큼 위로받지 못했다. 그렇게 2년이 흘러버렸다는 점만 분명하다. 2014년 4월 16일, 다시 그날을 향해 배를 출항한다. 세월호를 온전히 인양하고 진상을 규명하며, 피해자와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항해다. 욕심으로 과적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게 좋다며 짜고 치며 부정부패를 은폐하지 않을 것이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 잘못된 명령을 내리는 선장도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선장과 선원만 탈출시키는 해경도 없을 것이다.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고 살려달라는 비명을 외면한 채, 왜 살리지 못했느냐 절규하는 유가족의 입을 틀어막는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그 배에는 타인의 아픔을 내 자식의 죽음, 내 어미의 죽음처럼 통곡하는 사람들이 탈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향해 열린 선량함과 온화함. 포옹할 수 있는 마음들.

기필코 세월호를 맹골수도에서 건져낼 것이다.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찾을 것이다. 상실의 기간을 거쳐, 애도의 노동을 통해 마침내 미안했던 마음을 딛고,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다른 사회에 도착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라진 304개의 운명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진도를 거쳐 제주에 무사히 도착하는 배를 이제, 타자.

 


박  진 ―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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