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5호 2015년 11-12월호  인쇄용  

 

  서평| '근대'에 대항하는 주술사

  장정일

  이시무레 미치코 지음, 서은혜 옮김
 《신神들의 마을》(녹색평론사, 2015년)

 

1953년 12월, 일본 남단 시라누이해(不知火海)에 위치한 미나마타시(みなまたし)에 사지마비, 청력장애, 시야협착, 의식장애, 보행장애, 광분상태를 동반하는 괴질이 퍼지기 시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던 이 병은 환자를 극심한 고통에 빠트린 끝에,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불구로 만들거나 사망에 이르게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 병은 임신한 여성의 태아에게도 똑같은 병을 유전시켰다. 훗날 미나마타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병의 발병 원인은, 미나마타시에 있는 신일본질소비료(‘짓소’) 공장이었다. 아세트알데히트 초산 공장에서 생성된 메틸수은화합물이 정화처리 없이 미나마타만(灣)에 방류되었고, 맹독 물질에 감염된 어패류를 지속적으로 섭취한 어부 가족은 어김없이 이 병에 걸렸다.

미나마타병이 발발한 바로 그해,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禮道子)는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미나마타시립병원 미나마타병 특별병동을 방문했다.”(《슬픈 미나마타》, 달팽이, 2007, 123쪽) 이후 그녀는 30여 년에 걸쳐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운 《고해정토(苦海淨土)》(1969~2004) 3부작을 쓰게 된다. 그 첫 권이 《슬픈 미나마타》인데, 맹목적인 충동으로 미나마타시립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미나마타강 하류 근처에 살고 있는 그저 그런 가난한 일개 주부”(위의 책, 124쪽)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30년 동안 미나마타(병·환자·시)를 집요하게 천착하게 만든 동기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미나마타시립병원에서 미나마타병에 걸린 환자를 처음 대면했던 순간을 그녀는 같은 책에 이렇게 적었다.

이날은 특히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카마 츠루마츠 씨의 슬픈 산양 같은, 물고기 같은 눈동자와 바닷물에 떠밀려 온 나무토막 같은 자태와 결코 왕생할 수 없는 혼백은, 그날부터 송두리째 내 안으로 옮겨 왔다.(125쪽)

반복하기 위해 방점을 찍지 않았지만, 인용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라는 문장이기보다, ‘산양’, ‘물고기’, ‘나무토막’ 같은 단어이다. 반(反)공해 주제를 다루는 대개의 사회고발문학(르포)은 ‘탈선한 근대’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또다른 ‘정상 근대’의 방법론을 동원해 탈선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즉 반공해나 사회고발을 떠맡은 거개의 논픽션이 비판과 대안의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은 근대적 방법론의 적자(嫡子)인 과학으로, 명성 있는 논픽션은 거개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예컨대 정치·사회 이론)이라는 양 축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시무레 미치코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의 양대 과학이 배제하고 타기시한 비과학적 세계관을 근거로 근대를 비판하고, 거기에 반하는 대안을 내놓는다. 바로 첫 책에서 “나는, 나의 애니미즘과 프리애니미즘을 조합해서 근대에 대항하는 주술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같은 책, 65쪽)고, 선언하듯 밝힌 것이 그것이다. 지상의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지은이의 애니미즘은 《슬픈 미나마타》 곳곳에 출몰하고 있으며,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신神들의 마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표적인 두 대목을 꼽아보자.

우물에는 우물 신령님, 산에는 산신령님, 배에는 배의 신령님, 바위에는 바위 신령님, 논에는 논 신령님, 바다에는 바다 금비라(金比羅), 강에는 강의 신령님이 제각각 독특하고 사랑스런 성격을 부여받아 깃들어 있었다.(53쪽)

먼 훗날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믿을 수 있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신일여(人神一如)가 아니면 안될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나 생물의 숨결 속에 언제나 깃들어 있어 언제라도 단박에 상대에게 옮겨갈 수 있어야 했다. 거의 모든 애니미즘의 신들은 또한 주술신이기도 하여 주술신과 재앙은 항상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105쪽)

1927년생인 이시무레 미치코는 대도시라고 할 수 없는 구마모토(態本)현에서 태어나 줄곧 시라누이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다. 이런 약력은 그녀의 애니미즘이 자신의 태생적 환경에서 비롯한 소박한 것이자, 근대와 제대로 조우해보지 못한 미개화의 산물이라는 단정을 부른다. 하지만 《신들의 마을》의 깊고 넓은 문명비판 의식은 그런 단정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가르쳐준다.

 

합법적인 야만세계의 폭력

이시무레 미치코는 미나마타(병·환자·시) 문제를 만든 장본인인 신일본질소비료와 공범자인 일본정부를 지탄한다. 하지만, 그녀가 제1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팽창하고 식민화하는 근대문명 자체이다. 미나마타 사람들은 1908년에 세워진 ‘짓소’에 화물을 싣고 오는 외국배를 ‘본선(本船)’(143쪽) 또는 ‘외국선’(146쪽)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1853년 일본을 함포로 개항시킨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과 포개진다. 타르로 선체를 검게 칠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선으로 불렸던 유럽과 미국의 대양 항해용 대형함은 “진보하는 과학문명 … 합법적인 야만세계로 역행하는 폭력지배”(49쪽)의 상징이다. 지은이는 팽창하고 식민화하는 근대문명이 어떻게 지구 전체를 재앙으로 물들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오늘에 이어졌는지를 이렇게 직시한다.

15세기 남부 스페인에서 태어난 선교사 라스카사스의 손에 의해 쓰여진 《인디언의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는 기록하고 있다.

히스파니올라섬의 왕국들, 산후안섬과 자메이카섬, 페를라스 해안, 쿠바섬, 혹은 니카라과 지방, 유카탄 왕국, 산타마르타 지방, 베네수엘라 왕국, 페루의 광대한 왕국 등등에 기독교도의 이름으로 쳐들어온 스페인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완전히 파괴당해버린 인디언의 수난을 그는 빠짐없이 목격했다. (…) 라스카사스의 눈에 비친 인디언은 미나마타와 시라누이 바닷가 사람들과 어쩌면 이리 흡사한 것일까?(190쪽)

이시무레 미치코의 문명비판 의식은 근대문명이 팽창하고 식민화하는 폭력지배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미나마타병의 의미를 좀더 통시적이고 광역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페리 제독의 미군 함선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했던 일본은 재빨리 아류 제국주의국가로 변신한 다음 스스로 ‘흑선’이 되었다. 《슬픈 미나마타》에서 지은이는 신일본질소비료가 1927년 5월 조선 함경남도 함흥군 운전면 호남리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세우기 위해 무수히 없애버린 마을을 이야기한다(242~244쪽). 이렇게 해서 근대문명은 ‘라틴 아메리카=일본=조선’에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균질한 지구화를 이룩했다.

 

근대문명의 제물(祭物)이 된 사람들

지은이의 근대문명 비판은 제국주의적인 팽창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본과 과학기술이 결합한 근대문명은 팽창하기 전에, 먼저 국가 내부의 안(시골/자연)과 밖(도시/문명)을 균질하게 만든다. 기차를 역사적 진보와 연관하는 문학적 은유는 매우 흔한데, 지은이에게 기차는 안과 밖을 균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근대의 상징이다.

[이] ‘짓소’의 정면 출입구는 바로 미나마타역이다.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철도로 가고시마본선을 경유해 미나마타에 처음 오게 되는 이들은, 우선 ‘짓소’의 현관 앞에 내려서게 되는 것이다. ‘미나마타를 명랑하게 하는 시민대회’ 사람들이 말하듯이, ‘짓소’가 있기에 미나마타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제 와서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마을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모두들 옛날부터 믿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따질 것도 없이, ‘짓소’에 연결되어서 이 근처의 일상적인 풍경 자체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142쪽)

‘짓소’와 미나마타시는 기차로 인해 균질하게 되었다. 기업과 도시를 하나로 연결하는 기차의 힘은 “미나마타병 발생 이전부터 여긴 특급(열차)이 서주던 곳이었다. (…) 미나마타병을 너무 떠들어댔다가는 특급도 그냥 지나가버릴 것이다”(187쪽)라는 미나마타 주민의 우려와 자부 섞인 말에서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근대문명은 공간만 아니라 시간도 균질화한다. 《슬픈 미나마타》에서 인용한다.

그는 항상 신변에 낡아빠진 자명종 시계를 하나 두고, 눈 아래 내려다뵈는 신일본질소 미나마타비료공장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아침 여섯 시와 낮 열두 시, 그리고 오후 네 시에 정확히 태엽을 감는다. 아침에 정수를 길어와 차를 끓이고, 열두 시에는 막 지은 밥을 먹고, 오후 네 시 반에는 선로를 넘어 길 위의 점방으로 소주를 마시러 간다. 그것은 느긋하면서도 단 1분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56쪽)

낡아빠진 자명종 시계가 있기는 했지만, ‘짓소’가 들어서기 전에 미나마타 주민은 자연과의 교감이나 육감에 의지한 시간관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기업이 들어서면서 이들의 삶은 전국이 하나로 되는 균질한 시간 속에 포섭되는데, 그것은 권력과 자본주의가 똑같이 효율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근대문명의 팽창하고 식민화하는 힘은 외부로 향하면서 제국주의가 되고, 내부를 향할 때는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 지은이는 전기·전화·라디오·자동차 등의 문명의 이기(利器)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고 여기지 않으며, 애니미즘적인 영성과 활력의 근거지인 마을을 파괴하는 흉기라고 여긴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으로 얼마든지 진화·대체할 수 있는 이런 문명의 이기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생활세계를 균질화하고 식민화한다. 그렇게 하여 “가라오케투성이의 일본열도. 이 어리석은 자들의 배에 나도 함께 타고 있다. 도쿄에 가든 말든 이 세기야말로 ‘운명공동체’라는 것이다”(192쪽)라고 할 정도가 되면, 괴질에 걸린 도시(미나마타)나 괴질을 만든 회사(신일본질소비료)는 ‘일심동체’(142쪽)의 괴물이 된다.

회사가 쓰러진다는 것은 미나마타시가 망한다는 거여. 미나마타 시민 4만 5,000명의 목숨과 미나마타병 환자 백 여남은 명, 어느 쪽 목숨이 중요혀?(71쪽)

한국에서도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가 한창일 때, 경제를 내세워 피해자의 입과 해결노력을 막고, 나아가 피해자를 가해자화(化) 하려는 온갖 시도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짓소’가 지역경제를 도맡았던 미나마타에서  ‘피해자의 가해자화’는 어느 곳에서보다 무성했다. 자본과 과학기술의 결합인 근대문명이 제국주의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넘어, 최종적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모든 생명체와 사물로부터 신을 발견하는 영혼의 능력을 말끔히 탈취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리에 풍요와 편리(경제발전)를 향한 욕망을 심는다. 그 결과 인간은 이웃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본능적인 연대감’(《슬픈 미나마타》, 22쪽)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무표정한 ‘현대의 악령’(《신들의 마을》, 190쪽)이 되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신(부처)인데 말이다.

《신들의 마을》에는 《슬픈 미나마타》에는 나오지 않는 ‘인신공양’이라는 놀라운 단어가 몇번 나온다. 이시무레 미치코는 이 단어를 미나마타병으로 죽거나 반죽음이 된 불구자들은 근대문명에 바쳐진 희생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은이가 보기에 미나마타병은 “말법(末法) 세상”을 경고하는 것이고, 그 환자들은 “거꾸로 된 세상의 진실을 몸에 지고 있”(274쪽)는 것이다. 그런데 원시사회의 희생의례가 문명사회에서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국가와 기업은 이들의 인신공양을 그저 돈으로만 환산하려고 하며, 그것조자 여의치 않을 때는 “돈벌이 사망자들”(184쪽)이라는 표독한 말로 희생자를 희화화해버리거나, “역적”(155쪽) 취급하거나, “적색혁명을 노리는 좌익”(297쪽)으로 둔갑시켜버린다. “어떤 세기에나 인신공양에는 가장 연약한 영혼, 무방비한 생활자들이 선택된다”(50쪽)는데, 이들은 아무런 자리나 이름을 얻지 못함으로써 이중의 희생물이 된다.

 

신(神)들의 마을

이상이 거칠게 살펴본 이시무레 미치코의 근대문명 비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촌사(村史)의 시대가 지나고, 정사(町史)의 시대가 지나고, 만나러 가야 할 영혼들은 이미 거기 없다”(88쪽)라는 시적인 전언에 있다. 그것을 알기 쉽게 풀면 이렇다.

“도쿄에 가지 마라 고향을 만들어라.” (…) 도시와 시골은 균질화되고 무화되어가고 있다. 나는 나가지 않으리. 아직 부모를 모시고 있으니 굳이 나갈 이유도 없다. 아니 변경이나 비경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 사람 마음속에 남아 있는 비경으로 나는 길을 떠나야만 한다.(192쪽)

대안은 일본어 원제 그대로인 바로 이 책의 제목에 있다. 신들의 ‘나라’가 아닌, 신들의 ‘마을’. 이시무레 미치코가 국가 대신 마을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국가야말로 근대문명의 진지(陣地)이자, 자본의 보루라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협력한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가 진지의 예를 증거하고, “후생성은 … 기업육성성이라고 이름을 바꿔라”(240쪽)라고 규탄하는 미나마타 환자의 절규가 보루의 예를 입증한다. 또 ‘짓소’가 들어선 미나마타 마을의 예가 보여주었듯이, 거대기업은 전통적인 지역공동체의 생업과 심성을 한꺼번에 파괴한다.

두 권의 책에 지은이가 국가의 대안으로 삼는 마을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지만, 바다와 무덤과 어머니가 등가이면서 순환구조로 맞물려 있는 그녀의 세계로부터 ‘마을’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대가”(251쪽) 살아있는 마을, 인신공양의 희생물로 선택된 ‘몫 없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서 신을 볼 수 있는 ‘신들의 마을’ 마을로부터.

문학에서 장르는 왕후장상에서 농민에 이르는 사회계급의 구조를 닮았다. ‘장르 피라미드’라고 해도 좋을 이 계급의 가장 상층에 시·소설·희곡이 있고, 그 밑에 에세이와 전기(傳記) 같은 비교적 새롭거나 비인기 장르가 각축을 한다. 이번에 읽은 이시무레 미치코의 저작은, 예전 같았으면 르포로 분류되어 장르 피라미드의 가장 낮은 자리에 놓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협소한 사회고발물을 뜻하는 르포라는 용어는 잘 쓰지 않고, 비문학이라는 포괄적인 뜻을 가진 논픽션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논픽션은 엄밀히 말하면 ‘허구’가 섞이지 않았다는 뜻인데, 《신들의 마을》과 《슬픈 미나마타》는 애니미즘을 표출하거나 그 세계를 넘나든다. 이 대목에 대한 정교한 해독과 논픽션에 대한 새로운 상(像)이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사족으로 《신들의 마을》을 읽은 독자에게는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의 《황천의 개》(청어람미디어, 2009)도 권하고 싶다.


장정일 ― 시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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