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4호 2015년 9-10월호  인쇄용  

 

  서평| '수월성'에 이념을 뺴앗긴 대학

  김누리

  빌 레딩스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폐허의 대학》(책과함께, 2015년)

 

광복 70년,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자랑스러운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에서 정작 국민들은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기이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은 국민들이 느끼는 절망감이 어떤 사회적 비극으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양극화는 극단으로 치닫고, 불평등은 악화일로에 있으며, 세계 최장 시간 노동을 하는데도 생존경쟁은 나날이 격화되고 있다. 이 나라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해방 이후 온갖 희생 속에서 이룬 경제적·정치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희망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 중에서도 나는 대학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대학은 최고 학문기관의 위상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공적 담론을 생산하지 못한 채 기득권세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대학은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는 ‘정의(定義)권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했고,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는 도덕적 심급으로서의 품격도 잃어버렸다. 우리가 매일 목도하는 사회적 비극은 최고의 학문기관이자 최상의 도덕적 심급이었던 대학이 처참하게 몰락한 정황과 관련이 깊다.

사실 해방 이후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대학은 언제나 국가와 사회 발전의 견인차였다. 대학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양성해왔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선도해왔다. 이런 대학이 지금 사회의 여러 조직 중에서 가장 무력하고 퇴행적인 조직으로 전락했다. 흔히 운위되는 ‘지식인의 죽음’은 대학이 붕괴하면서 남긴 파열음일 뿐이다.

현재 한국 대학이 처해 있는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고,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는 기능은 대학에서 기업의 연구소로 넘어간 지 오래고, 지성적인 문화가 사라진 캠퍼스는 현란한 대중문화와 소비문화가 점령해버렸다. 게다가 한국 민주주의의 산실이었던 대학이 이제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조직이 되었다. 초등학교 반장도 선거로 뽑는 시대에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총장을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곳은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총장 직선제를 지켜내기 위해 부산대 교수가 투신자살한 최근의 사건은 대학 민주주의의 죽음을 극적으로 증언한다.

한국 대학의 급속한 몰락은 대학의 기업화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대학이 빠른 속도로 자본권력에 장악되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대학은 기업의 하부조직처럼 움직이고 있다. ‘기업이 선호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기업식 논리와 경영방식에 따라 운영되며, 재벌언론사의 대학평가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우리사회가 보다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학이 본래의 사회적 기능과 도덕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대학은 우리사회를 총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자본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대학마저 기업의 하수인, 시장의 포로로 전락한 사회에 미래는 없다.

 

교육시장에 적용된 자본의 논리

최근 번역 출판된 빌 레딩스의 《폐허의 대학》은 한국 대학이 처해 있는 위기의 원인을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 타개책을 모색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근대 대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통시적 시각과 현시대 대학의 상황에 대한 공시적 접근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대학이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한국 대학의 위기를 보다 확장된 보편적인 틀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특히 캐나다 몬트리올대학의 교수였던 저자가 북미 대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대학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어, ‘미국화’와 ‘세계화’가 한국 대학의 위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빌 레딩스가 펼치는 핵심적인 주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화(지구화)가 대학의 기능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결과 오늘날의 대학이 ‘수월성의 대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대학의 급격한 변화를 몰고 온 본질적인 요인은 세계화다. 자본의 지구적 지배를 내용으로 하는 세계화가 근대 이후 발전해온 국민국가를 약화시켰고, 이에 따라 국민국가에 바탕을 두고 성장해온 전통적인 대학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대학의 전통적인 기능 - 칸트의 ‘이성의 대학’, 훔볼트의 ‘문화의 대학’- 은 점차 쇠퇴하고, 자본과 시장의 작동방식에 조응하는 ‘수월성의 대학’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이상 대학은 민족문화의 이념을 생산하고 주입하는 역할을 통해 국민국가의 운명과 맺어지는 기관이 아니다. 경제적 지구화 과정은 전세계에 걸쳐 자본 재생산의 주된 기반으로서 국민국가의 쇠퇴를 불러일으킨다. 대학은 초국적인 관료적 기업이 되어가고 있다.”(16쪽) 대학이 민족문화를 보존하는 ‘국민국가의 기관’에서, 초국적인 관료적 기업이라는 ‘자본권력의 기관’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대학의 사회적 공적 기능이 약화되었고, 대학의 내적 구조도 변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인문학이 직격탄을 맞았는데, 그것은 인문학의 전통적인 과제가 국민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국민국가에 토대를 둔 근대 대학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레딩스의 분석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서 ‘수월성의 대학’이 탄생했다는 그의 진단은 상당히 참신하다. 지금까지 대학 이론가들은 이 과정을 대개 ‘대학의 기업화’나 ‘학문 자본주의’ 등의 개념으로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레딩스에 따르면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근대 이래 전승되어온 ‘문화의 대학’은 ‘수월성의 대학’으로 변화한다. “민족문화의 이데올로기가 수월성의 담론으로 대체”(16쪽)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수월성’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대학이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구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관료체제로 변화했다”(32쪽)는 사실이다. 국민국가가 쇠퇴함에 따라 이제 대학은 이념적 기구에서 관료적 기구로 변한다. 그에 따라 ‘수월성의 대학’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교육과 연구가 아니라 행정이다. “수월성의 대학이란 행정의 일반 원칙이 교육과 연구의 변증법을 대체하고, 그래서 교수생활의 두 양상인 교육과 연구가 행정 아래 포섭되는 대학”(206쪽)이다.

이렇게 교육과 연구보다 행정을 우위에 둔 결과, 수월성의 대학은 학문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하나의 ‘기업’이 된다. “수월성 개념은 대학이 단지 기업체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업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수월성의 대학’의 학생들은 고객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고객이다.”(45쪽) 수월성 논리를 수용함으로써 대학은 기업이 된다. 수월성의 대학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적 결속의 모델이라는 대학의 역할을 포기하고 자율적인 관료적 기업의 구조를 선택하는 것”(64쪽)이기 때문이다.

레딩스는 수월성 개념이 대학 담론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구조를 탁월하게 분석한다. 수월성이 강력한 담론이 될 수 있는 힘은 ‘모두의 동의’에서 나온다. “수월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한 바다.”(46쪽) 문제는 이러한 절대적 동의가 그 개념의 ‘무내용성’, 즉 “어떤 외부의 지시 대상이나 내부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46쪽)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수월성은 ‘텅 빈 개념이기 때문에 강한 개념’이다. “무엇을 가르치고 연구하느냐 하는 문제는 수월성 있게 가르치고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덜 중요하다. 수월성은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현금 관계와 흡사하다.”(31쪽) 여기서 목적과 수단의 완전한 전도가 일어난다. 대학은 학문의 논리가 아니라 시장의 논리에 예속된다. 수월성의 원리가 관철되면 “대학의 문제는 단지 상대적인 ‘비용 대비 가치’의 문제이고, 사고하기를 원하는 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소비자로 규정된 학생에게 제기하는 문제”(52쪽)가 되어버린다.

레딩스는 수월성이 교육시장에 적용된 자본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고등교육의 접근성 문제는 고려에서 일단 배제된다. 고등교육은 그저 또하나의 내구성 소비재로 간주되고, 따라서 구입 능력 혹은 비용 대비 가치가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범주 중 하나가 된다. 저 대학이 아니라 이 대학을 선택하는 일은 어떤 특정 연도나 시기에 ‘링컨 컨티넨탈’과 ‘혼다 시빅’의 손익을 견주어보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처럼 된다.”(53쪽) 수월성 논리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자본의 논리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점은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대학의 사회적 책임, 사회에 대한 대학의 책무성은 단지 등록금의 대가로 제공하는 서비스의 문제일 뿐이다.”(59쪽)

이상의 이유로 수월성 개념이 지배하는 순간 대학의 이념은 숨을 거둔다. “수월성에 대한 호소는 더이상 대학의 이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혹은 차라리 그 이념이 이제 모든 내용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월성이라는 텅 빈 개념은 정보의 문제에서 최적의 투입-산출 비율 이외의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69~70쪽) 결국 “‘수월성의 대학’은 오로지 자기자신만을 섬기는, 초국가적으로 교환되는 자본의 세계에서 또하나의 기업체”(74쪽)에 불과하다.

수월성의 대학이 잉태한 최악의 산물은 학생을 대학의 주체가 아니라 소비자로 보는 ‘소비자주의’이다. 레딩스는 소비자주의를 “북아메리카 대학교육의 전통적인 주체에게 가장 절박한 위협으로 인식되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소비자주의는 국민국가의 쇠퇴로 정치적 주체성의 내용이 소실되는 현상에 대한 경제적 상응물이다. 소비자주의는 개인이 더이상 정치적 실체가 아니라는, 국민국가의 주체가 아니라는 표시다.”(82~83쪽) 소비자주의가 오늘날 대학에 당면한 ‘가장 절박한 위협’이라는 지적은 한국 대학의 현실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대학생들은 자신을 대학의 주체가 아니라 소비자로 인식한다. 그 결과 대학이라는 학문공동체의 주권은 엉뚱한 타자에게 이양된다. ‘상품의 판매상’이 대학의 주체 행세를 하는 이러한 주객전도 현상이 오늘의 한국 대학에서는 일상이 되었다.

수월성 개념으로 펼치는 현대 대학에 대한 레딩스의 분석은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수월성 개념의 헤게모니적 성격과 그 모순성에 대한 분석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딩스의 관점을 좀더 발전시키면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수월성은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강력한 헤게모니적 개념이지만, 의미도 가치도 배제한다는 점에서 무의미의 척도화이고 탈가치의 지표화라고 할 수 있다. 수월성 개념은 이런 맥락에서 자본이 ‘의미의 최상 심급’인 대학을 해체하기 위해 동원한 음험한 수단이다. 수월성은 그 무내용성, 비지시성으로 인해 자본의 고유한 작동방식, 즉 모든 내용적 차이를 돈으로 환원하는 ‘사탄의 맷돌’(칼 폴라니)에 유비될 수 있다. 수월성 담론은 본질적으로 자본 담론인 것이다. 수월성 개념에 굴복함으로써 대학은 이제 더이상 진리와 정의의 공동체가 아니라, 무의미와 무이념의 텅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  

 

대학의 존재의의를 복원하려면

빌 레딩스는 ‘수월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대학이 자본논리에 종속되어 이념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추적하고, 그 문제점을 탁월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규정하고, 새로운 대학의 탄생 가능성을 탐색하는 부분에서 그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노정한다.

먼저 레딩스가 대학의 비판적 역능의 복원 가능성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비판을 통해 비평적 기능을 재동원함으로써 이(수월성의 대학)에 저항하려는 것은 애석하지만 러다이트류까지는 아니더라도 칸트류의 발상인 것은 엄연하다”(198쪽)고 하면서 대학의 비판정신을 재활성화하려는 시도를 시대착오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이라고 힐난한다. 그의 이러한 비판 무용론의 근저에는 역사 염세주의, 이성 회의주의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가 이성의 이념으로 돌아감으로써 문화의 이념을 바꾸거나, 문화에 그 이성을 돌려주고 역사를 합리적 분석의 자리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201쪽)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그의 정신적 스승인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신자유주의의 문화논리’라는 테리 이글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레딩스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세계의 비참’(피에르 부르디외) 앞에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그 결과 오늘날 이 지구가 얼마나 야만적인 정글로 변해버렸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레딩스는 이 책을 “전투적 급진주의와 냉소적 절망 사이의 꽉 막힌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19쪽)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과연 성공했는가. 그는 급진주의와 냉소 사이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체념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폐허의 대학’을 논할 때 그의 체념적 태도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레딩스는 “대학을 자연스럽거나 역사적으로 필수적인 그릇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그 역사적 존재이유를 상실한 폐허가 된 기관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39쪽)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화가 대학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스스로 역사적 존재이유를 상실함으로써 폐허가 되었다고 본다. 레딩스는 “근대 대학이 폐허가 된 기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 폐허는 잃어버린 온전성에 대한 낭만적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 대학이 더이상 진보의 연속적 역사, 즉 통합적 이념이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연속적인 역사 속에 자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평가하려는 시도의 터전이어야 한다.”(211쪽) 여기서 ‘폐허의 대학’이라 함은 자본의 공세 속에서 폐허가 된 대학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역사 진보의 터전으로서의 수명을 다한 대학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은 자유주의의 승리로 이데올로기 투쟁으로서의 역사는 끝났다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유의 주장을 대학에 적용한 ‘대학판 역사의 종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고한 이후에도 역사는 끄떡없이 지속되고 있듯이, 레딩스가 ‘대학의 폐허’를 되돌릴 수 없다는 숙명으로 선언한 이후에도 대학은 진보의 아방가르드로서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대학은 그야말로 수월성의 대학이다. 자본권력은 지난 수십 년간 ‘수월성’을 앞세워 대학의 이념을 짓밟고 대학을 충직한 종복으로 예속시켰다. 진리 탐구와 정의 구현이라는 대학의 이념은 ‘낡은 구닥다리’라는 혐의를 쓰고 뒷방으로 쫓겨났다. 대학이라는 최후의 비판세력을 진압한 자본권력은 사회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사회는 점점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이제 수월성의 함정에서 대학을 구원하고, 진리와 정의의 이념을 구제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절대로 가서는 안되는 길은 자본의 지배가 강제하는 대학의 변화를 마치 자연의 이치나 사물의 질서인 양 숙명론적으로,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대학은 자본 비판의 최후 진지로서, 진리와 정의의 기관으로서의 본연의 공적 사명을 복원해야 한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저서로 《알레고리와 역사》, 《통일독일의 문화변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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