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4호 2015년 9-10월호  인쇄용  

 

  기본소득과 민주주의

  김종철

세월호 국면을 거치면서

오늘 강연 제목은 기본소득과 민주주의라고 돼 있는데, 둘 다 충분히 이야기하자면 한없이 시간이 걸리는 테마입니다. 그래서 핵심을 요령 있게 설명해야 할 텐데 잘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민주주의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야 될지 기본소득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상당히 고민스럽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든지 결국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기본소득에 관해 관심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경제상황이 전반적으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두 실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작년에 세월호 참사를 겪지 않았다면, 지금쯤 기본소득에 관한 우리사회의 논의 수준은 꽤 높아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작년 초에 우리가 ‘기본소득 공동행동’이라는 조직도 만들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계획을 하던 중에 세월호라는 비극적 사건이 터졌지요. 그 바람에 다들 큰 충격과 절망에 빠지면서 계획된 일들이 자연히 중단돼버렸거든요. 세월호 참사에 관련해서는 아직 무엇 하나 정리되거나 해결된 것도 없고, 그렇게 될 기미가 있는 것도 아닌 한심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우리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제 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 자신은 세월호 국면을 거치는 동안 기본소득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한 것이지만, 국가라는 게 너무나 어이없을 만큼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시민들의 정당한 항의와 요구를 일방적으로 탄압 하고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것을 울분 속에서 지켜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군사정권이 종식된 이후에 우리나라도 적어도 기초적인 민주주의적 권리는 보장되는 국가가 되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그게 큰 착각이었다는 게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아주 결정적으로 분명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새삼 국가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거죠.

어쨌든 그런 상황 속에서 다시 골똘히 국가에 대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물론 새로운 생각은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아니고서는 지금 우리에게 닥친 갖가지 현안과 위기적 현실을 해결할 수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과 사회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통렬히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자본주의 논리가 흉측한 말세적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금 지구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최대의 위기, 즉 기후변화를 봅시다. 이것은 늘 단기적인 이윤추구가 앞설 수밖에 없는 기업, 시장, 자본의 탐욕스러운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업의 논리와 민주주의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온갖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이 문제들은 당면한 하나하나의 이슈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는 사회운동이나 환경운동 방식으로는 절대로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업이나 정부를 향해서 “당신들 좀 정신 차리라”고 백번 소리를 높여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기업경영자의 입장에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답이 나오겠습니까? 실제로 기업이라는 것은 경영자의 개인적 선택으로 윤리적·생태적 경영을 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재벌과 같이 황제경영·족벌경영 체제라 할지라도, 그게 주식회사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조직인 한, 궁극적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불특정 주주들입니다. 만약에 깨달은 경영자가 있어서 이윤 저하를 무릅쓰고 사회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책임 있는 경영방식을 채택하려 한다고 합시다. 아마도 그날로 그 회사는 주가 폭락 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게 자본주의의 냉정한 논리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주식회사 체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책임의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즉, 기업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주주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지분만큼만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익이 생기든 손해가 생기든 주주들은 자신이 소유한 주식만큼의 제한된 권리와 책임을 나누어 가집니다. 따라서 기업이 사회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거기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중심’ 혹은 ‘주체’가 기업 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구조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황폐케 하는 이 시스템 자체가 문제임이 확실하다고 할 때, 과연 어떻게 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넘어가느냐? 그래서 어떻게 자본주의 문명과 다른 방향으로 전환을 하느냐? 참으로 난감한 문젭니다. 사실 제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발견한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처음에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는 이거야말로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상당히 흥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게 실현이 되려면 결국 정치적인 합의나 결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한국의 정치판에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정치를 바로잡고, 국가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는 것입니다.

국가의 통치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다 - 사실 제가 전에는 이런 생각에 별로 찬동하지 않았습니다. 근대국가라는 게 원래 그 본성상 자기확대의 욕망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과 불가분리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국가를 바로잡아 일으켜 자본의 횡포를 제어하도록 만들겠는가.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기대는 아예 단념하고, 오히려 국가 없는 삶, 지역 차원에서의 자급·자립·자치의 생활공간을 몽상하고 추구하는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인 세계관에 훨씬 더 공감을 느끼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가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에 기대를 건 것도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예를 들어, 4대강사업이라든지 원자력문제라든지 국가권력이 국가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갖가지 만행이나 폭거들 앞에서 절망과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안에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즉, 지금과 같이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가 세계 전역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세계의 모든 지역이 다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 거죠.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훨씬 더 지속가능한 사회가 이 세계에 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무시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경제규모가 크거나 부유한 나라라고 반드시 좋은 나라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국가의 가능성

그러면 도대체 그런 지역이나 나라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는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 몇 년간,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 관계 자료를 손에 닿는 대로 읽어봤는데, 참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라틴아메리카가 어떤 곳입니까? 오랫동안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제가 번거롭게 더 설명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군사독재 치하에서 고통스럽게 살아본 경험이 있지만 그쪽은 우리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 밑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칠레에서 피노체트라는 군사독재자가 물러나는 1990년 중반 전후해서 라틴아메리카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즉, 좌파 내지는 민주적 성향의 정부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거죠. 지금도 물론 반민중적인 극우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상당히 많은 나라들이 민주화되고, 다수 민중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앞세우는 정권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선 데가 라틴아메리카죠.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지금 세계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데가 라틴아메리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선진적인 방향이라는 것은 국가정책이 사회의 특권적 소수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생존권, 인권, 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뜻이죠.

재미난 얘기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 얘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차베스 대통령은 재작년에 아깝게 고인이 되고 말았죠. 그래서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지도자가 갑자기 사라지고 난 다음 반동세력이 다시 복귀하여 베네수엘라의 정치적·사회적인 안정성이 지금 많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차베스 생존 시에도 역사적 뿌리가 굉장히 깊은 수구세력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죠. 선거로 당선된 합법적인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쿠데타까지 일으켜 차베스를 일시 감금하기도 했죠.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수구세력과 그 배후에 있는 국제적인 반동세력은 늘 기회만 노리다가, 차베스가 죽자 이때다 하고 지금 역사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는 거죠.

그러나 좀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차베스가 뿌려놓은 씨앗이랄까 그런 게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최근에 어떤 일본 저널리스트가 쓴 베네수엘라 방문기를 읽었는데,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는 동사무소라고 했는데 요즘은 모두 주민자치센터라고 이름이 바뀌었죠. 그런데 정말 주민들이 거기서 동네일을 가지고 의논하고 결정하고 그럽니까? 주민자치센터라는 건 그냥 허사(虛辭)일 뿐이지 여전히 중앙정부나 상위 관청에 수직적으로 연결된 말단 행정기관일 뿐이에요. 그런데 베네수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주민자치센터라고 하면 공식적인 행정기관과는 별도로, 문자 그대로 주민들이 모여서 자기 지역의 일에 대해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결정하는 그런 곳입니다. 동네 주거환경을 고친다, 길을 낸다, 보건위생환경을 개선한다, 쓰레기 처리를 어떻게 한다 등등, 주민의 일상생활에 관계된 기본적 사항을 주민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말 그대로 ‘주민자치’이고, 직접민주주의 방식이죠. 차베스 시대를 통해서 이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차베스는 이것을 자신의 핵심적인 과업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결정적인 대목입니다.

 

매일 헌법을 읽는 사람들

그리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늘 헌법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밑바닥 서민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베네수엘라에 가면 거리의 노점상에서도 헌법책을 팔고 사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장정이 잘되어 있는 것은 좀 비싸지만, 수수하게 만들어진 헌법책은 길거리 노점상에서 아주 싸게 살 수 있다는데, 헌법책을 노점상들이 팔고 있다는 건 우리 같은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굉장히 낯설죠.

차베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 곧바로 새로운 헌법을 만듭니다. 새로운 시대, 즉 그가 ‘21세기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했던 래디컬한 민주사회를 열자면 그에 합당한 헌법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차베스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대적으로 시행한 게 문맹퇴치 사업이었습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의 빈민층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문맹퇴치 사업을 전개했고, 크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차베스 정부는 글자를 깨친 사람에게는 뭔가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주어져야 한다면서 정부가 돈을 들여, 예컨대 《돈키호테》 같은 고전소설을 몇백만 부나 찍어서 무료로 보급했습니다. 그 결과로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때까지 한 번도 사람취급 못 받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차베스 덕분에 고전문학 작품을 즐기는 문화적·정신적 삶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인민의 진실한 욕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정치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문맹퇴치 사업에는 또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즉, 글자를 알아야 헌법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원래 헌법이라는 것은 국가의 최고 법전이기 때문에 아무리 엉터리 국가, 독재국가일지라도 기본적인 구색은 갖추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의 헌법도 외관으로는 제법 그럴듯한 말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아주 형편없는 헌법은 없습니다. 헌법에서 노골적으로 우리는 독재국가라고 말하고 있는 나라는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전쟁 전 일본의 제국헌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일본제국의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고 명시돼 있는 완전히 전근대적인 헌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헌법을 가지고 민권운동을 하고, 풀뿌리 저항운동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뭐냐 하면 일본국민은 주권자인 천황이 사랑하는 인민이다, 그런 인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그런 인민의 삶터를 파괴하는 것은 천황을 배신하고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그런 논리를 펴니까 정부와 관리들로서는 할 말이 없죠. 궁여지책이지만 ‘헌법’을 무기로 해서 그렇게 저항을 했습니다.

그런데 차베스 정부가 제정한 새 헌법은 래디컬한 민주주의 헌법입니다. 명백히 인민주권을 천명하고, 철저히 인민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조문들로 구성돼 있는 헌법입니다. 차베스는 그런 헌법을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매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베네수엘라 빈민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도 카라카스의 시내를 둘러싼 주변 언덕들은 거의 모두 짐승우리보다 못한 판잣집으로 꽉 차 있는 빈민지역인데, 그 지역이 당시의 지도에는 ‘그린존’, 즉 녹지대로 표시돼 있었다고 합니다. 요컨대, 거기 살고 있는 가난한 하층민은 베네수엘라 기득권층의 눈에는 불가시적인 존재였다는 얘깁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고용된 하인, 청소부, 식모, 운전수일 뿐이거든요.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사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죠.

차베스는 이런 현실을 젊었을 때부터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이런 극심한 차별구조를 깨기 위해서 정치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가 베네수엘라국민,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고전문학을 즐기고, 헌법을 매일 읽을 것을 권장한 것은 그들이 존엄한 인간으로 다시 일어서는 데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일상적으로 헌법을 가까이하게 된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지금은 가령 관공서 같은 데서 공무원이 뭔가 미심쩍은 말이나 행동을 하면 헌법책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라고.

아까 말한 일본 저널리스트가 한번은 길거리에서 남루한 차림을 한 할머니가 헌법책을 사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 다가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그게 왜 필요하냐고. 그랬더니 이상한 인간 본다는 듯이 자기를 쳐다보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태까지는 헌법책을 이웃사람한테서 빌려 봤는데, 이제 돈이 조금 생겨서 헌법책을 샀다고, 너무 기쁘다고,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베네수엘라에는 차베스 이후에 주민자치센터나 국영상점을 통해서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생필품은 시중 가격보다도 훨씬 싼 가격으로 공급을 하는데, 그 생필품의 포장지에는 헌법에 따라 이 물건의 가격이 이러저러하게 책정되었다고 표기돼 있고, 관련 헌법 조항이 큰 글씨로 적혀 있다고 합니다. 헌법의 생활화가 되어 있는 셈이죠.

가난한 사람들이 쓰는 물건과 일반 시장의 물품가격에 차등을 둔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논리로는 말이 안되죠. 하지만 그렇게 조정을 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해야 국민공동체라는 게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 그게 국가다운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그게 가능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주정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횡포로부터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보호하려면 무엇보다 민주정부의 성립이 선결조건입니다.

 

군대 없는 나라의 헌법재판소

그런 점에서 코스타리카도 매우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코스타리카가 군대 없는 나라라는 것은 잘 아시죠? 사실 인구 500만 이상의 근대국가로서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근대국가라는 것은 군대를 축으로 해서 돌아가는 통치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대적 국가권력은 선거에 의해서 정통성을 부여받지만, 국가의 궁극적 통치력은 ‘합법적인 폭력조직’, 즉 군대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평화헌법이라고 해서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나라로 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위대라는 막강한 화력과 병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얘기죠. 현대세계에서 한 국가가 군대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연구할 만한 대상입니다. 어쨌든 코스타리카가 그런 나라인데, 이 자리에서는 그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만, 이미 반세기 이상 군대 없이도 훌륭한 국민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코스타리카는 입증해왔기 때문에 세계의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코스타리카를 주목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시 군대 없는 나라답게 코스타리카도 배울 바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중 헌법재판소 얘기가 특히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헌법재판소라면 거창한 것을 생각하지만, 코스타리카에서는 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아주 친근한 기관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은 굵직한 정치적 이슈 이외에 사소한 생활의 불편도 서슴없이 헌법재판소에 질문을 하는 데 익숙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24시간 문을 열어놓고 있고, 재판 신청도 법률전문가의 도움이 필요 없이 그냥 보통 종이에 일상적인 언어로 적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초등학교 아이들이 교장선생님의 자동차가 운동장 안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자기들의 놀이터가 위험해졌다고 여럿이서 같이 재판 신청을 하고, 헌법재판소는 또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한 다음 교장선생님에게 시정명령을 내리고, 그런 식이라는 거죠. 재미있죠? 민주주의라는 것이 제대로 기능하면 어떤 사회가 될지 상상이 가능하죠?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야기도 음미할 만합니다. 그때 미국이 별로 이렇다 할 명분 없이 이라크를 공격하려니까 여러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들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전쟁을 지지한다는 의사표명을 각국 수뇌들에게 부탁을 했을 텐데, 어떤 경위인지 모르지만 코스타리카 대통령도 찬동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국립코스타리카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한 대학생이 백악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까 자기 나라 대통령의 이름이 거기에 들어 있단 말이에요. 평화를 국가 제1의 목표로 세우고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이럴 수가 없다고, 그 학생이 헌법재판소에 대통령을 제소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곧 심의에 들어가서 현직 대통령의 행위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리고 백악관에 연락하여 코스타리카 대통령 이름을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은 그 후 졸업을 하고 인권변호사로 쭉 활동을 해왔는데, 제가 금년 초에 우연히 어디서 그 변호사가 한국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로 부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나서 얼마 전에 알아보니까 부임했다가 얼마 안돼서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그만두고 돌아갔다고 해요. 많이 섭섭하더군요. 그런 사람이 한국에 좀 오래 있으면서 우리 시민단체들이나 젊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지냈다면 우리가 얻는 게 많았을 텐데 말이에요.

아무튼 코스타리카는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직업외교관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닌 인권변호사를,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민변’ 소속 변호사를, 대사로 임명하여 외국에 보낸다는 것도 우리로서는 놀라운 발상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한 일본 저널리스트가 직접 경험한 재미난 일화가 또 있습니다. 그 기자가 코스타리카의 어떤 시골에 갔다가 그 지역에서 유명한 관광농원을 방문했는데 마침 비가 쏟아지는 참에 마중을 나와 있던 노인이 우산을 씌워주어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인은 농원의 경영자였고, 게다가 코스타리카 전직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전에 누구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죠.

비록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의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우리 마음도 흐뭇해집니다. 다 같이 지구를 공유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렇게 재미있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사회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됩니다.

 

덴마크, 국가의 ‘설명책임’

요즘 우리사회 일부에서 덴마크에 관한 관심이 꽤 있는 것 같은데, 덴마크야말로 그런 대표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녹색평론》이나 다른 지면을 통해서 저도 덴마크 이야기를 조금씩 해왔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나라를 생각할 때 그 기본 척도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사회란 무엇보다 국가권력이 시민들에게 ‘설명책임’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회, 따라서 상식과 합리적인 언어가 통하는 사회가 아닌가.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나라가 덴마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덴마크는 지금 풍력발전 기술로 세계의 선두에 서 있는 나라입니다. 덴마크도 석유자원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유혹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국민적으로 대논쟁을 거친 뒤 원전은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고, 그 대신 자연에너지 개발에 몰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자연에너지 중에서도 특히 풍력발전을 중점적으로 개발해왔죠. 북해의 거센 바람이라는 자연조건과 예전부터 풍차를 많이 사용해온 역사적 전통 때문에 아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풍력발전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쉽게 보급되거나 확산되지 않고 있는 기술이에요. 왜냐하면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돌아가면 엄청난 소음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자연경관을 훼손하고, 또 새들이 부딪혀 죽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령 독일과 같은 ‘환경 선진국’에서도 풍력발전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고, 절대 자기 지역에 들어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요.

그런데 덴마크 시민들의 반응은 다릅니다.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하는 일을 별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풍력발전의 폐해를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정부가 시민들의 이해를 구하고 자세히 설명을 하기 때문에 별로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설사 개인적인 피해가 예상되더라도 국가가 자기들을 속이고 사술(詐術)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가피한 피해를 감수한다는 것이죠. 책임 있게 시민들에게 설명하고, 만약에 생각지 않았던 문제가 터지면, 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지는 사회, 이게 진짜 민주주의죠. 덴마크는 이런 민주적 관행이 뿌리박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 덕분에 이 기후변화 시대에 덴마크는 세계의 가장 모범적인 국가가 되었고요.

 

소수파 정권의 전횡

지금까지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제 이야기는 국가의 인간화라는 명제를 우리가 포기해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대개 좌파 지식인이나 활동가들은 늘 자본주의의 결함이나 부작용에 집중하면서 국가의 문제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출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와 시장의 횡포를 제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를 먼저 만드는 게 순서라는 거죠. 잘 생각해보면, 원래 국가의 도움 없는 100% 순수한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국가가 법률이나 세금제도로 자유로운 영리활동을 조장하고, 때로는 폭리까지 취하는 것도 허용하고, 노동운동이나 저항운동을 규제 혹은 탄압하고, 그리고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 기반시설을 만들어주는 것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국가의 적극적인 협력이 없이는 절대로 ‘자유시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돌아봐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략)


김종철 ― 본지 발행인. 이 글은 2015년 5월 7일 마포성미산마을극장에서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 주최로 행한 강연 내용을 정리, 가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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