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2호 2015년 5-6월호  인쇄용  

 

  세월호 1년, 자본주의국가와 민주주의

  김종철

이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은 누구인가
그것을 말리지 않는 우리는 무엇인가

                                   ―신호성(단원고 학생, 세월호 희생자) 군의 시 〈나무〉에서

세월호 참사 1년, 나라 꼴이 참으로 한심하다. 최소한의 상식이 살아있는 사회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으면서도 1년이 지난 지금도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보다 진상규명을 위한 납득할 만한 조치가 아직도 없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정부가 입안한 엉뚱한 ‘시행령’ 때문에 출범도 하지 못한 단계에서 공정한 조사활동의 길도 막혀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수수께끼투성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가기관의 직무유기가 핵심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사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이 나라 공직자들은 엄중한 심문을 받아야 할 일차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가 작성한 ‘시행령’은 바로 그들이 사실상 조사의 주체가 되도록 만들어놓고 있다. 어떻게든 진상규명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러한 후안무치한 작태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세월호의 피해자, 즉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와 유가족들은 지난 1년간 이 사회 기득권세력에 의해 끊임없는 모욕과 비난과 조롱을 당해왔다. 수학여행길에 나섰던 아이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그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부모들의 요구를 이 나라 지배층은 한사코 외면하고, 도리어 유가족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그리하여 (사이비) 언론들이 증폭시킨 이 분위기 속에서 별생각 없이 살아가는 생활인들 중 다수가 “이제 그만하자”라며 유족들에게 짜증스럽게 반응하는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세월호의 침몰과 구조 실패(혹은 구조 방기) 그 자체보다도 훨씬 더 통탄스러운 것은 몰상식과 비이성이 활개를 치는 이 나라의 절망적 현실이다. 국가권력은 자식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허심탄회하게 사죄하고, 그들을 위무하고 껴안으려고 하는 대신에 어째서 이토록 괴물 같은 행태밖에 보여주지 못하는가? 국가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가?

 

국가란 원래 이런 것인가

돌이켜보면, 세월호 침몰 당시 인근 민간어선들이 해경의 저지를 받지 않고 구조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보다 많은 인명을 구출할 수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왜냐하면 민간인들이라면 가라앉는 선박의 창을 통해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학생들을 해경처럼 멀뚱히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버렸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해난 사고에 대비하여 조직된 국가기관이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을까 ―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은 명령과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조직을 전제하지 않고는 상상 불가능한 ‘반자연적인’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지 세월호 사고는 국가라는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계가 만들어낸 참사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국가의 존립의미를 따지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되풀이해서 묻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기는 국가의 존재의미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의심해야 할 사태를 우리가 한두 번 경험한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4대강의 전면적 파괴를 국가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는 황당한 꼴을 당할 때, 후쿠시마라는 세기적 대재앙이 눈앞에 벌어져 있는데도 설계수명이 끝난 원전의 연장가동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국가의 자세를 볼 때, 우리는 그때마다 대체 국가라는 게 무엇인가, 쓰라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질문을 집요하게 던짐으로써 어떤 뜻있는 변화를 성취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하고, 늘 어정쩡한 수준에서 질문은 멈추어지곤 했다. 그러다가 세월호 참사와 그 사후처리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민얼굴을 드러낸 이 나라 국가권력과 통치시스템에 맞닥뜨렸다.

지금 이 사회에는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국가에 대해 던져야 한다고 느끼는 시민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과거의 어떤 사고, 어떤 사건보다도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과 직결된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인들의 국가, 자명한 존재

생각해보면, 강단과 연구실이 아닌 거리와 생활의 현장에서 보통사람들이 국가의 의미를 심각하게 묻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오랫동안 우리에게는 국가란 자명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것을 질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말하는 소위 ‘사회계약’의 발현 형태로서의 국가 개념은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원래 생소한 것이었다.

돌이켜볼 때, 어떤 점에서 동아시아는 서구적 의미의 ‘근대국가’를 서양보다 훨씬 먼저 성립시켜놓고 있었다. 즉, 기원전 3세기에 중국을 통일한 진(秦)이 수립한 통치체제는 본질적으로 ‘근대적인’ 국가체제였고, 그 체제는 이후 동아시아의 기본적 통치형태로 지속되었다. 진나라 시황(始皇)은 도량형의 정립과 통일통화의 발행을 통해서 단일시장을 구축하고, 문자의 통일과 군현제의 실시 등을 통해서 관료제적 통치기반을 확립하고, 한비자의 법가사상에 의거 법치주의를 표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의 근대국가란, 요약하자면, 분권적 농민공동체들을 기반으로 유지되던 중세적 질서가 무너지고 여러 차례의 시민혁명을 거쳐 형성된 중앙집권적 관료시스템에 의거한 통치체제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에서의 근대국가는 부르주아지든 하층민중이든 역사의 새로운 주체세력들에 의해서 몇 세기에 걸쳐서 거듭된 정치적·사회적 투쟁을 거쳐 형성되었고, 이 때문에 그 통치체제가 인위적 산물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뚜렷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서구의 정치사상에서 국가 성립을 ‘사회계약’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근대적 형태의 국가 형성 과정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만큼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동아시아인들에게 국가란 ‘계약’에 의해 성립한 공동체라기보다 오히려 자명한 실체, 즉 우리들 모두가 태어나기 훨씬 전 까마득한 옛날부터 존재해온 ‘자연적’ 현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상상의 공동체’ 혹은 ‘공동환상’으로서 국가나 국민 혹은 민족을 해석하는 관점은 적어도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부자연스러운 논리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동아시아인들의 국가 관념이 크게 흔들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그 반대로, 제국주의에 의한 침탈, 식민지지배를 당하면서 중국인이나 조선인, 혹은 베트남인들에게는 국가의 ‘자명성’이 오히려 강화된 측면을 부정할 수도 없다. 오늘날처럼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신제국주의’ 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글로벌자본은 거침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사실상 국가주권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자본의 지배 때문에 국민국가체제의 붕괴나 소멸을 운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국경을 자유롭게 가로질러 다니는 게 불가능한 노동자, 하층민중 그리고 (환경 및 공동체의 보호를 위한) 각종 규제가 느슨한 저개발국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글로벌자본의 계속적인 성장·축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든 혹은 그 반대로 민중의 생존·생활을 방어하기 위해서든 ‘국가’의 역할은 오히려 지금 더 증대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국가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비극

세월호 참사는, 간단히 말하면, 기업의 탐욕과 그것에 동조해온 국가의 논리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전형적인 비극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국가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국가라는 개념을 놓고 무슨 추상적인 정치철학적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온갖 재난 대응 시스템을 국민의 세금으로 가동하고 있으면서도 ‘국민’을 위험상황으로 태연히 방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긴급구조가 필요한 위급상황에서는 ‘국민’을 버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국가의 문제이다.

이것을 단지 국가기능의 마비라는 측면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국가에 의한 기민(棄民)은 우연한 실수나 실책이 아니라 국가운영체계, 나아가서는 나라의 정치시스템 자체의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지금 이 국가는 자본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다른 인간적인 소중한 가치는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천박한 사고습관에 깊게 빠져 있다. 그리하여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양심의 목소리들은 흔히 ‘종북좌파’니 뭐니 하는 더러운 딱지가 붙여져서 근거 없이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탄압을 받고 있는 게 오늘 이 나라의 현실이다.

결국 이렇게 간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이런 현실에 깊이 절망을 느끼는 민감한 사람들은 이 역겨운 정치·사회 현실로부터 퇴각하여 ‘밀실’ 속으로, 사적 공간으로 숨어들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어디에도 숨을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오랜 세월 갖은 시련을 견디며 피땀 흘려 유기농 생산 공동체를 만들어 봤자 국책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땅을 내놓기를 강요하면 대항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오늘날 국가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자급·자치의 독립적 삶을 훌륭하게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것은 이제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때에도 《월든》에서의 독립생활은 단기적인,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실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보다 인간적인, 보다 녹색적인 국가는 가능하다

국가에의 근원적인 물음이 국가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그래서도 안되고, 또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오늘날 자본과 국가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겨냥하는 사람들이 처한 근본 딜레마는, 자신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체제를 (개인적으로) 완전히 벗어나서는 의미 있는 인간적 삶도,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생존도 도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국가,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치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의미를 새롭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즉, 국가는 그 자체 ‘필요악’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유로운 삶을 위한 불가결한 틀인가?

이런 질문은 원론적인 국가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특히 동아시아인들에게 국가라는 존재는 거의 자명한 것임을 고려할 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국가의 존재가 필요한지 아닌지를 두고 추상적 논의를 하는 것은 전혀 무익하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차피 국가라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수긍한 다음, 우리는 이 지구상에, 그리고 자본주의체제가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재의 글로벌 자본주의체제 속에서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매우 부러워할 만한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북유럽 복지국가 혹은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를 비롯한 몇몇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보여주는 모범적인 선례 말이다.

덴마크나 스웨덴 등은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남아메리카 몇몇 국가들은 오랜 제국주의, 군사독재로 파괴되고 짓눌려온 사회임에도 근년에 이르러 평화국가, 인권국가, 녹색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분투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인데도 ‘자연의 권리’를 명시한 헌법을 세계 최초로 채택했고, 에콰도르는 지구온난화 방지와 토착민의 삶터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이 발견된 유전(油田)을 함부로 채굴하지 않을 것을 국가정책으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종래의 상투적인 ‘국익’ 우선주의의 견지에서 보자면,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정책들을 관류하는 ‘공존공생의 사상’은 지금 이 세계에 가장 결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긴급히 필요한 사상이다. 경탄스러운 것은, 소위 번영하는 ‘선진국’들이 아니라 남아메리카의 작고 가난한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이 공존공생의 사상을 국가운영의 원리로 채택하고 그것을 실천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진정한 선진국은 남아메리카 국가들임이 분명하다.

북유럽 복지국가나 남아메리카 몇몇 나라의 예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적어도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나라, 더 녹색적인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자연환경과 역사적 배경과 문화풍토가 다른 지역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옮겨다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보편적인 정치시스템이 되어 있는 ‘민주주의’도 원래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시작된 제도였다. 세계의 역사는, 따져보면, 인간 공동체들 사이의 끊임없는 모방의 과정, 즉 ‘미메시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이다

좋은 사회,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녹색적인 나라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실천 여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란 정기적으로 선거가 있다고 해서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선거를 통해서 대표자를 뽑아 그들에게 국가운영을 위임하는 제도는 허다한 경우 특권세력의 과두지배체제를 영속화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선거를 통한 위임통치는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를 낳고, 금권정치의 지배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최근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를 통해서 백일하에 폭로된 한국 정치판의 부패양상, ‘뒷거래’ 관행은 현행의 선거제도 속에서는 절대로 근절될 수 없는 체제적·구조적 범죄이다).

그리스 출신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에 의하면, 민주주의 성립의 기본전제는 자주적 인간의 자율 혹은 자치(auto―nomy)에의 의지이다. 즉, 자신(auto)의 삶은 자신이 만든 법(nomos)에 의하여 규율하겠다는 의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오로지 경제성장과 이윤획득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는 풍토에 길들여진 나머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자유인’의 자율적·자치적 삶이라는 것을 망각해왔다. 그리하여 이 사회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라는 천박한 언술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되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라도 민주주의가 없으면 밥도 못 먹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지금 온 세상을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만들고,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하며, 걷잡을 수 없이 환경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논리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세계와 인간이 영영 구제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폭주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욕을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기업경영자나 주식·부동산 투기꾼, 경제적 특권층의 관심사는 세계의 지속가능성도, 평화와 인권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그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오로지 더 많은 이윤, 더 많은 금권의 확보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설득을 통해 자본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결국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힘은 국가의 공권력이다. 문제는, 오늘날 국가권력은 대부분 경제적 특권세력의 하수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국가권력을 바로잡아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엉터리냐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소선거구제 단순 다수 득표로 당선되는 국회의원이 실제로 얻는 표는 대체로 전체 유권자의 과반수 이하, 흔히는 30%도 안된다는 사실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통령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투표율 60%에 51%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전체 유권자의 30% 정도의 지지로써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 한국의 집권당은 기본적으로 ‘소수파’ 정권이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 이게 엄연한 현실인데도 집권당은 마치 점령군처럼 나라 전체를 자기들의 사물(私物)인 양 온갖 요직을 독점하고, 권력의 전횡을 일삼는다. 그 필연적인 결과가 바로 ‘조직화된 무능과 무책임의 통치체계’임은 여기서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자신과 아이들이 살아갈 이 나라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나라로 만들려면 민주주의를 하루빨리 정착시키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이 나라 정치시스템의 근본적 결함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원점, 즉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테네인들의 민주주의가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 이외에 세계와 인간존재, 그리고 공동체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색하고 질문을 던졌던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습관’과 더불어 탄생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질문할 줄 아는 능력과 습관은 자율과 자치의 삶,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에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나마 하나의 ‘희망적’인 징조인지도 모른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즉 “전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이 모양인지 전혀 몰랐다. 나라가 이렇게 되도록 방치한 것은 결국 우리 책임이다. 죽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라고.

재임 중 세계적인 존경과 주목을 받았던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은 국가의 성격과 수준은 국민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 이 나라를 마냥 이 꼴로 내버려둘 것이냐, 보다 인간적인 공동체로 만들 것이냐는 결국 우리들 ― 당신과 나의 책임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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