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1호 2015년 3-4월호  인쇄용  

 

  '우리'의 밥상에 차려진 아시아의 비참

  이문영

전국의 논밭은 우리 밥상에 이렇게 온다

경기도 고양시는 서울·수도권의 근거리 채소 공급지다. 고양시에서 생산된 채소는 농산물종합유통센터를 거쳐 대형마트나 직거래장터에서 소비자들과 만난다. ㄱ(32세, 여, 캄보디아)은 고양시의 비닐하우스에서 살았다. 비닐하우스는 산업화 이후 한국 도시 극빈층의 ‘전통 가옥’이다. 흩뿌려진 채소 씨앗이 뿌리를 얻으며 자라는 곳이 비닐하우스지만, 흩뿌려진 사람들이 뿌리 없이 사는 곳도 비닐하우스다. ㄱ의 ‘옆집 이웃’은 상추, 열무, 쑥갓, 시금치, 아욱, 근대 등이었다. 그가 입국 뒤 처음 배운 한국말들이기도 했다. ㄱ의 ‘처음들’은 설렘 대신 당혹으로 수식됐다.  

봄여름엔 상추와 열무를 심고 거뒀다. 200여 개씩 날라 5단 높이로 쌓아올리던 채소 상자가 무너질 때마다, 20~30단씩 모아 ‘보따리’를 싸는 서툰 손놀림에 화가 날 때마다, 그의 사장은 욕설을 뱉고 발로 걷어찼다. 추워지면 시금치와 쑥갓을 수확해 포장했다. 처음 만나는 가을·겨울이었고, 처음 만지는 차가운 흙이었다. ㄱ의 손은 동상에 걸렸다. 붉은 빵처럼 부풀어올랐고, 하얀 고름을 밀어올렸다. 살갗은 새까맣게 변색돼 죽었다. 더운 나라에서 온 노동자는 추위가 만드는 병이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밭에서 처음 알았다. 산재 처리는 거부됐다.

계약서상 그의 근무지는 경기도 파주였다. 파주엔 가보지도 못했다. 계약서상 사장은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종이 사장’의 동생이 ‘실제 사장’이었다. 월평균 308~319시간 일했다. 월급은 110만원이었다. 시급 3,448~ 3,571원(2013년 최저 시급은 4,860원)꼴이다. 사장은 최저임금법 위반을 낮은 채소 출하 가격 탓으로 돌렸다.

충남 논산 광석면은 쥬키니호박의 최대 산지다. 서울 가락시장 경매를 거쳐 전국의 밥상으로 보내진다. ㄴ(24세, 여, 캄보디아, 2012년 6월 입국)은 광석면의 47개 호박 비닐하우스에 투입됐다. 그는 시린 겨울날이면 소름이 돋았다. “춥다”며, 하우스에 들어온 사장은 일하는 ㄴ을 강제로 안아 들거나 뒤에서 덮쳐 쓰러뜨렸다. 사장의 입에선 술냄새가 났다. 거부하는 자신을 완력으로 껴안고 웃으며 사진까지 찍는 31살 젊은 사장이 ㄴ은 공포스러웠다. 아들을 제지해달라는 호소에 사장의 아버지는 “한국 문화”라며 외면했다. ㄴ은 한 달에 290~320시간 일했다. 월급은 103만원이었다. 1년 동안 체불임금(최저 시급 위반 액수)은 540여 만원이었다. 같은 농장의 노동자로 계약된 ㄷ(22세, 여, 캄보디아)은 입국하자마자 다른 지역의 다른 사장에게 보내졌다. ㄷ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 사장 간의 거래였다. ‘적발’의 두려움에 떨며 665시간 일한 대가로 그가 받은 돈은 200만원(시급 3,000원)이었다.       

 

전국의 축사는 우리 밥상에 이렇게 온다

전남 장성의 돼지는 녹차를 먹고 특화된다. ㄹ(28세, 남, 캄보디아)은 2,000여 두의 돼지농장에서 ‘연중무휴’로 일했다. 사료를 주고, 배설물을 치우고, 도축도 하며 사체를 처리하다가다도, 사장의 옥수수밭을 매고, 사장 누나 밭의 양파를 출하하고, 사장 아버지 고추밭에서 풀을 뽑았다. 양돈 노동자로 계약한 그는 사장 가족의 ‘가노’처럼 쓰였다. 매일 13~14시간 일했고 한 달 최다 노동은 370시간에 달했다. 한국 농·축산업에서 이주노동자 ‘돌려쓰기’와 ‘도용’(외국인고용등에관한법률·출입국관리법 등 위반)은 흔하다. 형이 계약해 동생이 쓰고, 20대 딸이 고용해 60대 아버지가 부리며, 75살 노모의 이름으로 40대 아들이 사용한다. 가족 혹은 마을 주민들끼리 ‘공용’하기도 한다.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식재료는 사람과 사람에게 물건처럼 넘겨지는 사람들의 손으로 번식하고 생육하는 단계에 와 있다. 계약을 지켜달라고 ㄹ이 요구했을 때, 사장은 “모두 농업”이라고 답했다.

 

전국의 과채밭은 우리 밥상에 이렇게 온다

전남 담양은 국내 3대 딸기 주산지다. 병과 해충에 강하며 과즙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ㅁ(35세, 여, 캄보디아)은 2012년 담양 딸기밭에서 일했다. 한 달에 330시간 노동하고 90만원을 받았다. 376일 동안 휴일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최저 시급 2,727원을 받은 셈이며 474만 8,400원을 체불당한 것으로 환산된다. ㅁ은 2013년 10월 국회에서 자신이 당한 혹사를 증언했다. 국내 이주노동자 최초의 국정감사 출석·고발이었다. 고용주는 2014년 3월 ㅁ을 상대로 식대와 숙박대금 473만 7,600원을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ㅁ이 체불임금으로 계산한 금액과 일치한다. 그가 받은 1년 임금 1,250만원의 38%에 해당하는 돈이다.    

전북 고창엔 국내 복분자 재배면적의 36%(최대 산지)가 있다. 전국의 15만 명이 고창 복분자를 소비한다. ㅂ(21세, 여, 캄보디아)은 고창의 유명 복분자 마을에서 일했다. ‘일요일·공휴일·격주 토요일 휴무’라고 쓰인 계약서에 사인했으나 한 달 내내 쉬는 날이 없었다. 월 310~360시간 노동에 115만원(평균 시급 3,203원)을 받았다. ㅂ은 밤마다 빈 농장에서 60대 사장과 둘이 지냈다. 방에서 쉴 때마다 사장이 불러내 밥을 차리라고 요구했다. “아빠라고 부르라”며 그의 방으로 들어와 안마를 시켰다. ㅂ이 쪼그리고 앉아 팔다리를 두드리면 누워 안마를 받던 사장은 “으어” 하며 뜻 모를 소리를 냈다. 사장은 지역사회에서 성공한 농업인으로 통했고 언론에도 소개됐다. 인터넷 기사에서 “복분자 사장님”의 얼굴을 본 ㅂ이 입술을 깨물고 울었다.

 

넓고 푸른 바다는 우리 밥상에 이렇게 온다

연근해 고등어 어획량 95%가 부산공동어시장(부산 서구 남부민동) 위판장에 배를 깐다. 고등어잡이 대형선망 어선들이 부산 남항으로 집결하면 항구 전체가 ‘등 푸른’ 색을 입는다. ㅅ(47세, 남, 인도네시아)의 배도 매월 보름 귀항한다. 집어등을 켜고 조업하는 고등어잡이 배들은 달빛 흐드러지는 ‘월명’에 맞춰 음력 14일(고기가 모이지 않아 귀항) 육지로 키를 돌린다. 대형 뜰채가 남항에 쏟아놓은 고등어는 서울 노량진시장으로 보내져 전국으로 유통된다. ㅅ은 한국인 선원들이 무섭고, 그들이 자신에게 쏘는 물도 무섭다. 그는 한국인 선원에게 “자주”(2012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결과 43%와 94%가 폭행과 폭언 경험) 맞았다. 고등어에 뿌리는 물도 “종종” 그에게 뿌려졌다. 생선 비늘 둥둥 뜬 어창의 물을 뒤집어쓸 때마다 그는 그물에 걸린 고등어처럼 낭패감과 모멸감을 느꼈다. ㅅ은 “때리지만 않으면 욕을 해도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명태의 ‘실종’은 한국 어선을 원양으로 불러낸다. 국내 어류 소비량 1위(2010년 32만t, 2011년 28만t, 2012년 30만t)인 명태가 2014년엔 11월까지 국내에서 단 207마리 잡혔다. 12월 1일 러시아 서베링해에서 침몰(전체 승선 인원 60명 중 7명만 구조)한 501오룡호도 한국을 떠난 ‘국민 생선’을 찾아 먼바다로 나간 명태잡이 어선이었다. 53명 중 27명(한국인 6명)이 숨지고 26명(한국인 5명)이 실종됐다. 1월 30일 사조산업은 본사(서울 서대문)에서 사고 진상 규명과 실종자 수습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한국인 유가족들을 건물 밖으로 쫓아냈다.

오룡호 선원의 80%는 외국인 선원이었다. 국내 언론에서 그들 가족의 오열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도네시아에선 “역대 최악의 원양어선 사고가 났다”며 반한(反韓) 감정이 일었다. 남편의 죽음과 실종에 망연한 가족들의 눈물이 지면과 전파를 적셨다. 인도네시아는 한국 선원 이주노동자의 최다 송출국이다. 오룡호에선 인도네시아 선원 35명과 필리핀 선원 13명이 우리 밥상의 명태를 잡고 있었다. 사조산업이 “1만 달러(약 1,000만원, 시신 운구비와 장례비 포함)를 받고 민·형사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합의서 서명을 강요했다는 말이 외국인 유가족 쪽에서 나왔다. “서명하지 않으면 시신을 돌려주지 않겠다”며 협박했다는 주장도 따랐다. 사조 원양어선은 국제사회에서 ‘노예선’으로 악명이 높다. 2011년 뉴질랜드 앞바다에서 참치를 잡던 오양75호의 인도네시아 선원 32명이 집단 탈출했다. 그들은 뉴질랜드 당국에 참혹한 선상 폭력과 성폭행·임금체불을 고발했다. 국내 원양어선 선원 이주노동자의 월 최저임금은 423달러(50여 만원, 연근해 어업은 118만원)다.

선원들은 뱃일을 ‘4D’라고 부른다. 3D(Dirty·Difficult·Dangerous)한데 멀기(Distant)까지 하다는 의미다. 한국 어선을 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뱃일은 ‘5D’라고 할 만하다. 고향에서 멀고, 언어에서 멀고, 법에서 먼 바다 위에서, 그들은 한국 선원에 비해 이중(二重)의 고통을 겪는다. 

 

상추, 열무, 쑥갓, 시금치, 호박, 돼지고기, 딸기, 복분자, 고등어, 명태, 참치는 이렇게 우리 밥상에 온다. 2014년 8월부터 12월까지 〈한겨레21〉을 통해 농·축·어업의 이주노동 실태를 보도했다. 전국의 논밭과, 축사와, 과채밭과, 푸른 바다가 밥상 위로 올라오기까지 이주노동자들이 흘린 ‘눈물의 과정’을 추적했다. 우리의 밥상이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는 독자 반응이 많았다. ‘일부’ 고용주들의 문제를 ‘전부’처럼 보이게 했다는 농·축산업 종사자들의 비판도 있었다. 이주노동자와 고용주를 선과 악으로 이분화했다는 항의도 받았다. 모두 귀담아들어야 할 지적들이었다. 다만 일부가 되풀이되다 보면 전부와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피해사례가 지나치게 많았다. 과장이라고 하기엔 글로 밝히지 않은 현실이 더 가혹했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는 문장이 있었다. “밥상의 근원, 그 눈물의 뿌리.”

우리 시대는 부지와 불식 간에 가혹하다. 누군가의 일상이 누군가의 비참에 뿌리박고 영위된다는 사실은 모질고 혹독하다. 일상을 떠받치는 ‘비참의 메커니즘’이 진보·발전의 ‘불가피’로 용인되는 세계는 잔인하다. ‘편안한 평소’를 구성하는 ‘가혹한 현실’을 발견해내는 것이 이 시대 언어와 문자의 최전선이다.

밥상은 일상의 최소와 기본이다. 최소와 기본이 위협받을 때 일상은 흔들린다. 어느 때부턴가 밥상의 문제가 정치·사회와 만나기 시작했다. 일국적 농업정책과 국제적 통상협정, 지구적 환경정세가 맞물리는 거대정치는 개별 가정에 미시적으로 틈입하며 밥상을 정치의 영역으로 불러냈다. 우리의 밥상은 안전한가. 이 질문 위에서 생활협동조합과 먹거리운동은 시대적 흐름을 얻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밥상의 정치성’을 재차 경각시키는 다급한 화두가 됐다.  

인지되고 인식되는 질문 뒤에 부지되고 불식되는 질문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의 밥상은 인간다운가. 질문은 순서가 바뀌어 우리를 충격한다. 밥상의 안전성을 묻는 탈근대시대에 밥상의 인간성을 묻는 (전)근대적 물음이 뒤늦게 도착한다. 세계화·국제화에 휘말린 저개발국가의 노동이 안전한 ‘지역’ 식재료 생산에 투입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의식과 생활은 글로벌을 강조하되 먹거리는 로컬리티를 추구하는 한국사회에서 밥상의 탄생은 글로벌스탠다드와 한참 멀다. ‘우리’는 배제의 언어다. ‘우리에서 배제당한 사람들’ 없인 ‘우리의 신토불이 밥상’도 없다는 현실 속에 아시아의 비참은 숨어 있다.

 

국제적 이촌향도

한국인의 밥상은 세계체제 안에 들어와 있다. 식재료가 다국적이란 뜻만은 아니다. 우리의 밥상은 배고픈 나라에서 온 ‘맏딸들의 밥상’이 떠받치고 있다.  

ㅇ(35세, 여, 캄보디아, 2012년 입국)의 방 주인은 사람이 아닌 선(線)이었다. 형광등 선과, 냉장고 선과, 각종 용도를 알 수 없는 선들이, 천장과 벽을 타고 기어오르고 허공을 종횡하며 늘어졌다. 마릿수가 너무 많아 겁을 잃은 파리와 모기들이 ㅇ의 손짓을 무시하며 날아다녔다. 지난해 8월 숨을 조이는 열기가 ㅇ의 컨테이너 숙소 안에서 육박했다. 작은 선풍기 한 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더위였다. 창문을 활짝 열어도 외부보다 뜨거운 내부는 쉼터라기보다 싸움터였다.

경기도 여주의 버섯농장에서 만난 ㅇ은 키가 150cm도 안돼 보였다. 노동청이 첫 번째 일터 사장의 임금체불 사실을 확인한 직후였다. 소송을 제기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주노동자단체 쪽의 전언에 그는 말했다. “여기(두 번째 일터) 일 빠질 수 없어 소송할 시간 없어요.” 버섯농장에서도 그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고 최저임금 이하의 시급을 받고 있었다.

좋은 김치는 좋은 배추가 만들고, 좋은 배추는 좋은 땅에서 난다. 2012년 한국 땅을 밟자마자 ㅇ은 강릉시 왕산면 산비탈에 배추를 심었다. 해발 1,200m인 안반데기는 국내 고랭지 배추의 대표 산지다. 왕산면은 그가 한국에 올 때 작성한 계약서의 주소지다.

왕산면에 오기까지 그는 전북 익산에서 고구마 줄기를 잘랐다. 교육장(입국 후 3일간의 의무교육)에서 ㅇ을 차에 태운 고용주는 강릉이 아닌 익산으로 데려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왕산면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사장은 그를 다시 충남 예산으로 실어 갔다. 경기 평택으로, 경기 안성으로, 충남 태안으로, 충남 아산으로, 충남 서산으로 옮겨지며 ㅇ은 처음 보는 사람의 인삼밭, 무밭, 감자밭, 열무밭, 양파밭 등(전국 15개 이상 작업장)에서 일했다. 사장은 그의 노동력을 거래했고, 그의 임금은 사장이 받아갔다. 그는 사장의 불법 인력파견업에 이용됐다. 오전 6시 일 시작을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차를 타고 이동했다. 새벽 2시에 기상해 3~4시간씩 걸려 도(道)의 경계를 넘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5분 혹은 10분 만에 끝나는 날도 있었다. 밥을 먹던 사장이 화난 표정으로 밭으로 돌아가면 모든 노동자들이 숟가락을 놓고 따라갔다. 다른 밭에서 그의 노동을 ‘주문’하지 않을 때 ㅇ은 사장의 공장으로 불려가 풀을 뽑거나 단무지를 포장했다. 하루 8시간(한 달 226시간)이던 계약서의 노동시간은 현실에선 12시간(월 318~352시간)으로 바뀌었다. 노동시간이 100시간 이상 늘어나도 월급은 95만원으로 변함없었다. 휴일을 지키지 않는 이유를 묻자 사장은 그가 읽을 수 없는 문장(농·축산업엔 근로시간·휴게·휴일 적용의 예외를 둔 근로기준법 제63조)을 보며주며 말했다. “농장은 공장과 달라.”

ㅇ은 맏딸이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인 프레이웨인이 고향이다. 물이 부족해 한 해 농사를 하늘의 선처에 맡겼다. 강수량이 주민들의 밥을 결정지었다. 그는 200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중학교만 마치고 일자리를 구했다. 동생 둘은 공부시켜 좋은 직업을 갖게 하고 싶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오가며 일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광고는 한국행을 권했다. “한국이 기회를 줄 것”이라고 했다. 맏딸은 한국의 농업 이주노동자가 되기 위해 3,000달러를 썼다. 친척과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복분자농장의 ㅂ도 맏딸 역할을 했다. 그는 시엠레아프 앙코르와트 서쪽 트러키어트에서 왔다. 집이 가난해 중학교도 중퇴했다. 7남매 중 다섯째였다. 오빠 한 명과 언니 네 명이 결혼했다. 미혼 중에선 그가 맏이 격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엔 타이의 신발공장에서 일했다. 입국을 위해 은행빚을 졌다.

만나본 많은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들이 맏딸이었다. 가정을 건사하고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 맏딸들은 한국의 농업 이주노동자가 됐다. 그들은 “캄보디아 맏딸들은 이래야 한다”고 했다.

조성(1964년 9월 14일에 근거법 제정) 50년을 맞아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구로공단의 역사도 한국 ‘맏딸들’의 역사다. ㅈ(57세, 여)은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4년(당시 17살) 나이를 속이고(회사의 묵인하에 알선기관이 서류 조작) 구로공단 계산기 제조회사에 취업했다. ‘경영난을 이유로 해고 → 버스 안내양 → 결혼 → 구로공단 주변 식당 → 1990년대 구로공단 전자부품 회사 재취업 → 회사 파산 → 구로공단 주변 식당 → 파견직 청소노동자 → 수당 지급을 요구하다 해고’의 과정을 겪었다. ㅊ(54세, 여)도 맏딸이었다. 1990년대부터 구로공단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한 번도 정규직이었던 때가 없었다. 문구류 하청업체 → 아파트형공장(굴뚝형 공장을 밀고 들어선 고층빌딩 형태의 공장, 기존 공장의 라인별로 쪼개져 소규모화 된 업체들이 입주) 내 전자부품 제조업체 → 5개월 단기직 휴대전화 배터리 조립 → ‘호출형’(작업 물량이 있을 때 호출했다가 없으면 돌려보내는 형태)으로 고용이 악화되며 공단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거쳐온 모든 업체가 폐업하거나 저렴한 땅값과 노동력을 찾아 지방·해외 이전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농촌의 값싼 노동력을 뽑아 올려 수출산업에 매진케 했다. 일할 사람을 빼앗긴 농촌은 도시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정책을 강요당했다. 농촌을 떠나 구로공단 여공이 된 맏딸들은 ‘벌집촌’에 모여 살며 도시의 값싼 노동력으로 소모됐다. 그들은 평생 공단 주변을 떠나지 못하며 공단의 부침과 더불어 그들의 삶도 출렁였다. 한국 맏딸들의 자리에 이젠 가난한 나라의 맏딸들이 들어와 채우고 있다. 어린 여공들이 3~4명씩 짐짝처럼 부려졌던 좁은 쪽방엔 중국에서 온 동포 노동자들이 고된 몸을 누인다. 맏딸들에게 구로공단과 농촌은 공간의 차이일 뿐이다. 일할 한국인이 씨가 마른 농촌에 배고픈 나라의 맏딸들과 그의 형제들이 들어와 우리 밥상에 오를 식재료를 생산하고 있다. 일국적 차원의 이촌향도가 국제적 차원으로 바뀌었을 뿐 ‘맏딸의 역사’는 그대로 재생되고 있다.

찬란은 빈곤을 묻어 감춘다. 구로공단의 번쩍이는 아파트형공장 내부와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는 ‘밥상의 저편’은 찬란의 눈으론 보이지 않는다. 빈곤과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점조직 잇듯 흐르는 동안, 보이는 세계는 ‘비참의 작동방식’과 무관하다는 착시에 빠진다. 과거 ‘일국적 이촌향도’ 시기엔 서울이 가난한 농촌 자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지구적 이촌향도’ 시기의 한국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청년들을 빨아들여 텅 빈 농촌을 채우는 주요 송입국이다. 이주노동의 국제적 송입·송출 시스템과 얽히며 우리의 밥상은 일상의 장막 뒤에서 작동하는 지구적 이촌향도의 연결고리가 되고 말았다.

 

인권의 사각지대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제조업 쪽을 희망하지만 자리가 나지 않는다. 그들도 농장보단 공장이 임금과 노동시간에서 덜 취약하다는 사실을 안다. 한국 이주노동 20여 년의 역사(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 도입 → 2004년 고용허가제 도입) 동안 공장의 노동환경은 ‘상대적으로’ 나아졌다. 고용 역사가 짧은 농업 쪽에선 20년 전의 ‘인권 공백’ 상황이 한창이다. 

제조업 취업은 원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특화국가’ 출신은 더욱 그렇다. 2014년 9월 말 현재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농·축산 분야 ‘등록 노동자’는 2만 3,687명(여성은 7,352명으로 31.0%)이다. 농·축산업 할당 쿼터(2003년 923명 이후 증가)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15년엔 6,000명+α(전 분야 5만 5,000명 중)가 들어올 예정이다. 미등록 신분까지 포함하면 국내 농축산 이주노동자는 3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2011년 12월 정부는 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버마(미얀마) 등을 농·축산업 특화국가로 지정했다. 특화국가의 노동자들은 한국어능력시험(TOPIK) 점수(점수가 낮을수록 농업과 어업으로 배치)가 좋아도 제조업 쪽에 채용되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맏딸과 형제들에겐 시간이 없다. 농·축산업을 택하면 취업 시기가 빨라진다.

밥상을 둘러싼 아시아의 비참엔 ‘심각한 동상이몽’이 존재한다. 제조업을 포기하고 농·축산업 이주노동자가 되더라도 그들은 ‘노동자’로 대우받길 기대하며 한국에 온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를 맞는 한국의 농·축산업은 그들을 ‘임금노동자’로 대우할 준비가 안돼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정서는 전통적 ‘일꾼’에 가깝다. 일꾼에게 노동시간은 대중없고 노동의 내용도 ‘필요한 일 전부’다. 그 동상이몽의 격전장이 계약서다. 상추와 배추가 저절로 밥상에 오르진 않는다. 우리의 밥상은 계약의 산물이다. 씨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고, 노동하는 ‘근로계약’이 있어야 쌀이 익고 돼지가 살찐다. 계약대로 노동조건을 보장받을 것이란 이주노동자들의 믿음은 비정하게 배반당한다. 엉터리로 작성된 ‘무법한’ 계약서가 고용센터의 추인을 받고 법적 효력을 얻는 사례가 셀 수 없다.   

ㅋ(23세, 여, 캄보디아)은 외출 뒤 농장으로 복귀하다 길을 잃었다. 그가 내민 외국인등록증 주소지에 택시가 도착했지만 농장은 없었다. 놀란 ㅋ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택시 기사에게 다른 주소를 알려줬다. 계약된 주소지와 다른 장소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ㅋ은 그때 알았다. 그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입국했다. 사장이 그를 데려간 곳은 덕양구 대장동이었다. 대파를 심고 수확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ㅋ은 1년 2개월 동안 안성시 일죽면 → 강원도 평창 → 고양시 대장동 → 전남 영광 → 전남 신안(임자도) → 고양시 대장동 → 전남 신안(자은도) → 고양시 대장동 → 안성시 일죽면 순으로 실려 다니며 대파 작업을 했다. 국내 대파 주산지 및 시기별 수확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 불법파견이다. ㄱ부터 ㅋ까지(구로공단 한국인 노동자 ㅈ·ㅊ 제외) 모두 엉터리 계약서의 피해자들이다. 계약서를 확인·검증해야 할 정부기관의 관리·감독기능이 먹통인 탓이다.

농업이 엄격한 고용계약에 따른 ‘사업’이 됐다는 사실을 한국의 농업인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안돼 있다. 그들은 노동시장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 급변하는 농업 현실에 맞서 농업노동의 미래를 내다보고 근본대책을 만든 역대 정부도 없다. 오히려 사태를 방관하거나 조장하고 있다. 독소조항 두 개가 휘발유 역할을 한다. 근로기준법 제63조는 근로시간과 휴게·휴일 규정을 농·축산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않도록 못박고 있다. 계절·날씨산업의 특성을 띠는 농업엔 엄격한 규제가 힘들다는 이유다. 농·축산 이주노동자 혹사의 핵심 근거가 되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사업장변경제한’ 규정도 폐지 1순위 조항으로 지적돼왔다.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은 불가능하다. 이주노동자들이 불법 상황을 억지로 참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들을 붙들어 매는 규정이 역설적으로 ‘미등록으로의 이탈’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국내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호와 이주노동자의 과도한 임금 상승 방지에 방점을 두고 고안됐다. 두 독소조항은 정부가 체계적 농업노동 정책을 고민하는 대신 무책임과 무능을 면피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그 사이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 ‘농·축산 이주노동자 인신매매 국가’로 낙인찍히고 있다.  

 

한국 농업을 떠받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없으면 한국 농업은 생산량 유지가 불가능한 상태에 와 있다. 연구 수치(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사의 〈생활양식으로서의 가족농과 그 지속가능성〉)로 확인된다. 2003년과 2012년 사이 농업노동력은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농가 평균 가구원 수(2003년 3.2명 → 2012년 2.6명)와 농가 평균 연간 농업노동 투입량(1,613시간 → 1,204시간), 임시 농업종사자 수(0.49명 → 0.32명) 모두 감소 일로다. 현재 이주노동자가 전체 농·축산 노동에서 차지하는 몫은 5.4%다. 이주노동자들은 임금고용 노동자들이다. 임노동으로 한정시키면 그들은 36.7%의 노동을 공급한다. 이주노동자가 농·축산업 생산에 ‘결정적 존재’가 됐다는 의미다. 국내 농업역사상 최초로 ‘실질적 농업노동자’가 출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 농업은 거대한 전환기에 있다. 이주노동자의 노동환경 개선은 인권의 문제를 넘어선다.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제도는 미비하고 정부는 안일하다. 현행법은 “농업에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농업노동’의 개념 자체가 없다. 국내법상 정부가 대체개념으로 설명하는 ‘농업인’은 고용인을 포함한다. 농업노동자 수도 확인할 길이 없다. 통계청의 수치도 그들의 지위(고용인·피고용인·자영농 여부)까지 알려주진 않는다. 현재까지 정부는 농업 현장의 변화를 법체계에 담아내려는 계획도 의지도 없다.  

개방 압력이 커진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는 농업 구조조정과 생존방안으로 영농 대형화를 제시했다. 대형화 이후 영세농가는 몰락하고 중농은 대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한국의 산업구조에서 농·축산업은 언제나 수탈의 영역이었다. 쌀을 내주고 휴대전화를 파는 국제 통상거래는 삼성전자 한 개 기업의 매출액이 228조원(2013년)일 때 농·축산업 전체의 매출액을 60조원에 묶었다. 농산물 가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수입이다. 연간 노동투입이 1,800시간이 넘는 중농은 1~2인가족 노동력으로 농사를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이 값싼 노동력에서 비용절감 요인을 찾도록 유혹받는 이유다. 먹이사슬 끝으로 내몰린 고용주들은 최말단에 선 이주노동자들을 밟고 올라타도록 떠밀리고 있다. ‘나쁜 사장님’은 이 구조 아래서 만들어진다.  

암울한 전망이 하나 있다. 2014년 현재 다문화가정(외국인끼리 결혼+결혼이민+혼인귀화)의 자녀는 20만 4,204명(안전행정부 통계)이다. 2009년 10만 7,689명 → 2010년 12만 1,935명 → 2011년 15만 1,154명 → 2012년 16만 8,583명 → 2013년 19만 1,328명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만 0세부터 만 18세까지의 연령대만 집계한 수치다. 성인으로 진입한 만 18세 이상은 정부도 통계 파악을 못하고 있다. 그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지 알려진 바 없다. 한 농업연구자의 조심스런 말을 기억한다. “정보와 물적 기반에서 뒤지는 농촌의 다문화가정 자녀들일수록 취업과정에서 사회적 장벽으로 좌절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향후 농업노동자군을 형성할 수도 있다.”   

그들은 온몸에 분노를 체득하고 자랄 것이다. 그들 부모 세대의 분노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남의 나라’에 돈 벌러 온 최하층 노동자에게서 나타나는 위축이 자녀 세대엔 없을 것이다. 대신 ‘자기 나라’에서 배척되고 외면되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분노로 심장은 들끓을 것이다. 그 분노가 언젠가 ‘우리’의 밥상에 다시 오를 것이다. 우리의 ‘방리유’(프랑스의 도시 변두리로 프랑스사회의 차별과 배제의 상징 공간, 샤를리 에브도 사태는 방리유 출신의 총격으로 발생)는 그 밥상에서 자랄지도 모를 일이다.


이문영 ― <한겨레21> 기자.

녹색평론사  (02)738-0663, 0666  fax (02)737-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