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40호 2015년 1-2월호  인쇄용  

 

  국가의 쇄신과 개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김종철


“제발, 어디로 가야 할지 좀 가르쳐줘.”
“어디로 가고 싶은데?”
“몰라.”
“그럼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 루이스 캐럴, 《신기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오늘 이 자리는 대단히 중요한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치권에서 개헌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그것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가 자주적인 개헌운동을 해야 할 필요와 그 의의에 대해서 논의해본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한마디로 대전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환기라는 용어는 우리가 별생각 없이 흔히 쓰는 말이지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지금은 전환기, 그것도 대전환기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지금부터는 경제성장이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단순히 저성장이 아니라 성장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로 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겠지만, 그동안 제가 《녹색평론》 지면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서 많이 얘기해왔기 때문에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대전환기인데, 이 대전환기를 맞이해서 우리사회나 세계 전체가 슬기로운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 안 있어서 엄청난 파국을 맞을 것이 확실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만 국한시켜서 보더라도 당장에 모든 것을 가로막는 큰 장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시스템입니다.

지금 매일매일 우리사회의 온갖 생활 현장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끝도 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불거지고 있는 이러한 골치 아픈 문제들이 해결이 되려면 결국은 이 나라의 정치가 큰 테두리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줘야 되는데, 이게 꽉 막혀 있습니다. 그 결과로 현장에서는 피눈물 나는 투쟁들이 계속되고, 세상에는 온통 억울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지만, 어디에도 시원한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생활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못지않게 지금 우리는 경제성장이 끝나가는 시대를 맞이하여 종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 전례 없는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불거지는 현안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서 앞으로 우리사회가 국가적 차원에서 어떤 비전을 갖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합의를 봐야 합니다. 그것은 긴급한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이랄까 비극이랄까, 이런 중차대한 역사적 과제를 핵심적으로 짊어져야 할 정치가 지금 완전히 기능부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삶의 밑바닥, 현장에서의 자치와 자립적 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국가 차원의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든 게 헛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는 정치라는 게 그저 하찮은 이해관계를 둘러싼 정파 간의 소모적인 대립과 입씨름으로 시종할 뿐, 어떻게 엄중한 시대적 과제를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은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혁명에 버금가는 국가 쇄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세월호 사태 초기에 대통령의 입에서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대통령 자신이 그 말의 참된 의미를 알고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죠. 사실 세월호 사태에서 확연히 드러났듯이 지금 이 나라는 국가라고 할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썩은 정치라 할지라도 이토록 무능하고 무책임한 권력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국가의 통치능력은 전면적으로 붕괴하고, 대의제 정당정치라는 것도 거의 효력을 잃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국가, 이런 정치 때문에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고,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가들 거의 전부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지만, 그래 봤자 입만 아프지 상황이 조금이라도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정치권에서 나오기 시작한 개헌 논의는 아시다시피 주로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헌법으로는 비록 선거에 의해 뽑혔을지라도 대통령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더라도 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이죠. 그냥 대통령 개인의 인간적 자질과 선의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화주의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말이 안되고, 위험한 것인지 우리들 모두가 갈수록 통절히 느끼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현역 정치가들이 어떤 의도에서 개헌을 말하느냐와 관계없이 저는 개헌 자체는 지금 시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헌을 통해서 권력구조를 변경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의 개헌 움직임을 처음부터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서 지금 우리가 개헌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헌법 개정이라는 것을 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디를 둘러보아도 암울하기만 한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는 사회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고 싸워야 할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발본적인 방법으로서 개헌운동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 개헌은 직업적 정치꾼들에 의한 개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민들이 주도하는 개헌작업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시민 주도 개헌이라는 아이디어를 대대적인 시민운동으로 확산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혁명에 준하는 성취가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권재민이라는 민주국가의 제1원칙을 단순히 문서상으로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현실 속에서 명확히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근본문제는 뭔가 하면, 민주주의라는 것은 허울뿐, 정치란 것이 실제로는 기득권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 국회의원, 공직자들이 국민들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위기상황이나 재난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국가권력은 그냥 민중을 버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봤습니다.

그런데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게 단순히 정치가들 개인의 자질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저는 이 모든 게 결국 현행의 정치시스템, 즉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이름 밑에서 행해지는 선거제도에 내재된 기본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게 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원래 민중의 자기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어느새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소수 엘리트들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 되었고, 그것이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엘리트에 의한 과두독재 체제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것 말고는 일반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습니다. 정치는 어느새 정치가계급의 전유물이 돼버린 것이지요. 그러면 이 직업적 정치가들이 과연 민중의 의사를 정치에 옳게 대변하느냐? 말할 것도 없이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로 선거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과 조직과 미디어에 의한 이미지 조작으로 이루어지고, 그 결과 기득권세력에 속하거나 그 세력에 영합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선거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선거제도는 기득권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메커니즘 이외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러한 선거제도에 대해서 일찍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통렬하게 야유한 바가 있습니다. 즉, 그는 “선거로써 세상을 바꾸는 게 정말로 가능하다면, 선거제도는 벌써 불법화되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백한 한계를 가진 선거제도이지만, 그동안 이 제도가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고 그런대로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경제성장이 계속돼왔기 때문입니다. 경제성장이 계속되는 한, 다수의 생활인들은 약간이나마 떡고물을 받아먹는 게 가능하고, 현재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민중에게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도) 끊임없이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더이상 안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조만간 기존 선거제에 기반을 둔 대의제 정당정치의 전면적 붕괴로 나타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대의제 정당정치에 대해서 막연히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정말로 좋은 사회, 좋은 정치가 불가능한 것인지, 대안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민주주의의 사상적, 실천적 원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용기 있게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지금 완전히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국가의 통치기능을 회복할 수 없고, 인간적인 정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다급히 요구되는 국가의 쇄신, 정치의 환골탈태를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합니다만, 그것은 지금 모처럼 대두되기 시작한 개헌 논의를 빌미로 하여, 시민 주도 개헌이라는 아이디어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헌법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만한 실력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지만, 헌법이라는 것은 국가의 존립방식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기본 골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 나라의 헌법이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인가, 물어봐야 할 때입니다. 정말로 헌법이나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흔히 듣는 얘기가 과연 옳은 말일까요? 다 알다시피 지금 헌법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 정파들 사이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타협은 그때의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타협의 성과로서 획득한 것이 결국 대통령직선제 하나였다고 한다면, 그 이후 사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청나게 시대가 변한 이 시점에서 현행 헌법으로 과연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지혜롭게 열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요컨대 이른바 1987년 개정된 헌법에 의한, 이른바 87년체제의 한계가 바로 지금과 같은 정치의 마비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되풀이하는 이야기지만, 헌법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긴급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헌법 개정을 통해서 어떻든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개헌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개헌운동을 통해서 주권재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그 원칙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방안을 헌법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시민사회의 주도로 활발하게 토의한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사회의 총체적 지성, 정치의식의 수준이 대폭 향상될 게 틀림없습니다.

토마스 페인이 1776년에 펴낸 《상식》이라는 책자가 미국독립전쟁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민들은 누구나 영국 왕이 지배하는 억압적 통치질서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명료하게 논리화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주제는 시대착오적이다, 새로운 시대의 상식은 공화제다”라는 토마스 페인의 거침없는 논리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의지에 불을 지폈습니다. 즉, 미국혁명은 ‘상식’이 바뀜으로써 거대한 역사적 행동이 시작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얘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상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원전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삼척에서 주민투표가 실시됐습니다. 어쩐 일인지 진보 성향 언론들도 별로 관심이 없지만, 저는 이 삼척주민투표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척시 의회와 시민들이 합심해서 모든 비용을 자담하여 결국 주민투표를 성사시켰고, 그 결과 압도적인 다수가 원전 건설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삼척에서는 원전 건설 문제가 20여 년 이상 계속돼온 지역의 가장 중대한 현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한 주민들은 이 문제를 소상히 숙지한 상태에서 투표를 했고, 그런 의미에서 뭐가 뭔지 내용도 잘 모르고 하는 일반적 투표와는 질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숙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투표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에게 모범적인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민주주의란 풀뿌리 민중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대표자들’ 혹은 소위 전문가들의 판단에 맡겨두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 것입니다.

삼척주민투표는 투표의 구체적인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명확히 드러난 상황에서, 풀뿌리 민중이 이제부터는 자신들의 일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자세야말로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직면한, 기후변화를 비롯한 엄청난 위기들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세계 곳곳에서 기후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점점 짙어짐에 따라 이 문제에 예민한 선각자들 중에서, 예컨대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제임스 러브록 같은 과학자는 현재의 국제질서로는 임박한 파국을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 슬기롭게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세계현인회의’라는 것을 시급히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인회의’라고 하지만, 결국은 세계적인 독재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권능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회의체를 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설령 그런 ‘에코파시즘’ 체제가 성립된들 그게 과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독재시스템을 구상하게 됐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옳은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천하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게 확실합니다. 생활하는 당사자들이 왜 생태친화적인 사회(혹은 녹색국가)를 지향해야 하는지 자발적인 각성이 없이는 실효성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강제성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허용할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해법은 민주주의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척시민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삼척주민투표는 우리가 개헌문제를 생각하는 데에도 굉장히 중요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자주적 정신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개헌을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게 실은 가장 건강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합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가끔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이 사회 혹은 이 나라의 구성원들을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무슨 힘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이제 와서 어떤 특정 종교 혹은 문화적 공통유산을 가지고 시민적 통합을 시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원칙적인 견지에서도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헌법밖에 더 있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철학자 하버마스가 말한 ‘헌법애국주의’라는 아이디어를 빌려서 생각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버마스의 ‘헌법애국주의’라는 개념은, 나치스의 잔학한 범죄라는 독일 국민의 역사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지적·정신적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독일인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시민적(혹은 국민적) 정체성의 근거를 공통적인 혈통, 역사, 문화, 전통 같은 것이 아니라 ‘좋은’ 헌법과 그 헌법적 정신의 실천에서 찾고자 하는 자세는 어느 사회라도 적용 가능한 매우 보편적인 철학,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훌륭한 ‘헌법공동체’ 속에서 사는 구성원들이다”라는 의식을 갖고, 시민들끼리 연대감을 형성하고 삶을 나누는 사회 말입니다.

보수주의 정치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월터 배저트도 자신의 저서 《영국헌정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즉, 헌정질서가 잘 유지되려면 국민들이 자기 나라의 헌법 속에 인간다운 위엄과 품위를 느끼게 할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로서 영국은 대영제국이었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라는 뭐 그런 국가주의적인 자부심이 큰 시대였으니까, 베저트는 그런 국가적 ‘영광’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헌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민들이 느끼기에 자랑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단지 문서상에서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실천되고 있다는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저는 현재 우리의 헌법 제1조 1항, 즉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보다 우리가 이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근거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조항은 결국 우리가 모두 ‘자유인’임을 천명하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 조항의 정신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왜곡 없이 실현되고 있느냐,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현방안들을 위해서 헌법이 정부와 권력자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국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국민이 아니라) 정부에 대하여 명령하는 체계가 민주국가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에 절망할수록 우리는 헌법 제1조 1항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주공화국’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장치와 제도들을 확립하도록 헌법과 법률로써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국가권력이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개헌운동을 통해서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시민들이 주도하는 개헌운동을 위해서는 우리가 ‘시민의회’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현행법으로는 개헌은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가결로, 국민투표에 붙이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시민들은 철저히 수동적인 위치에 서 있도록 강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돼서는 개헌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설령 결과가 좀 엉성한 것이 될지언정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개헌을 하는 게 진정한 민주정치를 획득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을 확실히 갖고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2008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국가파산 상태로 내몰렸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가 보여주었던 개헌 과정과 유사한 수준이나마 우리가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나라에서는 국가적 위기에 대해 책임이 있는 당시의 정부가 모두 물러나고, 새로이 성립한 정부가 각기 선거제도를 포함한 헌법 개정 작업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개헌 과정에서 무슨 조항을 신설 혹은 보강하고 무슨 조항을 폐기할 것인가 등등, 이른바 ‘어젠다 세팅’(의제설정) 작업을 기성의 국회의원이나 정치가들이 아니라 보통시민들이 맡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구성된 게 ‘시민의회’입니다. ‘시민의회’는 선거인 명부에서 무작위로 제비뽑기라는 방식으로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물론 성별, 연령, 지역별로 고르게 선출되도록 조절과정을 거쳐서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시민의회라는 개념과 그 멤버들의 선출을 위한 방법, 즉 제비뽑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공직자나 대표자를 뽑을 때 투표를 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만, 실은 투표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원래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투표는 귀족주의 엘리트 정치를 유지하는 방식이고, 민주정치는 제비뽑기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게 보편적인 상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투표란 어차피 이미 널리 알려진 ‘영웅’, 명망가, 재력가 등등,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비뽑기를 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을 고르게 대변하는 대표자를 선정할 수 있고,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넓게 열린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로 대표자를 뽑는 아이디어에 관해 말하면, 흔히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무식한 사람이 뽑혀서 어떻게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오랜 세월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치에 길들여져온 결과입니다. 올바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부터 불식하는 게 시급합니다. 제비뽑기를 통해서만 올바른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고대·중세인들의 상식이 어쩌다가 뒤로 물러나고, 민주주의라고 하면 사람들이 대뜸 투표나 선거를 떠올리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상당한 연구가 필요한 테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근년에 이르러 유럽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결함이 주목되면서 기왕의 투표제도, 선거제도를 가지고는 진정한 민주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사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인식이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구에서 시작된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해온 우리들에게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저런 국지적 특성과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의제 정당정치의 문제,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련성 등의 문제는 세계의 보편적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 새로운 ‘민주주의혁명’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학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에서 시민의회가 제비뽑기를 통해서 멤버들을 구성했다는 것도 결국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일랜드의 경우에는 시민의회 멤버들의 일부는 일반시민들이 아니라 기성 정치가들로 충원했다는 점입니다. 모두 100명 중에서 3분의 2는 일반시민으로 구성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현직 정치가들로 구성한 것이죠. 이것은 기성 정치권, 기득권층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는 타협책으로 보입니다. 관습이란 사실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타협책은 그 나름으로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비례대표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꽤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저는 기왕의 대의제, 선거제도를 전면적으로 혁파하지 않고, 비례대표들이 더 많이 국회에 진출하는 것으로 결코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중간과정으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뚫고 가야 할 거대한 장벽들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례대표제 확대라는 한 가지 숙제라도 푼다면 그 자체 큰 성취일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정치의 근본원칙입니다. 즉, 민주주의란 대의제도, 다수결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시민들 자신에 의한 자주적 통치라는 대원칙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새로이 집약된 형태로서 시민 주도 개헌운동을 숙고해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에 부합하는 정치를 실제로 허용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장치들을 명시하는 헌법을 우리가 요구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헌의 주체가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부적인 문제는 그 다음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되풀이하지만, 정말로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들자면 이러한 대대적인 개헌운동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책이 아닐까 합니다. 하기는 “법을 만드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권위”(칼 슈미트)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권위’가 곧 현실의 권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민들 자신이 바로 ‘권위’라고 용기 있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 1항의 정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우리의 자세일 것입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이 글은 2014년 11월 2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당에서 녹색당·녹색전환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토론회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 개헌을 제대로 말하자’에서 행한 기조발제를 정리,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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