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8호 2014년 9-10월호  인쇄용  

 

  서평| 불안정 노동의 시대, 어떻게 대응할까

  김찬호

 가이 스탠딩 지음, 김태호 옮김
《프레카리아트 ― 새로운 위험한 계급》(박종철출판사, 2014년)

 

몇해 전 어느 신문에서 본 사진 한 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대기업의 노조 간부들이 회사 측과 임금협상을 하러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옆에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큰절을 하는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엄청난 죄를 지어 사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사를 읽어보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 간부들에게 노사 협상에서 자신들의 입장도 반영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상황은 너무 절박한데 공식적인 협상 창구가 없기에 대변을 간청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놀라운 것은 노조 간부들의 태도였다. 굳은 표정에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고, 엎드려 있는 동료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태연히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IMF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가 있다.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일한 범주로 포괄하기에는 존재조건이 너무 다른 것이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바우만이 말한 ‘액체근대’ 속에서 점점 많은 것들이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위치에 놓이고 있는 추세의 핵심적인 양상이다. 비정규직은 그야말로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보호막이 취약하다. 그 불안정한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precarious’(불안정한, 위태로운)와 ‘proletariat’(프롤레타리아계급)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말이 ‘프레카리아트(precariat)’다.

그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책이 2011년 출간되었고, 얼마 전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저자 가이 스탠딩은 경제학자로서 지난 30년 동안 국제노동기구에서 노동시장정책과 사회경제적 보장 프로그램 등의 분야에서 일했고,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의 창립회원으로서 세계 여러 나라에 기본소득을 확산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치열한 실천과정에서 분석한 실태를 관련 자료들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탐색해온 대안적인 방향을 정책과 경제시스템 그리고 사회적인 삶의 여러 차원에서 조망한다.

 

프레카리아트의 삶

프레카리아트는 어떤 존재인가? 조직 속에서 분명한 위치를 갖고 승진의 경로가 정해져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지니면서 계급의식과 의제를 가지고 정치세력화할 수 있다. 그 결과 근로조건이 많이 개선되었다. 그에 비해 비정규직은 고용 자체가 단기적이고 불안정하다. 여러가지 수당에서도 배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근로와 관련된 복지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많은 정규직이 출산휴가나 병가를 내고 비정규직이 그 빈자리를 (일시적으로) 대신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혜택이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리고 일정한 경력으로 축적되지 못하는 파편화된 일자리들을 전전하다 보면 자기의 일에 자부심과 정체성을 갖기가 어렵다.

프레카리아트는 지난 30년간 세계적으로 급증해서 많은 나라에서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데(한국은 특히 높아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나 된다고 이 책은 각별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지구화가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줄어들면서 초국적 기업들은 자본과 자원과 노동력과 정보 등을 광범위하게 조달하고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회사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되어 이익만 챙기고 튀어버리는 행태가 만연하는데(쌍용차가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피고용인에 대한 고용주의 책임의식이 희박해졌음을 반영한다. 설상가상으로 노동력이 과잉으로 공급되었다. 지구화 이전에는 노동시장에 10억의 노동자와 구직자가 있었는데, 2000년쯤 15억으로 증가했고 거기에 중국, 인도, 동구권이 합류하면서 15억이 추가되었다. 결과적으로 3배로 증가한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가치는 급격하게 하락할 수밖에 없다. 

프레카리아트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우선 여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프레카리아트의 증가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증가와 시간적으로 일치하는데, 유럽연합에서 2000년 이후 생긴 일자리의 4분의 3이 여성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그 윗세대 베이비부머에게 주어졌던 적절한 집값, 풍부한 일자리, 연금 등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비좁아지는 노동시장의 입구 앞에서 좌절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턴 사원이 늘어나는데, 저자는 많은 나라에서 확대되는 인턴제가 사실은 청년들을 프레카리아트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고급 노동력을 값싸게 조달하는 편법으로 악용되고, 임금과 기회에 하향압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에 합류하는 또다른 부류로 장애인과 장기 이주자 그리고 노인이 있다. 특히 급속한 고령화 속에서 노인이 빠르게 늘고 있는데, 오랜 기간 일에 지쳐 있다가 퇴직 후에는 쉬엄쉬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프레카리아트는 안성맞춤일 수 있다. 고용주들도 노인을 선호하는데, 각종 보조금을 받을 뿐 아니라 출산휴가, 자녀양육, 의료보험 등 기업 수당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암기력 같은 유동성 지능은 떨어져도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관 같은 결정성 지능에서 유리하다. 여러 직종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은 그런 능력을 키우기가 어렵다.

취업의 문이 좁아질수록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은 자꾸만 높아진다. 각종 자격증을 약속하는 교육상품들이 불안한 젊은이와 퇴직자들을 현혹하지만, 그 자격증들이 속 빈 강정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채용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점수를 따기 위해 경쟁을 하다 보면 챙겨야 할 것들의 목록이 한없이 늘어난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한국 청년들의 경우 특히 많다. 어학 점수, 교환학생, 관련 분야의 대회 수상경력 등의 스펙만이 아니다. 좋은 이미지로 어필하려면 고급 정장을 구입해야 하고, 증명사진을 정교하게 보정도 해야 한다. 성형수술이 대세가 되고, 목소리 교정도 종종 행해진다. 면접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고 마술을 배우는 젊은이들도 있다. 취업이 어려워질수록 그런 부대비용이 늘어난다.

그렇게 힘들게 준비해도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분이 불안정하기에 최대한 성과를 올리려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노동시간과 스트레스가 증가한다. 게다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속에서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애매해져, 퇴근 후에도 가정에서 또는 카페나 자동차에서 업무를 봐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도태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전문성을 잘 유지해야 하는데, 숙련기술이 많이 필요한 일일수록 기술 개선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 탈숙련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숙련기술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기에 자기 시간의 15%를 훈련에 투입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프레카리아트가 자신의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의 인생을 긴 안목에서 바라보면서 진로를 설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직업적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그것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가라고 할 수 있다, 여가는 단순히 남는 시간이 아니다)를 갖지 못한 채 시간을 탕진하기 일쑤다. 게다가 일터에서는 멀티태스킹이 요구되기에 두뇌에 정보 과부하가 걸리기 쉽다. 일상생활에서도 자기 나름의 테마나 목표의식 없이 ‘정보의 바다’에 표류할 때가 많다. 정보의 선별능력과 자제력이 부족한 이들이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결단력과 창의성을 발휘하기는 매우 어렵다. 프레카리아트의 증가가 디지털 매체의 보급과 비례한다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정치적 각성과 연대의 힘

이들의 삶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저자는 프레카리아트에게 경제적 보장, 시간, 양질의 공간, 지식, 금융자본이라는 다섯 가지 자산에 대한 접근 통로와 통제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보장이란 기존의 복지시스템을 통해서 이뤄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혜자가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근로연계복지는 안일한 의존성을 탈피하게 한다는 취지를 깔고 있지만, 그것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면 대상자들이 생산성 낮은 일자리들을 유지하느라 높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 억지로 하는 일에서는 근로 습관과 노동 몰입이 생겨나기 어렵고, 오히려 냉소와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된다.  

시간이 중요한 까닭은 자기 나름의 속도로 장기적인 자기개발을 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절한 여가도 즐길 수 있어야 범죄나 마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양질의 공간이란 사생활의 자율성을 말한다. 만성적인 사회경제적 불안에서 벗어나 교육과 사유를 통해 정보를 선별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 거기에는 일정한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을 때 적절한 조언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너무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 그러한 부조리를 개선하도록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금융자본의 확보와 병행되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기본소득을 이 책에서도 강력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기본소득은 일종의 불로소득이다. 그런데 투자에 따른 수익이나 상속재산도 엄연히 불로소득이고 당연시된다. 기본소득은 ‘사회배당’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부자들이 이룩한 부는 선조의 노고 그리고 자기보다 덜 부유한 사람들의 선조의 노고 덕분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혜택은 사회 전체가 골고루 나눠 가져야 마땅하다. 재원이 없다고? 금융위기 때 순전히 경영의 오류로 파산하게 된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했다. 그 절반 정도만 프레카리아트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교부금으로 집행했다면, 지금 경제 전체가 훨씬 더 건전해졌을 것이다.

저자는 소득의 재분배가 지구적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방법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위해 ‘시민자격세’를 내는 것이다. 선진국의 국민들이 누리는 부(富)는 그 개개인이 뛰어나거나 특별히 노력을 해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그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혜택들은 일종의 상속재산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이것이 시민자격세를 내세우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지원체계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프레카리아트의 사회적 위상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상호 존중의 소규모 집단 속에서 공감과 연대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삶의 의미와 안정성을 확보하고, 문화적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사회적 기억’을 생성해야 한다. 일에서 벗어난 자유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여 각자의 다양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충전하는 생활도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 정치적인 훈련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재 프레카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은 너무 미약하고, 노조도 그런 방향으로 개혁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어떻게 결사체를 만들 것인가? 저자는 협동조합을 제안한다. 비슷한 일들을 하는 이들이 조직과 직급과 정규/비정규 등의 경계를 넘어서 동등한 조합원으로 조직되는 방식인데, 여기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소득을 분배할 것인가 하는 난제를 풀어야 한다. 프레카리아트의 존재조건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더욱 거시적인 차원의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 모든 정책의 수립과 이행에서 투명한 원리가 적용되고 정책기관 내부에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사회에서 프레카리아트는 잉여 같은 존재다. 프리랜서나 프리터 같은 명칭에 담겨 있듯이 그들은 자유로운 존재지만, 자신의 일을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하거나 일의 양과 조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그 자유는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들은 인생의 방향을 뚜렷하게 잡지 못한 채 떠돌아다닌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어서 정치적인 선동에 휩쓸려 극단적 우익이나 좌익으로 기울 수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 시민으로서 공공의 친목과 교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다. 그러려면 사회의식이 형성되어야 하고 현실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것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저자는 기본소득 교부금을 주면서 투표를 반드시 하도록 요구한다든가, 정치문제를 토론하는 지역회합에 몇 차례 반드시 참석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을 제안한다. 많은 선거가 기권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에서 우선 프레카리아트의 투표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본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깨달아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일자리와 관련해서 불안정한 신분에 놓이는 사람이 지구상에 이렇게 많아진 것은 역사상 초유의 사태다. 자본의 힘이 점점 막강해지고, 국가는 그것을 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규제를 풀어 자본을 유치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유연화라는 미명하에 인간은 노동력이라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격하되고, 사회의 모든 리스크를 개인이 떠안아야 한다. 이런 흐름이 전세계적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면서,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위안을 얻어야 할까. 책의 몇 군데에서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여러가지 악조건이 압축되고 증폭되어 있는 듯하다.

이 책은 현상을 조감하고 분석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대안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구조의 힘이 거대해지는 반면 개인들은 왜소해지고 무력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방향은 분명하다.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에 눈을 뜨고 삶의 주체로 나서겠다는 결단을 해야 하고,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면서 정치적인 힘을 모아내야 한다. 그를 위해서 기존의 정치권과 사회운동 세력이 나서야 한다. 저자가 인용한 밀턴 프리드먼의 말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존 정책들에 대한 대안들을 개발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것들이 될 때까지 그 대안들이 살아있고 유효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김찬호  ―  성공회대 교수. 저서로 《사회를 보는 논리》, 《문화의 발견》, 《돈의 인문학》, 《모멸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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