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7호 2014년 7-8월호  인쇄용  

 

  소국사상의 흐름과 무위당의 생명사상

  김종철

세월호 참사, 사상의 빈곤

오늘 여기는 무위당 선생님 20주기를 기념하는 자리인데, 제가 여러분 앞에 서서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외람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모두 참 침통한 기분으로 지내는 나날입니다. 어찌 보면, 세월호 참사는 결국 우리가 역사적 과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역사적 과제라는 것은 결국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그동안 역사를 통해서 후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내외 조건들에 의해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의 전망도 시원하게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에 우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우리의 정신적인 혹은 사상적인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선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년에 갑오 2주갑을 맞이하여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명색이 지식인이라면서 제가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요즘 역사책을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 20주기가 마침 동학 2주갑에 해당되는 해인데, 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장 선생님의 사상의 뿌리는 해월 선생님이었죠. 끊임없는 내면적 수행, 만물에 대한 공경심, 이것을 바탕에 깔고 생명과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말씀하셨죠. 그런 점에서 장 선생님의 전생이 어쩌면 해월 선생님인지도 모르고, 해월 선생님의 부활하신 모습이 무위당 선생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역사를 찬찬히 돌이켜보면 굉장히 소중한 역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근현대사를 실패한 역사로 간주하지만, 그냥 단순히 실패했다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설혹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대단히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서 이 땅을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보려고 애써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위해서 분투해온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해월 선생의 부활한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좀 거창하지만, 무위당의 삶과 사상을 우리 근현대사 혹은 더 나아가 세계사적 문맥 속에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각도에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아까 박맹수 선생 말씀으로는 동학농민전쟁에서 30만 명이 희생당했다고 했죠. 그리고 당시 인구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이 농민군으로 실제로 전쟁에 참가했다고요. 사실 동학농민전쟁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난 농민반란하고도 성격이 많이 다르죠. 우리나라에서도 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민란과 비교해볼 때도 질적으로 아주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동학농민전쟁은 사상적으로 굉장히 무장이 잘된 민중반란이었습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해월 선생께서 지하로 잠행하면서 끊임없이 민중을 가르치는 동안 형성된 정신적 토양, 거기에서 자란 나무가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봉준 선생의 사상과 해월 선생의 사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에 입도하기 이전이든 이후든 기본적으로 유생이었고, 유생으로서의 자각과 강한 긍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학을 창시하신 수운 최제우 선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운 선생은 조선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오래된 왕조국가, 즉 확고한 민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정치체제 속에서 숙성된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사상을 일궈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글 읽는 선비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정치를 한다고 하는, 세계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문민통치의 전통 속에서 면면하게 지속되었던 덕치(德治)의 이상과 민본주의 사상이야말로 동학사상의 모태라는 것이죠. 우리는 흔히 동학의 혁신적 면모를 중시하여 그것이 마치 유학 전통과 단절된 것처럼 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유교정치의 이념과 동학사상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유교정치의 이상과 동학사상

우리는 흔히 조선왕조가 망하여 식민지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그 정신적·문화적 유산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오래 지속된 왕조라고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50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흔한 예는 아니죠. 물론 임진왜란 이후에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지고 특히 정조대왕 사후에는 외척들의 발호 때문에 매관매직의 성행, 삼정문란 등 나라 전체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단순한 민란 수준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엄청난 사상적 민중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유교국가에 잠재되어 있던 실력, 사상적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로지 수운, 해월 선생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물론 조선의 많은 정통적 유학자들이 동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심지어 적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매천야록》을 쓴 황현 선생도 그러했고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태훈 선생 같은 분도 그러했습니다. 심지어 안태훈 선생은 황해도에서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직접 전투대를 조직하여 싸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5세 소년으로서 자기 부친이 이끄는 동학 토벌대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동학군의 입장에서 보면 적이죠.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분들은 유교국가의 선비로서 백성들이 죽창을 들고 나오는 것을 결코 찬성할 수는 없었지만, 무조건 그들을 적대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 시절의 김구 선생이 황해도에서 동학군에 가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학군들이 나중에 쫓기게 되었을 때 청년 김구(김창수)가 어디에 피신을 했느냐 하면 바로 안태훈 선생 댁이었습니다. 안태훈 선생은 바로 어제까지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투를 지휘했지만, 동학군 진압이 끝난 상황에서는 도리어 동학에 가담했던 젊은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왜? 그들의 애국심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를 어디선가 읽고, 조선의 유학자들이 비록 일부였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깊고 유연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이 경탄스러웠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조선왕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제 식민사학이 심어준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조선왕조가 굉장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다, 권력이 오로지 중앙에 집중돼 있는 국가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방에는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들이 많았고, 이들 중 유교의 정치이념에 충실하려고 한 선비들이 많았습니다. 이른바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고 하는 선비들이죠.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런 선비들이 향청이나 향교 등등 준(準)제도적인 조직을 통해서 지방 수령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충고를 하고 간섭을 했습니다. 중앙정부로부터 임명을 받아 부임해 온 수령들은 어차피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현지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할 수도 있죠. 그러면 그때마다 지방 선비들은 여론을 모아서 수령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지방 선비들도 조선조 후기에는 많이 타락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생으로서의 소명감을 갖고 살았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즉 유생이란 오로지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소명감 말입니다. 문제는, 유교국가의 근본적인 한계, 즉 민중 자신이 스스로를 다스릴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데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죠.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본주의죠. 그러나 지금의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보다는 그 민본주의가 오히려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사림파 선비들은 기본적으로 맹자 이래의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본 입장은 백성의 삶을 파괴하는 폭군이라면 추방해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맹자는 포악한 통치자는 군주가 아니라 불한당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마땅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맹자의 이 생각을 조선의 선비들이 반드시 따른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에게 적어도 이념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백성의 삶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전통이 오래 계속됐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동학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인 움직임도 결국은 이러한 유교적 민본주의 정치이념과 절대로 분리해서 볼 수 없는 것이죠.

권력을 잡은 부패한 지배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서 밑으로부터의 민중의 요구를 압살해버렸습니다. 막강한 물리력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 거죠. 죽창 정도 가지고 어떻게 현대식 무기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전봉준 장군도 아마 자기 쪽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다음 두 달에 걸쳐서 심문을 받습니다. 그게 ‘전봉준 공초(供草)’라는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심문관은 당시의 사법관리와 일본 영사, 이렇게 두 사람이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공초를 읽어보면, 심문관들의 주된 관심은 동학군 봉기에 대원군이 어느 정도까지 개입했느냐는 것을 캐내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심문하는 도중에 심문자들이 전봉준 선생의 고결한 인격에 크게 감화를 받습니다. 그래서 심문이 끝나고 재판으로 들어갈 때 일본 영사가 본국 정부에 상신(上申)을 합니다. 이 사람 죽여서는 안됩니다, 굉장히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조선의 사법관리도 무척 애통해합니다. 당시 개화파 독재정권이 방침을 미리 정했기 때문에 결국 사형언도를 내리지만 몹시 아까워합니다. 재판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당시 심문관이었던 사법관리 장박이라는 이와 전봉준 장군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고 합니다. “할 말이 없느냐?” 전봉준 선생이 “내가 죽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분한 것은 내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는 것이다” 그러자, 그 장박이라는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누가 당신을 역적이라 하더냐? 당신 역적 아니다. 당신의 충군애국 정신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오늘날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검찰과는 그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다르죠.

이런 전통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 그 자체도 세계사적으로 참으로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중세 후기 유럽 농민전쟁이나 민중반란 같은 걸 보면 대개 평등까지는 이야기를 해요. 대개 그 맥은 기독교 사상의 급진적인 흐름에서 나오는 것이죠. 인간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형상을 받아서 태어났다, 그러니 당연히 누구나 평등하다,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물레질을 할 때 양반 상놈이 어디 있었느냐, 그런 논리죠. 그러나 아무리 급진 사상이라 하더라도 동학사상이 보여주는 그런 심오한 수준, 궁극적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경우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동학운동의 탁월성

조선시대 말기에 민중사회에 만연했던 것은 구세신앙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정감록 신앙, 즉 언젠가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세상을 구제할 것이라는 신앙이었죠. 그 신앙은 숱한 민란의 배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학사상의 특징은 진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진인이고, 구세주라는 것이죠. 철저한 내면적 수양을 거쳐, 만물을 공경하고, 하늘을 섬기고, 물건을 아끼고 이웃을 보살필 줄 알면 누구나 자기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탁월한 민중사상이죠. 이 진실로 래디컬한 사상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죠.

물론 이런 탁월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당시 상황으로 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물밀 듯 쳐들어오는 서양 제국주의의 물리적 힘 앞에서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결국 사회진화론을 수용했습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것은 세계사의 항거할 수 없는 법칙이고 진리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사회진화론자였습니다. 박은식 선생도 그랬고요. 이런 이론에 입각하면, 사람이 버틴다는 게 힘듭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식자들은 친일파가 되거나 상황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남는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은 실력에 의한 국권회복이라는 당시로서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면서도 절대로 굴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조선을 탈출해서 중국으로 갑니다. 중국에서 풍찬노숙의 험난한 생활을 견디며 그 열악한 여건에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다가 결국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순사하셨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생각이 많이 바뀝니다. 사회진화론이라든지 약육강식이라든지, 이것은 지금 현실적으로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논리는 되겠지만 이걸 우리까지 수용하면 우리가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서 투쟁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를 마련할 수 없죠. 그래서 포기합니다. 그래서 민중적 민족주의라고 해야 할 노선을 견지하면서 국제주의적 시야를 잃지 않는 방향으로 사상적 방향을 재정립하면서 나중에는 아나키즘에 경도됩니다. 신채호 선생이 감옥에서 돌아가신 뒤 발견된 몇 가지 안되는 유품 가운데 특기할 것은 크로포트킨의 책이 들어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나키즘 사상, 그중에서도 민중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의한 협동적 자립생활을 강조한 크로포트킨식의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돼 있었다는 얘기죠.

 

경제성장 시대를 통한 망각

여기서 한번 돌이켜보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결국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이했지만 곧 분단되고, 전쟁 터지고, 휴전 후에는 이승만 독재정권 밑에서 신음하다가 4·19라는 빛나는 순간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1년 만에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짓밟혀버렸습니다. 그 뒤 근 30년 동안 군사독재 시대가 계속되다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비로소 120년 전 동학농민군이 제시했던 역사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열렸다고 할 수 있죠. 즉, 우리가 어느 정도 자주적으로 민중이 주체가 되는 인간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죠. 그리하여 명색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두 차례의 민주정부가 들어섰죠. 그리고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획기적 조치도 나왔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또다시 구한말 이래의 뿌리 깊은 반민족, 반민중적 특권세력의 계승자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현실로 퇴행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현대사란, 거칠게 그려보면, 대략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변수는 자본주의 근대라는 논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 시기에서부터 근대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소위 근대적 제도와 문물이 어느 정도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식민지 시대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식민지 시대는 소위 경제성장이라는 개념이 시작된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경제성장이라는 척도 하나를 가지고 마치 식민지 시대를 통해서 조선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발전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원래 조선의 민중사회는 경제성장이라는 근대적 개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던 자족적 농경사회였습니다. 삶의 방식, 무엇이 옳고 좋은가를 재는 가치척도 자체가 자본주의 근대사회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세계였던 거죠. 이렇게 전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삶을 ‘경제성장’이라는 근대적 잣대를 가지고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난센스 중의 난센스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서 조선에 근대 자본주의 제도와 문물이 도입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게 우리나라가 더 좋은 사회가 되었다거나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었다거나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질적으로 다른 삶의 상황이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전개되기 시작했을 뿐이죠. 오히려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의 도입과 더불어 삶은 더 혹독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실체적 진실입니다.

하여튼 조선사회도 비록 식민지 상황이지만 자본주의 근대의 세례를 입게 되고, ‘경제성장’으로 인해 근대적 물질문명의 영향을 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경제성장 체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이제는 전근대적 질곡과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 혹은 환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기대와 환상이 지속되는 동안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진정한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민중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 되고, 자치와 협동을 토대로 한 인간다운 사회를 만든다는 역사적 과제 말입니다. 그 역사적 과제가 이미 120년 전에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 동학농민군에 의해서 제시됐는데도, 우리는 그동안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이죠. 그 망각의 필연적인 결과가 이번 세월호 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분명한 것은 이제 경제성장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기본적으로 화석연료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원자력도 따지고 보면 화석연료 에너지죠. 석유가 없으면 원전을 건설할 수도, 유지할 수도, 폐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미 70년대 초에 1차 석유쇼크가 발생했을 때부터 온 세계적으로 석유문명은 끝난다는 게 명확히 예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세계의 주류 정치,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엉뚱하게 금융화, 즉 돈이 돈을 버는 카지노 도박 경제 쪽으로 세계경제를 끌고 감으로써 30년 이상 버텨왔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뉴욕에서 시작된 금융 붕괴 사태로 인해 이것도 수명이 다했다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면 깨달아야 합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에너지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전혀 다른 문명을 구상하고 그쪽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좌파, 우파의 구별도 없습니다. 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좌파도 이 사실을 냉정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서 조금 더 합리적인 정치를 한다면 상황이 약간은 개선될 수 있겠죠.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종전 방식으로는 더 갈 수가 없습니다.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문명을 조속히 탈피하지 못한다면 전면적인 환경파괴,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인류는 결국 절멸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도 시골에서 오신 분한테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지금 꿀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꽃이 피어나는 신록의 계절인데도 벌을 보기가 어려워요. 도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시골에서도 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기가 막힐 일이죠. 그냥 심각하다고 말하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젭니다. 무조건 성장만 하면 된다고 끝없이 생명과 자연의 논리를 무시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꿀벌 없는 세상은 생태계의 총체적인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계속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방향전환을 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결국 사상적 빈곤 탓입니다. 저는 우리 역사를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돌아보면 해답을 발견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소국사상, 생명사상의 오래된 뿌리

저는 그동안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협동운동 혹은 생명운동이 그냥 서양에서의 사회적 실험을 모방한 게 아니라 어디서나 자본주의 근대체제 속에서 시련을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대안적 구상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도 어쨌든 사람들이 살아온 땅인데 여기서는 그런 운동의 오래된 사상적 뿌리와 흐름이 없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우리 근현대사를 겉핥기식으로나마 읽다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책은 일본 책인데, 이 책(?境を貫く歷史認識》, 2002)에 실린 논문 중에 〈근대 조선의 소국사상〉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조경달이라는 재일조선인 역사학자입니다.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쳤어요.

실은 일본에서는 소국주의를 지향하는 일련의 사상적 계보가 있다는 것은 저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직후부터 서양의 강대국을 모델로 나라를 발전시킬 것이 아니라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등 작은 나라들을 모델로 삼아서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비주류지만 그런 흐름이 계속 이어져왔죠. 그중에서도 유명한 사상가는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이라는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전후에 잠깐 총리까지 되었던 사람이죠. 이 사람은 1920년대에 〈동양경제신보〉라는 신문의 주필이었는데, 일본이 진정으로 살려면 대만, 조선과 같은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논설을 게재합니다. 지금 세계 열강들이 다 제국주의 세력화해서 식민지를 거느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무리한 짓을 하고 있다, 국제법도 어기고 세계를 위험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 세계전쟁밖에 없는데, 이 상황에서 일본이 식민지를 포기하고 평화국가 노선으로 간다면 세계인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오히려 큰 도덕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개 그런 요지의 논설을 되풀이해서 썼습니다. 그는 일본이 식민지를 포기하면 서양 사람들도 몰염치한 짓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세계가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비현실적인 논리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대단히 실용주의적인 생각이기도 하죠. 군국주의 노선으로 폭주해가면 결국은 전멸할 게 분명한데, 그것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국주의적 야심을 버리는 게 현실적으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일본에서는 사상적으로 그런 일련의 흐름이 존재해왔고, 그것은 실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전후 평화헌법도 결국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물론 군대의 보유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전후 헌법은 맥아더 사령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어떤 연구자들에 의하면 원래 전쟁 직후에 일본의 일부 리버럴한 헌법 학자들이 만든 독립적인 헌법 초안이 있었고, 맥아더 사령부는 그것을 중요한 자료로 참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쨌든 그 헌법 초안을 작성한 일본 학자들은 ‘소국주의’ 사상의 계승자로 볼 수 있는 거죠. 하여튼 이런 사상의 흐름이 있는데, 다만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고, 한국의 언론이나 학자들이 그런 일본의 비주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몰랐던 거죠.

그럼 조선은 어땠는가. 식민지 상황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정치적 발언은 근본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사실 현실화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고 따라서 리얼리티가 없죠. 그런 점에서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왔던 우리 선배들을 생각하면 몹시 비감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이라는 것은, 아무리 가혹한 상황에서라도 열심히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독립을 할 것인가, 독립한 뒤에는 어떤 국가 모델을 채택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를 인간다운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토론해야 하는 게 지식인의 임무입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그런 면면한 전통이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유교전통에서 선비들, 글 읽는 사족에게는 나라 일을 생각하는 게 그들의 존재 이유 자체였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조경달 교수가 쓴 이 글을 읽어보면 비록 식민지 치하였지만, 조선 근대사회에서도 이 소국주의 사상이 전승되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꿈꾼 세상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120년 전에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전봉준 선생이나 동학 지도자들 혹은 많은 농민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물론 그때는 다급한 상황이니까 우선 외국 침략세력을 막아내고, 국내의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을 척결해야 한다는 게 우선적인 목표였겠죠. 사실 한일합방이 되기 훨씬 전에도 일본인들은 조선의 백성을 수탈하고, 조선에서 쌀을 많이 강탈해가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조선 지배층에 의한 가혹한 수탈 때문에만 고통받은 게 아니고, 1876년의 강화수호통상조약 이후에 소위 미곡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수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전라도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닙니다. 곡창이기 때문에 더 많이 착취를 당했던 거죠. 농민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자신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통절히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학농민군은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서, 힘에 대해서 힘으로라는 논리로 궐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세계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무엇보다 그 사상적인 탁월함 때문이라고 아까 말씀드렸죠. 동학농민군의 목표는 요컨대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동학군이 내세운 기치, 즉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왜양(斥倭洋), 유무상자(有無相資) 등, 핵심 구호를 들여다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국안민의 ‘국(國)’ 자가 뜻하는 것은 고종 임금도, 국가 위계질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백성들이 살림살이를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사는 땅이에요. 그 땅을 떠나면 갈 데가 없는 삶터 그것입니다. 척왜양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특정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약자를 희생시키려는 비인간적인 논리, 그 폭력적인 세력에 대한 항거를 뜻하는 거죠. 그러니까 평등과 공생의 원리가 살아있는 세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개념, 즉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서로 도와서 살아야 한다는 상호부조의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유무상자라는 것은 동학의 가르침 이전에 전통사회를 통해서 면면히 전승돼온 오래된 농민의 인생관, 세계관입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같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이것은 고대 이래 국가가 생기기 이전부터 풀뿌리 민중사회 속에 집요하게 흘러온 전형적인 농민적 사고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를 통해서 전승돼온 ‘소국사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농민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국사상이라는 것은 패권을 누리고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게 아니고, 남들과 더불어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겠다는 사상입니다. 유교적 정치이념도 따지고 보면 원래 이 농민적 세계관에서 움튼 것이 확실합니다. 조선의 유교정치의 이상도 패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왕도였습니다. 유교적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동학운동 이래 우리나라의 지혜로운 사상가들의 이상도 대개는 그랬습니다. 패권을 추구한다거나 부국강병 노선을 지향한다는 것은 조선의 사상 전통에서는 예외였습니다. 오히려 친일파들, 그리고 친일파를 혈통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계승한 이 나라 주류 지배층이 부국강병이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왔을 뿐입니다.

스스로 내면적인 수양을 통해서, 외적의 침입을 방비할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만 가지면 되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내적인 충실이다. 이게 원래 조선의 정통적인 정치사상이었습니다. 절대로 부국강병 노선이 아니죠. 부국강병이라는 건 식민지 시대를 경험하면서 조선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진 잘못된 사상입니다. 말하자면 부국강병이라는 논리는 일제 식민지 잔재의 하나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우리의 정신적 습관 속에는 일제의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지만, 그중에 제일 타기해야 할 게 강자숭배주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자숭배주의와 결부해서 꼭 짚어야 할 또하나의 중요한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하극상(下剋上)이라는 개념, 용어입니다. 하극상이라는 것은 원래 조선사회에는 없었던 개념이죠. 일본에서는 800년 동안 칼잡이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아랫사람의 옳은 이야기도 높은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가차 없이 처형 혹은 처벌하는 관행이 굳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가장 무거운 죄가 하극상이었죠. 그런데 조선은, 옛날 사료나 통속적인 사극을 보더라도, 임금 노릇하기가 정말 어려운 나라였습니다. 신하들이 날마다 임금에게 정치의 도리를 가르치는 경연(經筵)이라는 제도가 있었고, 임금의 잘잘못을 그때그때마다 날카롭게 따지고 지적하는 상소문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하극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었죠. 그래서 저는 ‘소국사상’이라는 것도 일본보다도 본시 조선의 전통에 더 어울리는 사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재홍과 김구의 자강(自强)사상

조경달 교수는 우리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소국사상가로 두 분을 꼽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그리고 민세 안재홍 선생. 안재홍 선생은 해방 후 군정기에 민정장관을 하신 분인데,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조선일보〉가 사실상 신간회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맡고 계셨죠. 신간회라는 것은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체로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시도하던 대표적인 지식인 단체였죠. 안재홍 선생은 그 신간회를 주도하셨던 분이죠. 저는 안재홍 선생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는데, 이번에 조경달 교수의 글을 읽고 찾아보니까 재미있는 글을 많이 쓰셨더군요. 이분은 기본적으로 농본주의자입니다. 물론 당시 농민이 전체 인구의 8할을 점하는 나라였으니 농본주의는 아주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실은 그 당시에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대부분의 지식인은 공업입국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재홍 선생은 원래 조선의 길(조선도)은 농민의 길(농민도)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경공업과 전통적인 산업을 부활시켜야 하고, 기본적으로 상부상조하면서 또 동시에 상호 견제하면서 살아가는 공생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제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덴마크에 대해서 안재홍 선생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최근 몇년 동안 여기저기서 덴마크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안재홍 선생이 이미 일제 때 덴마크 이야기를 하신 걸 보니 굉장히 반가웠어요. 덴마크란 나라는 150년 전에 독일과 전쟁을 한 뒤 완전히 패망했지만, 농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협동조합운동과 ‘폴케호이스콜레’라고 하는 성인교육기관을 통한 광범위한 국민교육운동을 통해서 일어선 나라죠. 지금도 덴마크는 자립정신을 으뜸으로 여기는 나라라고 합니다. 강인한 자주성, 자립심을 지닌 시민을 육성한다는 게 덴마크 교육의 주안점이라고도 합니다. 국민체조라는 것도 원래 덴마크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전파되었죠. 안재홍 선생도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덴마크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크고 강한 나라가 되어 다른 나라에게 위압적인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적 충실을 기하면서 알뜰하게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국주의 사상가였던 것이죠.

민세 안재홍 선생은 시대가 시대니만큼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민족주의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신간회가 해산되고 나서는 사회주의자들과 결별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 해방 전에도 그랬지만,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잠시 몸을 담았는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를 못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좌우합작이라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기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끝내 남북에서 각각 단독 정부가 세워졌고, 그 후 전쟁 중에 선생은 납북되셨는데, 지금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누워 계시다고 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 중 큰 비극이 뭐냐 하면, 좌파, 우파로 극명하게 분열되어서 좌파 쪽 사람들은 좌파 사상가들만 부각시키고, 우파는 우파 쪽 인물들만 편향적으로 부각시키는 바람에 중도 내지 통일 노선을 지향한 사상가들은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저도 여태까지 민세 안재홍 선생 같은 분을 잘 몰랐는데, 물론 저 자신의 나태함도 원인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이데올로기 편향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던 탓이죠.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도 민족주의자이고 우익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념적 통합을 지향한 사상가였고, ‘소국’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우익 사상가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말미에 쓰신 유명한 〈나의 소원〉 다 아시죠? 조경달 교수는 김구 선생의 이 〈나의 소원〉에 대하여 굉장히 크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것이 전형적인 소국사상의 표출이라고 해석합니다.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은 단순히 한 애국자가 즉흥적으로 기분 나서 쓴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것이다” 라는 게 김구 선생의 첫번째 소원입니다. 김구 선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나라이지 결코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조경달 교수는 김구 선생의 이 입장이야말로 유교국가의 오래된 이념인 자강(自强)사상을 훌륭하게 계승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강’이란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어디까지나 내적 충실을 중시하는 개념이라는 것이죠.

김구 선생의 두 번째 소원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문화적 국가’는 물질만능의 근대문명, 생산력 제일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현재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자연과학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연과학은 현재의 수준으로 충분하다는 거죠. 대단히 과감한 발언이죠. 물론 이런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철저한 ‘소국주의’에 대한 신념 없이는 안되는 발언이죠. 김구 선생은 지금 인류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의(仁義), 자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를 쌓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국가의 건설은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의 축적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하여 김구 선생은 세 번째 소원으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는 상태”를 들고 있습니다. 조경달 교수에 의하면, 일찍이 실학파 이후 조선에서는 “인민의 총 선비(士)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이 계속돼왔는데, 김구 선생의 “모든 사람의 성인화”라는 아이디어는 이 흐름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동학사상에서도 “모든 인민의 진인화(眞人化)”가 핵심이었죠. 이 점에서 젊었을 적에 백범 선생 자신이 동학도였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설프게나마 살펴봤습니다만, 어쨌든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무위당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자리매김해보고, 또 지금 중요한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대두되고 있는 다양한 협동운동들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생명사상도, 오늘의 협동운동들도 결코 평지돌출적으로 출현한 게 아님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나카 쇼조와 참된 ‘문명’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사상적 빈곤을 벗어나는 것은 결국 세계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시대가 완전히 전환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 전환기는, 예전처럼 고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이행기 정도가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더 근원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전환기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전환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슬기롭게 전환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는 절멸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합니다. 6,500만 년 전에 공룡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멸한 것은 소행성 때문이라고 하죠. 지금은 온 세계에 만연한 자본주의 근대문명, 부국강병 지향 국가논리, 경제성장 논리 자체가 바로 ‘소행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절체절명의 전환기에 아마도 가장 시급한 것은 도대체 ‘문명’이란 게 무엇인지, 깊이 숙고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자료가 있어서 이것을 소개하고 오늘 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서양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물밀 듯 쳐들어오면서 멀쩡한 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하고, 우리도 일제의 침략을 받아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제국주의자, 식민지 지배자들이 내걸었던 명분이 뭡니까? ‘문명화’의 논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 통감에 부임하면서 내걸었던 명분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이토 자신이 진심으로 믿었던 명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의식중에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의 논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토의 평전을 읽어보면, 그는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정치에서 군대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민통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어쨌든 그 이토는 조선의 ‘문명화’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물론 그게 허위의식일 수는 있지만, 하여튼 침략의 명분은 문명화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지식인들도 그 명분 앞에서는 항거하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이 문명화의 논리는 일본만이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 국가가 공통적으로 표방한 논리입니다. 맑스도 그랬습니다.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지배가 없다면 인도가 자기 힘으로 문명화를 성취시킬 능력이 없다고 지적하며, 식민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학농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바로 그 무렵, 일본에서는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라는 한 정치가, 사상가에 의해서 격렬한 ‘반문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 다나카 쇼조라는 분도 원래 글 읽는 유학자 가계 출신입니다. 청년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해서 지방 관헌의 부조리한 행정에 항의를 하다가 감옥살이를 몇 차례 했던 사람인데, 그런 경험을 통해서 국가와 민중의 관계 혹은 근대문명의 모순 등등에 대하여 남다른 성찰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는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근대적인 산업국가, 군사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고 공장을 세우고 하는 바람에 숱한 사회적 마찰과 갈등, 환경문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시오(足尾) 광독사건이라는 거죠. 일본 도치기(?木)현 아시오라는 지역에 구리(銅)광산이 있었습니다. 구리는 근대적 산업이나 무기생산에 불가결한 금속이라고 하죠. 그래서 옛날부터 있었던 광산이지만, 그 무렵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리라는 게 워낙 독성이 강합니다. 광산에서 구리 원광을 캐내 거기에서 정련을 합니다. 그러면 증기와 물을 통해서 아랫마을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농작물이 말라 죽고, 가축들이 괴질로 쓰러지는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홍수가 나면 그 물이 둑을 넘쳐서 논밭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고. 거기서 키운 작물을 먹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게 된 거죠. 이것을 아시오 광독사건이라고 합니다.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 공해 사건입니다. 근대라는 것은 바로 공해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다나카 쇼조라는 분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애를 다 바칩니다. 몇십 년 동안에 걸쳐서요. 순전히 이 문제 때문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자마자 매일같이 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집니다. 일본 헌법이 천황 주권을 명시한 나라이지만, 천황이 사랑하는 인민의 생명과 삶을 파괴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논리로 매섭게 따집니다. 정부가 굉장히 성가셔 합니다. 근대적 산업화와 군비 증강에 몰두하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는 다나카 쇼조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나카 쇼조는 도쿄시내로 외출 중인 천황 앞으로 달려가 직소를 결행합니다. 아까 하극상 이야기를 했지만, 일본에서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천황에게 직소를 하면 사형을 당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각오를 하고, 유서까지 써놓고, 천황에게 직소를 한 거죠. 결국 천황의 특명으로 사형은 면했고, 덕분에 아시오 광독문제는 전국적으로 부각되었죠. 일본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광산 하류에 큰 유수지를 만들어서 광산에서 흘러내리는 독성물질을 거기에 정체시키기로 조치를 강구합니다. 하지만 유수지를 만들려면 또 몇 개 마을이 수몰됩니다. 마을이란 백성이 장구한 세월 동안 일구고 살아온 터전인데, 이것을 없애려고 한다는 것은 결국은 국가의 안중에는 백성의 삶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냐면서 항의를 계속합니다. 그러면서 국가를 위해서 백성을 죽이는 게 ‘문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문명을 가장한 조직적 대량 학살이라고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농민들의 위험에 처한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작한 운동이 어느새 근대국가, 근대문명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묻는 반근대주의 사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나카 쇼조는 자신의 거처를 그 수몰 예정지 마을로 옮겨서, 마을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몇몇 마을사람들과 버티다가 결국 지병으로 거기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분이야말로 근대 동아시아의 근본 모순을 온몸으로 드러낸 최대의 의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그 다나카라는 분이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동학농민군의 군율(軍律)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대규모로 군사행동을 하자면 군율이 있게 마련인데,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정한 군율의 일관된 원칙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절대 생명을 해치지 말라, 군사행동 중 민폐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말라, 효자와 열녀가 사는 마을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 숙영을 해야 한다 등등. 이런 군율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듣고 다나카 쇼조는 이 군율이야말로 참으로 ‘문명적’이라고 감탄했다는 겁니다. 일기인지 편지인지 그가 적은 기록에 이 발언이 남아있다고 합니다(어느 일본 학자의 책을 보니, 이 기록을 찾아낸 분이 바로 박맹수 교수라고 하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같은 시대임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말한 ‘문명’과 다나카 쇼조의 ‘문명’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명이라는 말은 같지만, 그 뜻은 판이합니다. 다나카 쇼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천의 수명, 즉 자연의 생명은 영원하고 인간의 생명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순의 생명에 불과한 인간이 자연을 상하게 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물론 다나카 쇼조도 예컨대 이토 히로부미의 문명관이 당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겠죠. 그러니까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의 삶을 희생시키는 시스템이 문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그는 그것은 본래적인 의미의 문명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다나카 쇼조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근대적 국가시스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근원적 삶터, 즉 ‘마을’입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마을은 몇천 년, 적어도 몇백 년에 걸쳐서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구축되어온 터전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을 위해 싸워야지 일순간의 생명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명관’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밝혔습니다. “지금 세계 인류 대다수는 기계문명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있다. 문명은 인간을 집어삼키는 악의 도구가 되었다. 산을 황폐케 하지 않고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인간을 죽이지 않는 것이 참된 문명이다.” 또한 그는 민중과 지식인 혹은 권력엘리트의 근본적 차이를 이렇게 드러냅니다. “오호라, 인민은 어리석게도 정직해서 항상 백 년의 대계를 생각하는데, 관리, 특히 상층 엘리트 관리들은 백 년은커녕 1년의 계획도 없이 일시일각의 욕심뿐이다. 무학(無學)의 토민 노동자는 일시적 유한의 이익을 위해서 영원의 토지를 못쓰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최근 다나카 쇼조를 재발견하여, 생태주의 사상의 선구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구적인 생태사상가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나카 쇼조는 일본이 근대 초기에 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광분하던 시기에 이미, 동아시아 혹은 세계 전체에 닥쳐올 불길한 어둠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고, 나아가서 우리가 진실로 추구해야 할 문명이 어떤 문명인지 가장 명쾌하게 밝혀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론 앞으로 한동안 국민이나 민족 개념을 완전히 떠나서 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안재홍 선생이나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민족주의는 늘 세계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주의로는 절대로 희망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국사상가’들은 벌써 오래전에 국제적 민족주의 혹은 민족적 국제주의를 제창하셨지만, 세계로 열려진 이런 사상이야말로 활인의 사상, 생명사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무위당 선생님을 생명사상의 스승으로 기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이 생명사상을 토대로 전국 각지에서 국가와 자본의 틀을 벗어나 자립과 공생의 삶을 실현하려는 노력들이 많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희망의 표지이면서도 한편 생각하면 그만큼 상황이 다급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사상의 뜻을 깊게 새기고 그것을 실속 있게 발전시켜 나가려면, 국내외 생명사상의 선각자들에게서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이 위기의 시대에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상적 빈곤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상적 빈곤을 벗어나는 확실한 길은 우리가 선인들의 발자취를 깊이 음미하는 가운데서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종철 ― 본지 발행인. 이 글은 2014년 5월 16일 조계사 전통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무위당 20주기 기념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의 녹취기록을 보완, 가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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