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6호 2014년 5-6월호  인쇄용  

 

  깊이 사랑하는 것은 닮아가는 과정이다

  김선미

봄이 오면 봉산동에 있는 그 집 마당이 궁금하다. 남녘의 꽃소식이 치악산 아래 봉천변까지 다다르는 데 얼마나 걸릴까. 원주의 봄은 치악산 비로봉이 겨우내 덮어쓰고 있던 눈 모자를 벗어낸 뒤에나 온다는데…. 아침마다 산마루를 넘어오는 햇살이 무위당 선생님 댁 마당 안에는 얼마나 깊어졌을까.
내가 그 마당을 드나든 지 올해로 7년째 되었다. 1994년에 돌아가신 선생을 생전에 뵌 적도 없고, 무위당을 스승으로 모시는 또다른 어른들과도 무슨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엉겁결에 무위당 선생에 대한 어린이책을 쓰게 돼 영광스럽기는 했지만 상당한 중압감 때문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우리교육’에서 기획한 ‘우리 인물 이야기’는 ‘평생 한 가지 일과 뜻에 매달린 우리시대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거미, 새, 옥수수, 물고기 박사도 있고 사진작가나 춤꾼, 작곡가, 기업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거기에 등장했다. 누구든 이름을 대면 무슨 일을 한 인물인지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으신 분”이라니! 대체 이 뜬구름 같은 화두를 잡고서 어떻게 아이들 앞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야 할까. 나는 무위당이라는 말을 한참 들여다보아야 했다.

 

봉천 건너 치악산 큰 그늘 아래 무위당 길

2007년 처음 원주 땅을 밟았다. 원주는 가는 곳마다 치악산이 보여서 좋았다. 산이 가로막혀 답답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치악산 아래 사람의 마을은 안온해 보였다. 치악산을 처음 만난 것은 20대의 겨울, 꽁꽁 언 손과 발로 그 산 정수리를 밟아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산을 오를 때였다. 높이 오르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산이 보일 리 없었다. 산마루에서 내려와 멀리 떨어져야만 산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을 깨우치기 힘들던 나이이기도 했다. 우스개 말 그대로 ‘치를 떨며 악에 받쳐’ 오르던 기억만 남은 치악산을 오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니 푸근하게 느낀 것일까. 아니면 평생 그 산자락의 은덕 아래 살아온 선생이 어머니의 달 같은 산, ‘모월산’이라 부르고 싶다 했던 말 때문이었을까.
“뭐 하는 게 없는데 다 하거든. 그게 위무위(爲無爲)라. 산이 아무것도 안하잖아? 그렇지만 다 하잖는가?”1)1)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101쪽선생은 생전에 이현주 목사와 나눈 《노자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원주시 중앙동 시장 한가운데 있는 밝음신협 건물에 둥지를 튼 (사)무위당사람들 사무실에서 나와 쌍다리를 밟아 봉천을 건너면 바로 봉산동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원주초등학교는 설립 당시 무위당 선생의 집안에서 땅을 내놓은 곳이고, 조금 더 걷다보면 3년간 무고한 옥살이 끝에 나온 선생을 평생 감시하던 봉산파출소가 있고, 곧이어 ‘무위당길’이라는 도로명 표지판이 나타난다. 무위당길 안쪽에 있는 선생의 집에는 부인 이인숙 여사가 서울에서 시집온 날부터 지금껏 반백년이 넘게 붙박이로 살고 있다. 예전엔 한 마당을 쓰던 선생의 아우 장화순 교장선생의 집 사이로는 ‘봉천길’이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지난다.
그 길을 무던히도 오가며 무위당 선생의 식구와 제자들을 만나는 일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가을에 처음 밟은 마당에 겨우내 눈이 쌓였다 녹고 새로 봄을 맞을 즈음, 쑥이며 냉이 같은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병아리 솜털처럼 노란 봄꽃들이 피어나면서 거짓말처럼 선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봄은 겨우내 무채색의 들판에서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하는 계절인 것처럼! 그 집 마당에서부터 무위당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손수 지은 봉산동 집

선생과 가족들이 시내 한복판에 있던 평원동 생가에서 봉천 건너 치악산 쪽으로 이사를 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였다. 폭격으로 원주시내가 폐허가 될 때 내로라하는 부잣집이던 선생의 집도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허허벌판과 다름없던 봉산동에 새 터를 잡고 손수 집을 지어야 했다. 선생의 아버지와 장성한 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작 장남이던 선생은 집안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무위당의 조부는 자손들 교육을 위해 일찌감치 서울 명륜동에도 큰 집을 지어놓고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일찍이 서울로 유학한 선생은 배재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미군정이 추진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투쟁에 참여했다가 제적을 당했다. 뒤에 서울대학교가 설립된 뒤 미학과에 다시 입학해 잠시 수학하기는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학업을 접고는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눌러앉았다. 그는 원주로 돌아와, 배우고 싶어도 학교는커녕 교사도 없는 후배들을 위해 자신이 먼저 배운 것을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육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학교가 어려워지자 아예 교장으로 살림을 떠안았고, 원주에 졸업한 학생들이 갈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자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성고등학교를 세우게 된다.
후손들이 대처로 나가 공부를 하기 바랐던 조부의 뜻도 입신양명의 길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가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시작할 무렵 선생의 조부는 스스로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준 사람이었다. 이미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로 땅값 이상으로 받아먹고도 남았으니 그냥 돌려주라는 게 조부의 뜻이었다. 선생 역시 그들의 땀으로 먹고 자라 공부했으니 배운 바를 농부의 자식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결과적으로는 금의환향 대신 비단옷을 만들어 바치던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에게 환원(還元)하는 길을 택한 셈이다.
이렇게 장남이 학교를 세우느라 여념이 없을 때, 식구들은 묵묵히 살 집을 지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주춧돌을 놓고 아궁이를 파고 굴뚝을 내고 흙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봉산동 집에서 선생은 아내를 맞고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동생들을 분가시키고 아들 셋을 낳아 기르며 40년 가까이 살았다. 지금도 그 집에서 무위당가의 대가족이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고 제삿밥을 나누어 먹는다.
선생은 생전에 그 집과 아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저 양반이야. 나는 건달이고 하숙생이었지.”
무위당을 알아갈수록 그건 그냥 하는 겸양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제 식구 살길에 대해서는 따로 마음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리어카로 흙과 돌을 퍼 나른 것은 오로지 학교 울타리 안이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줄곧 곳간의 것을 퍼 나를 줄만 알았지 안으로 변변한 재물을 들인 일이라곤 없다. 설상가상으로 국회의원에 두 번 출마하고 낙선한 일로 집안에는 빚과 고통만 보탰을 뿐이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는 보안대로 끌려가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춘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출소한 뒤에는 대성학교 이사장직에서도 쫓겨나 봉산동 집에 위리안치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감옥에서 나왔어도 창살과 수갑만 없었지 늘 감시받으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혼자만 감당할 수 있는 짐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그 많은 식구들 가운데 누구 하나 원망이나 서운한 기색을 내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봉산동 집에서 살을 맞대고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의 힘임을 느꼈다.

 

봉산동 집에서 쏟아져 나온 글씨와 그림들

‘하는 일이 없다’는 무위당이 봉산동 집에서 가장 많이 한 일이 붓을 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돈벌이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늘 붓을 쥐고 쓰고 그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지만, 일이 곧 돈이 되어야 하는 저자의 이치로 볼 때 그는 분명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위당은 조부의 친구인 차강 박기정 선생으로부터 서화를 배웠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는 차강은 젊어서 유인석 장군 밑에서 칼을 들었던 의병이었다. 그는 추상같은 붓끝으로 서화를 그려, 만주로 보내는 독립운동자금에 보탰다. 그런 스승에게 배운 사람답게 무위당 역시 생전에 서화작품을 돈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생이 1988년 서울 인사동의 ‘그림마당 민’에서 전시회를 열고 작품을 판 것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임을 믿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새로운 사회운동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지난 2012년 9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생명과 협동,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수묵전’ 개막식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잘나가는 변호사 시절 선생의 작품을 여러 점 샀는데, 나중에 시민운동을 하는 데 쓰느라 모두 팔아버려 정작 지금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전에 선생은 돈을 받지 않고 글씨와 그림을 두루 나누어 주었지만, 누군가는 선생을 흠모해 작품을 샀고 그 돈은 두루 좋은 일에 쓰였다.
앞서 2010년 4월 원주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청안 곽병은 기증전 ―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의 사연도 비슷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심심찮게 작품들이 거래되고 있는 것을 본 곽병은 씨가 틈틈이 사 모은 유작 32점을 (사)무위당사람들에 기증하면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는 원주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며 노숙인과 장애인 등 지역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데, 무위당이 부적처럼 나누어 준 글씨와 그림이 전하는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제자가 된 것이다. 곽병은 씨 소장품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위당사람들에 기증한 선생의 유작은 70여 점이 된다. 지금까지 발굴해낸 선생의 작품은 모두 600여 점이다. 하지만 해마다 전국을 돌며 계속되고 있는 무위당의 서화전을 보면서 선생에게 선물받은 작품을 여러 사람과 나누겠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도대체 생전에 선생은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을 나누어 준 것일까.
무위당 선생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글씨와 그림으로 우리사회 구석구석 목이 마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사람이 죽어서도 계속 사는 힘이란 이런 것 아닐까.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어져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 좋은 생각의 씨앗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 심지어 유명 프랜차이즈 떡볶이 매장에도 스스로 낮추고 고객을 섬기겠다는 다짐으로 무위당의 글귀를 적어놓은 사례까지 있으니, 선생을 일러 ‘안하는 일 없으신 분’이란 말이 얼마나 정확한가.
선생이 붓을 쥐고 있던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과 글씨 때문에 종이를 구겨 버리거나 붓을 놓기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술가의 집에 파지가 쌓이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에서 군고구마 장사가 직접 써 붙인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던 선생이니, 매번 그런 절박함으로 쓰고 그렸으리라 짐작만 해볼 뿐이다.
동생 장화순 선생에 의하면 병풍 같은 큰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혼신의 힘을 다 쏟은 형님의 얼굴이 안쓰러워 차마 마주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 때문인지 지난 서울 전시회에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형의 작품들을 둘러보던 장화순 선생은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주변에 나누어 준 글씨와 그림들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선생이 흘린 피와 땀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감회가 각별했을 것이다. 특히 말년에 ‘청강’도 ‘무위당’도 아니고 ‘일속자’라는, ‘조 한 알’이라고 가장 소박하고 겸손한 이름을 써넣은 작품 앞에서 동생은 오래도록 발길을 떼지 못했다. 주로 병중에 쓴 것들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쓰고 그려 주었다.
무위당은 세상 떠나기 전에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선생의 그림과 글씨를 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하나 특별한 유언들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큰 계산은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라네”, “식당으로 밥 먹으러 오는 사람이 자네의 하느님일세”, “인사는 앞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옆으로 뒤로도 하는 거라네” 등등 널리 알려진 선생의 이야기 모두가 유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위당 사람들의 벙거지 스타일

고백하자면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안 무위당이란 아우라에 가려진 그분의 가족들을 만난 것은 내게 예상치 못한 큰 축복이었다. 집안을 일으켰던 조부 장경호의 인품과 묵묵히 자식의 길을 믿음과 헌신으로 지켜봐준 부모의 사랑이야 생전에 선생의 입으로도 누누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형제와 아내, 자식과 제자 그리고 친구와 이웃들의 관계 속에서 만나는 선생의 모습은 나날이 새로웠다.
아내 이인숙 여사와 세 아들에게도 무위당이 있었고, 동생 장화순 교장 내외와 다른 형제 또 조카들의 삶 속에도 그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봉산동 집과 마당을 드나들수록 무위당이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아끼고 흠모하며 닮아가려는 모든 이들이 한데 어울려 빚어낸, 어떤 열정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나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하나인 무엇,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그 무엇. 그래서 무위당이란 단지 선생 개인의 호가 아니라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큰 집의 당호(堂號)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흥미로운 것은 무위당이 집이라면 그 안에 한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위당을 닮아간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생전에 선생이 즐겨 쓰던 벙거지는 ‘무위당 스타일’이라 부를 만큼 원주 사람들의 패션 아이콘처럼 되었다. 동생인 진광고등학교 장화순 교장도, 무위당사람들의 김영주, 김상범 선생, 한알학교 김용우 교장, 조카사위 황도근 상지대 교수, 판화가 이철수 선생 등등 원주에서 선생을 인연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너도나도 벙거지를 즐겨 쓰고 있어 속으로 웃은 적이 있다. 낮고 느린 목소리로 이어가는 온화한 말투도 대개 한결같아서 나는 그것 역시 선생이 조금씩 사람들 속에 남겨놓고 간 흔적일 거라 생각했다.
벙거지는 원래 조선시대 궁중이나 양반집 군노나 하인이 쓰던 털모자를 부르던 이름인데, 국어사전에서는 ‘모자를 속되게 부르는 말’이라 뜻풀이를 해놓았다. 벙거지는 중절모나 베레모와는 격이 다른 모자다. 각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접어서 주머니에도 넣고 다닐 수 있는, 가볍고 실용적이어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자다. 선생이 제자와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던 당부가 “기어라!”라는 말이었듯, 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했던 선생과 가장 잘 어울리는 모자다. 그래서 벙거지를 쓴 사람들을 만나면 스스로 낮추고 겸손해지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있구나 싶었다. 단정하게 갓끈을 고쳐 매는 선비처럼 무위당가의 사람들은 벙거지를 눌러쓰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대상과의 경계가 무의미해져 하나처럼 된다. 선생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이야 자연스런 일이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카사위나 제자들마저 선생의 외모와 말투가 비슷해지는 건 사랑해서 닮아가는 이치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선생을 생전에 만나본 일이 없지만 원주에만 가면 무위당의 미소와 목소리가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봉산동 집 오래된 마당에 들어서면 나무와 풀꽃에서도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된 마당과 뒷간이 살찌운 생명

봉산동 뜰 한쪽에는 식구들이 쓰던 뒷간이 오래전 메워진 채로 남아있다. 큰 나무 그늘 사이로 빗장이 질러진 빛바랜 판자문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유독 그 뒷간에 정이 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서 요강을 가져다 비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는 무위당. 선생 역시 자기 몸 안으로 들인 것을 매일같이 비워내던 곳이 그 뒷간이었을 터. 마지막 숨이 떠난 늙은 육신은 선산의 부모님 곁에 누웠어도, 젊은 날 그와 식구들이 매일 먹고 마시며 비워낸 것들은 고스란히 뒷간에 모였다가 텃밭으로, 마당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해마다 마당가에서 발아래 피고 진 꽃다지, 냉이꽃, 제비꽃들이 되었을 것이다. 모과나무, 밤나무의 열매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래된 마당에서 뒷간이 살찌운 뭇 생명들마저 모두 다 무위당처럼 보이곤 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 밥상에는 그 마당가에서 길러낸 푸성귀와 절로 자라서 뜯어낸 나물들이 올랐다.
“다들 어려울 때니까 찬이 없어도 흉이 안됐지. 그저 된장찌개에 마당에 있는 질경이 뜯어 볶아내고, 울타리에 노란 꽃이 피는 아네모네라고 있는데 손님만 오면 그 이파리를 무쳐서 냈지. 내가 그거 수도 없이 뜯었어.”
자신을 건달이고 하숙생이라 말하던 선생을 보필한 봉산동 안주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거름이 되어 푸성귀를 기르는 텃밭이 있는 작은 마당,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이 자연스런 일상이 되는 곳. 사람들이 잃어버린 오래된 마당이 봉산동에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봄이 되면 마당에 지천으로 먹을 게 돋아나겠구나. 더이상 풀들로 반찬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먹어주는 이가 없는 풀과 꽃들은 서운하지 않을까. 엉뚱하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봄이 되면 그렇게 자꾸 마당이 떠올랐다.
매일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가까이 있는 풀과 나무에서 왔고, 우리가 내쉬는 숨은 다시 식물들에게 꼭 필요한 광합성의 원료가 된다. 우리는 풀과 나무에게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먹고 먹히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사람과 자연이 하나의 목숨이라고, 밥 한 그릇에 온 우주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던 선생의 가르침들은 그렇게 봉산동 마당 안에서도 해마다 새로 돋아나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마당을 바라보며 곧게 붓을 쥐던 선생의 손이나 조물조물 나물을 무쳐내던 아내의 야문 손끝이 하는 일 역시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마당을 함께 쓰던 동생 장화순 교장 내외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내가, 우리가 그 마당을 드나들며 선생을 흠모하던 숱한 사람들을 닮아갈 일만 남았다. 그게 무위당을 사랑하고 기리는 일 아닐까 조심스레 적어본다.


김선미 ― 작가. 저서로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단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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