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5호 2014년 3-4월호  인쇄용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 소농을 생각한다1)

  백승종

다시 돌아온 갑오년

2014년은 다시 갑오년, 60년마다 되풀이되는 ‘푸른 말’ 해다. 이런 명칭 따위는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기 마련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무방하다. 문제는 우리시대의 현실이 두 갑자 전인 1894년 갑오년과 여러모로 흡사하다는 점이다. 위정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정권안보’를 위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라를 위해서 저들은 개방정책을 추진한다지만, 진의가 의심스럽다. 사회는 갈수록 양극화되고, 정의는 실종되어간다. 그리하여 1894년에 일어난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아득한 시간의 장벽을 넘어 오늘 일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동안 갑오동학농민혁명에 관하여는 많은 연구업적이 쌓였다. 관련 문서들도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숨은 이야기들도 채록되었고, 일본 측에 전하는 종군기록 역시 발굴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선행 연구에 의지한다.2)

그래도 이 글에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글쓴이가 21세기 한국의 농업이라는 현실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사실보다는 그에 대한 해석에 비중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이 글에는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또는 교양대중을 위한 한국사 개설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주장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특히 글쓴이는 한국의 위정자들이 추구해온 섣부른 무역개방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19세기 말 고종과 그의 측근 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여 소농 중심의 한국사회를 파괴하였다. 그들은 소농중심사회의 미덕이었던 ‘사회적 합의’를 깨뜨렸다. 이로써 사회적 안정의 토대가 무너졌다. 그때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소농과 연대하여 동학, 즉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은, 무엇보다도 내적 혁신의 가능성을 앗아갔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뼈아픈 일이었다. 이후 한국사회는 표류를 거듭했다. 식민지와 국토 분단이라는 비극이 잇따라 벌어졌다. 한마디로, 한국사회는 ‘과잉산업화’의 질곡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은 지구 차원의 거대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뜻했다. 21세기 한국의 농촌 현실은 비참하다. 한번 우리에게 들씌운 역사적 굴레는 웬만해서는 벗어나기 어려울 전망이다.

 

조병갑 때문이었는가?

갑오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되었다. 두어 달 전인 1893년 겨울, 전봉준(全琫準, 1855―1895) 등 수십 명이 두 차례에 걸쳐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에게 학정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1894년 1월 9일, 농민들이 탐관오리로 규정한 조병갑이 고부군수에 재임명되었다. 그 이튿날이 되자, 전봉준은 1,000명의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가 문제의 군수를 쫓아냈다.3)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무장에서 제1차 기병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호남 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는 등 군사조직을 편성하였다. 4대 행동강령과 12개 조의 군기(軍紀)도 정하였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즉 나랏일을 도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목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시작한다고 외쳤다. 실상 그들은 기성체제를 전복할 생각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승승장구했고, 1894년 4월 27일에는 전라도의 수도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겁에 질린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큰 실수였다. 이것을 빌미로 청국과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해 5월 7일, 동학농민군은 외세의 개입을 막기 위해 조정과 평화적 협정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그래도 혁명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전라도 각지에 도회소(都會所)라는 지역 사무소를 설치하였고, 6월에는 도내 대부분의 지역에 집강소를 두어 농민 자치를 벌였다. 농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 점령하여 내정간섭의 신호탄을 쏘았다. 이틀 뒤 그들은 이 땅에서 청일전쟁을 시작하였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그해 8월 재차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 한반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재집권을 노린 흥선대원군은 사람을 보내 동학군의 서울 진입을 요청했다. 전봉준은 그에 호응하여,4) 9월 10일, 전라도 각지의 동학군을 삼례로 집결시켰다.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동학군은 제2차 기병을 시작한 것이다.

1894년 9월 18일, 여태껏 전봉준 등의 무장투쟁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도 노선을 바꾸었다. 그는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반외세 연합전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하였다. 각도의 동학농민군은 그에 호응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진압군을 편성해 동학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8일, 그들은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을 꺾었다. 큰 피해를 입은 동학군은 북진을 포기했다.

이미 청주까지 진격한 김개남 부대도 패전의 상처를 안고 후퇴했다. 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는 끝까지 저항하는 동학농민군과 진압군 사이에 혈전이 잇따랐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진압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해 12월 2일, 전라도 순창의 피노리에서 동학농민군 총수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도 붙들렸다. 1895년 3월 29일, 그들은 전봉준과 더불어 한날한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해 4월 17일, 청일 양국은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청일전쟁 역시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일본은 청나라를 누르고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았다. 또한 일본은 전쟁배상금으로 은화 2억 냥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청나라로부터 받아냈다. 당시 일본의 3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것을 군비 확장에 쓸어 넣으면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다. 동학은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고종을 비롯한 한국의 위정자들도 정치적 외상을 입었다. 그들은 외세에 의존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기 때문에 권위를 상실하였다. 정권 탈환을 노렸던 대원군 역시 정치적 패배를 감수해야만 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과 일본의 국운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일본보다는 한 수 아래라는 굴욕적 평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승리에 고무된 일본은 명실상부한 근대적 국민국가로 성장하였고, 한반도에 대한 침략야욕을 구체화하였다.

이 모든 오욕의 역사가 일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청렴하지 못한 지방관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황현(黃玹, 1855―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조병갑이 부임하는 곳마다 뇌물을 탐했고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 증거는 충분하였다. 조병갑은 태인 현감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운다며 1,000냥을 고부군민에게서 뜯어냈다. 이미 설치된 ‘만석보(萬石洑)’ 아래 다시 ‘보’를 설치해 억지로 물값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다. 면세를 조건으로 황무지 개간을 허락해주고는, 나중에 말을 바꾸어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돈 많은 백성들에게 불효, 음행, 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는 없다. 19세기 후반 한국 관료사회의 전반적인 부패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그는 한 사람의 평범한 탐관오리였을지도 모른다. 고부에 부임하기 전, 그는 이미 함양, 천안, 김해, 장흥 등지에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수령으로서 그의 고과성적은 도리어 우수한 편이었다. 함양군수 시절에는 치적이 많았다고 해서 송덕비까지 세워졌다. “백성들을 편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쳤으며, 세금을 감해주기도 하였다. (조병갑은) 곧은 마음으로 정사에 임했으므로, 사심 없는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일반의 막연한 억측과는 달리, 조병갑의 송덕비와 그가 세운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는 아직도 건재하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영세불망비’라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일까. 함양에 서 있는 송덕비의 내용이 옳다면, 조병갑은 웬만해서 탐관오리로 전락하고 말 저열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부에서 그가 많은 불법 및 탈법행위를 자행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역사 속 조병갑은 탐악한 저질 관리이기도 했고, 청렴한 모범 관리이기도 했다.

19세기 한국사회는 이런 이중성을 양립시킬 만큼 모순적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드높아지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탐관오리의 전형이라 규탄하며 고금도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곧 풀려났다. 조정에 복귀한 조병갑은 승진을 거듭했다. 1897년 그는 법부 민사국장에 발탁되었고, 곧이어 고등부 판사가 되었다. 1904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 정3품)까지 올라갔다.5) 당대의 조정 인사들이 조병갑을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간주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조병갑의 부패에 관한 조정 여론은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었다.

글쓴이가 조병갑을 두둔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처럼 부정부패한 인사들을 두둔하고 감싸는 분위기가 조정에 팽배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부정부패의 만연, 이것이 어찌 19세기 말에 국한되었겠는가. 지금도 한국사회의 부패지수는 높다. 2013년 국제투명성기구가 조사·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부패인식지수’는 177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46위로서 높은 편이다. 이처럼 명예롭지 못한 조사 결과는 지난 3년 동안 계속 악화되고 있다. 그때 하필 조병갑이 고부군수가 아니었더라도, 동학농민혁명은 조만간 일어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미 1862년(철종 13년) 임술년에도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나마 여기저기서 민란이 일어났다. 비슷한 시기 중국과 일본의 농촌사회도 술렁거렸다. 특히 1851년(청, 함풍 1년)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14년 동안이나 혼란이 지속되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뒤에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30년 동안(1863~1893), 전국적으로 60차례도 넘는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해마다 어디선가 난리가 일어났다.

동아시아의 농민들은 대대적인 사회 혁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집권층은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농민들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점차 피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되었다. 일본은 1867년부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극적인 탈출구를 마련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무분별한 무역개방이 문제다

역사학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찾는다. 주로 세 가지 이유를 거론하는데, 첫째는 농업기술의 변화가 농촌사회의 변질을 초래했다는 주장이다. 이앙법의 보편화로 농업생산력이 증가했고, 이것이 지주에게 유리한 경제 환경을 만들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농촌사회의 양극화는 심해져, 빈농이 증가하고 사회적 불만도 커졌다는 것이다. 둘째, 3정의 문란이 농민층의 반발을 불러왔다고 한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및 환곡(還穀) 등 전통적인 수취체제에 모순이 쌓여 조세정의가 무너지자, 농민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말이다. 셋째, 19세기에는 세도정치가 등장하여 부정부패가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는 것이다. 자연히 농민들의 부담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평야가 많은 전라도 농민들은 그 처지가 더욱 열악했다. 그들은 국가재정의 절반 이상을 부담해야 되었기 때문에, 지배권력에 대해 한층 강하게 저항하였다. 전라도는 양반들까지도 권력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관계로, 핍박받는 농민들과 연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19세기 말이 되자 전라도의 상하 계층은 서로 협력하여 반정부활동을 조직적으로 펼쳤다.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여러가지 사료(史料)를 읽어보더라도, 과중한 조세부담에 관한 동학농민군의 불평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관리들의 탐욕과 지주들의 횡포에 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기왕의 주장은 역사적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역사기록에 직접 언급된 경우는 드물지 몰라도,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글쓴이가 볼 때는 외국산 공산품, 특히 면직물의 수입이 농촌사회에 던진 충격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1876년(고종 13년) 일본과 강화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을 통해 값싼 면직물과 각종 공산품을 대량으로 유통시켰다. 1882년(고종 19년) 이후로는 임오군란의 여파로 청나라 상인들까지 대거 등장하여,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전국 각지에서 공산품 시장을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였다. 그 틈을 이용해 일부 객주들과 보부상은 수입상품을 거래하며 돈 벌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대다수 전통 상인들과 수공업자들 그리고 가내수공업에 종사해온 농민들은 타격을 입었다. 가령 소농 가족들은 면직물의 생산을 비롯한 가내수공업을 통해 가계 적자를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헐값의 외제 공산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생계를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 상황은 해마다 악화되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자료에는 이런 문제를 명시한 대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 동학농민군은 조정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당시 조정은 외국으로부터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하는 약자에 불과하였다. 조정은 해외시장은 물론, 국내시장에 대해서도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쌀과 콩을 비롯한 국내산 곡물의 무분별한 유출이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전라도 지역이 매우 심했다. 전라도는 국내 제일의 곡창이었다. 그런데 식량 수입국가였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거리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해, 가장 매력적인 생산지였다. 일본 자본은 빠른 속도로 전라도의 연안지방에 진출해 많은 곡식을 헐값에 사들였다. 고창의 김성수 일가처럼 셈이 빠른 지주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단기간 내에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6) 하지만 소작으로 겨우 연명하던 소농들은 물론이고, 일부 자영농들까지도 곡물가격의 잦은 변동으로 손해와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애써 노력한 결과 설사 풍년이 들더라도, 지주로부터 식량을 빌려 먹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주들로서는 한 톨의 쌀이라도 더 많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이 더 큰 이익임이 분명하였다. 자연히 한국의 농민들, 특히 전라도의 농민들은 곡물의 수출에 종사하는 일본 상인과 일부 한국인 중간상 및 지주들에 대하여 원망을 품게 되었다.

글쓴이가 보기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촉발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무분별한 무역개방 조치에 있었다. 고종과 그의 측근 세력들이 추진한 ‘개화정책’이 문제였다. 그들 위정자들은 부국강병을 구현하기 위해 서둘러 개화정책을 폈다. 그 과정에서 위정자들은 재정 부족을 실감하였고, 이것은 자연히 각종의 증세 조치로 이어졌다. 이래저래 죽어나는 것은 당시 한국의 핵심 산업인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더욱 좁게 말하면 전라도의 농민들이었다.

역사기록에는 동학농민군이 그저 단순히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친 것처럼 되어 있다.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정의를 부르짖었다는 말이다. 일본과 서양이 문제시되는 까닭이 중요하다. 그들 외세는 한국의 정치적 주권만 위협했던 것이 아니라,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 주범이라는 인식이 동학농민군들에게 있었다. 두말할 나위조차 없이 명쾌한 지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은 당대의 폐정(廢政), 즉 잘못된 정치를 거론하면서 ‘서울의 권귀(權貴)’를 문제삼았다. 그들은 ‘횡포한 지방 양반들’도 거론했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귀착된다. 글쓴이는 이렇게 해석한다. 요컨대 지방과 서울의 실력자들이 외세에 빌붙어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은 분노를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기득권 세력을 배신자로 인식하였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부패한 기득권층이야말로 한국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국가의 주권을 외세에 팔아먹은 죄인이자,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협잡꾼들이었다. 동학농민군의 현실 인식은 그처럼 날카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진격하여, 일거에 “권귀를 내쫓고”, “나랏일을 도와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輔國安民)” 작정이었다. 물론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구현되어야 했다.7)

무분별한 시장개방은 19세기 말의 문제라고만 볼 수 없다. 1997년의 외환위기도 외환시장을 함부로 개방하여 외국의 투기자본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농어촌이 지금처럼 피폐해진 까닭도, 앞뒤 생각 없이 공산품의 수출을 촉진하겠노라며 수입시장을 함부로 개방한 결과다. 최근 수년 동안 집권층이 정력적으로 추진해온 이른바 ‘자유무역협정(FTA)’들 역시 앞으로 한국사회, 특히 농촌지역에 가공할 만한 충격파를 불러오고야 말 것이다. 1960년대 이후 ‘과잉산업화’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농촌을 구조적으로 황폐화시킨 정치세력의 음모는 끝이 없다. 그들은 이미 빈사상태에 빠진 농촌을 결국 끝장내고야 말 것인가.

 

소농 중심 사회

동학농민혁명이 가능했던 좀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왕의 연구 논저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두 가지 대답이 발견된다. 하나는 농민들이 당해도 너무 심하게 당해왔다는 주장이다. 또하나는 ‘동학(東學)’이라는 종교집단의 견고성이다. 동학에서는 ‘포(包)’와 ‘접(接)’을 단위로 하여 6임제(六任制)를 실시하였다, 과연 동학교도들은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 등 6종류로 직임을 구별하여 조직을 철저히 관리했다.

글쓴이가 보기에는 더욱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한국 소농중심사회의 특징인 마을조직의 강건함이다. 동학의 포접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접주 또는 포주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을이 있다. 6임이란 것도 사실은 한두 마을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다시 말해, 마을의 조직적 기반에 힘입어 동학조직도 건재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소농 중심의 마을조직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대표적인 것이 ‘리중(里中)’이라 불린 마을공동체였다. 또한 각 마을에는 노동, 오락 및 제의(祭儀)를 담당하는 ‘두레’ 조직들이 결성되어 있었다. 마을공동체나 두레 같은 것은 으레 선사시대로부터 농촌사회에 존재한 오랜 관습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글쓴이가 이미 다른 책에서 밝힌 사실이지만, 19세기에 이르러 한국의 마을공동체는 독자적인 조직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우두머리인 ‘좌상(坐上)’을 선출했고, 그 아래 실무를 담당하는 ‘공원(公員)’도 뽑았다. 마을공동체는 별도의 공유전답을 소유하였고, 비단으로 만든 값비싼 마을 깃발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의 상장례(喪葬禮)는 물론 세금과 부역 등 생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마을 일들을 처리하였다.8)

18세기 이후 동아시아 사회에는 지주제가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지주제라도 나라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보아, 중국과 일본에서는 소작농에 대한 지주의 지배력이 강했다. 결과적으로, 소농 중심의 협동조직이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농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소농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 다양한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조직체를 구성해 세금, 부역, 군역 등의 문제를 직접 관리하였다. 그들은 마을의 노동력을 집중시키거나 분배하는 문제까지도 스스로 결정하였다.

한국의 중앙 및 지방정부는 소농들이 운영하는 마을공동체를 정치적 동반자로 인식하였다. 집권층은 그들에게 조세의 공동납부를 떠맡김으로써 세수(稅收)의 안정을 꾀하였다. 각종 범죄행위에 대하여도 공동책임을 지워 사회안정을 도모하였다. 상당기간 동안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19세기 전반까지도 한국에서는 농민의 집단저항이라고 일컬을 만한 사건이 거의 없었다.

한국사회는 안정적이었다. 상부상조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합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주제로 인해 점차 양극화 현상이 강화되고는 있었지만 그 속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다. 경제성장의 이상 따위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상업 발달의 속도 역시 완만해, 원거리 시장의 형성이 주변 국가들보다 늦었다. 외국과의 무역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교통 및 숙박업도 발달이 거의 없었다. 요컨대 당시의 한국사회는 시장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지주제 아래서도 자급자족적 농촌사회의 틀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지주는 잉여 농산물을 시장에서 화폐로 교환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소작농들에게 높은 이율을 붙여 대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리부담을 이기지 못한 소작농들은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무단이탈하였다. 이로써 채무관계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지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한국 농촌은 위에서 말한 몇 가지 특수성으로 인해,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지주는 가난한 소작인을 먹여 살리고 대신에 소작인은 지주에게 명예를 보장해주는 식의 사회적 보상체계가 작동하였다.9) 그 당시 한국사회가 도달한 안정성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동시대의 동아시아 각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보더라도, 한국은 최소의 사회경비로 가장 완벽하게 치안을 유지하는 사회였다. 한국에는 악명 높은 감옥도 없었고, 전문적인 법률가 집단이 형성될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는 급속도로 달라졌다. 각처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저항의 강도도 거세졌다. 외부세계와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다음에는 농민의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그 까닭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조병갑 때문이었는가?’ 단락 참조). 섣부른 개방정책의 결과 민란이 거듭되었고, 그러자 소농들은 군사활동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농민들은 마을의 두레를 중심으로 농악대와 깃발을 앞세우고, 스스로 질서정연하게 군사훈련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10) 그리하여 《경국대전》에 입각해 지방에 배치된 고유한 경찰 또는 군사력만으로는 민란을 진압하기가 어려워졌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 때는 농민들의 군사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탈취한 조총은 물론 대포까지 운용하면서 전술의 폭을 확장했다.11) 이제 중앙에서 급파된 최정예 군대로도 진압은 장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곧 집권층의 위기의식을 고양시켰다. 마침내 고종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연출하였다.

고종이 내정의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한국의 유약한 집권층은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외국 군대의 상주가 집권자에게 정권 유지를 보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한국사회의 비용지출은 계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고, 다방면에 걸친 것이다. 만일 한국사회의 자산이던 부자와 가난한 소작농 사이의 사회적 합의가 끝까지 존중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충격적인 ‘민란’이나 혁명 같은 것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총체적 대안으로서의 동학

1894년, 위정자들은 외세를 빌려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른바 ‘토벌작전’에 참가한 일본 군인들의 종군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동학농민군의 재기를 근원적으로 차단할 목적으로 처형자의 수를 극대화했다. ‘가능하면 모두 잡아 죽인다’는 식이었다. 동학농민군의 피해는 매우 컸다. 그 규모를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1894년 일본군이 처형한 인원만 해도 2~5만 명을 오르내렸다. 그해 전투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연인원 30만 명 정도로 평가된다. 지역적으로는 전라도가 압도적인 다수를 점했지만, 충청도와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등 여타 지역에서도 상당한 호응이 있었다.

전국의 소농이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가한 까닭은 무엇인가. 앞에서 글쓴이는 조정의 무분별한 무역개방정책이 그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말하였다. 그보다 더 심층적인 원인은 없었을까? 1860년대부터 꾸준히 전개된 ‘동학’이란 일종의 문화운동에서 한 가지 답을 찾을 수도 있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원은, 《정감록》에까지 이른다.

‘문화운동’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19세기 말 동학은 정치운동이자 경제운동이었고, 사회운동인 동시에 종교·문화운동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그 가르침은 자주적 근대화운동이기도 하였다. 동학교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인의 평등을 신봉했다. ‘유무상자(有無相資)’라 하여, 그들은 가진 사람과 없어서 못사는 사람이 서로 도와 사는 경제공동체를 추구했다. 그들은 일체의 사회적 차별을 해소하기를 바랐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유교, 불교, 도교의 장점을 취하여, 앞으로 5만 년을 지속할 새로운 ‘대운(大運)’을 열고자 했다. 겉보기에 동학은 일개 종교운동이었지만, 실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상생(相生)’을 목적으로 하는 총체적 개혁을 그들은 바랐다. 그들의 이러한 이상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네 글자에 집약되었다.

19세기 후반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 특히 글쓴이가 ‘평민지식인’이라 부르는 이들이 바로 동학을 창도(唱導)하였다. 또는 그러한 사상적 흐름에 기꺼이 동참했다. 개인적인 편차는 있었지만,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의 최고위층들도 평민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1890년경 동학에 입문하였다. 동학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들은 혁명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그들은 종교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혁명까지 포함한 총체적 ‘문화운동’을 위해 동학의 문을 두드린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미 18세기부터 조선왕조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발과 저항은 노골화되었다. 원국지사(怨國之士), 즉 나라를 원망하는 선비들이 《정감록》의 예언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것이다. 시일의 경과와 더불어 그들의 연대는 외연을 넓혀갔다. 그리하여 평민지식인들이 이 비밀결사 운동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그런 흐름이 계속 이어지다가 19세기 후반 최제우(崔濟愚, 1824―1864)에 이르러 ‘동학’으로 승화되었다. 《정감록》 비밀결사가 하나의 신종교운동으로 탈바꿈한 것은 결코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결사체의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질적 전환이 가능하였다.12)

19세기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다. 소농중심사회의 장점이던 안정성이 무너져, 일반 농민들조차 왕조의 멸망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사정이 악화되었다. 최제우는 그러한 사회변화를 깊이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총체적 대안을 마련하였다.13) 1890년대 초기 전봉준과 김개남(金開男, 1853―1895) 등이 동학에 합류한 것은 최제우의 대안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의 일부 지식인들은, 이미 1892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혁명을 준비하였다. 그해 11월 1일 전봉준 등은 전라도 삼례에 모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촉구하고, 교도들에 대한 관리들의 탄압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1893년 2월 서울로 달려가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려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어서 그해 3월, 전봉준은 전라도 금구의 원평에서 1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재차 비슷한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 밖에도 1893년 3월부터 4월까지 열린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도 전라도 출신 동학도들은 참가율이 유달리 높았다. 그들의 언사 또한 가장 과격했다.

전봉준 등은 자신들이 직접 기획·참가한 여러 행사들을 통해서 일련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다. 글쓴이는 그들이 이미 정치권력을 상대로 투쟁력을 강화하고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조정의 물리적인 진압 의지 및 능력을 시험하는 한편, 자신들의 동원능력을 높였다. 그리하여 일단 유사시에 어떻게 처신할지를 고민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훈련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전봉준은 자연스럽게 전라도 동학농민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가 결성됨에 따라, 전라도의 동학농민들은 조정과의 일전을 더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 또는 머지않아 닥칠 문제로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고부군수 조병갑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는 결정적인 문제도 될 수 없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지도부는 많은 인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어딘가에서 조정과 힘겨루기를 시도할 것이 분명했다. 성공적인 저항운동은 어디서든 쉽고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준비된 곳에서만 가능하다.

 

21세기 한국사회, 어디로 갈 것인가

요컨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조정의 무분별한 개방정책에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주축은 소농이었고, 그들은 굳건한 마을조직을 기반으로 투쟁의 역량을 강화했다. 그들이 동학의 이름으로 전면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게 되기까지는 하나의 뚜렷한 역사적 흐름이 있었다. 18세기부터 한국에서는 《정감록》 예언서를 바탕으로, 사회적 변화를 향한 모색이 활발했다. 그것은 일종의 대안적 문화운동이었고, 이를 주도한 것은 평민지식인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들 평민지식인들은 동학에 입문하여 소농과의 연대투쟁을 시도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여러가지 난제가 엉클어져 있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며 경쟁의 논리만을 부르짖는다. 그들은 공기업을 사유화하고 의료기관까지 민영화하려고 한다. 공익을 해치는 저들의 탐욕은 개방정책으로 미화되기 일쑤다. 이것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소농을 중심으로, 한국의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은 다시 연대해야 한다. 판에 박힌 계급투쟁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모두가 ‘해원상생(解寃相生)’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 《정감록》에서 발원해, 동학혁명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염원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선 거대자본의 해악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요구된다. 아울러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합의도 이뤄야 한다. “나락 한 알에도 우주가 있다”는 장일순(1928―1994) 선생의 말처럼, 지극히 사소한 것도 그 본질은 우주적이다. 독립적인 ‘너’와 ‘나’지만, 차별은 초월의 대상이다. 이런 입장을 생태주의라고도 부를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의 저변에 깔린 풀뿌리 민주 조직과 ‘유무상자’의 사회적 건전성을 되찾으려 한다면, 그 길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14)


1) 최근 어느 모임에서 글쓴이는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과 농업’이란 교양강연을 하였다.

2) 이 글을 쓰는 데는 다음의 여러 논저를 참고하였다. 이 방면의 고전적인 자료라고 볼 수 있는 황현의 《매천야록》(이장희 옮김, 명문당, 2008) 및 《오하기문》(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을 비롯해, 《고종순종실록》(탐구당, 1996)과 오지영의 《동학사》(박영사, 1990) 등이 있었다. 《동학농민사료총서》(30권, 경인문화사, 1996)는 실로 귀중한 자료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최근의 저술인 위의환의 《장흥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들》(사단법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13)과 박형모 외, 《이야기 장흥동학농민혁명 ― 갑오년, 장흥 어느 무명 농민군의 기록》(사단법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13)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은 교양시민을 위해서 쓴 것이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겠다.

3) 전봉준의 기병(起兵) 동기를 그 아버지 전창혁의 억울한 죽음에서 찾는 경우가 더러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지영의 《동학사》이다. 그러나 전창혁이 과연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전봉준 공초에 보면, 그는 개인적으로 국가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하였다.

4) 대원군과 동학 지도부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였다.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대원군의 문객(門客)이었다고도 한다. 어떤 역사가들은 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부정하고, 그 운동을 보수적이라고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서울에 정치 기반이 없는 전봉준이고 보면, 대원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뜻이 왜 없었겠는가.

5) 조병갑의 자세한 이력은 《고종실록》을 검색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천안군수 시절에도 실적이 우수한 지방관에 손꼽혔다. 그런데 조병갑과 동학의 악연은 끝까지 이어졌다. 그는 최시형의 재판(사형)에도 판사로서 관여했다. 그 점은 광무 11년(1907년) 7월 26일자 최시형에 관한 재판 문서에서 확인된다.

6) 일본으로 쌀 수출이 시작되기 전 김성수 일가의 재산 규모는 연간 수입 200석 정도였다. 그러나 쌀 수출이 시작되고는 재산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1908년경 그들은 연간 수입 8만 석 정도의 거부가 되었다. 한 세대 만에 재산이 400배 정도 불어난 셈이었다.

7) 오지영의 《동학사》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패정개혁안〉 가운데는 농지의 ‘평균분배’가 보인다. 이것은 경자유전(耕者有田), 즉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중국 고대의 이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실제로 이러한 정책을 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8) 백승종, 《한국사회사연구 ― 15~19세기 전라도 태인현 고현내면을 중심으로》, 일조각, 1996, 152~153쪽

9)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어야 진정한 의미의 부자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사회 부자들의 미덕이었다. 일제시기까지도 그런 정신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명망가들이 있었다. 가령 충남 논산의 윤증(尹拯, 1629―1714) 고택에서는 연간 수입의 3분의 1을 기부와 자선 등에 사용하였다(연간 총수입은 3,000석). 한국의 부자들이 자선을 기꺼이 베풀었고, 그 바탕 위에 고도의 사회적 안정이 유지되었다는 점은 양반들의 가옥 형태에서도 알 수 있다. 서양은 물론 중국 및 일본의 지주들이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저택에 거주한 것과는 달리, 한국 양반들의 가옥은 외부의 침략 따위를 별로 고려한 흔적이 없다.

10) 고부의 동학농민군이나 장흥의 동학농민군들도 늘 농악대를 앞세웠다. 그들은 군사훈련 때도 농악대의 연주에 따랐다. 그런데 농악대는 두레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위 조직이었다.

11) 동학농민군은 그들이 점령한 각지의 관아에서 무기와 화약 등을 빼앗아, 그것으로 전력을 강화하였다.

12) 백승종, 《한국의 예언문화사》, 푸른역사, 2006 참조.

13) 훗날 최제우의 가르침은 《동경대전》(최천식 옮김, 풀빛, 2010)과 《용담유사》(양윤석 엮음, 모시는 사람들, 2013)로 정리되었다.

14) 2014년 2월 10~11일, 글쓴이는 충북 옥천에서 열린 녹색당의 한 모임에 참석했다. 장길섭, 황민호, 전희식, 김재형 선생은 전국의 여러 농촌마을에서 ‘상생’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희망찬 소식에 감사드린다.


백승종 ― 역사가.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저서로 《한국사회사연구》, 《그 나라의 역사와 말》, 《한국의 예언문화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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