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4호 2014년 1-2월호  인쇄용  

 

  지속가능성 위기와 민주주의

  김종철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 여러분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추운 날씨에 학기말인데도 많이 참석하셨는데, 오늘 제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흥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잘 들어보시고 나중에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지속가능성과 민주주의’에 대해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위기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문제들이 중층적으로 얽혀서 복합적인 위기상황을 초래하고, 그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말입니다. 세계적 금융파탄, 경제위기, 환경위기, 고용위기, 거기다가 정치적 혼란 등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그것들은 한마디로 ‘지속가능성의 위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흔히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은 환경오염, 생태위기 등에 관련해서 쓰이는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은 좁은 의미의 환경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은 1980년대에 세계 최초로 정부에 환경부가 만들어졌던 나라입니다. 그것을 2000년대에 들어와서 지속가능발전부라고 개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환경위기라는 게 이제는 단순한 환경보호 차원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죠. 환경문제라는 것도, 잘 생각해보면, 현대세계가 추구해온 개발이나 발전이라는 게 과연 지속가능한 것이냐,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 없이는 제대로 해법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인식이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이 대두되어 널리 쓰이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인간생존의 자연적 기반이 무분별하게 파괴되거나 훼손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두려운 것은 기후변화입니다. 지난번 필리핀을 초토화시킨 초강력 태풍 보셨죠. 과학자들은 그게 지구온난화와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강력한 태풍이 빈발할 것이라는 얘기죠. 태풍뿐이겠습니까? 극심한 가뭄과 대홍수, 이상고온, 이상한파가 끊임없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기후학자들은 지금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큰 빙하 하나라도 녹아버리면 지구의 해수면이 2m나 상승한다고 하죠. 그 빙하들이 자꾸 녹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해안이나 저지대에 있는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물에 잠길 게 뻔합니다. 싱가포르 같은 데서는 국토 전체를 에워싸는 제방을 건설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엄중한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특정 지역에서는 국지적으로 그게 대응방법이 될지 모르지만, 온 세계의 절반 이상이 바다에 잠기는 상황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경기 불황, 일시적일까

그러나 이런 환경문제나 기후변화 문제보다도 지금 여러분에게는 당장에 졸업 후 살아갈 문제가 더 절박한 관심사이겠죠. 그것을 조금 생각해봅시다. 요즘 여기저기서 듣는 것은 대학생들이나 20대 젊은이들이 갈수록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로지 혼자 살아남을 궁리만 한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시대상황이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얘기죠. 졸업을 해 봐야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도 희박한 게 사실입니다. 정부 통계에 관계없이 제가 짐작하는 바로는 현재 우리나라 청년 실업률은 아마 40~50%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부 통계라는 것은 취직을 하겠다고 희망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통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지금 취직 자체를 아예 포기하고 지내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요 얼마 전에 대학을 갓 나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어떤 젊은이하고 잠깐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1,000 대 1이라고 하더군요. 공무원이라면 이 사회에서 가장 안정된 일자리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겠죠. 그래도 그렇게 좁은 문인지는 몰랐습니다. 1,000 대 1이라는 것은 합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만은 성공할 것이라고 다들 매달려 있어요. 그런데 설혹 기적처럼 합격한다 하더라도, 그 개인의 생애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자기 또래가 대부분 일자리가 없거나 혹은 비정규직 일자리밖에 못 가진 사회에서, 예외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일까요?
결국, 지금과 같이 일자리 얻기가 어려워진 상황은 개인적 차원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를 제대로 물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려면 질문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고용위기 혹은 경제위기가 일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부, 기업, 언론, 학자,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이게 일시적인 경기 불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소간 경기가 살아나는 순간이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경제가 축소되고,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고용기회는 계속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경제란 근본적으로 자원 없이는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수치놀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물질적 기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물질적 기반, 즉 자원이 급속도로 소멸되고 있는 게 오늘날 세계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책을 결정하거나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경제성장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국가목표도 경제성장이죠. 예전에 왕조시대에는 기독교, 불교, 유교 등 종교나 사상적 이념을 현실 속에 구현해보려는 게 적어도 공식적인 국가의 목표였다고 한다면, 정교분리 원칙 위에 성립된 근대국가의 목표는 오로지 경제의 성장 혹은 발전을 통한 부국강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사고습관이기 때문에 떨쳐버리기 어려운 거죠.
이제 어쨌든 경제성장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면 조만간 속수무책으로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게 분명합니다. 적어도 우리는 어제와 오늘의 연장으로서의 내일을 생각하는 낡은 사고습관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미래는 조만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언을 향해 가는 석유문명

하기는 벌써 오래전부터 몇몇 선각자들은 자원의 한계로 인해서 자본주의경제의 성장 메커니즘이 벽에 부닥칠 것임을 예견해왔습니다. 맑스만 하더라도, 이른바 ‘평균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개념으로 자본주의의 성장 추세가 둔화될 것을 이론적으로 파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맑스는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의 필연적 결과로 토지의 질이 피폐해질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선구적인 생태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도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믿고 옹호하는 성장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맑스는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로막는 ‘자본주의적 질곡’을 사회주의혁명으로 타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제본스의 역설’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기술적 효율성이 높아지면 자원이 절약되는 게 아니라 총량적으로는 오히려 자원 소비가 더 증가하는 역설적 현상을 말합니다. 그 현상을 《석탄문제》라는 책에서 논리적으로 밝힌 사람이 윌리엄 제본스라는 19세기 후반기의 경제학자였습니다. 그는 근대자본주의가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언젠가 화석연료가 고갈되면 자본주의경제가 필연적으로 쇠퇴한다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산업자본주의가 한창 번성하던 19세기 중엽에 이미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견했고,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자원 문제임을 지적한 것이죠.
이런 선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는 성장론자들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자원이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이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데도, 성장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미국에 케네스 보울딩이라는 퀘이커 교도로서 특이한 경제학자가 있었는데, 이분이 1960년대에 〈우주선 지구의 경제학〉이라는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발표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경제가 무한히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광인(狂人), 다른 하나는 경제학자들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왜 성장론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가 하면, 결국 근대경제학의 근본 모델이 자본주의 시스템이고, 계속적인 성장·확대를 떠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게 자본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시스템도 이제는 성장시대가 끝나가는 상황에서 실제로 종언을 맞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까도 말했지만, 자원이 급속히 고갈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어떤 자료를 보니까 오늘날 세계경제의 자원의존도가 100년 전에 비해서 수십 배가 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동안 과학기술 덕분에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많이 개발되었지만, 아까 말했듯이, ‘제본스의 역설’에 의해서 전체적 생산량과 소비량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적 효율성을 높여 봤자 자원 절약이 안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석유문제입니다. 석유는 현대문명 전체의 존속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 자원입니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현대적 산업생산과 소비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원료이고 재료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거의 전부 석유제품입니다. 면직물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목화도 석유를 가지고 산업적으로 대량 재배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도 석유제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유의 쓰임새는 이렇게 막중합니다. 그러니까 현대문명은 바로 석유문명인 거죠. 그런데 어디서 본 통계인데, 1860년부터 지금까지 인류사회 전체가 산업적 시스템 속에서 소비한 석유가 대략 2조 배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첫 1조 배럴을 소비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느냐 하면 130년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1조 배럴을 소비하는 데는 얼마나 걸렸겠어요? 1990년부터 지금까지, 즉 20년이 걸린 것입니다. 갈수록 무서운 속도로 소비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이런 추세로 간다면, 채굴 가능한 석유가 얼마만큼 남아있든지간에 극히 단기간 내에 고갈돼버릴 게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석유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잔존 매장량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피크오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 알고 계시죠? 피크오일, 즉 석유의 생산 최대치라는 게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을 분기점으로 해서 석유가 종전처럼 저렴하게 풍부히 공급되던 상황이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죠. 일정한 양 이상을 채굴하고 난 후부터는 채굴작업이 물리적으로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성도 갈수록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피크오일이 지나가면 석유공급은 갈수록 곤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세계 전체적으로 언제 피크오일이 닥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국제에너지기구(IEA)가 2010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2006년에 피크오일이 지나갔다고 인정을 했습니다. IEA는 석유 장사꾼들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피크오일 같은 것이 언급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실이 명백하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그뿐만 아닙니다. ‘엑슨모빌’은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인데, 그 ‘엑슨모빌’도 2013년 연초에 발간한 〈세계에너지전망〉이라는 문서 속에서 피크오일이 2006년에 지나갔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석유가 순조롭게 공급되지 않습니다. 2006년경까지 수십 년간 석유 가격은 대체로 1배럴당 평균 2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8년 이후 100달러로 뛰었습니다. 2030년경이 되면, 원유 가격이 1배럴당 200달러가 될 거라는 게 IEA의 예상입니다. 불과 십수 년 전의 가격보다도 10배나 더 비싼 석유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가파르게 석유값이 올라가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당장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식량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25% 정도인데, 그나마도 석유를 써서 이 정도입니다. 만약 석유가 없다면 농사도 거의 전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모자라는 나머지 먹을거리는 가축사료까지 포함해서 해외에서 사들여오는 수입 농산물이죠. 물론 수출이 비교적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달러 획득이 가능하고 그 덕분에 외국 농산물을 수입해서 먹는 이런 상황이 유지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산업국가들 중에서 한국이 수출의존도가 제일 높은 나라인데, 문제는 그 수출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거의 전부가 석유제품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동차, 반도체, 가전제품 등등 모두가 석유제품입니다. 게다가 석유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이면서도 한국의 수출품 중에는 석유도 있습니다. 원유를 가공한 정유 말입니다. 국제유가가 워낙 싸기 때문에 그것을 사들여 가공을 해서 부가가치를 높여서 해외로 판매하는 거죠. 이렇게 거의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게 한국 경제의 현재의 실상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석유 공급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두렵습니다. 지금과 같은 한국 경제는 완전히 붕괴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제가 요즘 이런 얘기를 강연 때마다 하는데, 질문시간에 제 얘기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왕왕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에 동의할 수 없다면 당신의 그림을 가져와 봐라, 두 그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그럴듯한 그림인지 대조를 해보고, 당신의 그림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면 내 그림은 기꺼이 포기하겠다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그림은 보여주지도 않고, 비판만 합니다. 비록 불량식품이기는 해도 어딜 가나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제가 식량자급률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석유문명의 종식에 대해서 얘기를 하니까 너무나 낯설고 불편한 얘기인데다가 당장에 해결책도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으니까 거부반응부터 나타내는 것이죠. 그러나 해결책은 나중에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질문을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듣기 싫거나 보기 싫다고 해서 엄중한 사실이 사라져주는 게 아닙니다.

셰일유(油), 기회인가 망상인가

여기서 잠깐 언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겠지만, 요즘 미국을 중심으로 한창 얘기되고 있는 셰일가스·셰일오일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지금 심심치 않게 보도가 되고 있는데, 그런 보도에 의하면 이 새로운 ‘비재래식’ 석유자원은 미국에서만도 100년 이상이나 쓸 수 있을 만큼 매장량이 막대하고 개발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거죠. 셰일이라는 것은 혈암(頁岩), 즉 장구한 세월 동안 진흙이 퇴적하여 단단하게 굳어진 지하 심층의 암석층인데, 그 사이사이에 가스와 기름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개발이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1990년대 후반에 ‘프래킹(fracking)’이라고, 강한 수압으로 암석층을 파쇄(破碎)하여 가스와 기름을 꺼내는 공법이 개발되었습니다. 이 공법으로 상용화가 가능해져 지금 미국은 막대한 기름과 가스를 이 방법으로 채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셰일가스와 오일 덕분에 피크오일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 100년간 혹은 적어도 몇십 년간은 석유자원의 쇠퇴 혹은 고갈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죠. 심지어 ‘프래코노믹스(Frackonomics)’라는 새로운 용어도 생겼습니다. ‘프래킹’에 기반을 둔 경제라는 뜻이죠.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동안 개발이 불가능했던 셰일유(油)가 지금 상용화되었다는 것은 채굴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재래식 석유가 값싸고 풍부하게 공급되던 동안에는 전혀 경제성이 없었고, 따라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셰일유와 가스를 개발할 이유가 없었던 거죠. 그러니까 지금 셰일유와 가스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결국 피크오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사회가 집단자살을 결행할 생각이 아니라면, 셰일유와 가스 채굴은 결국 그만두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종래의 석유 채굴 방식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셰일유와 가스 채굴은 환경파괴적인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하 2,000m 내지 3,000m에 자리 잡고 있는 단단한 암석층을 독성화학물질이 포함된 대량의 물로 강력한 압력을 넣어 깨뜨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엄청난 소음, 진동은 물론이고 지하수를 광범위하게 오염시키고 주변 환경을 아주 못쓰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 파쇄작업이 지진을 일으킨다는 설도 있어요. 게다가 이 작업에는 막대한 담수를 사용해야 하는데, 갈수록 수자원 부족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는 세계의 물 사정을 고려하면, 이게 과연 허용될 수 있는 채굴 방식인지 매우 의문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파괴적인 채굴 방식도 문제지만, 채굴 과정에서 막대한 메탄가스가 발생한다는 사실이에요. 다들 아시겠지만,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도 더 치명적인 온난화 유발 가스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채굴된 셰일가스와 기름을 태울 때 거기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까지 생각하면, 극단적인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려는 지금까지의 세계적인 노력은 ―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형식적이고 불충분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는 하나 ― 전부 무위로 돌아갈 게 명백합니다. 그렇게 되면, 21세기 후반기부터 1,000년 동안 지구는 금성(비너스)처럼 생물이 살 수 없는 뜨거운 별로 걷잡을 수 없이 변하는, ‘비너스화(化)’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게 제임스 핸슨과 같은 기후과학자들의 비관적인 예견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에는 잘 반영이 안되고 있지만, 셰일가스나 오일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합니다. 실제로 지금 셰일유에 대한 정보는 매우 일방적이고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는 거죠. 실은 경제성도 별로 없고, 지질학적·지리학적·산업적·사회적 요인들 때문에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최근에 세계의 주요 언론, 예를 들어, 프랑스의 〈르몽드디플로마티크〉나 영국의 〈가디언〉 등에서도 보도되었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조차도 셰일유와 셰일가스의 잠재적 가치가 비현실적으로 과장되었다고 하면서 그것도 2015년에서 2017년 사이에 생산 피크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현대화’된 농업의 저주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면, 결국 석유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석유에 기반을 둔 경제와 사회, 문화 등등 모든 것도 그 존립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석유의 급속한 쇠퇴 혹은 고갈로 인한 갑작스러운 붕괴상황을 맞기 전에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비참한 예를 보여주는 게 오늘날 북한의 상황입니다. 1990년대에 북한이 엄청난 기아와 굶주림을 겪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그 상황은 기본적으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탈북자들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제일 중요한 이유가 굶주림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는지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십만 명을 넘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자료에는 수백만이라고도 하지요. 어쨌든 대량 기아사태가 있었고, 굶어 죽지는 않았다 해도 영양실조 때문에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또 성장발달에 현저히 지장을 받아온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쉽게 북한정권이 핵무기 개발과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하는 데 돈을 쓰느라고 인민을 기아상태에 방치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북한 지도부의 무능과 부도덕성도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삼농문제’라고 해서 공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어온 농촌·농민·농업을 살리기 위한 여러 움직임이 있는데, 이 움직임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원톄쥔(溫鐵軍)이라는 중요한 지식인이 있습니다. 중국 인민대학 교수로 그 대학의 농촌발전학원 학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녹색평론》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고, 최근에는 《백년의 급진》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판도 되었는데, 이분이 북한 농업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북한의 기아사태의 원인은, 북한 농업의 지나친 ‘현대화’에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재미있죠? 보통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기아사태는 농업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고, 그 원인은 사회주의라는 이름 밑에서 집단농장화를 한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톄쥔은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농업의 현대화, 즉 농사를 기계와 화학물질(농약, 비료)에 의존하는 시스템으로 만든 데 있다고 본 거죠. 저는 이 설명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집단농장화도 중요한 요인이죠. 인간이란 자기 것이 아니면, 자기한테 돌아오는 현실적인 이익이 없으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유지를 철폐하고 농민을 집단농장의 생산단위, 단순한 노동력 기계로 만들어놓고 농업생산성의 향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북한 기아사태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학생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1970년대까지 북한은 일본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제일 앞선 공업사회였습니다. 남한보다 앞서 있었죠. 이미 1970년대 말이 되면 북한의 도시화 비율은 70% 수준이었습니다. 농촌인구는 30%였습니다. 농촌인구가 이렇게 줄었던 것은 농사를 기계와 농약, 화학비료로 짓는 시스템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현대화된’ 농업이었죠. 그런데 그 현대화된 농업의 전제는, 말할 것도 없이, 석유죠. 소련으로부터 국제 시세보다 훨씬 싼 값으로 제공되는 석유라는 전제조건이 없으면 현대화된 농업이라는 것은 애당초 성립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뜻밖에도 1989년에서 1990년 사이에 소비에트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자 당연히 소련으로부터 들어오던 석유가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북한사회와 산업활동 전반이 기능정지 상태에 빠지고 농업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트랙터를 포함한 농사용 기계들은 기름이 있어야 돌아갑니다. 비료와 농약도 모두 석유로 만듭니다. 생산된 농산물을 운반하는 수단도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는 차량들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이 모든 게 정지됩니다.
거기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어 북한에는 몇 차례 홍수가 들이닥쳤습니다. 대량 기아사태가 안 난다는 게 이상한 일이죠. 그런데 이런 상황을 겪고 난 지금 북한의 식량자급률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65% 정도는 된다고 추산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석유와 에너지가 결핍된 상태에서 이 정도까지 끌어올려졌다는 것은 놀랍지만, 그래도 많이 모자라기 때문에 여전히 굶주림이 만성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남한의 식량자급률은 아까도 말했듯이 25% 정도입니다. 그것도 석유를 잔뜩 써서 이 정도입니다. 이제 제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만약에 남한의 수출 위주 경제시스템이 석유공급의 차질로 붕괴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두렵다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우리 농업을 살리는 일입니다. 동시에 화석연료나 원자력에 의존하는 에너지 시스템에서 재생가능한 자연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녹색평론》에서 20년이 넘게 반복해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에도 한국의 농촌과 농민은 피폐 일로를 걸어왔습니다. 지금은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고 거의 대부분이 노인들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간다면 곧 우리나라에서 농촌은 사라지고, 농업은 소멸됩니다. 역대 어떤 정부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한테 왜 농업이 중요한지 깊이 생각하면서 농정다운 농정을 구상하고 실천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뿐만 아니라 소위 이 나라의 엘리트들 중에 농업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좌우를 막론하고 그랬습니다.

요한 갈퉁의 충고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 때 요한 갈퉁이라는 세계적인 평화운동가가 김대중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러 온 일이 있습니다. 갈퉁은 노르웨이 출신의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이면서 세계의 전체 상황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지닌 현인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지금도 생존해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 경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취임식에 초대를 받고 왔던 거죠.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는 소위 외환위기 때문에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경제주권이 사실상 IMF로 넘어갔다고 했을 때입니다. 당연히 김대중 정부는 이 문제 해결을 가장 우선적인 국정과제로 생각하며 출발했죠. 그러나 갈퉁은 한국정부가 IMF의 돈을 받되 IMF가 시키는 대로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IMF가 시키는 대로 했던 나라들이 망하는 것을 봤으니까요. 긴축재정이니 국유재산 매각이니 민영화니 하는, IMF가 요구하는 정책들로 인해서 결국 일반 국민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빈부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는 것을 수없이 봐왔으니까요. 요한 갈퉁은 한국정부가 IMF가 준 돈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에너지와 식량 자립 기반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때 어떤 잡지에 나온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한 것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정부는 그 조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갈퉁의 조언에 우리 정부가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고, 농업과 에너지 자립을 위해서 국가적으로 총력을 기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가끔 생각합니다. 굉장히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지속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희망이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는 찬스를 놓쳐버린 거죠.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정부도 그렇지만, 뒤이은 노무현 정부도 농업의 중요성이나 재생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의 확보가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몰랐던 것 같아요. 군사독재정권이나 민주정권이나 그저 아는 게 경제성장밖에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근대의 끝, 인간적 사회 혹은 새로운 연옥

아무튼 이제는 한국사회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성장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시스템도 끝난다는 얘기죠. 지금은 경제가 한 나라에 국한해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가 맞물려 있는 글로벌 경제 시대입니다. 여러분, 미국의 역사사회학자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해서 들어보셨죠? 월러스틴이 말하는 세계체제라는 것은, 세계제국과 세계경제로 나누어집니다. 옛날 로마나 중국이 주변의 위성국가 내지 약소민족들 위에 정치·군사적으로 군림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시대는 세계제국의 시대였죠. 이 세계제국 체제에서는 경제는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자립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무역은 존재했지만, 소규모이고 국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500년 동안 계속되어온 근대세계 체제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경제의 시대입니다. 이 체제에서는 각 나라가 정치적인 주권은 가지고 있되, 경제적으로는 사실상 하나의 글로벌 경제권에 속하게 됩니다. 그 경제권은 중심국가와 주변국가, 반(半)주변국가들로 구성되고 있죠. 이러한 위계적인 질서가 성립하는 것은 경제발전 정도에 따른 불균등한 교역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중심국가의 번영은 주변지역의 낙후성과 관계가 있고, 주변지역의 빈곤은 중심국가의 번영과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세계경제 전체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메커니즘이라는 거죠. 불균등 교환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제국주의적 지배와 종속 관계를 말합니다. 지난 500년간 몇몇 서양의 선진 산업자본주의 국가들이 세계 전역을 제국주의적 지배 혹은 침탈의 대상으로 삼아왔고, 그 결과로 많은 비서구권의 전통사회나 토착사회들이 식민지로 전락해온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노골적인 군사적 침략의 시대도 끝나고 식민주의 시대도 끝났지만, 세계무역 시스템의 확충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여전히 착취적이고 약탈적인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의 관계가 유지되고 확대되어왔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최근에 이 세계경제 시스템도 곧 끝나게 되어 있다는 말을 부쩍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석유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월러스틴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투자를 해서 계속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소위 자본축적이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이죠. 자본주의경제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삶에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이윤추구, 즉 끝없는 자본축적을 위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든 성장이 멈추고, 더이상 투자를 해 봤자 큰 재미를 볼 수 없게 되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월러스틴은 지금이 그러한 상황이라고 보는 거죠. 그동안 중국이나 인도의 대규모 초저임금 노동자들 덕분에 자본주의가 연명을 해왔는데, 이제 더이상 그런 식의 대우를 받고 만족할 수 있는 노동자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자원도 급속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자본주의를 지탱시킬 수 있는 물적·인적 조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월러스틴은 앞으로 20~30년 내에 자본주의가 붕괴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사회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는 이 새로운 사회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지금보다도 조금 더 민주적이고, 조금 더 평등한 사회라는 거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고 착취적이며, 억압적인 사회, 즉 새로운 연옥(煉獄)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지상에 유토피아가 실현될 가능성은 아예 단념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것을 그는 ‘유토피스틱스’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 유토피스틱스, 즉 좀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로 가느냐 아니면 연옥을 향해 가느냐 하는 것은, 세계의 시민들이 어떻게 선택하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월러스틴은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골치 아픈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미래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관계된 모든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서 정치적 결단이나 중대한 정책결정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실상에 대해서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게 실은 껍데기 민주주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월러스틴도 지금 지구상에 온전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즉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치란 사실상 금권정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명색이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돈 없는 사람, 혹은 돈 있는 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선거에서 이길 수도 없고, 설사 선출된다 하더라도 뜻한 바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앞길을 가로막는 금권정치

그렇게 본다면, 현재의 정치시스템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고 재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자본주의 근대체제를 벗어나서 새로운 사회 시스템, 새로운 문명의 틀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이 절체절명의 전환기에, 자본가·재벌들이 과연 이러한 전환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동의하고 행동할 것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물론 자본가나 기업가들 중에는 개인적으로는 선의를 가진 사람, 훌륭한 인간적 품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 기업경영의 논리가 그런 인간적 품성의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문젭니다.
예를 들어, ‘보팔 참사’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1984년에 인도의 보팔이라는 곳에서 살충제를 제조하는 화학공장의 독가스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그 지역 주민 수천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의 주민이 상해를 당한 20세기 최대의 산업재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 화학회사는 미국의 대기업 ‘유니언카바이드’의 인도 자회사였습니다. 사고가 나자 유니언카바이드사의 최고경영자는 즉각 방송에 나와서 사고를 일으킨 데 대해서 사과를 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방송을 마치고 한 시간도 안되어 그 최고경영자는 다시 방송에 나와서 아까 했던 말을 취소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사과 방송이 나가자 즉시 유니언카바이드의 주식이 폭락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했던 말을 취소한 것은 회사가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거죠. 미국은 회사의 경영이 잘못되어 주주들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판정 날 경우에는 최고경영자에게 형사책임을 묻는 법률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처음에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최고경영자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발언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중의 발언은 기업의 논리에 따른 냉담한 비―인간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적으로 행동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본가나 기업가들이 개인적으로 탐욕스럽다 아니다가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시스템 자체가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 윤리적 경영 등을 고려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본과 기업이 공공선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국가의 공권력이나 시민들의 각성된 힘뿐입니다. 그런데 국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어떤 점에서는 자본의 논리보다도 더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국가이익, 즉 흔히 말하는 ‘국익’ 논리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진 냉혹한 성질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익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지요. 국익이나 애국심이니 하는 말을 들고 나오면 사실 비판하기가 어렵다고 사람들은 느낍니다. 그리고 대개는 속으로는 거북하더라도 체념하고, 국익 논리에 굴복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 정부가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의 기초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뒤집었을 때도, 사람들은 대부분 “나라에 돈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겠어”라고 체념해버렸습니다. 정말 나라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 혹시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닌지, 좀더 파고들 생각은 하지 않고 주저앉아버립니다. 그러면서 한 대에 5,000억원이나 한다는 최신 전투기를 40~60대나 사겠다는 정부의 결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국방을 위해서라는 명분 앞에서는 감히 이의를 달지 못하는 거죠.

‘국익’을 극복하지 않으면

오늘날 국가이익이라는 것은 거의 모든 근대국가가 소위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자명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나오는 고착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동북아시아 정세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새삼스럽게 영토분쟁이 가열되고 있고, 이웃 나라들 간에 험한 말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발 비끗하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상황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냉전시대만큼도 못한 상황인 거죠. 영토문제만 해도, 가령 예전에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다툴 게 아니라 나중에 후손들이 보다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미뤄두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현명한 자세입니까. 영토분쟁이라는 것은, 설사 전쟁을 하더라도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이익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게 영토 확보라는 것은 주권국가의 상식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롭게 지내려면 덮어두는 게 상책이죠. 이 점을 알고 지혜롭게 행동한 주은래 수상 같은 사람이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행한 시대죠. 지금 우리가 보는 정치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은 너무나 철이 없어요. 역사에서 뭘 배우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헤겔이 그런 말을 했다죠.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틀린 말이 아니죠.
지금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 시급히 방향전환을 하기 위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는 핵심적 요인은 물론 경제성장 논리입니다. 그리고 이 성장논리는 근본적으로는 끊임없는 축적을 겨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에 못지않게 성장논리를 극복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은 국익 관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국익 논리는 결합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시장과 국가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할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자본주의 혹은 순수한 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에요. 자유주의 경제이론가들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말고 시장의 메커니즘에 모든 것을 맡겨두라고 요구하지만, 만약에 국가가 시장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난다면, 시장도 자본주의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국가권력이 온갖 규칙과 법률을 만들고, 노동세력을 국가의 강제력으로 탄압·회유·억압하는 등 시장질서의 안정성을 자본가에게 유리하도록 확보해주지 않으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애초에 존립 불가능합니다. 금융투기꾼들의 농간으로 은행이 무너지거나 방만한 경영으로 대기업이 망하려고 하면 서둘러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돈으로 손실을 메워줍니다.
그런데 왜 국가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한마디로 국가의 논리란 항용 부국강병을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탱크와 전투기와 군함을 보유하려면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경제력을 강화하려면 장기적 생존기반이 무너지든 말든 당장에 경제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런 논리와 심리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좀더 인간적이고 좀더 민주적이며,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갈 수 없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체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에 무비판적으로 주저앉아 있으면 출구는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우리가 국익이라는 틀을 넘어서 세상을 볼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전망도 열리지 않고 끝내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가두고, 우리 삶을 어둡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상상력이라는 것은 공상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공상이라는 것은 전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꿈을 말하지만, 상상력은 비록 눈에 띄게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일지라도 최소한의 현실적인 근거에 입각한 구상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그 작품이 나온 지 5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토피아》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비록 먼 곳의 낯선 현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실재하던 인간사회를 부분적으로나마 모델로 삼은 데 있습니다. 실제로 토마스 모어는 자신이 구상하는 유토피아적 상황, 즉 사유재산제가 아닌 공유 원칙에 의해 돌아가는 공동체를 묘사할 때에, 16세기 초 당시 유럽 독서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신대륙에 관한 탐험기나 여행기들 속에 언급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에서 암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사고습관으로는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모델이 역사 속에서든 혹은 우리 동시대에 어느 곳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델은 우리가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필요한 정신적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를 주목해보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

이 세상에 군대가 없는 나라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믿지 않으려 하지만, 실제로 작은 도시국가들을 제외하고도, 아이슬란드나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지리적으로 북대서양의 외딴 섬나라로 예외적인 경우라 치면, 가장 흥미로운 나라는 역시 코스타리카입니다. 보통 근대국가라면 행정·입법·사법부로 삼권이 분리된 제도 위에서 관료제와 경찰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군(國民軍) 조직을 갖춘 정체(政體)를 말합니다. 그런데 작은 도시국가도 아니고 인구가 500만 가까이 되는 버젓한 근대국가인 코스타리카는 1949년에 헌법에 군대를 갖지 않기로 명시하고 그 상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세중립국가인 스위스만 하더라도 군대가 있습니다. 스위스는 10만 이상의 상비군에다가 유사시에 즉시 동원 가능한 그 비슷한 수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는 무장중립국가죠. 2차대전 때의 경험을 보더라도 외적의 침입을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는 스위스도 이런 국방력을 갖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늘 불안한 정세가 계속돼온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군대를 폐지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경탄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것은 《비무장국가 ― 군대를 폐지한 코스타리카》(한글판 제목은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제목이 붙여진 일본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본인 청년인데, 그는 전후에 일본이 군대의 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라는 사실상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을 늘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중, 코스타리카가 군대 없는 나라라는 것을 듣고는 곧바로 코스타리카 대학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군대 없는 나라가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좋은 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자기 나름대로 살핀 끝에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첫째로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코스타리카에서 군대를 없애자고 제일 먼저 제안한 사람은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는 오랫동안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빈발하는 쿠데타 때문에 세계에서도 가장 불안한 지역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군대의 폐지란 것은 쿠데타 방지책으로서는 최선이죠. 그런데 군대를 지휘하는 책임자가 이것을 발의하고, 대통령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비상한 용기가 없으면 안될 일이죠. 국민들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정치가 불안정해도 군대를 아예 없애자는 데까지 갈 수 있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군대를 없앤 이후, 코스타리카는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주권을 지키고 평화로운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해왔습니다. 군대를 폐지한 후 두어 차례 니카라과 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코스타리카는 군대를 부활시키자는 일부 국내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경찰병력으로 맞서 싸우면서 대외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코스타리카의 외교가 성공하고, 평화를 위한 중재에 협력해달라는 코스타리카의 호소가 국제사회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자신이 비무장 상태였기 때문이죠. 아무리 현대의 국제질서가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국제법이 있고, 유엔이라는 게 있고, 무엇보다도 형식적이지만 명분을 중시하는 국제관계라는 게 있습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 침공이라는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게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도덕적 권위가 추락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국제사회에서는, 어쩌면 국내에서보다도, 명분이라는 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코스타리카는 비무장 국가가 됨으로써 도리어 더 큰 힘이 생긴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 실제로 군대를 버린 국가가 됨으로써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어느 나라든지 국가예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국방비입니다. 그 국방비가 필요 없어졌으니 당연히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쪽으로 쓸 수 있고, 교육과 의료, 사회보장 시스템을 보강하는 쪽으로 쓸 수 있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국민들의 삶이 윤택해지는 거죠. 그런데 군대 없는 나라의 장점은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코스타리카의 경우는 보여줍니다. 즉, 군대가 없어짐으로써 국가의 재정에 여유가 생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대다수 국민들의 심리와 정서가 알게 모르게 비폭력주의적인 방향으로, 평화 지향적인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거죠. 하기는 원래 코스타리카에서 1948년에 군대 폐지 문제를 결정할 때도 국민투표에서 90%가 찬성했다고 합니다. 정치적 안정과 평화로운 사회에 대한 염원이 굉장히 절실했던 나라였다는 얘기죠.
그런 바탕 위에서 실제로 군대를 폐지하고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코스타리카 국민들은 어느새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국가권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없어지고, 국가와 자신을 한 몸으로 의식하는 사고습관이 붙게 된 것 같아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힘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무력입니다. 막스 베버도 그렇게 말했지요. 국가란 ‘정당한 폭력행사를 독점하고 있는 조직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개인들이나 시민들의 그룹이 폭력을 행사하면 그것은 즉각 범죄행위로 규정되어 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데, 이러한 법의 집행이 가능한 것은 배후에 ‘군대’라는 국가권력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다 큰 폭력조직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근대국가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국가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은 ‘큰 폭력이 작은 폭력들을 억압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민들의 기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파시즘이나 다름없는 노골적인 폭력적 통치 상황으로 들어가지만, 그러한 극단적인 권능까지 국가권력에게 합법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게 근대국가체제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라도 국가권력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도 합법적인 방식으로요.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나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늘 잠재적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공포가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국민은 결국 그런 두려움과 공포감 없이 살고 있는 자유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 대한 애정이 훨씬 더 각별한 것이 될 수 있죠.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나라라는 것은 강제력을 행사하는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신들의 자발적인 의사가 결집되어 유지되는 공동체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알면 알수록 코스타리카는 매우 독특한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스타리카는 반세기 이상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해온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요.

성숙한 민주주의

오늘날 코스타리카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질적으로 높고 성숙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을 때, 미국은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확보하기 위해서 유엔의 승인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얘기를 퍼뜨려 그것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침공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세계가 다 알고, 미국정부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영국, 일본, 한국을 포함한 만만한 국가들의 수반을 움직여 이라크전쟁을 지지하고 찬동한다는 의사표명을 얻어냅니다. 그때 어떤 경위였는지 모르지만 코스타리카 대통령도 지지성명을 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도 아닌, 코스타리카 내각의 국무위원, 즉 장관 한 사람이 대통령이 코스타리카 헌법을 위반했다고 최고재판소에 제소를 했다는 거예요. 우리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얘기죠. 자기가 임명한 장관으로부터, 그것도 현직의 장관으로부터 대통령이 고소를 당한다는 것, 우리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한술 더 떠서 최고재판소도 대통령의 행위가 위헌적이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아요? 이게 코스타리카예요. 그러니까 코스타리카 국민들은 진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자유인으로 살게 되면 생각도 넓어지고 굉장히 지혜로워집니다. 오늘날 코스타리카는 물론 현대적 산업국가의 면모도 갖추고 있지만, 재벌에 의해서 경제가 좌우되는 나라가 아니고, 국민 대다수는 커피를 포함한 농업과 어업 그리고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코스타리카 국민들은 자기 나라가 과도하게 공업화된 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나라의 아름다운 풍광과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투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광산업에 관련해서도, 코스타리카에는 대형의 호사스러운 호텔이나 대규모 골프장, 카지노 따위 시설이 없습니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지금 세계 어딜 가나 흔해 빠진 5성급, 6성급 호텔에 투숙하고 골프를 치고 도박을 하기 위해서 코스타리카 관광을 오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로운 사회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참으로 이성적이고 건강한 사회죠.
영국 런던에 ‘신경제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이라는 독립적인 싱크탱크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지금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경제모델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그 목적에 따라 좋은 책과 보고서들을 계속 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는 해마다 ‘해피 플래네터리 인덱스(Happy Planetary Index)’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국이 얼마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을 중심으로 측정하여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요소들이란, 자연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가, 자원을 얼마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하는가, 국민들이 얼마나 자유와 행복감을 누리며 사는가 등등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계속해서 일등을 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코스타리카입니다.

분단국가를 넘어서는 상상력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인데 우리가 군대 없는 나라를 꿈꿀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로 우리를 가두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근원적인 질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건이 웬만큼 갖추어져 있는 상황에서 무슨 일을 이루어내는 것은 별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어려운 일을 이루어내는 게 가치 있는 일이고, 인간으로서 해볼 만한 일입니다. 설사 성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력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두뇌 속에서, 우리의 정신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도 군대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면 미친 짓이겠지만, 궁극적으로 군대 없는 나라 건설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워놓느냐 않느냐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과 생활에 근원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언젠가 통일은 성취해야 하겠지만, 남북통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되려면 높은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남한의 일부 통일론자들 중에는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과 결합됨으로써 우리 민족이 웅비할 수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죠. 종래의 고정관념, 배타적인 민족주의, 혹은 심지어 제국주의적인 생각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실제로 통일도 요원하고, 또 그런 논리로 통일을 해 봤자 그게 인간다운 세상이 될 수 있겠는지 깊이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시대의 종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장시대가 끝나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국민국가체제도 해체되거나 어떤 형태로든 변형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통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는 상상이 잘 안됩니다만, 어쨌든 지금까지와 같은 낡은 사고습관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요컨대 앞으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을 맞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장이 끝나고,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되면, 그 과정에서 월러스틴과 같은 사람이 우려하는 것처럼 억압적인 파쇼 통치가 등장하거나 전쟁이 터지거나 혹은 세상이 온통 혼돈 상태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질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지옥 같은 세상을 원치 않는다면, 결국 대답은 민주주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또 민주주의를 통해서 지속가능한 삶을 어떻게 만들고 유지할지 우리는 모든 지혜를 모아서 활발히 토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김종철 ― 본지 발행인. 이 글은 2013년 12월 10일 한신대학교 지역발전센터 창립 5주년 기념 강연의 녹취기록을 보완, 가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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