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2호 2013년 9-10월호  인쇄용  

 

  책을 내면서

  김종철

‘기본소득’을 테마로 한 지난호의 좌담은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녹색평론》 지면에서 기본소득이라는 것은 낯선 아이디어가 아니고, 또 비록 제한된 서클이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진보적’ 그룹의 일부에서도 이것은 지난 몇해 동안 꾸준히 거론되어온 주요 테마였다. 다만 지난호의 좌담은 근년에 이 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논의가 전개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해왔던 이들을 초대하여 그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된 이야기들을 한번 총괄적으로, 그리고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정리해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물론 이 시도가 충분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로 시간과 지면의 제약 때문에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거론되지 못했고, 언급됐다 하더라도 충분히 깊이 있게 논의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좌담은 일단 이 사회에서의 기본소득 논의에 한 획을 긋는 성과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충분한대로나마 그것은 기본소득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필요한가를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작은 지금부터인지 모른다. 기본소득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 윤곽은 어느 정도 잡혔다 하더라도,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점검은 앞으로 상당한 시일 동안 많은 뜻있는 이들이, 진지한 논의와 논쟁을 통해서, 함께 떠맡아가야 할 공통과제일 것이다.

어떻든 지금, 비록 일각에서의 일이지만, 기본소득에 관련한 논의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를 보면,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지만, 머잖아 이것은 ‘무상급식’ 못지않게 익숙한 대중적 화제가 되고 나아가서 선거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 이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몽상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숱한 사회적, 실존적, 생태적 위기상황은 본질적으로 종래의 습관적인 방법, 다시 말해서 더 많은 에너지와 물자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 ― 즉 경제성장 ― 를 전제로 하는 구태의연한 정책이나 사회운용 방식으로는 더이상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 논리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동시에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차별 없이 보장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로서 기본소득이 지닌 잠재적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소득의 무조건성

세부적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는 많지만, 적어도 원리상으로 기본소득이 지닌 가장 긍정적인 측면은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직업 유무, 노동 의사 유무, 재산 유무 등을 일절 불문에 붙이고 어떠한 자격도 묻지 않고, 심사도 하지 않는다는 이 무조건성(無條件性)이야말로 종래의 사회복지 논리와는 구분되는 기본소득의 독특한 장점임이 분명하다. 일찍이 철학자 푸코는 복지국가를 정의하여, 그것은 국가가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낙인(烙印)찍고, 통제하는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푸코의 이 말은 복지국가 체제가 내포한 어두운 진실을 어느 정도 정확히 건드리고 있는 진술이라는 것은 쉽게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누군가의 말처럼, 복지국가(welfare state)란 기실 전쟁국가(warfare state)와 모태가 같은 쌍둥이 형제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기본소득은 단순히 기왕의 복지국가 시스템을 보강하는 부수적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지국가를 성립시키고 있는 근대적 산업국가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뒷받침하고 있는 통치형태, 노동윤리, 생활관습, 사회적 인간관계 전체를 근저에서부터 뒤바꿔놓을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가진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산업국가란 본질적으로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다수의 희생을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데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이른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소위 청교도적 노동윤리·생활윤리를 세계 전역으로 퍼뜨려 모든 비서구 전통사회들도 예외 없이 이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을 하든 아니하든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할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러한 노동윤리·생활윤리와 정면에서 배치되는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노동윤리·생활윤리에 토대를 둔 가치, 신념, 관습, 제도를 뛰어넘어 새로운(그러나 실은 오래된) 지평, 즉 탈근대적 혹은 비근대적 세계를 안내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선구적인 기본소득 제창자였던 클리포드 더글러스에 의하면, 기본소득의 궁극적 목표는 본래적 의미의 기독교적 윤리의 회복이다.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인간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은총’에 있다는 기독교적 교의(敎義)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게 기본소득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동의하건 아니하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흔히 일 혹은 노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적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부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기본소득은 종래의 좌우익 논리를 넘어서 정말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노동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하고 실현하는 데 큰 기여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신용론’의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

《녹색평론》 지면을 통해서 이미 몇 차례 소개되었지만, 클리포드 더글러스는 일찍이 1920~1930년대의 대공황 시대에 ‘국민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제의 도입을 제창한 걸출한 사상가·실천가였다. 그는 이 ‘국민배당’이라는 것을 근대 금융통화제도의 근본적인 개혁과 동시에 실현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사회신용론(Social Credit)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정리·해명했다. 더글러스에 의하면, 근대 금융통화제도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갈수록 심화시키고, 호황과 불황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키며, 공황과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근원적 요인이다. 그것은 근대적 금융통화제도가 기본적으로 심각한 부조리 혹은 내적 결함에 의거해서 돌아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 혹은 결함은,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통용되는 화폐의 대부분이 국가나 공공기관에 의해 발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상업은행에 의한 ‘신용창조’, 즉 부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부채는 반드시 이자를 붙여서 상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메커니즘에서는 별도의 착취가 없더라도, 경제생활이 지속되는 동안 그냥 시간이 경과하는 것만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의 부는 자연히 부유한 자산가들의 주머니와 금고로 흘러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1%의 부유층을 위해서 99%가 희생을 강요당하는 극히 부조리한 사태이다. 더글러스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을 혁파하고 진정한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신용창조 행위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것이 되도록 국가나 공공기관이 화폐발행권(시뇨리지)을 재탈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이러한 제안은 실은 대공황기의 여러 사상가 혹은 경제이론가들이 각기 독립적인 연구의 결과로 내놓은 공통한 제안이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저명한 경제학자 어빙 피셔의 개혁론이다. 이 어빙 피셔의 논리에 입각하여 오늘날 세상을 망치고 있는 ‘카지노경제’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책이 지금 일본에 귀화하여 사업가·경제평론가로 활동 중인 빌 토튼이 쓴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녹색평론사, 2013년)이다).

더글러스는 이와 같은 금융통화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한다면, 세금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민배당’에 필요한 자금은 얼마든지 마련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현실적 정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는 영국은 물론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각처를 여행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부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세상의 몰이해에 부딪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글러스의 시대와도 많이 다르다. 오늘날 지구사회 전체가 직면한 경제위기·금융위기는 대공황기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금융통화 메커니즘의 소산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산업경제의 확산과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자원들, 특히 석유자원이 빠르게 감소·고갈되어가고 있는 새로운 현상과 맞물려 있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경제성장 시대가 계속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따라서 고용문제를 비롯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사회적 모순과 혼란을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논리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음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새로이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에 끌리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위기상황을 타개하고, 활로를 모색하는 데에 기본소득보다 더 획기적이고 합리성을 갖춘 방안을 구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 자멸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방향전환을 통해서 질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갈 것이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 상황을 만들어온 기성의 낡은 사고와 논리에 마냥 매달려 있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것은 경제성장 시대 이후를 내다볼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이다.

 

후쿠시마 사태와 일본 정치

엄중한 상황에 맞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없을 때, 인간사회와 그 정치가 얼마나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그 생생한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지금 일본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후쿠시마 사태가 발생한 지 2년 반, 일본의 정치가들과 엘리트들은 이 미증유의 원자력 사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귀중한 시간을 계속 허비하고 있다. 그것은 지난 7월 말 일본정부가 스스로 후쿠시마 상황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함으로써 명확히 드러났다.

사실, 후쿠시마 사태는 의지가 있고 돈이 있다고 해서 계획대로 제어가 가능한 그런 종류의 산업재해가 아니다. 사고 당초부터 이미 분별력 있는 이들은 이 사태가 수습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 있었고, 앞으로 장기간 일본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방사능 오염을 우려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진학자들은 이제부터 일본열도에서 ‘대지동란(大地動亂)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고 예측하고 있다. 조만간 연달아 대지진이 일본열도를 흔들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후쿠시마 사고 원전은 물론, 일본열도 전역의 해안에 임립(林立)해 있는 50여 개 원전들 전체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는 것은, 북반구 전체가 고농도 방사능 지옥으로 변하는 날이 곧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서 재작년 3월 11일 대지진 때 이미 상당부분 손상된 후쿠시마 제1원전 4호기 수조(水曹) 속의 사용후 핵연료봉 상태는 특히 위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상 100m 높이 공중에 설치되어 있는 수조(水曹)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냉각시스템이 기능을 상실한다면, 지금도 간신히 제어되고 있는 1,500여 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은 어떻게 될 것인가? 헬렌 칼디콧을 위시한 세계적 핵 전문가들은, 그때는 남반구로의 이주가 불가피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4호기의 핵연료봉 문제는 불안하기는 해도 아직은 통제되고 있다. 지금 당장 난감한 것은 원전사고 수습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방사능 오염수 처리문제이다. 최근 도쿄전력과 일본정부가 그동안 매일 300톤의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유출되어왔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결국 지금까지 손을 쓸 방법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실토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가 매일 태평양으로 쏟아지고 있고, 그것이 언제 그칠지 모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찍이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생명의 어머니’인 바다가 방사능 오염에 의해서 죽음의 바다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초월한 사태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은 실로 가공할 일이다.

현재 후쿠시마 원전 사고현장에 투입되어 수습작업에 임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사실상 사고처리는 아무것도 진전된 게 없고,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제는 고농도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노동자를 더이상 확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고현장에서의 작업을 위해서 원전 노동자들에 대한 피폭 허용 기준치를 몇 번이나 상향 조정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예를 들어, 거리의 노숙자들을 유인하거나 강제로 연행하여 현장에 투입시켜야 할까? 심히 야만적인 인권유린 사태를 상정해야 할 날이 가까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처참한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간단히 말하면, 원자력이라는 것은 절대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닌데도, 이 기초적인 사실을 주제넘게 무시하고 ‘원자력을 통한 평화와 번영’이라는 자가당착적 슬로건으로 끊임없이 일반시민들을 속이고, 자신들까지 속이며 지금까지 원전을 만들고 유지해온 자들의 가공할 교만심과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사태 앞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원전 재가동, 해외 원전 수주 따위를 운운하는 극단적인 무책임과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이중구조’

미증유의 핵재해(核災害)로 온 세계에 피해를 끼치고 있으면서도 일본정부와 지배층은 지금까지 진지한 사죄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열심이었을 뿐이다. 이 한심한 행태는 한사코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옛 일본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골몰하는 어리석은 자세와 내면적으로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이처럼 일본정치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에는, 후쿠시마 사태가 수습 불가능한 상황이 됨에 따라 갈수록 깊어지는 일본사회의 무력감과 좌절감이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도 일본사회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제물로 삼아 학살을 자행한 경험이 있다.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성숙한 지혜를 발휘하기보다는 마초적인 권력주의·국가주의에 빠지거나, 비주류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비열한 충동에 쉽게 끌리는 것은 물론 일본사회 특유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일본의 근현대 역사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 코넬대학 교수로 있는 평론가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에 의하면, 전후 일본 권력 엘리트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온 것은 ‘식민지 이중구조’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미국에 대해서는 철저히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동시에 한때 일본의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였던 동아시아 인근 국가·국민에 대해서는 늘 오만방자한 자세로 일관하는 행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외교든 문화든, 부문을 가릴 것 없이, 전후(戰後) 일본은 사실상 미국의 속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존재해온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져보면,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뒤 미군정 치하라는 사실상의 식민통치 상황에서 전후 일본을 지배하게 될 인적, 물적, 제도적 구조가 결정되었고, 그 구조는 반세기가 넘도록 아무런 근본적인 도전에 부딪침이 없이 계속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미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에서, 동아시아 인근 국가·국민들에게는 고자세로 일관하는 이 ‘이중적인’ 행태가 반드시 전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메이지유신 이래 소위 근대국가를 만들고,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일본 지배층이 기댄 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근대화는 곧 서양화였고, ‘아시아’라는 것은 경멸의 대상이자 하루빨리 버려야 할 모든 것의 대명사였다. 일본의 ―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의 ― 불행은, 이 ‘탈아입구’라는 이데올로기가 전후 일본 지배층의 의식 속으로 고스란히 계승됐다는 사실에 있다.

‘탈아입구’라는 것은 결국 강자숭배주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약자를 멸시하고, 약자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변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근현대사 전체를 통해서 주류 일본사회의 두뇌는 이 강자숭배, 약자멸시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어왔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히로시마·나가사키는 말할 것도 없고, 후쿠시마 사태도 또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어온 역사의 필연적 산물이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자력, 극단적인 ‘희생의 시스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란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원자력 기술은 이 이데올로기의 가장 과격한 체현물임이 분명하다. 즉, 원자력 시스템은 끊임없이 약자들을 제물로 삼지 않고는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희생의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 시스템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첫째, 원전 인근 지역에서 늘 불안과 위험 속에 살아야 하는 시골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고, 둘째, 원전의 방사능 구역에서 온갖 궂은 작업을 수행하며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희생이 필요하며, 셋째, 처치 불가능한 핵폐기물을 떠안고 살아야 할 미래세대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자력은 안전하고 값싸고 깨끗하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 끊임없이 유포되는 상황에서 늘 진실이 희생되고, 진실에 기반을 둔 건전한 사회적 이성과 상식이 늘 희생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에 의하면, 원자력 시스템이 이처럼 약자들의 희생 위에 존립하고 있는 구조는 전후 일본의 ‘평화와 민주주의’가 오키나와의 희생 위에 존립해온 구조와 일치하고 있다. 인구로 보면 일본 전체의 0.6%밖에 안되는 오키나와에 재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본사회가 주류든 비주류든 미군기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데 둔감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어있다고 러미스는 지적한다.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몸소 겪어보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쟁이든, 원자력이든, 비인간적인 시스템은 언제나 직접 피해를 입을 위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생되는 것은 부와 권력으로부터 먼 약자들일 수밖에 없다(후쿠시마 사고 이후, 후쿠시마 원전에서 생산된 전력이 100% 수도권에서의 소비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혹해 한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보면, 오래전부터 원전을 도쿄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온 반핵운동가 히로세 다카시(??隆)의 논리는 정곡을 찌르는 바가 있다. 히로세의 주장이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는 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더글러스 러미스의 증언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지난 가을 히로세가 오키나와에 와서 후쿠시마 참사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원전을 도쿄로’라는 아이디어와 ‘후텐마 기지를 야마토 일본으로’ 운동이 유사성이 있다는 데 공감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히로세의 아이디어는 풍자이고, 미군기지 본토 이전 아이디어는 정말 진지하게 얘기되고 있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에 히로세는 강하게 부정하며, 그 역시 매우 진지하게 원전을 도쿄로 옮기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원전을 도쿄로 옮기는 것만이 도시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2012년 3월 20일자

 

결국, 전쟁도, 원자력도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이러한 ‘희생의 시스템’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인가에 대한 각성, 그리하여 그것은 절대로 더 용납되어서 안된다는 데 대한 폭넓은 시민적 공감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지금 밀양에서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 저지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에 대해서 지금 이 나라 주류 미디어는, 시골의 무지렁이들이 ‘국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앞세워 공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쯤으로 간주하고 여론을 왜곡하고 있다. 그리하여 소위 ‘님비현상’이라는 용어까지 들먹이면서, 시골 사람들을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고, 조상과 자신들이 가꾸어온 삶터를 뺏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진실로 염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 달라”는 것이다.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원하는 것은 거액의 보상금도 아니고, 대체지(代替地)도 아니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하면서도 강경하다. 즉, 국익이니 경제발전이니 하는 거창한(결국은 허황한) 명분을 내세워 풀뿌리 백성의 삶을 짓밟는 짓은 이제 제발 그만두라는 것이다. 소위 도시의 석학들, 고명한 지식인, 시민운동가들 중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하는 발언을 지금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고 있다. 그들은 한 번도 학문적으로 연구해본 적이 없지만, 여러 해에 걸쳐 몸으로 직접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희생의 시스템’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은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인간화·녹색화하기 위한 피나는 싸움이다. 여러 해에 걸친 싸움에서 지치고 병들고 죽어가면서도 시골 사람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끊임없이 다지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강인함은, 오랜 세월 땅에 뿌리를 박고 이웃과 더불어 자립적인 생을 일구어온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확고한 정신적 토대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질일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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