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제131호 2013년 7-8월호  인쇄용  

 

  서평| 협동의 기술이 빚어내는 힘

  고영직

  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투게더》(현암사, 2013년)

 

 지난 4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망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이후 영국에서는 이른바 대처의 유산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란이 있었는데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가 다수를 차지했다. 마거릿 대처가 총리 시절에 “사회 따위는 없다”는 말로 대변되는 큰 시장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복지 축소를 대대적으로 추진했지만, 대처 사후 〈가디언〉이 실시한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다수의 영국인들은 여전히 큰 정부를 선호하며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국내외 할 것 없이 사회적인 것의 귀환 내지는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세계 시민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드높다. 우리나라 독서시장에도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을 촉구하는 서적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다. 1 대 99 사회를 고발하며 월가 시위를 예견한 미국 작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3부작인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긍정의 배신》이 번역 출간되었는가 하면, 우리사회의 핫이슈인 갑을(甲乙) 관계의 문제를 성찰하고 개혁하려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다양한 서적들도 출간되었다. 특히 지난해에 출간된 사회학자 조은 교수의 《사당동 더하기 25》의 경우 25년간 참여관찰 방식으로 ‘가난이 낳은 가난’의 문제를 성찰하며 우리시대 가난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낸 뛰어난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신자유주의 구조 아래에서 무너진 중산층의 신화를 고발하고 긍정주의의 중독현상을 꼬집으며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재구성할지를 역설하는 사회적인 가치들의 귀환현상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디랄 것 없이 철장갑을 끼고 나타났다는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사회 따위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저마다 고독한 존재이지만 고립되지 않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적 커뮤니티는 사회적 안전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는 ‘거룩한 분노’가 응당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분노의 파토스가 사회적인 것을 (재)구성하는 힘으로 곧장 작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리는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하지 않았던가.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 런던정경대 사회학과 교수인 미국인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에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은 ‘협력의 의례(儀禮)’ 또는 ‘의례적 연대’에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세넷이 말하는 의례는 “협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던 의례”를 말한다. 세넷의 《투게더》는 협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던 의례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과정을 추적하며 사회적 커뮤니티와 협력의 기풍이 무너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협력의 의례를 강화할지를 논하고 있는 책이다.

 

협력의 기술, 몸의 연대

  세넷은 왜 연대보다는 협력의 의례에 더 주목하는가. 다음 진술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20세기는 연대의 이름을 내걸고 협력을 왜곡했다. 통합의 이름을 내걸고 발언했던 체제들은 독재체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연대에 대한 욕구, 바로 그것이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명령과 조작을 끌어들였다.”(440쪽) 이 진술에서 세넷이 이 책을 집필한 내밀한 글쓰기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법하다. 언제나 항상 좌파들은 연대를 강조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연대의 고리는 너무나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과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사회와 세상의 진보를 촉구하는 좌파들이 타인과 공생하는 일을 지나치게 낭만화한 것에도 한 요인이 있을 터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공통의 행동 대신에 공통의 진리(〓이념)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꾀하고자 한 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세넷이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의 ‘소신의 물신숭배(fetish of assertion)’라는 개념으로 그런 이즘(ism)에 의한 연대는 결국 ‘귀머거리 대화’에 불과했다고 비판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터이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면에, 세넷이 역설하는 협력의 의례는 일종의 공통의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협력적 연대의 새로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점에서 세넷의 《투게더》는 상투화된 목소리로 이념적 연대를 역설하는 책과는 거리가 멀다. 세넷은 이 책에서 엄청난 박물지적 지식을 과시하며 역사 속 장인(匠人)들이 어떻게 협력의 의례 또는 의례적 연대를 통해 협력의 기술(skill)을 제대로 발휘했는가를 차분한 목소리로 논증하는 섬세한 글쓰기 전략을 구사한다. 역사 속 장인들의 다양한 사례분석을 통해 세넷이 ‘대화적 대화(dialogic convers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대화적 대화라는 말은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세넷은 이 대화적 대화 개념을 중심축에 놓고서 역사 속 장인들이 공감(sympathy)보다는 감정이입(empathy)을 일상적으로 더 많이 구사할 줄 아는 의례의 달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대화적 대화는 ‘가정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마’, ‘그럴 수 있지’, ‘나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 같은 식의 가정법 말이다. 세넷은 “단언하는 태도를 삼가는 것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규칙이다”(54쪽)라고 대화적 대화의 가치와 의미를 풀이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세넷의 《투게더》는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을 부채질하는 처세술 책이 결코 아니다. 이 책 《투게더》를 본 후에, 그가 직전에 쓴 《장인(The Craftsman)》을 함께 읽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넷은 《장인》에서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의 부활을 염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손의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넷은 현대문명은 생각하는 손의 감각을 잃어버림으로써 문화로 구현되는 기술(technique)의 세계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결과 우리는 손과 머리, 기술과 표현, 실기와 예술이 분리됨으로써 무엇인가에 확고하게 몰입하는 특수한 인간의 조건, 즉 장인(匠人, the craftsman)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잊고 말았다고 역설한다. 자신의 일에 임하여 몰입하면서도 일을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장인이라 부른다. 그런 장인들이야말로 “나는 나의 창조자”라는 위대한 선언을 실제로 일상의 삶에서 구현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런 지적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제출된 세넷의 《투게더》는 비유하자면 우리사회가 잃어버린 ‘협력의 기술’에 관한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까. 《투게더》의 행간에서 《장인》에서 그토록 역설해 마지않는 ‘생각하는 손’의 이미지가 곳곳에서 출몰하는 듯한 즐거운 착각에 빠지곤 한다. 세넷 자신이 사회학자가 되기 전에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자였다는 점을 연상하게 된다. 아마도 세넷은 우리들 스스로 생각하는 손을 가져야 타인을 생각하는 머리와 생각하는 가슴을 갖게 된다고 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세넷이 “협력은 인간 발달의 기초이며, 발달 과정에서 우리는 따로 서는 법을 배우기 전에 함께 있는 법을 먼저 배운다”고 선언한 에릭슨의 명제를 이 책의 주조음으로 깔고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것에서도 충분히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협력의 형성, 약해진 협력, 협력의 강화가 그것이다. 특히 1부 ‘협력의 형성’ 장(章)에서 세넷의 구상 전모를 확실히 엿볼 수 있다. 1부에서 세넷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연대는 ‘어떤 연대인가?’라는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사불란한 통일성과 하향식 연대를 주된 방식으로 차용하는 정치적 좌파의 싱크탱크식 연대방식은 그 답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성원들 간에 열린 포괄성의 좌충우돌을 감내하며 풀뿌리 상향식 연대를 구현하는 ‘사회적 좌파’의 연대방식이야말로 더 충실한 협력적 의례의 방식이다. 자신의 모친과도 두터운 친분이 있었던 미국 사회운동가 사울 D. 알린스키의 말을 빌려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필요한 운동가의 덕목은 “돕기는 하되 지시하지 마라”는 지침을 스스로 구현할 줄 아는 ‘공동체 조직자’로서의 자질이 더 요구된다는 것이다. 주민운동의 명저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저술한 사울 D. 알린스키는 “알고 보니 노조 조직가들은 공동체 조직가로서의 실력은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세넷은 이 책에서 협력의 아이콘으로서의 작업장이 갖는 매력에 대해 적잖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나는 특히 미국 흑인 해방노예와 러시아 농노들이 작업장에서 공예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을 세밀히 묘사하며 논증하는 세넷의 유려한 글쓰기에 매료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작업장에서 척 하면 착 하는 사람들의 친밀한 관계망을 형성했으리라.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신경림)고 해야 할까. 세넷은 그런 작업장에서 탄생하는 ‘장인 ― 시민’이야말로 좋은 시민들이며, 이런 장인 ― 시민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예외 없이 상호존중의 의례가 작동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례는 서양의 역사에서 반복과 상징화 과정과 연극적 표현을 통해서 더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함께 삶’을 꿈꾼다

  세넷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을 위해 필요한 덕목은 위민(爲民)의 논리가 아니라 여민(與民)의 함께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과문한 탓일까. 세넷이 이 책에서 우리의 계(契)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단결의 코드로서 제시하는 중국인들의 ‘꽌시(關係)’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중국인들의 꽌시 공동체는 세넷 자신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중세적 장인공동체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란 일종의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nity)의 한 사례는 아닐까. 세넷의 《투게더》가 분명 매혹적이지만,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을 이른바 중세적 길드 형태의 ‘조합주의’에서 찾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협력의 명백한 적인 고립을 스스로 자초하는 우리네 현실을 비판하고, 이른바 소셜미디어(SNS) 타임라인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피상적 사회관계에 대해 자신의 처절한 실패사례를 들어 신랄히 비판하며, 우리들 삶과 노동에 있어서 함께 어울려 만들고 수리하기를 통해 자신의 ‘리듬’과 ‘동작’과 ‘작업’의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주장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세넷의 주장이 일종의 사회적 수리(social repair)에 관한 은유로서 읽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세넷은 이러한 은유를 통해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을 위한 방도로서 ‘복원/교정/구조변경’의 세 가지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귀띔한다.

  우리사회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떠한 사회적 수리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공동체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서는 어떤 덕목이 요구되는지에 대해 먼저 성찰해보아야 한다. 이 책의 결론부분에서 세넷이 미국 사회당의 급진주의적 지도자 노먼 토머스의 ‘격식 없음’의 행동을 통해 ‘공동체가 주는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리려면 기존의 관행과는 철저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 점은 하나의 중요한 힌트가 된다. “그(노먼 토머스)는 더 급진적이 되라고 촉구했다. 이는 더 많은 것을 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다르게 행동하라는 요구였다.”(430쪽) 요컨대 세넷은 공동체 조직자로서의 몸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사회는 ‘냉소적 사회’로 변질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일상이 이상이 되고, 우리의 이상이 일상이 되는 사회와 세상을 꿈꾸고 실현한다는 것은 분명 난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터와 삶터의 분리현상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으며, 작업장의 안과 밖에서 우리자신이 함께 삶(together Life)의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한다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스스로 불안과 자발적 굴종의 태도를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일상의 네트워크를 신뢰하고 거기에 참여해야 함 또한 당연하다. 이것이 일상의 혁명을 위한 단초가 되지 않을까. 혁명이라는 영어 단어는 원래 천체의 ‘회전’(re ― volution)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지금 당장 ‘나부터’ 자신의 내면과 일상을 경쟁에서 협력의 문화로 회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넷의 책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고영직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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